10만 원권 화폐의 모델로 누가 적당할까라는 설문 조사 결과 총 응답자의 40. 7퍼센트가 광개토대왕을 선택했다는 기사를 보면서 묘한 흥분을 느꼈다. 분석심리학자 융이 말한 집단 무의식의 어느 한 단면이 작용하는 것 같다. 광개토대왕에 대해서는 국사 시간에 배운 몇몇 단편적 지식밖에 없지만 그 이름을 들으면 왠지 웅혼한 기개나 가슴 두근거림을 느끼게 된다(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고들 한다).
그런 예는 지난 월드컵 때 ‘붉은 악마’의 경험으로도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치우천왕이 그려진 붉은 기를 앞세운 응원의 물결 속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 가슴에서 울컥 솟구치던 감동은 누대의 역사를 지나오면서 우리 의식 속에 켜켜이 쌓인 민족적 자부심과 동질감의 극적 발현이었던 것이다.
역사는 의식적으로 각인되기도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전승되기도 한다. ‘광개토대왕’이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그의 업적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의식 속에 떠올리지만 그와 함께 무의식적으로는 이를 민족적 자부심의 상징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역사는 사실이면서 동시에 상징으로 작용한다. 상징의 힘은 매우 크다. 일례로 ‘붉은 악마’의 상징적 힘이 어떠했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 것이다.
그런데 정작 많은 사람들이 붉은 악마와 치우천왕이 우리의 고대사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의 역사가들은 반성해야 한다. 요즘 중국에서 고구려의 역사를 자신들의 ‘변방사’로 규정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고구려는 우리에게 과거의 역사라는 의미를 넘어 민족혼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것을 스스로 연구하여 지켜나가지 못하면 지금처럼 남의 나라 변방이나 어슬렁거리는 민족으로 격하, 왜곡될 수 있다. 역사적 사실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민족의 정신적 상징으로서의 고구려 역사에 대한 복원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고구려에 대한 특집을 마련했다.
신화는 완전한 허구의 산물이 아니라 일정한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형성된 정신적 체계이다. 우리나라의 신화는 민족 정체성 형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그 기능이 미미하다. 신화를 단순한 허구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역사와 신화는 아주 밀접한 연관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일제 시대 일본 사학자들이 우리의 고구려사를 폄하, 왜곡하기 위해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 ‘주몽 신화’에 대한 부정이다.
일본은 초기 고구려사를 부정하기 위해 장수왕 때 부여의 ‘동명 전설’을 개작하여 ‘주몽 신화’를 만들었다는 요지의 조작설을 주장하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남북한 사학계에서도 ‘주몽 신화’가 고구려 후반에 완성되었다고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화를 조작된 이야기로 치부하려는 것은 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려는 식민지 통치의 배경을 반영하는 논리이며, 아울러 신화가 후대에 완성되었다는 국내 학자의 논리도 신화 속에 담긴 역사성을 배제하는 잘못된 인식이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고구려의 ‘주몽 신화’를 역사적 상상력을 통해 복원해내려고 한 것이 김기흥의 『고구려 건국사』이다. 역사적 상상력을 통해 신화를 복원한다는 것이 어떤 내용인지 살펴보자.
한 예로 이규보의 「동명왕편」에서 금와왕의 정실 아들인 대화에게 쫓겨 송화강에 이른 주몽이 건너갈 수 없게 되자 하늘과 땅에 도움을 청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주어 무사히 강을 건너갔다는 내용을 김기흥은 이쪽 강 언덕과 저쪽 강 언덕이 굽이쳐 띠처럼 보이는 곳(흙과 모래가 쌓여 수심이 얕은)으로 말을 몰아 주몽이 무사히 강을 건너갔다는 내용으로 서술(주몽이라는 인물의 이성적 판단 결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서술은 신화에 내재된 역사성과 합리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우리가 신화를 읽으면서 의아해하거나 모호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명징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해모수는 왜 유화를 버리고 하늘로 달아났는지’, ‘유리왕은 왜 수도를 옮겼는지’, ‘호동 왕자는 정말로 낙랑 공주를 사랑했는지’ 등 우리가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는 사실들의 함축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새롭게 환기시켜 주고 있음은 물론 고구려라는 국가가 탄생하는 대변동기에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흥미롭게 서술하고 있다.
김기흥의 『고구려 건국사』가 역사적 상상력을 바탕으로(저자의 주관적 판단력이 중심이 된 서술 체계) 고구려의 초기사를 복원한 것이라면 노태돈의 『고구려사 연구』는 객관적인 서술 체계를 바탕으로 고구려사를 살펴보고 있다.
