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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하나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살아내는 삶이 가장 귀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한번쯤 듣거나 불러봤을 법한 “은혜”라는 곡을 작곡한 그는 “가장 귀한 삶”이라는 제목의 또 다른 곡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삶이라 하여도
스치듯 지나는 삶이라 하여도
후회하지 않고 오늘을 사는 것은
가장 귀한 삶을 앎이라
내가 꿈꾸는 일 이루지 못해도
내가 바라는 것 다 갖지 못해도
낙심하지 않고 오늘을 사는 것은
가장 귀한 삶을 삶이라
내가 복음을 알고
내가 복음을 믿고
내가 복음을 전하며 살아간다면
나의 삶은 가장 귀한 삶이라
내가 예수를 알고
내가 예수를 믿고
내가 예수를 전하며 살아간다면
나의 삶은 가장 귀한 삶이라
하나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날 위해 고귀한 생명 주셨으니
그 생명 받은 나 하늘의 소망 있네
나의 삶은 귀한 삶이라
...
내가 예수를 위해
내가 살아간다면
나의 작은 삶 아무도 모른다 해도
나의 삶은 가장 귀한 삶이라
나의 삶은 가장 귀한 삶이라
복음을 알고, 믿고, 전하는 삶이 귀하다고 노래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전하는 삶이 귀하다고 노래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간다면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는 무명의 삶이라 할지라도 더할 나위 없이 귀하다고 노래했습니다. 선지자는 무려 850명에 이르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능력 전쟁을 벌였습니다. 완벽한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의 간절한 기도에 불로 응답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영웅으로 급부상하였습니다. 이 소식은 즉시 실질적인 왕권을 행사하던 왕비 이세벨에게 전해졌습니다.
이세벨은 분노했습니다. “내일 이맘때까지 너를 죽이고 말겠다. 네가 그 예언자들을 죽였듯이 나도 너를 죽이겠다. 내가 너를 죽이지 못한다면, 신들이 나에게 무서운 벌을 내려도 좋다.”(왕상19:2b)라고 선포했습니다. 이는 선지자를 붙잡아 반드시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공개적으로 처형하고야 말겠다는 의미였습니다. 동시에, 선지자의 연약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실제로, 선지자는 이세벨의 전갈을 받자마자 혼비백산했습니다. 마음이 완전히 녹아내렸습니다. 도무지 떨쳐버릴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대단히 낙심했습니다.
즉시 광야로 도망쳤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능력 대결을 벌이던 때의 영적인 위엄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를 향해서 “이제 선지자라고는 저 하나 남았는데 그들이 저마저 죽이려고 찾고 있습니다.”(왕상19:10b)라고 외쳤습니다. “저 하나 남았는데”라는 구절은 “나, 나만 남았다”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하고 노력을 해봐도 도무지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없는 사면초가의 상황으로 내몰리고 말았다는 의미입니다. “오, 여호와여, 이제 다 끝났습니다. 제 목숨을 거두어주십시오...”(왕상19:4b)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자신을 지금 당장 죽여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는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자들이니라.”(왕상19:18)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칠천 명의 의인들을 남겨두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 성경은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오십 명씩 따로 나눠 굴에 숨기고 (이세벨이 알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빼돌린) 떡과 물을 먹였더라.”(왕상18:3b-4)라고 증거 합니다.
당시 궁중은 바알과 아세라 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 여호와를 진실한 마음으로 경외하고 있었던 오바댜의 입장에서는 적진 한 복판이었습니다. 자신이 여호와를 경외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라고 한다면, 모든 것은 물론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까지도 잃을 수 있었습니다. 한두 명도 아니고 무려 백 명이나 되는 선지자들을 숨기고 때를 따라서 음식을 먹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성실하게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선지자는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하늘로부터 불을 내렸습니다.
