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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너에게로 가는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인간문화재
우표로 본 오늘~ 11/01 잡지의 날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09 - 한국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
한국박물관 개관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가 펼쳐지고 있어 한국박물관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 3일 한국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식을 갖고 한국박물관의 나아갈 방향을 모색했다.
한국박물관 100주년 기념사업은 지난 1909년 11월 1일에 문을 연 제실박물관 개관 기념에 맞춰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한국박물관 100주년 기념사업은 한국박물관의 전망과 향후 진로를 모색하기 위해 지난 2008년 11월 3일 ‘한국박물관의 역사적 의미’를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한데 이어 지난 5월 22일 2차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했다.
또한 한국박물관의 진수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우리 문화와 함께한 박물관 100년전’을 오는 11월 8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고있다.
특히 오는 10일부터 한국박물관의 모든 것의 결집체인 박물관 대축전이 국립중앙박물관 일원에서 펼쳐지며 오는 11월 2일에는 한국박물관 100주년을 기념하는 기념식이 각계인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열리고 오는 11월 3일에는 ‘21세기 박물관의 발전전략과 비전’을 주제로 국제 포럼이 열린다.
또 오는 27일에는 학국박물관 100주년을 상징하는 상징물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설치된다.
한편 한국박물관 100주년의 역사를 담은 한국박물관 100년사도 오는 12월경 발행될 예정이다.
박물관뉴스 2009/10/07 [10:00]
http://www.museumnews.kr/sub_read.html?uid=896§ion=sc15
[한겨레프리즘] 순종과 근대 박물관 / 노형석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1874~1926, 재위 1907~1910)은 투명인간에 가까웠던 군주였다. 생전 행적이 포폄의 대상이 됐던 다른 임금들과 달리 존재감이 없었다. 큰 심신장애가 있었고, 등극 3년 만에 나라가 망한 탓도 있을 터다. 한국인들은 순종이 이 땅 최후의 왕이며 장례식날 만세운동이 일어난 정도 외에는 그의 처절한 인생을 거의 알지 못한다.
순종은 친모 명성황후를 난도질하고 주검을 불태운 일제에 떠밀려 즉위했다. 후견인을 자처한 통감 이토 히로부미 앞에서 떨면서 ‘국정 지도’를 받았고, 1910년 친일파 대신들이 멋대로 도장을 찍은 병합조약에 나라가 결딴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뒤 창덕궁에서 감시 속에 살다 16년 뒤 생을 마쳤다. 1926년 4월25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숨질 당시 측근에 구술한 유언은 참담한 회한으로 얼룩졌다. “병합조약 인준 당시 강린(일제)이 나를 유폐하고 협제(협박)해 명백히 말할 수 없게 한 것이므로 … 고금에 어찌 이런 도리가 있으리 … 말할 자유가 없어 지금까지 이르렀다 ….”
순종 서거 83주기인 올해 뜻밖에도 그를 기리는 국가적 캠페인이 한창이다. 순종을 근대박물관 선각자로 추앙하자는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사업’. 1909년 11월1일 순종이 창경궁 전각들 안에 제실박물관을 동물원, 식물원과 같이 세워 일반 공개한 것을 한국 박물관 역사의 시발로 삼겠다는 것이다. 사업 주체인 국립중앙박물관(이하 중박)은 최근 국내외 명품들을 집대성한 100주년 특별전, 박물관 대축전, 국제학술대회 등을 잇달아 벌이며 분위기를 지폈다. 11월1일 기념 상징물 제막식, 11월2일엔 정부 요인이 참여한 100주년 기념식을 연다. 중박 앞은 지난달부터 기념 공연과 패션쇼 등의 이벤트로 흥청거린다. 본관 앞 거울못엔 울긋불긋한 전통 동물상들이 가득 떠다니고 있었다.
최광식 관장은 제실박물관 개관 때 순종이 백성과 함께 즐긴다는 뜻으로 말했다는 ‘여민해락’(與民偕樂:100주년 특별전 제목이기도 하다)의 정신이 근대박물관 역사를 열었다고 주장한다. 국가 정통성의 상징을 수집, 보존하는 박물관에서 순종의 애민 정신이 국내 박물관의 정통성으로 이어져 왔음을 내비친 것이다.