이 책에서는 고구려사의 기본 사료(史料), 건국 설화, 정치 체제, 혼인 제도, 대외 관계 등의 제 문제를 검토해 고구려사의 각 시기별 특징적인 면모를 부각시켰고, 이에 입각해서 고구려사의 시기 구분을 하고 있다. 현재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이 문제가 되고 있는 시점에서 고구려사 연구에 있어 지침이 될 수 있는 저서라 할 수 있다.
이 책의 특징으로는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가 이미 몇 차례의 첨가와 윤색을 거친 것임을 밝히면서 고구려 초기사를 재구성한 점, 고구려 초기(3세기까지)의 정치 체제를 중앙 집권적 영역 국가로 발전하기 이전의 단계인 ‘부체제’(部體制)로 규정하여 이를 개념화했다는 점(학계에서 아직은 논의가 진행되고 있으나 ‘부체제론’의 개념에 입각해 고구려뿐만 아니라 후기 고조선과 부여 및 초기 신라와 백제의 정치 체제를 파악할 수 있으며, 나아가 보편성을 지닌 ‘초기 고대 국가’의 정치 체제를 나타내는 개념으로 설정할 수 있다는 시각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형사취수제의 사회적 배경에 대한 자세한 분석, 고구려의 대외 관계사를 중국의 왕조들과 인접국 사이에서 행해진 조공(朝貢)·책봉(冊封) 관계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독창적이고 전문적인 시각으로 고구려사 전반을 다루고 있어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좋은 지침이 되고 있다.
중국은 고구려가 강력한 국가로 부각되면 한국이 만주 지역에 대한 역사적 연고권을 강력하게 주장하게 될까봐 고구려를 가급적 축소시켜 중국 정통 왕조의 속국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한편 일본은 한반도를 지배할 당시 고구려가 그들이 보기에 너무나 막강하고 훌륭한 나라였기에 조선인들이 결코 알아서는 안 되는 나라로 여겼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키면서 고구려가 자체 사관을 두고 기록한 역사서인 『유기』 1백 권과 『신집』 5권을 전부 없애 버렸으며 각종 유물들도 파괴해 버렸다. 일본인들은 남아 있는 유물들을 변조(대표적으로 광개토왕 비문 변조 사건)시켰다. 이는 모두 고구려가 매우 막강한 나라였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고구려의 발견』은 고구려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가 가능하도록 정치, 군사, 외교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부분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는데, 특히 돋보이는 것은 고구려의 문명사적 위상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고구려의 멸망을 동아시아 문명의 다양성이 상실된 역사적 사건이었다고 규정한다.
아울러 황하 유역의 중국 문명과 더불어 발전했던 동방 문명을 토대로 고구려는 7백 5년 동안 독자적인 문명권을 형성했으며, 특히 4세기 말부터 7세기 중엽까지는 당대 세계 최고의 문명을 꽃피웠다고 단언한다. 강서대묘의 생동감 넘치는 ‘사신도’(四神圖)는 고구려의 문명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며, 세계 최고의 천문 지도 ‘천상열차분야지도’ 제작, 연인원 천만 명이 동원된 동아시아 최대의 문명 전쟁인 수·당과 고구려의 전쟁은 가히 자부심을 가질 만한 것이다.
그리고 『춘향전』의 원형이 된 고구려 안장왕의 러브스토리, 39살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아시아를 석권한 세계 경영의 실천자 광개토대왕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구려의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우리가 너무도 무지하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민족의 자부심 회복을 위해 이 책을 꼭 읽어야 한다.
『고구려 700년의 수수께끼』는 고구려 역사에서 가장 쟁점이 되어 온 25가지 질문을 제시하고 그에 대해 답하는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어 대중들이 흥미롭게 고구려 역사를 접할 수 있다. 저자는 고구려의 군사력이 강했던 이유가 농사를 짓는 일반 백성과 농사를 짓지 않는 전문 전사 집단이라는 이원적인 구조에 기인한다고 보고 있다. 고구려 인구 3만 호(戶) 중 전문 전사 집단의 수가 1만 명이었다는 사실은 가히 놀랄 만한 사실이다.
광개토대왕이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전사 집단의 전투력을 강력한 왕권 아래 하나로 묶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며, 이것은 또한 고구려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는데, 대외 전쟁이 뜸해지면서 전사(戰士)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잃은 고구려가 장수왕의 평양 천도 이후 정복 전쟁보다 수성에 전념하면서 고구려의 호전성이 내부 분열로 치달아 결국에는 멸망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흥미로운 이야기 외에도 광개토대왕비의 변조 여부, 데릴사위제와 형사취수제를 통해 본 고구려의 풍속, 고구려 벽화에 단군 신화가 나오는 이유, 고구려 벽화에 불교와 도교가 함께 그려진 이유, 무지비한 독재자로 알고 있던 연개소문에 대한 새로운 해석 등 다양한 관심사를 다루고 있다.