여호와께서 가증스럽게 여기시는 우상 숭배를 앞장서서 조장하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척결했습니다. 누구도 감히 쉽게 시도할 수 없는 정말로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위험한 상황이 주어지자,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칠천 명의 의인들과 백 명의 선지자들에게는 불을 내릴만한 능력은 없었습니다. 다만 견디는 능력은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힘과 능력과 방패가 되시는 여호와 안에서 언제든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척박한 현실을 힘겹게 견디며 살아내고 있었습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하나님은 알아주시는 너무나 귀한 삶을 살아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주 자기 혼자만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어디에도 자기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와 같은 판단을 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처럼 힘겨운 삶을 참고 견디며 살아내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모를 뿐입니다.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사10:21)라는 증거대로, 어느 시대든지 남아 있는 사람은 있습니다. 그들은 비록 이름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사회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자신에게 허락되어진 힘겨운 삶을 묵묵히 살아내고 있습니다.
그Leslie B. Flynn는 “충성”이라고 번역된 자신의 책Keep on Keeping on을 통해서 “일평생 충성스럽게 (자신에게 맡겨진) 양떼를 치다가 세상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죽은 시골 교회 목회자가 (전 세계를 다니며 내놓으라는 거대한 부흥집회를 기획하고 인도한) 빌리 그래함보다 더 빛날지 모르며 (열매하나 얻기가 하늘의 별 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오지에서 묵묵히 사역한 무명의 선교사가 (아프리카 내지 선교회Africa Inland Mission 소속 선교사로서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리빙스턴Livingstone보다 더 칭송을 받을지 모른다.”라고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결코 수의 많고 적음을 보지 않으십니다. 건물의 크고 작음도 보지 않으십니다. 얼마나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느냐의 여부도 보지 않으십니다. 마치 사명처럼 주어진 삶을 어떤 자세로 살아내고 있느냐를 보십니다. 특히, 여호와에 대한 신앙은 탁월한 능력을 행하는 소수의 지도자들보다는 누구도 그들의 존재 여부를 알지는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에 새기시고 기억해 주시며 또 크게 기뻐하실 정도로 귀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낸 훨씬 더 많은 무명의 성도들을 통해서 지켜졌습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선지자의 경우 하나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자신에게 사명처럼 주어져 있는 삶을 어떤 자세로 살아내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사입니다...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여러분과 화목하셨으니 여러분도 하나님과 화목하십시오.”(고후5:220-21)라는 사도의 외침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처한 환경과 상황과 조건과 상관없이 또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누구나 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사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불신앙의 죄를 깨달아 알 수 있도록 가르쳐주어야합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을 완전히 떠나서 가증스러운 우상 숭배 놀음에 빠져버린 불신앙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라고 촉구할 수 있어야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깨져버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그야말로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차대한 사명을 받았습니다. 사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매사에 신중했습니다. 말과 행동을 조심했습니다. 사람들이 꺼릴만한 일들은 아예 행하지 않았습니다. 맹세한 것은 상황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지켰습니다. 오해될 만한 일들은 불가항력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최대한 행하지 않았습니다. 바르게 처신하기 위해서 몸부림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가 전하는 복음을 오해했습니다.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왜곡했습니다. 급기야 핍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무수히 많은 어려움을 당해야했습니다. 무던히도 참고 견뎌내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도무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하게 압박해오는 첩첩산중 같은 “환난θλΧψεσιν”을 견뎌냈습니다. 마치 밀물처럼 쉬지 않고 밀려오고 또 밀려오기 때문에 도대체 어떻게 처신해야 좋을지 판단하지 못한 채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무기력하게 짓눌려 있어야 하는 절대 “궁핍άνάγκαις”을 견뎌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다 동원한다 할지라도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그냥 주어지는 그대로 불가항력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당혹스러운 “고난στενοχωρίαις”을 견뎌냈습니다.
쉬지 않고 모질게 이어지는 구타와 채찍질과 발길질이 포함되어 있는 엄청난 “매 맞음πληγαῖς”을 견뎌냈습니다. 이는 복수입니다. 실제로 그는 사십에서 하나 뺀 매를 무려 다섯 번씩이나 맞았습니다. 죽기 일보 직전까지 맞았다는 의미입니다. 세 번씩이나 태장笞杖을 맞았습니다. 숨통을 아주 끊어버리고야 말겠다는 지극히 악한 의도를 가지고 무지막지하게 던져대는 돌들을 맞기도 했습니다. 여러 번 지극히 칙칙하고, 축축하며 이가 떨릴 정도로 혹독한 추위가 엄습해 오는 지하 감옥에 차꼬가 채워진 채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쳐지는 “갇힘φυλακαῖς”을 견뎌냈습니다.
