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악산과 외비량지(外比良池) 전경
① 동악산(성출산) 향로봉 ② 성출봉(불교에서 말하는 이름) ③ 형제봉(유교에서 말하는 성출봉)
④ 죽동마을 ⑤ 외비량지 ⑥ 선암동문(월평마을)이다.
사진에서 보듯이, 평소 맑은 물속에서 삼신산(三神山 지리산)의 해와 달이 뜨고 성출산이 비쳐드는 외비량지는
정녕 인간이 감상할 수 있는 최상의 아름다운 문화유산이었는데,
지금은 안타깝게도 공원조성으로 사라져버린 별세계다.
### 외비랑지와 곡성중학교의 역사
곡성읍 죽동 마을은 과거 죽곡면 당동리에 있었던 곡성현의 관아가 고려 말 지금의 읍으로 들기 전 도상면(道上面) 즉, 지금의 곡성읍에서 가장 번성했던 마을이었다.
모든 농촌의 인구가 절반은 도시로 나가버린 1987년 마을 인구가 675명이었으니, 한국의 농촌마을 평균 인구를 기준해도, 그 규모가 상당한 것이었다.
마을 앞에는 1768년 간행된 욕천지에 외비량지(外比良池)라 하였고, 1872년 제작된 곡성현의 지도에도 표기된 당시로서는 2개의 섬까지 겸비한 인공호수가 있었으며, 지금까지 마을의 젖줄이 되었으니, 오랜 농경문화의 역사를 미루어 알 수 있는 일이다.
곡성군에서 발간한 마을 유래집에서 죽동(竹洞)이라는 이름이 방죽(방축 防築)의 어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였으며, 1918년 곡성 유림들이 쓴 군지에서도 방죽을 ‘외비량지(外比良池)’라고 기록하고, 방죽동(防竹洞)을 죽동(竹洞)으로 새롭게 개명(改名)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잘못된 기록이다.
예로부터 지명(地名)의 자연 연기 법칙에 따라 마을 이름을 방죽(방축 防築)이 있어 방죽동(防竹洞)이라고 하였다면, 처음부터 방죽은 죽동 마을의 관할이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1872년에 제작된 전라도 곡성현 지도에 수계(水系)인 교촌리로 표기되어 있으며, 지금도 그 관할이 교촌리 200번지로 되어 있다는 것은, 오늘날 전하는 죽동(竹洞)마을의 유래가 잘못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한 고을에서 단일 마을로 제일 오래되고 큰 마을의 이름이 특별하지도 않으며, 자신들보다 후대에 만들어진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웃 마을이 관리하는 방죽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상식에도 맞지 않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1918년 곡성읍에 사는 유림(儒林)들이 만든 사찬(私撰) 곡성군지(谷城郡誌)를 보면, 1914년 4월 1일 일제 총독부의 식민수탈의 극대화를 위한 행정개혁으로 도상면과 예산면을 합쳐 곡성면으로 바꾸고, 기존의 20개 마을을 12개 마을로 개편하면서, 이때 ‘방죽동(防竹洞)을 죽동(竹洞)으로 개명하였다.’고 하였으나, 1872년에 제작된 곡성현 지도와 욕천속지(浴川續誌) 구지(舊誌 1768년)에는 방죽동(防竹洞)이 아닌 죽동(竹洞)으로 표기되어 있으니, 방죽동(防竹洞)을 죽동(竹洞)으로 새롭게 바꾸었다는 마을 유래는 분명히 잘못된 기록이며, 죽동은 본래의 이름이다.
◇ 1872년 제작된 전라도 곡성현 도상면(道上面) 지도
죽동(竹洞), 외비량지(外比良池), 서계동(西溪洞), 청류동(淸流洞), 청계동(淸溪洞)은 물론 순자강(鶉子江)까지
주요 마을과 지명들이 정확하게 기술되어있다.
이 ‘외비량지(外比良池)’의 이름을 괘(卦)로 풀어보면, 한 마리의 용(龍)이 하늘로 오르는데, 사해(四海)의 구름이 모여드는 좋은 연못이라는 뜻으로 번영과 화합의 상징이니, 이 ‘외비량지’가 정확히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지형의 조건과 풍수지리로 보아서 농사용이라기보다는 곡성현 관아가 현재의 읍으로 이전한 고려 말 이후, 또는 조선조에 들어와 성인(聖人)이 탄생하였다는 성출산을 지키는 청룡의 혈처에 향교를 건립하면서, 지역의 인재(人才)들이 많이 배출되기를 바라는 비보(裨補)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방죽이다.
일제 강점기 때 우리 곡성의 우국지사들이 비밀리에 자금을 모아 이 혈처에 지금의 곡성중고등학교를 세운 것 또한 이러한 풍수사상을 의지하여, 일제의 조선인 분열책과 각종 유혹으로 흩어지는 민심을 하나로 대동단결시키고, 의인(義人)들을 배출하여 나라를 되찾으려는 비보(裨補)이며 희망이었다.
물론 여기에 인공호수를 조성한 자연 조건은 지금도 방죽 위쪽에는 기계가 빠져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수렁논 즉, 늪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사계절 마르지 않은 자연 용출(湧出) 샘이 있었거나, 또는 성인이 출현한다는 성출산(聖出山 동악산) 풍수와 연관된 용(龍)이 살고 있다는 전설을 갖고 있었을 자연 늪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역사적인 근거와 전래문화를 놓고 보면 이 외비랑지와 교촌리 향교 그리고 일제 강점기 때 우국지사들이 비밀리에 자금을 모아 세운 곡성중학교는 우리 곡성 군민들의 간절한 염원이 깃든 화합의 상징이며 태평성대를 이루어줄 성인의 출현을 바라는 인재양성의 요람이다.
바라건대 이번 6월 2일 선거에는 이 외비랑지의 염원대로 우리 곡성을 바르게 이끌어줄 성인의 정치를 구현할 인물을 선출하자.
일제 강점기 때 곡성중학교를 세운 우국지사들의 간절한 소원대로 대를 이는 매국노들의 기만과 수탈의 치욕적인 어두운 역사를 끝장내자.
그리하여 찬란한 곡성의 역사를 다시 세워 21세기 문명한 세상에 빛나게 하자.
◇ 운무에 싸인 동악산과 외비량지(外比良池) 전경 5월 18일 오후 촬영
부정부패 없는 참 맑은 세상을 위하여
2010년 5월 18일 동악산에서 박혜범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