‘여민해락’은 병합 뒤 창덕궁을 좌지우지했던 일본인 사무관 곤도 시로스케가 1926년 지은 <이왕가 비사>에 나오는 말이다. 이 기고만장한 회고담에서 곤도는 1907년 통감 이토가 궁정의 존엄을 유지하기 위해 박물관, 식물원, 동물원 신설을 진언해 허락을 받았고, 설립을 궁 안에서 만류하자 명군은 백성과 해락했다며 순종이 설득해 예정대로 됐다고 밝혀 놓았다. 되레 일본인들의 권유(강권)가 박물관 설립으로 이어졌다는 근거가 아닌가. 게다가 제실박물관은 창경궁의 권위 부수기에 충실했다. 전각의 어좌 바로 옆에 진열장을 들여놓고 흙 묻은 신발로 관객들이 드나들게 했다. 1980년대 창경궁의 동물원, 식물원과 함께 제실박물관 후신인 옛 이왕가 박물관(훗날 장서각)도 같이 헐린 사실은 또 무엇을 뜻하는가.
100주년 잔치는 최근 거듭 씁쓸한 오점을 찍었다. 중박 쪽이 창경궁 전각들 앞에 제실박물관 터 기념 표석을 세우려다 문화재청의 거부로 무산되자 11월1일 창경궁에서 치르려던 100주년 고유제와 표지석 설치 행사 등을 황급히 취소하고 답사만 하겠다고 정정하는 촌극을 벌인 것이다. 한 중견 역사학자는 “궁궐 파괴의 자취로 경계해야 할 유적에 이를 기리는 표석을 세우는 건 역사적 무지의 극치”라고 혀를 찼다. 성찰 대신 경축 일색인 박물관 100주년 사업이 후대의 조롱거리로 남지 않을까 두렵다.
노형석 대중문화팀장nuge@hani.co.kr /한겨레 2009-10-29 오후 10:14:50
- 2005 인구주택총조사 기념 (2005.11.1. 발행)
2005 - 21세기 첫 인구 주택 총조사 실시
전국의 인구, 가구, 주택 등을 파악하기 위한 ‘2005년 인구주택 총조사’가 11월1일부터 15일 동안 실시된다.
전국의 모든 가구는 조사원증을 지닌 조사원들이 방문하면 조사원의 설명에 따라 응답하거나 조사표를 작성하면 된다. 인구주택 총조사에 응하지 않거나 허위로 답변하면 통계법에 따라 1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내야 한다. 이번 총조사에는 모두 10만여명의 조사원이 투입되며, 이들은 가슴에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는 명찰을 달고 있다.
면접조사가 어려운 가구는 인터넷으로도 조사에 참여할 수 있다. 인터넷 조사를 희망하는 가구는 11월10일까지 인구주택 총조사 인터넷 홈페이지(www.census.go.kr)에 접속해 조사에 응하면 된다.(전화 080-456-2005)
통계청은 5년 주기로 실시하는 이번 총조사에서 내·외국인 등 모든 가구를 대상으로 성별, 나이, 아동보육상태 등 44개 항목을 조사한다. 특히 추가계획 자녀 수와 혼인연월, 활동제약(장애) 등의 조사항목이 추가돼 저출산과 고령화, 복지 등에 대한 조사가 집중적으로 이뤄진다. 그러나 주민등록번호와 가구의 금융관계는 묻지 않는다. /한겨레 2005
- 2000, CYBER KOREA 21 특별
2002년 - 대한민국 전자정부 출범
대한민국 전자정부(www.egov. go.kr)가 2002년 11월 1일 완전 개통돼 국민들이 주요 민원을 인터넷으로 처리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이로써 토지(임야)등본 발급, 자동차등록원부 열람 등 393종의 민원을 인터넷 전자정부 사이트에서 신청해 우편이나 가까운 관청에서 받아볼 수 있게 됐다. 4000여종의 민원은 구비 서류와 처리 절차를 인터넷상에서 알아볼 수 있다. 주민등록 등·초본 등 20가지의 행정서류는 민원인의 발급신청 없이 행정기관끼리 알아서 주고받도록 해, 민원인들이 구비서류 부담을 덜게 됐다.
이에 따라 행정기관 직접 방문이 크게 줄고, 구비서류 준비에 따르는 시간, 비용도 대폭 절약할 수 있게 됐다. 정부는 전자정부가 정착되면 민원처리비용이 연간 1조8000억원 정도 줄어들 것으로 내다봤다. 행자부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민원업무를 인터넷으로 완전통합한 서비스는 세계 최초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용과정에서 시스템 불안으로 접속이 끊기는 등 장애가 발생하고, 회원가입을 위한 주민등록번호 입력시 본인확인 기능이 갖춰지지 않았으며 일부 개인정보 유출 등의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조선
- 2000 인구주택총조사 (2000.11.1. 발행)
2000 - 2000 인구주택총조사 실시 (1~10일)
2000 인구주택총조사 실시 안내
2000 인구주택총조사는 5년주기로 실시하는 국가 대규모 기본통계 조사로 국력의 기본이 되는 인구 및 주거의 실태를 파악하게 되며 보다 풍요롭고 번영된 21세기 복지사회 건설을 위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각종 정책입안, 경영계획수립 또는 학술 연구등에 필요한 기초 자료를 얻기 위하여 본 조사를 실시합니다.