그는 빌립보, 에베소, 가이사랴, 로마의 감옥에 갇혔습니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씩이나 맞을 때도 갇혔습니다. 태장을 세 번 맞았을 때도 갇혔습니다. 또 유대 정부와 로마 정부에 의해서도 갇혔습니다. 열 번 이상이나 갇혔습니다. “요란한 것άκαταστασίαις”을 견뎌냈습니다. “불안정한 상태나 무질서하고 혼란한 상태 곧 폭동이나 정치적인 소요” 등을 가리킵니다. 그는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 에베소, 예루살렘 등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했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일어났던 폭동들과 맞닥뜨려야했습니다.
시간과 장소는 물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또 미처 자신의 몸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진행되는 사역의 특성상 주어질 수밖에 없는 극도의 “수고로움κόποις”을 견뎌냈습니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극도의 고통이라는 “자지 못함αγρυπνιαις”을 견뎌냈습니다. 그는 선교 여행을 위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습니다.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편히 잠잘 틈이 없었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먹지 못함νηστειαις”을 견뎌냈습니다. 복음 전파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가장 기본적인 욕구조차 절제했습니다.
“...주리고 목말랐으며 여러 번 굶고”(고후11:27b)라는 고백에 따르면, 때로는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극도로 가난했습니다. 거기다 그는 혹독한 추위와 헐벗음까지도 견뎌내야 했습니다. 오늘 대한민국의 목회 현장에서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입니다. 아니 사명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이렇게 힘든 목회 현장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면 과연 나설 사람이 있을지 의심스러운 상황입니다. 아이들을 교육할 환경은 어떤지, 문화를 누릴 수 있는 환경은 되는지, 주어지는 사례는 얼마나 되는지 철저하게 따져본 다음 비로소 결정하는 세태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자신을 허물과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어떤 환경이든 개의치 않았습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과 고통으로 얼룩진 힘겨운 세월을 묵묵히 참고 견디며 살아냈습니다. 순결하고 흠 없이 살아냈습니다. 사심 없이 살아냈습니다. 그 과정에서 지극히 이기적인 인간의 탐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을 많은 수단들 가운데 하나 정도로 전락시키는 가짜 복음, 은밀하게 왜곡된 복음, 반쪽짜리 복음은 철저하게 배척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하나만 날 것 그대로 전했습니다.
하나님 영광 하나만 드러내는 진짜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대적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관대했습니다. 친절했습니다.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자신의 감정을 믿지 않았습니다. 철저히 배격했습니다. 성령의 충만한 감동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구했습니다. 가식이 전혀 없는 진실한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펼쳐지는 모든 상황 곧 범사에 믿음으로 행했습니다. 아주 가끔은 극찬과 함께 인정과 존경과 환영을 받았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지독하게도 박하고 또 악한 평가와 함께 수치와 모욕과 조롱을 당했습니다.
평가가 좋을 때도, 평가가 나쁠 때도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말도 안 되는 가르침으로 유혹하는 거짓 증인에 불과하다는 비난받을 때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하나만 증거 했습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고후6:9)라는 증거대로, 대적하는 이들에게는 업신여김을 당하고 존재 가치를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무명한 자Αγνοούμενοι”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인정받는 “유명한 자έπιγινωσκόμενοι”였습니다.
그는 또 마치 죽은 자 같았습니다. 뜬금없이 감탄사 “보라ιδου”가 이어집니다. 뜬금없지 않습니다. 당연히 나와야만 하는 감탄사입니다. 온전히 다 표현할 수 없는 벅찬 감사와 감격과 감동이 자기도 모르게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솟구쳐 올라왔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살펴보면 누구나 다 공감할 수 있습니다. 여러 번의 선교 여행을 반복하는 동안 수시로 죽음의 위험에 노출되었습니다. 실제로 죽음 직전까지 내몰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마다 언제 어디서나 함께 동행 하고 계시던 하나님께서 지켜주셨습니다. 보호해 주셨습니다. 살려주셨습니다.
