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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불교 철학 (1) : 석가모니부터 용수까지
부처의 근본 통찰과 석가 사후의 불교 사상 변형
2000년 동양 사상과 종교를
지탱해온 불교의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아주 어렵습니다.
특히 불교가 단순한 철학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종교 즉 절대자를 추구한다는 배경이 있기 때문에 ㅡ 이 말은 도를 닦는다 혹은 열반에 든다, 해탈한다 를 의미합니다. 이 작업은 큰 한계를 가집니다.
그러나 필자는 불교 탄생의 역사적인 배경 즉 인도 사회의 구조적인 특성과 또 그 때까지 인도를 지배한 브라만교, 힌두교 등과의 상황적인 관련성을 염두에 두고 고찰하여 중대한 철학적 요소를 고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유튜브 방송은 불교의 사상 즉 여러 경전들을 서양철학적인 면에서 고찰합니다. 그 결과 통상적인 불교 이해와는 많이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완전히 새로운 각도에서 불교의 발전사를 추적합니다. 즉 1, 원시 불교 시대의 사상 그리고 2, 반야경에서 시작된 대승 불교의 사상 그리고 다시 3, 용수의 중관론의 사상을 각각 (1) 부정 인식론적 해탈주의 (2) 부정 존재론적인 해탈주의 (3) 변증법적 해탈주의 라는 3단계 발전으로 봅니다. 그 후의 불교 운동 즉 밀교 등은 이런 큰 물결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작은 물결로 보고 다시 거기서 개념의 규정을 하겠습니다.
우선 초기 불교의 경전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초기 불교의 중요한 경전
초기 불교의 중요한 경전은 “상윳따 니까야”, “잡아함경” 그리고 “숫타니파타”등입니다. “숫타니파타”가 “상윳따 니까야”보다 더 오래된 경전입니다. 이것이 더 발전하여 “상윳따 니까야”로 됩니다.
잡아함경(雜阿含經)과 상윳따 니까야의 관계
상윳따 니까야 (Samyutta Nikaya), 상윳따 니까야는 팔리어 경전으로, 주제별로 묶인 경들의 모음집입니다.
잡아함경 (Samyuktagama), 잡아함경은 산스크리트어 아함경의 한역본으로, 상윳따 니까야와 대응되는 경전입니다. 이 들의 유사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두 경전은 초기 불교의 핵심 가르침을 담고 있으며, 내용상 상당 부분 일치합니다. 차이점은 언어가 다릅니다 즉 상윳따 니까야는 팔리어, 잡아함경은 한문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경전 구성, 잡아함경은 상윳따 니까야보다 경전의 수가 더 많습니다. 표현 방식, 일부 표현에서 차이가 발견되기도 합니다. (예, 무상과 유위에 대한 표현 방식). 불교 전통은 “숫타니파타”와 “상윳따 니까야”는 상좌부 불교 전통에서, 잡아함경은 대승 불교 전통에서 중시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잡아함경은 상윳따 니까야의 한역본으로서, 같은 내용을 담고 있지만 전승 방식과 표현 방식에서 차이를 보이는 경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잡아함경) 제12권 제299경 〈연기법경(緣起法經)〉에서 고타마 붓다는 연기법(緣起法)은 자신이나 다른 깨달은 이[如來]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며 법계(우주)에 본래부터 항상 존재하는[常住] 법칙[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인은 불교가 서양철학적으로 근본적으로 재구성될 수 있다고 봅니다. 완전한 강의는 다음으로 미루고 여기서는 일본 불교와 관련해서 간단히 다루어 보겠습니다.
우선 석가모니의 사상으로부터 시작을 하겠습니다.
1, 석가모니의 기본적인 통찰력
우선 저의 생각은 석가모니는 엄청난 사상을 가진 천재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여기서 석가모니를 종교적인 교주라기 보다는 철학가로 봅니다. 물론 이런 철학이 종교로 곧 연결이 되기는 합니다. 그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관념론이라는 것입니다. 관념론이란 여기서 주관적인 반성을 객관적인 존재보다 더 우위에 두는 하나의 습관입니다. 그를 천재적인 사상가로 보는 이유는 당시 즉 B C, 5세기경 인도는 브라만교와 우파니샤드 철학이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브라만교는 카스트 제도와 윤회설을 믿습니다. 이는 우파니샤드 철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석가는 이런 브라만교의 심원한 사상적인 전통과 사회적인 관습을 무시하고 독자적인 하나의 철학, 종교를 산출한 것입니다.