○ 조사기간
- 준비조사 : 2000. 10. 30 ∼ 10. 31 (2일간)
- 본 조 사 : 2000. 11. 1 ∼ 11. 10 (10일간)
※ 조사기준시점 : 2000. 11. 1. 0시현재
○ 조사대상
- 조사기준일 현재 조사구역내에 상주하는 모든 내·외국인과 이들이 살고 있는 거처
○ 조사방법
- 조사원이 가구 직접 방문 조사(면접방식과 응답자 기입방식 병행조사)
○ 조사내용
- 인구에 관한 내용, 가구에 관한 내용, 주택에 관한 내용 등 30개 항목
이 조사에서 수집되는 사항은 비밀이며 다른 용도로 절대 사용하지 못하도록 통계법 규정에 따라 엄격히 보호되오니 조사원 방문시 적극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장흥군 2000-09-18 http://www.jangheung.go.kr/
1993 - 유럽의 정치-경제 통합에 관한 마스트리히트조약 발효
유럽의 정치-경제 통합에 관한 마스트리히트조약(Treaty of Maastricht)이 1993년 11월 1일 발효됐다. (1991년 12월 10일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에서 EC 정상 간 합의되고) 1992년 2월 7일 EC외무장관회의에서 정식 조인된 이 조약은 이날의 공식적인 발효를 통해 지난 수십년간 유럽인들이 꿈꾸어온 유럽합중국을 향한 본격적인 과정에 들어서게 됐다.
각국의 이견과 덴마크의 비준거부 등으로 비록 당초목표보다 10개월 늦게 조약이 발효됐으나 EC 12개 회원국 3억4천6백만 유럽인들의 정치-경제적 운명은 이제 역사상 그 어느때 보다도 긴밀히 묶어지게 됐다. 그후 EC는 유럽연합(EU)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마스트리히트조약은 1999년까지 EU 회원국이 단일통화를 채택하고 정치적인 권한의 상당부분을 통합기구에 위임한다는 계획을 담고 있어 각국의 반대가 심했으나 우여곡절끝에 1993년 10월 독일이 마지막으로 비준해 실효를 보게 됐다. 마스트리히트조약은 회원국들이 공동의 외교-안보-국방정책을 수립해나가도록 정했다. /조선
1993 - 에스파냐의 생화학자 오초아(Ochoa, Severo, 1905~1993) 사망
1905년 9월 24일 루아르카에서 출생하였다. 마드리드대학교 의학부를 졸업, 독일에 유학, 카이저 빌헬름연구소 O.마이어호프 밑에서 생화학과 생리학을 배웠다. 귀국 후 마드리드대학교에서 생리학을 강의한 뒤,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연구생활을 하였다. 1941년 미국 워싱턴대학교 약리학 교실에 들어갔으며, 1942년 뉴욕대학교 약리학 교수를 거쳐 1954년 생화학 교수가 되었다. 1959년 DNA의 합성 구조를 발견하여 제자인 A.콘버그와 함께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하였다. 그 밖에 TCA 순환과정과 CO2고정에 관여하는 효소 등을 연구하였다. /naver
한국과 폴란드가 1989년 11월 1일 대사급 공식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최호중 외무장관과 마예프스키 폴란드 외무차관은 이날 수교의정서에 서명하고 서울과 바르샤바에 상주 대사관을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한국이 사회주의 국가와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한 것은 1989년 2월 1일로, 폴란드는 헝가리에 이어 두 번째였다. 이로써 우리나라의 수교국은 1백33개로 늘어났다. 양국은 이날 무역협정과 투자보장협정에 각각 서명했으며, 한국은 5년간 폴란드에 진출하는 한국기업에 4억달러 상당의 투자지원을 하고 이와 별도로 대외경제협력기금에서 5천만달러의 차관을 폴란드에 제공한다는 내용의 경제협력 합의의사록에도 서명했다.