자신 안에 넘치도록 풍성하게 부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강력하게 역사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온전히 다 드러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죽은 자 같아 보였는데, 실제로는 여전히 살아 있게 해주셨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주신 거룩한 사명을 완전히 다 마치는 순간까지 이 은혜를 넘치도록 풍성하게 부어주실 것이 확실했습니다. 이제까지의 경험에 비춰볼 때, 의심할 여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울컥 올라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올라오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또 “징계를 받는 자παιδευόμενοι” 같았습니다. 그는 몸에 가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습니다. 그가 반드시 걸어야만 하는 길 도처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난과 역경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하나 같이 절대 주권과 탁월한 섭리로 지으신 세계를 다스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들이었습니다. 그를 훈련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허락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들은 이를 알 턱이 없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피할 수 없는 혹독한 징계를 받고 있다고 왜곡했습니다.
어디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자며 비웃었습니다. 조롱했습니다. 멸시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가시 때문에 아주 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10)라는 증거에 따르면, 그는 또 “근심하는 자λυπούμενοι”처럼 보였습니다. “근심”을 직역하면 “슬픔”입니다. 실제로 그는 근심했습니다. 슬퍼했습니다. 성도들에게 근심하고 있다고, 슬퍼하고 있다고 편지를 쓰기도 했습니다.
나라와 민족이 여전히 하나님을 떠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를 대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해야만 하는 거룩한 근심이었습니다. 거룩한 슬픔이었습니다. 오늘 주어진 빛과 소금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저와 여러분 곧 교회에 대하여 가져야할 슬픔 또는 근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근심과 슬픔을 기뻐하십니다. 영광 받으십니다. 그렇다고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근심과 슬픔은 아닙니다. 소위 간절한 마음으로 원하고 바라고 구한다고 할 수 있는 근심이나 슬픔도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해왔다면, 오늘 하고 있다면, 이후로도 꾸준히 할 수 있다면 감사한 일입니다. 기뻐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슬퍼하며 근심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신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근심과 슬픔에 짓눌려 있으면서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그는 또 가난한 자 같았습니다. 실제로 그는 물질적으로 가난했습니다. 언제나, 항상 가난했습니다. 선교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는 고린도 교회에 도움을 구해야했습니다.
스페인 전도를 준비하면서는 로마 교회에 도움을 구해야했습니다. 골로새 교회를 방문할 계획을 세운 다음에는 빌레몬에게 자신의 처소를 준비해 달라고 부탁해야했습니다. 디모데에게는 드로아 가보의 집에 맡겨두었던 겉옷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해야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누구보다 가난했습니다. 영적으로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누구보다 부요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는 또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았습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돈도 없었습니다. 집도 없었습니다. 가족도 없었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는 빈털터리에 불과했습니다. 놀랍게도 그에게는 없음이 하등의 문제도 되지 않았습니다. 물질은 저와 여러분이 살아내고 있는 세대가 이어지는 동안에만 제한적으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가오는 새로운 세대 곧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는 어떤 가치나 의미도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지극히 제한된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다가오는 영원한 세대를 누구보다 풍요롭게 향유享有하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하는 당신 백성들에게 넘치도록 풍성하게 부어주시는 부요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치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3:21-23)라는 고백대로,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 같이 보였지만, 실제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것을 가진 자였습니다. 소유와 무소유, 삶과 죽음에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 오히려 더할 나위 없이 자유로운 삶을 영위營爲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무엇에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야하는지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편, 성경은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기 위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않았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였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다.”(히11:35b-38)라고 증거 합니다.
어떤 성도는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를 받아 누리기 위하여 묵인 상태에서 죽도록 맞는 고문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풀려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을 기꺼이 내놓았습니다. 어떤 성도는 온갖 종류의 희롱戱弄과 혹독한 채찍질과 옥에 갇히는 고난을 달게 받았습니다. 어떤 성도는 돌에 맞아 죽는 처형을 당했습니다. 어떤 성도는 톱에 켜져 죽었습니다. 어떤 성도는 칼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어떤 성도는 짐승 가죽을 입고 유리했습니다. 어떤 성도는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습니다. 산과 광야에서 짐승처럼 생활했습니다.
어떤 성도는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을 유리하였습니다. 세상은 그들을 도무지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세상은 그들에게 어떤 가치나 의미도 없었습니다. 환난과 핍박과 고난은 물론 부귀와 영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유일한 소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돌려놓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이름 없는 그들이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지켜내려고 몸부림쳤었던 믿음을 값없이 물려받았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반드시 지켜내야 합니다. 반드시 물려줄 수 있어야합니다. 그것만큼 귀한 삶은 없습니다.