고대 인도 문헌인 우파니샤드에서는 윤회(輪回), (환생 또는 전생(轉生)이라고도 함)를 탄생, 죽음, 재생의 주기적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삼사라, (samsara)라고 불리는 이 순환에는 사후에 영혼 즉 (아트만)이 새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 포함됩니다. 이 윤회의 본질은 다음 생의 형태와 환경을 형성하는 행위의 결과인 업(業) 즉 karma의 영향을 받는다고 믿어집니다.
이런 엄청난 종교적, 형이상학적인 그리고 사회 제도적인 문명이 판을 치고 있는 기원적 560년 인도에서 브라만교와 우파니샤드 등의 브라만주의 철학에 대항하여 하나의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업적이라고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하나 지적하는 점은 카스트제도와 윤회설의 상호관계입니다. 브라만교 혹은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는 환생 이론과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개념은 전생(前生)에서의 행동 즉 (업보)가 다음 생에서의 카스트를 결정하며, 좋은 업보는 더 높은 카스트로, 나쁜 업보는 더 낮은 카스트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과거의 행동의 결과로 현재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틀을 제공하며, 또한 미래의 탄생을 개선하기 위해 현생에서 좋은 업을 쌓기 위해 노력하도록 장려합니다. 이는 달리 말하면 윤회설이 카스트제도를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도의 신분적 계급제도인 카스트제도는 오늘 날까지 인도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카스트 제도 하에서 천민 계층이나 중상인 계층의 사람들은 그들의 신분적인 제약을 탈출하기 위하여 노력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도에서는 고래로부터 수행이나 고행이 많았습니다. 석가모니와 불교에서 행해지는 수련 및 출가 그리고 금욕주의의 추구는 이런 인도 사회의 특유의 산물입니다. 보통은 인도의 종교들이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금욕과 고행을 단순히 순수한 사유나 명상 혹은 종교적인 해탈을 위해서 추구하는 영적인 풍습으로 보지만 저의 관점은 이런 겉보기에는 영적인, 수양적인 혹은 초월적인 노력이 실은 그 뿌리가 카스트 제도의 보완적인 장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교나 자이나교에서 행해지는 출가의 수련이 아주 혹독한 것으로 보지만 인도의 역사에서 찾아보면 아주 지독한 고행의 풍습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꼼짝하지 않고 오랜 시간 동안 앉아 있는 수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즉 불 속에 뛰어드는 수련의 경우도 있습니다. 필자가 유튜브로 방송한 “철학의 항해” 92, “헤겔의 역사철학 강의(1)”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브라만 계급은 타고난 종교적인 엘리트 계급이기에 그들은 범천(梵天)과의 합일. 소위 범아일체(梵我一體)가 쉽게 이루어 집니다. 헤겔에 의하면 바라문 계급은 특별한 수행을 하지 않고도. “자기 자신 안에 들어 박혀서. 모든 외관(外官)을 닫고 말없이 옴,(Om)이라고 부를 때에 그것이 바로 범(梵)이라고 한다”. 이에 비해 다른 카스트들은 신과의 합일 즉 범아일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엄청난 고행과 금욕이 필요합니다. 대승불교 역사에서 수행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학파는 유가행파(瑜伽行派)입니다. 