지난 2월 헝가리와의 수교가 노태우 대통령이 지향해 온 북방정책의 첫 돌파구였다면 이번 수교는 이를 더욱 확대, 가속화시킨 계기로 평가됐다. /조선
1980 - 1980 인구 및 주택 센서스[census] 실시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 최초의 인구센서스는 1949년 1월 <인구조사법>의 제정, 공포 후 실시된 5월 1일의 총인구조사이다. 그 후부터 매 10년마다 실시하며 그 중간에 5년마다 간이인구센서스를 실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1955년 제1회 간이총인구조사가 실시되었고, 1960년 <세계센서스의 해>를 맞아 대규모의 인구·주택 국세조사가 실시되어 상주인구에 대한 표본조사 방법이 도입되었다. 그 뒤 1966년 실시된 간이센서스에서는 중요 기본항목은 전수조사에 의하고, 기타 항목은 10%표본조사에 의해 실시되었다. 1980년·1985년의 인구 및 주택센서스에서는 교육정도를 알기 위한 전공과목에 관한 조사항목과 교통관계자료를 위한 통근·통학거리 등에 관한 항목이 추가되었고, 경제활동·출산력·인구이동에 관한 전문적 조사 사항은 15%표본조사로 실시되었다. 이러한 인구 및 주택센서스 자료는 인구의 규모·분포·구조, 경제적·사회적 특성을 파악하는 가치를 지니며, 정부의 각종 정책·계획 수립의 기본자료로서 활용된다. 또한 인구·주택을 조사대상으로 하는 경제활동인구조사·도시가계조사·인구동태 표본조사 등의 기초자료가 된다. /Google
1977 - 소련 초음속 여객기 TU-144S, 모스크바-알마티 노선에 여객기로 취항
Tu-144(Tupolev-144)는 구소련이 개발한 초음속여객기로써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서 붙인 이름은 차저(charger)이다. 영국·프랑스가 공동 개발한 콩코드에 앞서 등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더 높은 고도를 더 빠르게 비행할 수 있는 세계 최초의 초음속여객기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추락사고와 경제성 부족 때문에 1978년 이후 여객기로 운항되지 않았고 모두 14대만 생산되었다.
구소련은 꼭 필요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유럽보다 빨리 초음속여객기를 개발하여 기술력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1964년 투폴레프설계국에 초음속여객기 개발을 지시하였다. 투폴레프설계국은 값 비싼 금속 사용을 최대한 줄이고 주로 알루미늄합금을 사용하여 시제기를 제작하였다. 시제기는 콩코드보다 2달 앞선 1968년 12월 31일 38분 동안의 첫 번째 시험비행에 성공하였으며 1969년 6월 5일에는 음속을 돌파하였다. 또 1970년 5월 26일과 6월 15일 각각 시속 2,150㎞(마하 2.0)와 시속 2,443㎞를 기록하였다.
1971년 7월 1일에는 동체길이와 주날개 폭을 확대하고 전체 성능을 개량한 양산형 Tu-144S가 첫 비행하였다. NK-144 터보팬 엔진 4개를 장비한 Tu-144S는 1973년 6월 3일 파리에어쇼에서 승무원 6명과 관람객 7명이 사망하는 공중분해 사고를 일으키는 등 우여곡절을 거쳐 1975년 12월 26일 모스크바-알마티 노선에 취항하여 화물과 우편물을 수송하였다. 1977년 11월 1일부터는 같은 노선에서 여객기로 운항되었다. 그러나 1978년 6월 1일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는 추락사고가 발생한 뒤에는 여객기로 운항이 금지되었고 주로 시험비행용으로 사용되었다. /naver
초음속 여객기 TU-144 연혁
1968-12-31 - 첫번째 시험비행 성공
1969-06-05 - 음속 돌파
1970-05-26 - 시속 2,150km(마하 2) 기록
1970-06-15 - 시속 2,443km 기록
1971-07-01 - 양산형 TU-144S 첫 비행
1973-06-03 - TU-144S 파리 에어쇼에서 공중분해 사고
1975-12-26 - 모스크바-알마티 노선에 취항(화물과 우편물 수송)
1977-11-01 - 모스크바-알마티 노선에 여객기로 취항
1978-06-01 - 추락사고 발생하여 여객기로 운항을 금지
1966 - 건축가 김수근, 문화예술 종합 월간지 <공간> 창간
건축가 김수근(金壽根, 1931~1986)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1952년 서울대학교 공과대 건축과 2년 중퇴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58년 도쿄[東京]예술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1960년 3월 도쿄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61년 귀국, 김수근건축연구소를 열고 1972년까지 대표를 지냈다. 그 사이 1961∼1968년 홍익대학 조교수로 재직했다.