중국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전염병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습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무기력하게 죽어갔습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한 선교사는 급히 병원체病原體를 구했습니다. 유리병에 담았습니다. 백신을 만들기 위해서, 당시 중국보다 의학이 발전해 있었던 고향으로 출발했습니다. 검역소 직원들은 공항에 도착한 승객들 하나하나를 철저히 조사했습니다. 병원체가 발각되면 백신이고 뭐고 헛일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순간, 선교사는 병원체를 자신의 입에 털어 넣었습니다. 잠시 후, 병원체는 선교사의 몸에 퍼졌습니다. 열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선교사는 그 길로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의사를 향해서 “나는 지금 중국에서 번지고 있는 전염병에 감염되었습니다. 병원체를 뽑아서 백신을 만들어 주세요. 그것을 중국에 보내 많은 사람들을 살려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외친 직후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한 선교사의 거룩한 희생을 통해서 백신이 만들어졌습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가난한 한 여인이 졸다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시장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던 그녀는 마침 새롭게 단장한 것 같은 가게로 들어갔습니다. 주인은 신神이었습니다.
여인은 신에게 무엇을 팔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신은 여인이 원하는 무엇이든 다 팔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여인은 신의 대답에 크게 놀랐습니다. 무엇을 살지 오랫동안 고민하고 또 고민했습니다. 인간이 원하는(아니 인간들에게 꼭 필요한) 최고의 것을 사기로 결심했습니다. 외치기라도 하듯 “마음의 평화와 사랑, 지혜와 행복을 주시고, 두려움과 슬픔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여인의 말을 들은 신은 조용히 미소 지었습니다. “미안하지만 가게를 잘못 찾아오셨네요. 이 가게에서는 열매가 아니라 오직 씨앗만 팔거든요.”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종과득과 종두득두 천망회회 소이불루種瓜得瓜 種豆得豆 天網恢恢 疏而不漏”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이를 심으면 오이를 얻고, 콩을 심으면 콩을 얻는다. 하늘의 그물은 넓고 넓어서, 그물눈이 성글기는 하지만 (절대로) 빠뜨리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자기가 심은 그대로 거두게 됩니다.”(갈6:7b)라는 성경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합니다.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삶을 살아내느냐가 중요합니다. 곧 어떤 씨를 뿌리느냐가 중요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어떤 삶을 살아내느냐에 따라 장차 나타날 열매가 결정됩니다.
특히, 오늘 저와 여러분 앞에 우뚝 서 있는 거대한 교회들은 위대한 능력을 행하는 지도자 한 사람이 아니라 외롭고 고독하며 힘겨운 상황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켜온 무수히 많은 이름 없는 성도들의 거룩한 희생과 헌신과 봉사와 눈물을 통해서 세워졌습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를 끝까지 지켜내며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가장 귀한 삶을 살아낸 이름 없는 그들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웅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로 이끌어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성도들의 거룩한 희생과 헌신과 인내를 통해서 저와 여러분에게까지 전달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구원을 위한 거룩한 씨앗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저와 여러분 역시 당신을 빼닮아서 거룩한 씨앗으로 심겨지기를 원하십니다. 요즈음 코로나19가 유행하는 동안 직격탄을 맞았던 PC방이 다시 활기를 찾고 있다고 합니다. 사려면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하는 게임Diablo IV을 즐기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게임을 홍보하기 위해서 내놓은 “다시 어두움이 빛을 덮으리라.”, “그토록 바라던 지옥으로”라는 문장Copy은 그야말로 섬뜩해지기까지 합니다.
최근, 예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그야말로 끔찍한 강력 범죄들이 하루도 쉬지 않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시대가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는지, 얼마나 어두운지, 심령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황폐해졌는지, 또 교회 아니 저와 여러분이 얼마나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는지를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그리스도인답게 살아낼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비록 손해가 불을 보듯 뻔 할지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아낼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왜곡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자 같으나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않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무엇보다 영원한 구원과 생명은 물론 참된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과 평안과 안식과 쉼으로 충만한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특히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천하보다 귀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거룩한 씨앗이 되어 심겨지는 가장 귀한 삶을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