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과 장보고, 동아시아 대륙과 해상을 정복하다.
광개토대왕 - 동북아시아를 호령한 정복왕(征服王)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은 필자의 특별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독자들이 잘 알고 있는 인물일 것으로 짐작됩니다.
앞의 열 번째 이야기에서 잠깐 얘기한 대로, 광개토대왕은 소수림왕(小獸林王)이 정비하고 복구해 놓은 강력한 왕권체제와 국력의 바탕 위에서 임금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광개토대왕의 아버지인 이련(伊連 : 於只支)은 소수림왕의 친동생이었습니다. 소수림왕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동생인 이련(伊連)이 임금의 자리를 물려받아, 고국양왕(故國壤王)이 되었습니다. 고국양왕은 즉위와 동시에 북쪽의 떠오르는 강자였던 후연(後燕)과 남쪽의 백제(百濟)를 상대로 숱한 전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당시 고국양왕은 일진일퇴(一進一退)를 거듭했을 뿐 후연 및 백제와의 전투에서 확실한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즉위한 지 9년째 되는 해, 병으로 드러눕게 되고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고국양왕이 소수림왕이 닦아놓은 시대를 물려받아 고구려의 위용을 과시하기에는, 9년이라는 시간은 너무 짧았습니다.
고국양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백제에게 빼앗긴 한반도의 주도권을 되찾고 동북아시아를 호령하는 강국(强國) 고구려를 만드는 과제는 맏아들 담덕(談德)에게로 넘겨졌습니다. 고국양왕의 맏아들 담덕이 바로 광개토대왕입니다. 광개토대왕은 즉위한 서기 391년부터 남쪽의 백제와 북쪽의 거란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합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따르면, 5월에 부왕(父王)인 고국양왕이 사망했는데, 7월에 백제를 공격해 10개의 성을 함락시켰고, 9월에는 북쪽의 거란에 쳐들어간 후 10월에는 다시 백제의 관미성(關彌城)을 함락시켰습니다. 미리 작정이라도 한 듯, 즉위하자마자 전광석화처럼 남쪽의 백제와 북쪽의 거란을 친 것입니다.
이때부터 시작된 광개토대왕의 영토확장은 재위 기간 내내 지속됩니다. 주요한 정복 전쟁만 살펴보아도, 거란 정벌(395년) →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을 공격하여 아신왕(阿莘王)에게 항복을 받음(396년) → 숙신 정벌(398년) → 신라에 원군을 보내 백제·가야·왜 연합군을 물리침(400년) → 후연(後燕)을 정벌하여 요동(遼東)지역 점령(407년) → 동부여(東夫餘) 정벌(410년)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광개토대왕은 무수한 정복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한반도와 만주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 일대를 고구려의 영토로 만들었습니다. 당시 고구려를 꺾을 군사력과 국력을 갖춘 나라는 한반도와 만주 일대는 물론 중국 대륙 내에서도 찾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특히 고조선(古朝鮮)의 영토였다가 한(漢)나라가 차지했던 요동(遼東) 지역을 5백여 년 만에 회복한 일은 광개토대왕이 이룩한 업적 중 가장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광개토대왕이 이토록 즉위하자마자 강력한 영토확장정책과 정복 전쟁에 전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소수림왕이 이룩해 놓은 정치적 안정이 밑바탕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왕권체제가 튼튼하고 나라가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광개토대왕은 대외팽창정책을 강력하게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광개토대왕 시대는 고구려가 자신을 세계의 중심에 놓는 독자적인 천하관(天下觀)을 완성시킨 때이기도 합니다. '천하에서 가장 성(聖)스럽고 강(强)한 나라는 고구려'라는 관념이 고구려인들 사이에 자리 잡으면서,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생각 역시 자연스럽게 형성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광개토대왕의 강력한 정복 전쟁으로 동북아시아의 패자(覇者)로 부상한 고구려는 그 뒤를 이은 장수왕(長壽王)에 이르러 최고의 '전성시대'를 구가하게 됩니다. 따라서 '천하의 중심은 고구려'라는 고구려인들의 자부심은 당시 동북아시아에 존재하는 어떤 나라도 감히 시비를 걸 수 없는 엄연한 사실로 굳어졌습니다. 4세기 말부터 5세기 말까지 100여 년 동안 고구려는, 소수림왕의 체제 정비와 정치 안정 → 광개토대왕의 정복 전쟁과 영토 확장 → 장수왕의 태평성대라는 선순환(善循環)의 역사를 유지해 나갔습니다
장보고 - 동아시아 해상을 장악한 정복자(征服者)
우리 역사에서 동북아시아 대륙(大陸)을 호령한 사람이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었다면, 동아시아 해상(海上)을 호령한 사람은 신라의 장보고(張保皐)였습니다.
『삼국사기』 「열전(列傳)」 '장보고(張保皐)'에는, "그의 이름은 궁복(弓福)이며 신라 사람이나 고향과 출신 배경은 알려져 있지 않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열전(列傳)」에 기록된 장보고의 삶은 친구이자 후배인 정년(鄭年)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뛰어난 무예와 용맹함을 지녔고, 바다에 익숙했던 장보고와 정년(鄭年)은 일찍이 당(唐)나라로 건너가 쉬저우(徐州) 무령군소장(武寧軍小將)이 되었습니다.
