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0일(화)
새벽에 깨어나 오전까지 기다리다가 11시가 조금 지나서 수술실에서 데리러 왔다. 아침에 서둘러 집에서 왔던 아내가 수술실까지 따라온다. 수술실 앞에서 대기를 하는데, 갑자기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온 몸을 뒤덮는다. 아내에게 통장과 금융에 관련한 주요한 사이트의 비밀번호를 말하고, 그 동안 이런저런 글을 모아놓은 블로그 주소까지 알려준다. 아무래도 그냥 세상을 떠나는 것이 조금은 아쉬운가 보다.
TV 드라마에서 보는 것과는 사뭇 다른 정경 속에서 뭔가를 코에 대었다가 떼었다가 하는 사이에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무척 심한 통증이 명치를 짓누른다. 그리고 혼수상태가 조금 지나자 이동침대가 움직이고 잠시 후 내 침대로 들어 옮기는 것이 느껴진다. 물론 통증이 무척 심하다.
잠은 무척 쏟아지는데 잠을 자지 말고 계속 호흡을 하라고 한다. 딸 수진이가 옆에서 계속 “아빠, 자지마!”하며 잠을 깨운다. 큰 여동생도 보인다. 잠을 참으며 호흡을 하다가 졸기를 몇 시간, 마취가 깨어날 즈음에는 잠도 달아나 버렸다. 이왕 자지 못할 바에는 밤을 새워 복식호흡과 기침을 계속하였더니 가래가 덩어리로 나온다. 새벽에 이르러 간신히 잠이 들었다.
11월11일(수)
밤새워 호흡을 하였기 때문에 조금씩 걸어보려고 하였더니 간호사가 말린다. 게다가 압축스타킹까지 신겨준다. “아니. 밤새워 호흡을 하였는데 이게 무슨 짓이람?” 화가 난다. 수간호사가 방문을 하였을 때 마구 푸념을 하였다. 오전에 집도의 안 교수가 방문을 하더니 간 절개수술을 받은 사람은 사흘은 꼼짝하지 않고 있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밤새워 호흡을 한 것은 대단한 것이 때문에 오늘은 침대에서만 움직이라고 한다. 다행히 코에 끼웠던 관은 빼주었지만 음식도 물도 모두 금지이다.
저녁에 큰 처남 부부가 함께 다녀간다. 빡빡한 강의일정으로 바쁜데 일부러 찾아왔다. 늦은 시간에 막내 매부 박서방이 헐레벌떡 찾아왔다. 요사이 창고를 옮기느라 바빠 제대로 찾아보지 못했다며 미안해 한다.
11월12일(목)
수술을 받은 날 아내가 침대 곁에서 잠을 잤고, 어제는 큰 딸이 잠을 잤다. 여자아이 같지 않게 평소에 무뚝뚝한 녀석이었는데 이번에는 매우 부드럽게 아빠를 간호한다.
안 교수가 다시 방문을 하였다. 물을 조금만 마시면 되지 않겠느냐는 요청에 쾌히 승낙을 해준다. 정말 물맛이 꿀맛이란 말이 어울린다. 오늘은 경주로 세미나를 다녀온 아들 승민이가 병상 곁을 지키겠다고 제 엄마와 누나를 집으로 보냈다. 장모님께서 옆 병실에 친구가 있어 성모성심(옛 봉1동)성당 주임신부께서 기도를 오셨다면서 내게도 모시고 와서 치유기도를 받도록 하신다. 그리고 낮에 장인어른의 죽마고우로 처가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자리를 함께 하신 부부께서 다녀가셨다. 둘째 아들이 생명위원회 사무국장 박 정우후고 신부님이라 아마 기도를 부탁하였으리라.
11월13일(금)
오늘부터 조금씩 운동을 하라는 말에 병동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링거를 비롯하여 몇 개의 관을 주렁주렁 단 채 느린 걸음으로 걸어보니 정말 환자라는 생각이 든다. 소변 줄을 뽑았다. 소변을 보기 위해 딸이 있는 것이 불편하게 되었다. 밤에는 아내 아니면 아들이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아들이 그냥 자기가 학교에서 돌아와 자겠다고 한다.
링거를 맞는 팔이 너무 아파 주사바늘을 뽑고, 수술할 때 비상용으로 뚫었던 목 옆에 있는 연결 관으로 바꾸었다. 막내 처남이 저녁에 병문안을 왔다. 마침 부근에서 모임이 있다고 일찍 서둘러 일어섰다. 환자를 위한다면 병문안을 가서 너무 오랫동안 있는 것이 그리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11월14일(토)
아침으로 죽이 나왔다. 만 3일 동안 물만 마시다가 죽을 먹으니 힘이 난다. 몇 사람이 병문안을 오겠다고 전화를 했는데, 아내가 전화를 가로채 모두 오지 못하게 면회금지를 시켰다.
하지만 성가대 후배 한 녀석이 아내에게 물어보면 오지 말라고 할 것 같다며, 그냥 찾아왔다. 의리가 있는 놈이다. 3시에 특전미사가 있는데 도저히 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난 번에 방문하셨던 원목실의 수녀님께서 다시 방문을 하셔서 봉성체를 해 주신다. 고마울 따름이다.
장모님께서 도시락을 잔뜩 싸가지고 오셨다. 언제나 행동으로 남을 돕는 분이다. 도시락 양이 많은 까닭은 간병을 하면서 제대로 먹지 못하는 이웃을 위한 것이란다.
11월15일(일)
아침에 대변이 나왔다. 어제부터 조금씩 마려웠지만 막상 화장실에 가면 힘을 줄 수가 없었는데, 딱딱한 변이 나왔다. 낮에도 한 번, 저녁에는 딱딱하지도 않은 변이 양도 제법 많이 나왔다. 시원하다. 거울을 보니 수염이 꽤 많이 자랐다. 기념사진을 찍어두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목으로 연결했던 연결 관은 제거하고, 비교적 가는 주사바늘로 팔뚝에 연결을 하였다. 저녁에 큰 처남 부부가 다녀갔다. 처남 댁이 수능시험으로 일찍 못 와서 미안하다고 한다. 고맙다.
11월16일(월)
큰 여동생이 제 남편 출근 길에 함께 차를 타고 나와서 병원으로 왔다. 아가페성가대의 큰 형님께서 두 번째 병문안을 오셨다. 오랜 병실 경험을 털어놓으며 이런저런 조언도 하셨다.
묵주기도를 드리며 병동을 수시로 돌았다. 아내는 병실에 누워있어야 한다고 아우성이지만 갑갑하기 때문에 산책을 계속 즐겼다. 심지어 아내의 요청으로 주치의마저 너무 지나치게 운동을 하지 말라고 한다. 낮에는 어머니께서 죽을 사가지고 오셨다가 드레싱 받는 모습에 깜짝 놀라신다. 아마 흉터가 너무 큰 탓이리라.
저녁에 신수동의 박베드로 선배와 흥사단의 이희승 선배가 오셨다. 그리고 송만호안토니오 형님이 연습을 가는 길이라면서 찾아왔다. 그리고 또 아내 친구의 남편이면서 오랜 친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찾아왔다. 아직은 손님을 만나면 쉽게 피곤해진다. 아들이 감기 기운이 있어 아내가 밤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