특히 4세기 초 형성된 유가행파는 불교 요가 수행을 바탕으로 사상을 발전시켜 왔으며 이후 대승불교 수행법 전반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래서 독일의 철학자 헤겔, (Hegel)은 말합니다. “바라문에 속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갱생을 획득하려고 노력할 때에는 이것을 유가행자(瑜伽行者). 즉 요기(yogi)라고 부른다. 어떤 잉글란드인은 티벳의 달라이라마에게 가는 도중에서 본 유가행자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데. 그것에 의하면 그 수행자는 벌써 바라문의 힘을 얻기 위한 도정의. 제 2단계에까지 도달하여 있었다고 한다. 제 1단은 급제하여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12년동안 앉는다든가, 잠자는 것까지도 하지 않고 끝까지 계속하여 있음으로써 비로소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선채로 잠자는 습관이 붙을 때까지, 처음에는 자기의 신체를 입목(立木)에 단단하게 묶어 놓았던 것이다. 끝내는 그가 제2단계에 급제하였을 때에는, 12년 동안이나 두 손을 머리위에 끼고 있었기 때문에. 손톱이 거의 손등살속에 파들어 가고 있었다고 한다. 제 3단은 벌써 이제까지와 같은 방식으로 해도 안된다. 보통으로는 유가행자는 다섯 개의 불 사이에서 즉 사방으로 태우고 있는 불과 태양 사이에서 하루를 지내고. 다음에 3시간 45분 동안 그 불위를 뛰어다닌다. 이 행동을 목격한 영국인의 말에 의하면, 반 시간을 지내니 그 남자의 온 몸으로부터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여 점차로 기진맥진해져서 드디어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험까지 통과하면 그 사람은 끝으로 또 한번 산채로 파묻혀진다. 즉 선 채로 땅 속에 넣어져 완전히 흙이 덮여진다. 이와 같이 해서 3시간 45분이 지나면 또 파내어 지는데. 그 경우에 아직도 살고 있으면 그 사람은 비로소 바라문의 내적인 힘을 획득한 것으로 된다.” (역사철학 강의 1권 245쪽)
카스트 제도 하에서 신분의 상승을 위한 수단이 요가 수행은 실은 거의 불가능한 목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결국 불에 태워도 죽지 않으면 그 수행자 즉 유가행자(瑜伽行者)는 바라문이 되는 목적을 달성합니다.
이런 정도의 전제적인 지식을 가지고 불교의 사상과 수련 그리고 열반(涅槃) 등의 풍습에 대해서 알아 보겠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렇게 지독한 전통적인 종교와 사회 구조 속에서 인도를 뒤집을 새로운 철학과 종교을 만들고 아시아 일대를 2천년 이상 지배한 사상을 산출한 것은 위대한 업적이었습니다. 그런 이제부터 붓다의 사상이 어떻게 그런 혁명을 가져왔는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우선 석가 역시 당시 인도 사회를 지배한 브라만 교의 인물들과 브라만적인 세계관을 노골적으로 반대하지는 않고 있지만, 예를 들어 불경의 군데 군데에서 브라만 교의 제신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라문 즉 브라만교의 최상위 계층의 신분적인 특권을 거부합니다.
즉 석가의 사상은 브라만교를 부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해탈(解脫)의 논리가 아주 정치하여 나중에는 동남아와 중국, 한국 그리고 일본의 정신적인 풍토까지 아주 바꾸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을 증명하는 불교 경전의 텍스트 지역을 보겠습니다. 여기서 보는 텍스트는 불교의 가장 초기의 문서 그룹에 속하는 “숫타니파타”입니다. 이는 보통 소승불교에 속하는 상좌부 불교의 경전으로 인정된 문서입니다.
"날 때부터 천한 사람인 것은 아니고,
태생으로 바라문인 것도 아닙니다.