1966년 종합예술지인 월간 《공간(空間)》을 창간하였고, 1971년 '공간사랑'을 건립하여 문화활동의 장소로 개방하였다. 1968년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사장, 1970년 김수근설계사무소 대표, 1971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초대작가, 1972년 건국대학교 공과대 교수, 1975∼1986년 국민대학교 교수, 1985∼1986년 공간그룹 회장 등을 역임하고, 후진양성과 현대 건축설계에 큰 업적을 남겼다.
1982년 미국건축가협회 명예회원이 되었고 국민포장(國民褒章: 1970), 미국 범태평양건축상(1971), 이탈리아문화공로훈장(1979), 철탑산업훈장(1984), 은탑산업훈장(1986) 등을 받았다.
대표적인 작품에는 《자유센터》, 이란 테헤란의 《엑바탄 주거단지》,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내 《올림픽 주경기장》 《마산 양덕성당》 <벽산빌딩> 등이 있다. 김수근 기념사업을 위해 김수근문화재단이 설립되었다. /naver
('공간'지에는 '발행일: 매월 1일'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
- 제40주년 소방의 날 기념 (2002.11.9. 발행)
1963 - 첫번째(제1주년) 소방의 날 행사 거행
소방의 날은 처음부터 전 소방인과 범국민적인 기념일로 시행된 것은 아니고 월동기간중의 대국민 불조심 계몽행사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그 기원은 확실치 않으나 일제시대에도 매년 12月 1日을 「防火日」로 정하여 불조심에 관한 각종 행사를 전개하였다.
이후 1948年 정부가 수립되고 불조심 강조기간을 정부에서 설정하여 운영하면서 불조심 강조기간이 시작되는 11月 1日에는 지역단위의 행사이기는 했지만 「소방의 날」 또는 「불조심 대회」라고 하여 유공자 표창, 가두캠페인, 불조심경연대회 등 다채로운 기념행사가 펼쳐졌다. 이후 1963年부터는 내무부가 주관하여 전국적인 규모로 「消防의 날」행사를 거행하여 오다가 1991年 消防法을 改正하면서 119를 상징하는 11月 9日을 『消防의 날』로 제정하여 법정기념일로 보장받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행사의 명칭이 통일되지 못하고 週年計算에도 혼선이 있어 1962年까지의 행사를 하나로 묶고, 지역단위 행사에서 전국적 행사로 전환된 1963年을 1주년으로 환산하여 1991年부터 행사명칭을 통일, 「第29週年 消防의 날」행사를 거행하게 되었으며 2001年으로 소방의 날은 39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 (생략)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소방의 날』이라는 공식명칭으로 매년 행사를 가졌음에도 소방의 위상을 높이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우선 법정기념일로 지정받지 못하여 국민적인 행사가 아닌 자체행사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고 둘째로 행사일인 11月 1日은 불조심 강조기간이 시작되는 날이라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없었으며 셋째로 그 해의 행사가 몇번째 행사인지 불분명하고 공식적으로 사용치 않아 행사의 일관성조차 희박하였다.
그러므로 일각에서는 消防法이 제정된 날인 3月 11日 또는 119를 상징하는 11月 9日을 소방의 날로 제정해서 전 소방인들이 기념할 수 있도록 하고 온국민이 참여할 수 있는 행사일로 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다. 이러한 다수의 의견에 대해서는 정부관계자들도 공감을 가졌으며 '민방위 본부장 김주봉'씨와 '소방국장 조남성'씨는 이를 1991年 消防法 改正시 적극 반영하여 각계의 의견을 수렴한 후 11月 9日을 소방의 날로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국가기념일로 인정받지 못한 아쉬움은 남았어도 '소방의 날'은 이때부터 법적인 근거를 갖게 된 것이다. 따라서 1991年부터는 소방의 날을 11月 9日로 옮겨 전 소방인의 행사가 되도록 행사내용을 다양화하고, 1963年度 행사를 1주년으로 역산해 第39週年 消防의 날 행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http://www.119csrmission.co.kr/page2/page2_1.htm
1962 - 소련의 화성탐사선 마르스 1호 발사
1962년 11월 1일(일부 자료에는 2일로 적힘) - 소련의 화성 탐사선(893 kg) 마르스 1호(Mars-1) 발사. 도중에서 통신이 두절되었다. /Google
기상관측을 주목적으로 설계하여 발사되는 기상위성은 단기예보에 필요한 저기압 또는 전선 등의 정확한 위치와 크기 등을 파악하며, 지구로부터 우주공간으로 복사되는 복사에너지, 지구와 대기가 반사하는 태양광선의 반사량, 대기권 밖의 태양에너지 등을 관측한다. 기상위성은 극궤도기상위성과 정지기상위성 등의 두 종류로 나눈다. 이 중 극궤도 기상위성은 850 km 고도에서 지구의 남북을 회전하면서 실시간적으로 관측한 기상자료를 이용국에 제공해 주는 위성으로, 타이로스(TIROS:Television and Infrared Observation Satellite)가 대표적인 예이다.