고구려를 보다 생생히 알기 위해서는 인물사가 절실히 필요하다. 그런데 고구려의 인물사에 대한 자료는 매우 빈약한 편이다. 앞에서 언급한 『고구려의 발견』에서 저자 김용만이 고구려가 어떻게 독자적인 문명을 형성하였는가를 통사적으로 살펴보았다면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에서는 내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어 고구려인의 생활상을 복원하는 데 주력하였다.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는 고구려 영웅전이 아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들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했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 있다. 고구려 2대 유리명왕은 어려서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자라 우여곡절 끝에 왕이 되었지만 첫 부인과의 사별, 사랑하는 치희와의 이별, 총애하던 태자 도절의 요절 등 불행한 가족사를 가지고 있었다.
중천왕은 사랑하는 장발미녀를 내쳐야 했고, 중천왕과 서천왕, 봉상왕은 왕위를 지키기 위해 자기 형제들을 죽여야만 했다. 대무신왕은 총애하는 아들 호동을 죽음으로 내몰기도 했다. 이 책은 기쁨과 슬픔, 충성과 배신이 얽힌 고구려인의 다채로운 삶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그 중 우리에게 놀라움을 주는 것은 고구려 여인들의 삶이다.
6대 태조대왕의 어머니 부여 태후는 남편이 왕이 아니었음에도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정권을 잡은, 한국 최초로 쿠데타를 일으킨 여두목이며, 우씨 왕후는 남편인 고국천왕이 죽자 왕의 죽음을 알리지 않은 상태에서 스스로 다음 남편을 골라 시동생인 연우를 왕으로 만들어 주고 다시 한 번 왕후의 자리에 올라 권력을 틀어쥔 놀라운 결단력의 소유자였다. 이 책은 왕들과 훌륭한 장군, 재상들뿐만 아니라 나라를 팔아먹은 배신자, 스파이, 승려, 왕후, 평민에 이르는 다채로운 사람들의 삶을 조명하고 있어 흥미롭다.
『한 권으로 읽는 고구려왕조실록』은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고구려본기」를 토대로 하고 있다. 각 장(章)을 동명왕실록, 광개토왕실록 등으로 이름 붙여 나누고 연대순으로 정리한 이 책은 당시의 국제 정세와 주변 국가, 가족 사항과 가계도, 주요 사건, 세계사 약사, 당대의 영토와 세력 관계를 반영한 지도를 넣어 독자들이 당시의 역사를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 책은 기존의 삼국사 중심의 고구려사 해석이 아닌 북방의 강대국으로서 대륙의 패권을 다투었던 국가로 고구려를 해석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대륙 국가로서 고구려의 위상을 확립하고 28대 7백 년의 역사를 왕조 중심으로 면밀히 복원하고 있다. 평양성, 환도성, 패수, 요하 등의 지명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근거로 고구려는 한반도를 다툰 국가가 아니었다는 것과 한국과 중국, 일본 역사를 통틀어 태조라는 묘호를 처음 사용한 국가는 고구려라는 주장이 눈에 띈다.
김용만은 『고구려의 발견』에서 ‘정착형 기마 문명의 힘’이라는 용어로, 고구려가 중국과 같은 농경민족의 장점과 아울러 유목민들의 기마 문명의 장점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고 하였다.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는 그러한 주장을 생활사의 측면에서 세세하게 정리하고 있다.
전쟁을 좋아하는 호전적인 풍속(활, 화살, 칼, 창을 잘 쓰며 전투에 익숙하다는 점), 유목 국가처럼 교역을 통해 번영했다는 점, 유목 사회의 전형적인 결혼 제도인 형사취수제와 서옥제가 있었다는 점, 농경민의 복식인 치마와는 달리 바지를 입었다는 점 등 유목 사회와 비슷한 생활 양식도 있었지만 농경지를 확보하여 생산력을 증가시키고 각종 수공업과 상업의 발전을 도모해서 여러 곳에 대형 시장을 탄생시켰다는 점(도로와 수레의 발전 양상을 통해 충분히 입증)을 볼 때 고구려를 단순히 유목 국가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고구려인들의 외모에서부터 복식, 장신구는 물론 그들의 주요한 먹거리, 가재도구, 부엌살림, 목욕 문화, 오락과 축제, 음악과 악기, 결혼 제도에 이르기까지 생활과 문화의 모든 면모를 골고루 다루고 있다.