행위로 말미암아 천한 사람도 되고
행위로 말미암아 바라문도 되는 것이오”(숫타니파타 1장)
석가의 가르침은 위의 문서 지역에서 보는 것처럼 브라만교의 최상의 계급 즉 바라문 계급에 대한 당시의 통상적인 믿음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는 바라문을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 말미암아 이루어짐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라문은 인도 카스트제도에서 가장 높은 계급인 브라만 계급을 한자로 표기한 단어입니다. 이는 동시에 윤회설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살아서 올바른 행동을 하면 그는 바라문이 됩니다. 여기서 행동이란 실은 깨달음을 말합니다. 득도, 열반 혹은 해탈을 말합니다. 이처럼 석가의 사상은 개인의 신분적 차별도 지양하고 삶의 고통도 소멸시키는 2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불경의 수(數)는 아주 많아서 불교의 본질은 간단히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석가모니는 우선 인생을 간단히 생노병사(生老病死)라고 봅니다. 삶의 즐거움이나 가치보다는 고통을 본질로 봅니다. 그가 인도의 한 왕국의 왕자의 신분을 버리고 출가하여 수련 즉 요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어린 나이에 왕국 밖에 나왔다가 늙고 병들고 죽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서 인생의 모습을 비극적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궁전을 뛰쳐 나와 구도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특히 생노병사 문제는 윤회(輪回)의 사상과도 직결되어 있습니다. 수련과 명상을 한다고 그것이 바로 노화(老化)하고 병들고 죽는 것을 막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살다가 죽어도 다시 환생하여 똑같은 고생을 하기는 싫다는 것입니다.
당시 인도를 지배한 브라만 종교에서 최고의 경지는 나와 범천(梵天)의 일치였습니다. 이를 범아일체(梵我一體)라고 합니다. 이는 사람이 미망(迷妄)을 떨쳐내고 자신의 본질이 범(梵)임을 깨닫으면 된다. 곧 “내가 범(梵)이다, 내가 최고의 존재이다” 라는 인식에 도달하는 것이 종교의 목적이었습니다.
브라만교 혹은 우파니샤드 철학은 여기서 추측할 수 있듯이 실재론(實在論) 내지 형이상학을 전제로 합니다. 즉 브라만교는 나와 세상 그리고 신들마저 모두 실재하는 것으로 봅니다. 석가 역시 브라만 제도의 최상위 계층인 브라만 족이 아니라 그 다음의 계급인 크샤트리아 계급이었습니다. 브라만 족과 크샤트리아 족 사이에는 절대로 넘지 못할 경계선이 있습니다. 아직까지 인도는 이를 유지하고 있으니 2500년 전 인도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 금방 추측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부처가 항상 말하는 생노병사의 극복 문제는 실은 계급타파와 연결이 됩니다. 이런 생노병사와 계급제도를 극복하는 부처의 통찰력은 다름이 아니라 인식론적 반성입니다. 이는 영국의 경험적 회의주의를 알면 금방 이해가 됩니다. 혹은 후설의 현상학적인 환원 개념을 봐도 됩니다. 어쨌던 석가모니는 벌써 기원전 500년 전에 이런 인식론적 반성에 도달한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브라만교의 형이상학과 그런 종교적인 온갖 망상을 쳐 부시게 된 것이었습니다. 영국 경험주의자 버클리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그는 존재는 지각이다 즉 esse est percipi라는 모토를 내세워 상식적이고 형이상학적인 토대를 무너트렸습니다. 즉 우리는 세계의 실재성을 믿습니다. 가령 나도 있고 너도 있고 또 나무도 있고 꽃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각종의 존재들은 변하고 생성 및 변화, 소멸의 과정을 밟아 사라지기는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실체 즉 substance 라는 개념입니다. 실체 개념의 부정은 버클리에게서 뿐만 아니라 후설과 부처에 있어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나 밖에, 사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를 부처는 다음과 같이 나타냅니다. 그는 주로 물질과 신체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불교의 초기의 가르침인 초전법륜경 (初轉法輪經) 에 의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 처음으로 설법하신 경전으로,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를 핵심 내용으로 담고 있습니다. 이 경전은 불교의 근본 교리를 제시하며, 특히 고통의 원인과 소멸, 그리고 그에 대한 극복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원문은 팔리어로 전해지며, 다양한 번역본이 존재합니다. 본문을 보겠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색(것, 물질, 몸)은 내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이 색이 나라면 이 색에 질병이 들 수가 없고 이 색에 대하여 ‘나의 색은 이렇게 되라. 나의 색은 이렇게 되지 말라.’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색은 내가 아니므로 수행승들이여, 이 색이 질병이 들 수가 있고 이 색에 대하여 ‘나의 색은 이렇게 되라. 나의 색은 이렇게 되지 말라.’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가르침의 바퀴를 굴림에 대한 이야기, 율장대품 전재성님역)
