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 죽음의 현장을 찾아라
전 대 열
한국정치평론가협회장
장준하 선생이 세상을 뜬지 서른세 해가 흘렀다. 지난 8월17일 33주기를 맞이하여 장준하선생 기념사업회에서는 묘소에 모여 조촐한 추도식을 거행했다. 유가족을 비롯하여 선생을 따르던 후학들이 모였으나 지금까지도 사인을 정확하게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고 자괴해마지 않았다.
유신독재를 반대하여 양일동선생 등과 함께 민주통일당을 창당하여 최고위원을 맡으며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선포했던 장준하는 긴급조치 시대를 열게 만든 장본인이다. 기념사업회는 일제 학병을 탈출하여 장장 6천리를 걸어서 광복군에 합류했던 장준하의 기개를 본받아 ‘청년등불’운동을 편지 19회째다. 그러나 껍데기로만 그 고통과 신념을 체험했지 모두 현실에 안주하는 듯해서 부끄러운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청년등불은 짧은 기간이나마 장준하가 걸었던 편린을 맛본다. 독립군가를 소리 높여 부르며 잠시나마 선열들의 애국단성에 다가선다. 저절로 애국심도 솟아오른다. 뮤지컬로 승화한 ‘청년 장준하’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지만 선생의 사인이 밝혀지지 않는 한 추모사업은 한낱 허공에 뜬 메아리일 뿐이다. 과연 등산도중 실족하여 추락사한 것일까? 아니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암살된 것일까?
이 두 가지 가설 중에서 하나만 맞다. 그런데 이 절체절명의 명제를 풀어낼 도리가 없다. 민주화를 이룩한 이후 정부에서는 ‘의문사 진상조사위원회’를 만들어 첫 번째로 장준하 죽음의 진상조사에 착수했다. 필자는 이 위원회에서 소환한 첫째 참고인으로 진술할 기회를 가졌다. ‘장준하 죽음은 암살인가?’라는 장문의 논문이 기초 자료였기 때문이다.
필자는 5일장을 끝낸 이틀 후 양일동총재의 명에 따라 ‘민주통일당 장준하선생 서거 진상조사위원회’를 이끌고 현장을 찾았다. 이 때 동아일보 송석형기자, 홍콩에서 발행되는 ‘파 이스트 이코노믹 리뷰’지의 로이 팜 기자가 동행했다. 안내를 맡은 김용덕은 장준하선생을 모시고 갔던 호림산악회 회장이며, 현장 목격자라고 하는 김용환은 약속하고서도 나타나지 않아 우리끼리만 가게 되었다.
우리 일행 16명이 찾은 현장은 ‘현장’이라고 말하기에는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장준하가 떨어졌다는 소나무에 자일을 묶고 타고 내려와 길이를 확인한 결과 16m70cm라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랐다. 그 높은 곳에서 떨어졌다면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선생의 시신은 골절 한 군데도 없었고 찰과상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80kg의 거구가 16m 높이에서 추락하면 형언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어야 마땅하다.
등산가들이 쓰는 자일은 추락에 대비하여 대개 1200kg~1500kg을 지탱할 수 있는 강도를 갖는다. 1m 떨어지는데 60kg의 가중력이 붙는 것으로 보는데 16m라면 약 1000kg의 무게다. 우리들이 큰 돌과 통나무를 떨어뜨려봤더니 산산이 부서졌다. 선생의 시신이 아무런 상처 없이 잠자는 듯 반듯하게 누워있었다는 김용환의 증언은 절대 거짓말이다. 게다가 사인으로 밝혀진 귀밑 급소함몰은 추락할 때 입은 상처일 수 없다.
사고소식을 듣고 유가족이 도착했을 때 시신은 이미 현장을 떠나 계곡 옆에 있는 널찍한 바위로 옮긴 후였다. 검사조차 현장을 보지 못하고 검안을 했다. 시신은 유가족에게 인계된 후 함석헌 문익환 백기완 등이 상의하여 조광현 등 의사 세 사람을 은밀히 불러 집에서 검안을 다시 했다. 이 때 발견된 것이 양쪽 겨드랑이 팔에 시퍼렇게 든 멍이다. 이는 두 사람이 팔을 꼈을 때 생길 수 있는 반점이다. 저항하지 못하게 팔을 끼고 다른 한 놈이 귀 밑 급소를 가격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사반(死斑)이다.
이처럼 절박한 의문점에도 불구하고 장례는 치러졌고 그 후 현장답사의 기록이나 사진 등은 후일을 기약하며 숨겨졌다. 필자는 얼마 뒤 ‘민주통일당보 필화’에 걸려 긴급조치9호로 수감되었다가 신군부가 쿠데타로 집권할 때에는 내란음모죄로 징역을 살며 혹독한 고통에 시달렸다. 교도소에서는 장준하 담당 교도관으로부터 꼿꼿했던 옥중생활을 듣는 것도 큰 위로가 되었다.
이번에 기념사업회 측의 주선으로 현장을 찾았다. 임현진회장을 비롯하여 이부영 유광언 윤무한 김시우 고성광 이희원 임혁백 김삼웅 등 모두가 감개에 젖었다. 이구동성으로 “이 자리는 죽음의 현장일 수 없다”는데 의견이 일치했다. 유일한 목격자라는 김용환은 끝내 진상을 불지 않았으며 담당검사도 고인이 되었고 따로 양심선언자도 나타나지 않아 미제(未濟)사건이 되었다. 필자는 항의했다. 명색이 조사위원회라면 증거와 증인을 못 찾았을 때 심증(心證)은 뚜렷하다고 발표해야 하는데 관료들이 항용 쓰는 수법으로 “엄정 조사했으나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발표한 것은 진실접근을 기피한 것이 아닐까. 지금까지 장준하 죽음의 현장으로 알려진 포천군이동면 약사봉 절벽은 절대로 현장이 아니며 암살된 곳은 검안을 실시한 바위 근처 숲 속일 것으로 보고 있다. 장준하 죽음의 현장은 반드시 찾아내야만 한다.
첫댓글 국가인권위나 과거사 진상조사 위원회등은 국민들이 의심하거나 의아해하는 사건,사고들을 면밀히 조사해서 진상을 밣혀 내야 할 것입니다.좋은글 감사합니다.건필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