특히 온돌로 대표되는 조선인의 좌식 문화와 달리 입식 생활을 했던 고구려인들의 모습을 고분 벽화를 통해 하나하나 분석해가는 대목은 상당히 흥미롭다. 또한 고구려 시대 일반 백성의 삶을 여러 가지 자료를 통해 재현한 「사수촌 여인의 인생 역경」은 저자의 역사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왕이나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한 역사 서술은 당시의 삶을 총체적으로 조망할 수 없기에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거기에 비해 생활사는 역사의 총체성을 담보하고 있어 중요성을 가진다. 그런 점에서 『한국생활사박물관 3--고구려생활관』은 단연 돋보이는 책이다. ‘야외 전시실’, ‘고구려실’, ‘특별 전시실’, ‘가상 체험실’, ‘특강실’, ‘국제실’이라는 박물관의 배치를 통해 고구려인들의 생활과 문화를 하나에서 열까지 세세하게 복원하고 있어 아주 유익하다. ‘야외 전시실’은 이 책의 도입부(서문)에 해당하는 곳으로 고구려 사람들의 7백 년 흥망성쇠를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상징하는 사신(四神)에 견주어 보여 주고 있다.
‘고구려실’에서는 고구려인의 생활상 전반을 성밖 마을 사람들(평민), 성안에 사는 사람들(귀족)로 나누어 보여 주고, 이어서 전쟁이나 대외 교류같이 국가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보여 준다. 대장장이, 농부, 병사, 관리 등 그 시대를 살았던 평범한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아기자기하게 펼쳐지는 이야기에 생생한 복원도와 유물 사진이 어우러진다. ‘특별 전시실’에서는 고구려의 하늘 세계를 보여 준다.
하나의 소우주인 고구려 무덤 속을 수놓고 있는 별자리와 하늘 세계는 고구려 사람들의 과학적 천문 지식과 함께 그들이 꿈꾸던 이상 세계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가상 체험실’에서는 고구려 사람들이 고분을 설계하고 그 안에서 벽화를 그리던 과정을 세밀하게 복원했다. 밑그림 그리기부터 안료의 종류와 만드는 법, 벽면의 상태에 따른 벽화 기법의 종류 등과 무덤을 지키는 수묘인 제도 등 당시의 독특한 장례 풍습을 잘 알 수 있다.
‘특강실’에서는 주몽 설화는 어떻게 고구려뿐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으뜸 신화로까지 떠오르게 되었으며, 동아시아 고대사의 비밀이 담긴 상자를 여는 열쇠,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으며 그것을 둘러싸고 한·일간에 왜 논란이 일어났을까를 다루고 있다. 국제실에서는 벽화의 기원을 이루는 구석기 시대 라스코 동굴 벽화, 장례의 일부로 그려진 이집트와 고구려의 고분 벽화, 불교의 이상 세계에 대한 염원을 담은 둔황의 사원 벽화, 현실 세계의 장식을 위한 폼페이의 도시 벽화를 만나 볼 수 있다. 이 책은 탄탄한 원고와 함께 1백 20여 점의 컬러 그림, 50여 컷의 컬러 사진이 압권을 이루고 있어 고구려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라면 필독해야 할 책이다.
『고분 벽화로 본 고구려 이야기』는 고구려의 벽화에 나타난 그림을 통해 고구려인의 세계관과 사유 방식, 종교, 생활을 정리하고 있다. 앞에서 소개한 두 권의 생활사 책과는 달리 벽화에 나타난 그림을 중점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고구려 벽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하다.
고구려인들이 어떤 집에서 살았는지, 옷과 차림새는 어땠는지, 손님을 맞을 때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수레를 두는 차고는 어떤 모양으로 지어졌는지, 사냥을 갈 때는 무슨 무기를 들고 갔는지, 사냥감으로는 무얼 잡았는지 등을 생생하게 설명하고 있다. 더 나아가 신앙 대상과 철학관의 변천도 고분 벽화를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어 생활사는 물론 미술사 공부도 저절로 하게 된다.
고구려는 잊혀진 과거가 아니다. 농경 문화와 유목 문화의 절묘한 결합을 통해 동아시아의 맹주로 군림했던 고구려인들의 기상은 우리가 다시 이루어야 할 미래의 모습이다. 중국이 고구려를 중국의 변방 역사로 규정하려는 현 시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자명하다. 우리 역사를 좀더 연구해서 민족의 자긍심을 되찾아야 한다. 고구려의 역사를 복원해내지 못하는 ‘Korea’는 이빨 빠진 호랑이와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