색(色) 이란 것, 물질, 몸 등을 말합니다. “것” 역시 영어로 어떤 것, something 혹은 그것, it 등을 말합니다. 위의 인용문에서 부처는 나의 몸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지시합니다. 보통은 내 몸은 나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물질이나 신체 등은 내가 아닙니다. 질병이 드는 것도 내가 아니라 나의 신체입니다. 나의 존재는 데카르트의 생각처럼 생각 뿐입니다. 혹은 선험적인 통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의 말처럼 내 몸과 나는 다릅니다. 만약 나와 나의 몸이 같다면 즉 정신과 육체가 같다면 육체는 병들지도 못합니다. 병 역시 육체와 물질의 현상입니다. 정신 즉 나는 병들지가 않습니다. 물질인 육체가 병에 걸리는 것입니다. 또 나와 나의 몸이 같다면 즉 정신과 육체가 같다면 색 혹은 몸은 정신이 몸에 대하여 하는 명령 즉 이렇게 되어라 라고 하는 나의 말을 듣고 그대로 될 것입니다. 정신과 육체가 다르기 때문에 “내 몸아, 병들어라” 라는 말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내게 병이 생기는 것이 내 마음대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 혹은 전쟁터에서 나의 목을 베는 것이 내가 아니라 적이라는 사실 등 일상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에서 내 몸이 내가 아니라는 것 혹은 내 몸이 진짜로 내 몸이 아니라 양자는 본질적으로 다른 실체라는 것이 알려집니다.
병든 몸은 몸의 본질이 정신이 아니라 물질이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줍니다.
몸은 이처럼 병들고 썩고 나중에는 부패되어 분해됩니다. 이는 분명 나 곧 자아(自我)가 아닙니다. 석가모니는 원래 궁중의 왕자였으나 인간이 지닌 이런 약점 곧 신체의 본성을 직관한 후에는 도저히 그대로 살 수가 없어서 출가하여 힘든 수련과 극기 그리고 금욕주의의 고난을 통하여 색비아라는 간단하지만 극히 극적인 인식에 도달하고 불교를 세상에 내 놓은 것입니다.
물론 내 몸을 내 마음대로 이리 저리 움직일 수는 있습니다. 본문을 보겠습니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는 몸과 자아는 하나가 아니고 둘도 아니다 라는 변증법적인 사상도 부여줍니다.
“그러므로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색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그 모든 색은 이와 같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니고 이것이 나의 자아가 아니다' 라고 올바른 지혜로서 관찰해야 한다.”
(다섯 명의 경-無我相經, 상윳따니까야 22,59, 전재성역)
내 몸이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면 몸의 객관성과 실체성 역시 사라집니다. 그렇다면 나의 육체는 무엇일까요? 내가 아닌 것 나의 대상으로서의 물질 혹은 육체는 이제는 자립적이고 객관적인 실체가 아니라 나의 의식과 감각에 의존되어 있는 하나의 부대적인 현상입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나의 몸이 무슨 환상이나 착각,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수행과 명상에서는 이런 것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즉 수행의 과정을 통해서 이런 인식이 정립됩니다.
상윳따니까야의 다른 부분에는 물질 및 인간의 육체(肉體)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습니다. 즉 인간의 감각을 고찰합니다.
“주로 여섯 가지 감각 기관 또는 접촉의 기반인 내적 감각 기반 즉 (눈, 귀, 코, 혀, 몸, 마음)과 이에 대응하는 여섯 가지 감각 대상인 외적 감각 기반 즉 (시각적 형태, 소리, 냄새, 맛, 촉각적 대상, 마음의 대상) 및 이 내적과 외적 감각 기반의 각 쌍과 관련하여 생겨나는 의식에 대해 다룹니다.
여기서 보면 외적 감각 즉 물질의 속성과 내적 감각 즉 보통은 감각기관 모두가 6종의 세트를 이루는 총 12 가지의 감각의 내·외부 기반을 열거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 모두 공허한 것들이고 무상(無常)한 것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석가의 진리 기준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나”입니다. 데카르트와 같습니다. 그래서 필자는 불교의 1단계를 위에서 말한 것처럼 (1) 부정 인식론적 해탈주의 라고 한 것입니다.