정지기상위성은 적도 상공 약 3만 5800 km 고도에 위치하며, 이 고도상에서는 지구의 자전속도와 같은 속도로 운동하기 때문에 지구와의 상대적인 위치가 변하지 않으므로 일정한 지역에 대한 관측을 많이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GMS-3(Geostationary Meteorological Satellite-3)을 많이 이용하고 있다. 미국에서 개발한 타이로스는 최초의 기상위성으로, 텔레비전 카메라와 적외검지기(赤外檢知器)를 이용해서 지표면을 관측하였다. 즉, 주반구(晝半球)는 텔레비전으로 촬영하고, 야반구(夜半球)는 적외검지기로 지표면에서의 적외복사를 측정하여, 지표면의 구름의 분포를 식별하였다. 이는 미국항공우주국(NASA) 소속으로, 대기권 밖의 평화이용을 목적으로 하는 실용위성이었다. 1960년 4월 1일 케이프커내버럴기지에서 타이로스 1호가 발사되어, 78일간 발신하여 사진을 찍었으나, 카메라 축이 지구자기장의 영향을 받아 흔들렸기 때문에 그 사진을 일기도 위에 대응시킬 수 없었다. 그 해 11월 1일 2호를 발사했는데, 이것은 성능이 매우 좋아서 1년 동안 발신을 계속하였다. /naver
1954년 11월 1일 시카고 오페라 극장에서 마리아 칼라스(Callas, Maria, 1923~1977)가 <노르마 Norma>의 노르마 역으로 미국에서 데뷔했다. 1923년 12월 2일 뉴욕에서 태어난 그녀는 1937년 미국을 떠나 아테네 음악원으로 가서 소프라노 엘비라 데 히달고에게 음악수업을 받았다. 아테네에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Cavalleria Rusticana>·<보카치오 Boccaccio>에 출연했고, 1947년에는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라 조콘다 La Gioconda>에 출연했다. 라 스칼라 오페라단에 입단한 뒤 곧 <청교도 I puritani>의 엘비라, <토스카 Tosca>·<노르마>·<람메르무어의 루치아 Lucia di Lammermoor>의 주인공역으로 갈채를 받았다. 1954년 미국 데뷔 이후 비범한 발성 능력을 요구하는 배역들을 맡아 이름을 떨쳤고, 프랑스·독일·이탈리아 오페라에 모두 출연했다. 그녀의 기교를 흠잡는 비평가도 있었지만 힘차면서도 명확한 넓은 콜로라투라 음역과 카리스마적인 연기 능력을 가진 가수였다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1965년 7월 런던 코벤트 가든에서 <토스카>로 오페라 출연을 마감한 뒤 영화 <메데아 Medea>(1970)에 출연했다. 1972년 줄리어드 스쿨에서 오페라를 가르쳤으며 그후 미국과 유럽 연주여행(1972~73)을 했다. /브리태니커
1954 - 알제리 독립전쟁 시작
1954년 11월 1일 알제리의 전국토 30여곳에서 창고 방화, 농업협동조합 폭격, 프랑스교사 살해 등의 사건이 발생해 프랑스인 7명이 사망하고 14명이 부상당했다.