장보고가 신라의 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시기는, 제42대 임금인 흥덕왕(興德王)이 즉위한 지 3년째 되는 서기 828년입니다. 신라로 돌아온 장보고는 흥덕왕을 알현(謁見)한 자리에서, 청해(淸海 : 진도)에 군사기지를 세우겠다고 간언했습니다.
遍中國 以吾人爲奴婢 願得鎭淸海使賊不得掠人西去
[신(臣)이] 중국을 두루 돌아다녔는데, 우리 신라 사람들이 노비(奴婢)가 되어 있었습니다. 바라건대, 저에게 청해(淸海)에 군사기지를 세워 지키게 하신다면 도적들이 우리 신라 백성을 서쪽(중국)으로 납치해 가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 『삼국사기』 「열전」 '장보고'
중국에 있을 때 장보고는 해적들이 신라의 연해안과 무역선을 습격해 약탈하고, 사람들을 납치해 노예로 파는 참상을 지켜보았습니다. 또한 바다에 익숙했던 그는 일찍부터 해상 무역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신라와 당나라 그리고 왜(倭 : 일본) 사이의 해상 무역 역시 해적들에 의해 큰 피해를 입고 있었습니다. 이에 장보고는 해적을 소탕하면 노예로 팔려가는 신라 백성들의 참상을 막고, 또한 3국간 해상무역로(貿易路)를 장악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흥덕왕으로부터 허락을 받은 장보고는 군사 1만여 명을 이끌고 청해(淸海)에 진영(鎭營 : 군사기지)을 설치하고 해적 토벌에 주력합니다. 그 결과 해적들은 더 이상 해상(海上)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삼국사기』에서는, 장보고가 해적을 소탕한 이후 바다에서 더 이상 신라 사람들을 사거나 파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장보고가 선택한 청해(淸海)는 신라 해상로(海上路)의 주요 요충지였습니다. 이곳은 군사기지로서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신라·당·왜 간 해상교통로의 심장부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서라벌-일본의 구주(九州)-탐라-중국의 등주(登州)-항주(杭州) 등을 잇는 삼각 해상로의 정중앙(正中央)에 자리 잡고 있던 청해진은, 이때부터 3국간 중개무역의 전략 거점으로 급부상합니다. 장보고는 강력한 군사력과 함께 중개무역을 통해 축적한 막대한 부를 밑바탕 삼아, 청해진(淸海鎭)에 자신의 해상왕국(海上王國)을 만들고 일약 동아시아의 바다를 호령하는 해상왕(海上王)이 됩니다.
특히 장보고는 자신의 정치적 후원자인 흥덕왕(興德王) 사후 벌어진 신라의 왕위 계승 분쟁에 깊숙이 개입하게 되면서, 신라 최고의 권력자로 떠오릅니다. 장보고는 훗날 신무왕(神武王 : 제45대 임금)이 되는 김우징(金祐徵)을 왕위에 앉히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장보고에게 비극의 시작을 알리는 조종(弔鐘)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신무왕은 임금의 자리에 오른 지 불과 7개월 만에 병으로 세상을 뜨고, 그의 아들인 문성왕(文聖王)이 보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런데 죽은 신무왕은 임금이 되기 전에, 왕위에 오르면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신무왕(神武王)의 너무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에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이에 장보고는 새로이 왕이 된 문성왕(文聖王)에게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했습니다.
당시 문성왕은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진 장보고를 무시할 수 없고 또 왕권을 강화하는 데 장보고의 힘도 필요하다는 현실적인 판단으로, 장보고의 딸을 둘째 왕비로 맞아들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혈통과 신분을 어느 나라보다 중요시한 신라의 귀족들이 장보고가 미천한 출신이라는 이유로,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이에 문성왕은 귀족들에게 굴복하게 되었고, 이 소식을 들은 장보고는 크게 분노했습니다. 귀족들의 반발과 위협에 굴복한 문성왕은 장보고의 분노 또한 두려웠습니다. 언제 청해진의 막강한 군사력을 동원해 반란을 일으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문성왕을 찾아와 장보고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겠다고 한 장수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염장입니다.
왕의 밀명(密命)을 받은 염장은 거짓으로 장보고에게 항복했습니다. 장보고는 염장의 뛰어난 무예와 군사적 능력을 높이 사, 그를 매우 신뢰했습니다. 염장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장보고를 암살합니다. 장보고가 죽자 청해진의 군사들은 별다른 저항 없이 염장에게 굴복하였습니다. 이로써, 해상왕 장보고의 꿈과 야망이 깃든 청해진은 종막을 고하게 됩니다. 그리고 장보고가 암살당한 지 5년 후인 서기 851년(문성왕 13년), 청해진은 공식적으로 해체되고, 그 곳의 백성들은 전라도 김제 벽골제로 강제 이주를 당합니다
첫댓글 광개토대왕 = 담덕대왕.
청해진거사 장보고.
조선시대 성웅 이순신.
암튼, 대한민국의 핏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