이것은 각각의 사건들로 본다면 단순한 데모행위에 불과하지만, 종합해 보면 1954년 결성된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의 지도에 의한 결과였다. 1830년이래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온 알제리의 독립전쟁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그들의 폭력에 대해 경고 조치에 그치지 않고 즉시 300명의 중무장한 경비대를 마르세이유로부터 알제리로 파병했다. 또한 프랑스 수상 맹드는 3개 대대의 낙하산병의 투입을 공식 발표했다. 모로코와 튀니지 보호령에서도 프랑스에 대한 새로운 폭력이 보도되자, 유목민들도 프랑스 공격에 가담했다. 이들의 공격은 유엔에서 프랑스 억압을 비난하고 나선 다른 아랍국들과 보조를 함께한 것이었다. 독립전쟁은 1962년 알제리가 독립을 달성할 때까지 계속됐다. /조선
프랑스인에게 알제리는 식민지가 아니었다. 알제리를 점령한 1830년 이후, 이곳에서 태어나고 살아온 프랑스계 2세·3세에게 알제리는 고향이었고 프랑스 그 자체였다. 그러나 1954년 5월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디엔비엔푸를 빼앗겨 100년에 걸친 인도차이나 지배에 종지부를 찍으면서 북아프리카의 알제리에서도 민족해방운동의 불길이 치솟았다. 11월 1일 민족해방전선(FLN)이 알제리 전역에서 대불(對佛)항전을 시작한 것이다. FLN이 점차 대량학살을 일삼고 프랑스군이 무자비한 고문과 살육으로 응수하면서 테러와 보복의 악순환이 반복됐다. 5만명에서 50만명으로 늘어난 프랑스군의 대대적인 소탕작전으로 FLN의 저항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프랑스 내부에서 갈등이 다시 폭발했다. 식민주의자와 프랑스군의 잔학상이 알려지면서 프랑스인과 국제여론이 알제리 독립 쪽으로 기울었고 이 때문에 1958년 5월, 위기의식을 느낀 현지 주둔 프랑스 군부와 식민지주의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청사를 점거하고 코르시카섬까지 장악한 반란군은 사태해결에 드골이 나서줄 것을 요구했다. 반란은 드골이 총리로 선출되면서 진정됐으나 반란군은 머지않아 드골에게 속았음을 깨닫게 된다. 알제리로 날아간 드골이 “당신들의 말을 알겠다” “프랑스령 알제리 만세”를 공공연히 외치면서 그들을 안심시켰으나 드골은 식민지 제국주의 시대가 이미 저물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1961년 1월 알제리 민족자결정책의 시비(是非)를 묻는 국민투표가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되면서 알제리는 서서히 프랑스로부터 멀어져갔다. 그 해 4월, 백인 비밀군사조직 OAS가 현지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미 시기와 명분을 놓쳐버린 반란이 성공할 리 없었다. 한동안 폭격기와 탱크를 동원한 OAS의 테러와 폭력이 끊이질 않았지만 그래도 독립일정은 예정대로 진행됐다. 1962년 7월 3일 드골이 알제리의 독립을 선포함으로써 알제리 식민통치도 132년 만에 막을 내렸다. 비싼 대가를 지불했던 독립전쟁이었다. (러시아문화원)
http://russiacenter.co.kr/info/main.php?page=view&code=edudata&id=10&start=0
1922 - 오스만 투르크 제국 멸망
1922년 11월 1일,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Kemal Atatürk, 1881~1938)이 주도하는 ‘투르크 대(大)국민의회’가 술탄(황제)제를 폐지함으로써 623년 역사의 오스만투르크 제국(Osman Turk Empire)이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1299년 창건돼 전성기때는 서아시아·북아프리카·발칸반도·흑해 북부까지 아우르고, 1453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를 함락해 유럽인들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짓밟았던 대(大)제국이었다. 그러나 술탄의 무능, 지배계급 내부의 알력, 산업 침체 등이 거듭되면서 16세기 후반부터는 점차 쇠락의 길로 들어섰다. 19세기 발칸반도 국가들의 독립 러시는 제국의 기반을 뿌리째 흔들었고, 1차대전의 패전은 오스만 제국을 열강들의 각축장으로 전락시켰다.
이러한 때 제국의 보존을 위해 영국이나 미국의 보호령으로 두자는 의견이 제국 내에서 제기됐지만 케말은 단호히 이를 거부하고 투르크 민족 중심의 독립국가 건설을 꾀했다. 케말이 민·군의 지지에 힘입어 오스만 의회로부터 자신의 독립안 지지를 이끌어내자 영국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의회를 해산시켰다. 그러나 케말은 새로운 ‘투르크 대(大)국민의회’를 구성하며 이에 맞섰다. 그의 관심은 과거 오스만 제국의 광활했던 영토가 아니라 투르크 민족 만의 독립된 영토였다. 따라서 투르크 영토 안에 있는 타국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던 케말은 해결책을 독립전쟁에서 찾았다. 결국 그들을 모두 내쫓고 1923년 10월 29일 터키공화국을 수립했다. 무스타파 케말이 초대 대통령이었음은 물론이다. /조선
1916 - 신소설 작가 이인직(李人稙, 1862~1916) 사망
한국최초의 신소설 작가 이인직이 1916년 11월 25일 조선총독부 병원에서 사망했다. 일본 도쿄 정치학교를 수학했고, 1906년 '국민신보' 주필을 거쳐 '만세보' 주필로 옮기면서 신소설 '혈의 누'를 동지(同紙)에 연재했다.
1907년 이완용의 도움으로 '대한신문'을 창간해 사장에 취임한 이인직은 국권피탈 때 이완용을 돕고 대정 일본왕 즉위식에 헌송문을 바치는 등 친일 행동을 했으나 한국에서 처음으로 산문성이 짙은 언문일치의 문장으로 신소설을 개척한 공로자였다. 그는 신소설을 쓰는 한편, 연극 개량에도 관심을 가져 1908년 11월 자신의 소설 '은세계'를 원각사 무대에 올려 최초의 신극을 공연하기도 했다.
'혈의 누' 외에 대표작으로 '귀의 성', '치악산', '모란봉' 등이 있다. 그의 작품들은 대개 장편이 많고, 근대 소설에 다소 접근한 면모들을 보여 주는 한편 작품의 구성과 등장 인물들의 성격 묘사, 그리고 현실적 제재에 의한 사실적 묘사 수법 등에서 개척자적 공로를 인정받았다. /조선
1908년 11월 1일 최남선이 우리나라 최초의 잡지 '소년'을 창간했다. 창간호 독자는 6명, 2호는 14명에 불과했고 1년이 지나도록 200명을 넘어서지 못했지만, '소년'은 최남선을 중심으로 이광수 홍명희 등이 필자로 참여한 당시 최고의 잡지였다.
그러나 '소년' 창간호는 이보다 훨씬 중요한 문학사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여기 실린 최남선 자신의 시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통해 도도한 서세동점(西勢東漸), 제국주의 침략의 암운 속에 새 세기의 새벽을 맞는 한국인 의식의 주소를 밝힌 것이다. 최초의 신체시로 불리는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소년'의 권두시였다.
18세의 천재소년 육당은 바다를 빌려, 새 시대의 주역인 ‘소년’은 힘차고 두려움을 몰라야 한다고 외쳤던 것이다. 무엇보다 한국인의 시선이 대륙을 떠나 바다로 향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여기서 ‘바다’는 문명 개화를 통해 도달하고 싶은 동경의 공간을 의미한다.
내용면에서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근대적인 자아의식이나 미의식을 개척하지 못하고 '계몽주의'에 머물고 말았지만, 형태나 표현상에 있어서의 시도가 근대시로의 출발점을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최초의 신체시라는 시사적 의의를 부여받을 수 있다. /조선
- 1964, 미터법 통일실시 기념
1905 - 한국, 도량형 신제도 채택
조선 후기 고종(高宗) 때에는 궁 내부에 평식원(平式院)을 설치하여 도량형 업무를 관장하게 하고 도량형 규칙을 제정하여 도량형 제도를 법제화하였고, 1905년에는 대한제국 법률 제1호로서 도량형법을 제정·공포하였다. 그 후 1961년에 과거의 도량형법을 개정하여 계량법을 제정하였고, 1959년에는 국제미터협약에, 1978년 국제법정계량기구에 가입함으로써 현대적인 계량제도를 마련하여 선진국과 같은 현대적 계량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naver
1894 -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3세(Aleksandr III) 사망
1887 - 영국의 화가 라우리(Lowry, Lawrence Stephen) 출생
1880 - 독일의 기상학자, 지구물리학자 베게너(Wegener, Alfred Lothar) 출생
1879 - 헝가리의 정치가 텔레키(Gróf Teleki, Pál) 출생
1870 - 오스트레일리어의 시인, 학자 브레넌(Brennan, Christopher) 출생
1864 - 폴란드의 소설가 제롬스키(Zeromski, Stefan) 출생
1849 - 일본 메이지 시대의 육군 대장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출생
1815 - 미국의 의사 롱(Long, Crawford Williamson) 출생
1800 - 미국 대통령 관저 백악관 개관
1757 - 이탈리아의 조각가 카노바(Canova, Antonio) 출생
1636 - 프랑스의 시인, 비평가 부알로(Boileau, Nicolas) 출생
1596 - 이탈리아의 화가, 건축가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Pietro da Cortona) 출생
1500 - 이탈리아의 조각가, 금속 세공가 첼리니(Cellini, Benvenuto)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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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너에게로 가는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인간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