“부정 인식론적 해탈주의”는 “생각하는 정신” 혹은 “생각하는 자아” 만을 유일한 실체로 인정한 데카르트의 생각과 일치합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데카르트의 사유는 생각하는 자아 혹은 생각하는 나는 존재한다 다시 말해서 생각하는 자아는 그 실체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 외의 다른 것들 즉 보이는 것들이나 신체나 혹은 고래로부터 내려온 각종 철학이나 이론과 지식 등은 다 가짜라고 말하기는 어려우나 하여튼 그 존재가 나에게는 불확실합니다. 그들의 현상은 다 의심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역시 생각하는 나 혹은 자아(自我)는 인정했습니다. 즉 석가모니는 항상 몸이 내가 아니다 혹은 물질이 내가 아니다 라는 인식을 그의 세계관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몸 혹은 물질을 그는 산스크리트어로는 루파, Rupa 한자로는 색(色)이라는 단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보통은 “나”란 존재는 나의 신체를 중심으로 정립됩니다. 그러나, 아래에 다시 말하겠지만, 데카르트도 신체를 부정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다시 양자를 결합시키기 위해서 노력은 합니다.
석가의 경우 열반이란 결국 자아를 신체에서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색비아, 오온비아를 알고 거기에 맞추어 수련을 하면 내세(來世)에서는 몸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런 구절이 잡아합경에 여러 번 나옵니다. 예를 들어 13권 315장에는 “나의 생은 이미 다하였고 범행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은 이미 다 마쳐 후세에는 몸을 받지 않는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서양철학이라면 이런 경우를 영적인 축복이라고 하겠지만 정신 혹은 영혼 개념이 확립이 안된 인도철학에서는 이를 그냥 열반이라고 한 것입니다. 즉 자아가 물질에서 탈출하여 더 이상은 자아와 물질의 재결합 즉 윤회의 메커니즘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 감각 기반의 무상한 본질과 이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 해탈로 이어진다는 설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감각 기반과 의식이 결합하여 생기는 감각은 세 가지 종류로 나뉩니다, 즉 즐거운 감각, 고통스러운 감각 그리고 무감각한 감각입니다. 이 중 어느 것도 영원하지 않으며, 각각은 갈망의 원인이 되며, 이는 모든 고통의 근원입니다. 열반에 대한 간결하지만 명확한 설명은 많은 경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한 윗빠사나 명상법에 대한 실용적인 지침도 있습니다.
첫 두 경전에서 부처님은 여섯 내부 감각 기반과 여섯 외부 감각 기반이 무상한 본성을 지니고 있으며, 무상하기 때문에 진정한 고통이며 자아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비구들아, 그들의 진정한 본성을 깨달은 너희는 이 열두 감각 기반을 ‘이것은 내 것’, ‘이것은 나’, ‘이것은 내 자아’라고 여기지 말라.
you should not regard these twelve sense bases as ‘This is mine’, ‘This is I’, ‘This is my self’.
그것들을 꾸준히, 끊임없이 관찰하라. 그러면 그 진정한 본성에 대한 비파사나 통찰이 생길 것이다." 부처님은 계속해서 열두 감각의 진정한 본성에 대한 통찰이 그들에 대한 무욕과 무상함을 일으킨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에 대한 무상함을 느끼면 갈망과 집착이 사라지며, 그리하여 진리의 길과 열반을 성취합니다.
이런 주장을 좀 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최신의 뇌과학의 한 가지 사례를 보겠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근대 철학의 시조 데카르트는 신체 역시 환상일 수 있다는 사상을 그의 제1철학에 대한 성찰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눈, 머리, 손 등등은 가상(假想)일 수 있다. (첫 번째 명상)
자신의 머리나 손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내 몸을 의심할 수 있을까요? 내 손과 발이 환상적일 수 있을까요?
어떻게 데카르트는 자신의 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요? 이것은 절대적인 의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필자는 데카르트가 자신의 신체를 불신하는 것은 소위 "환상 사지" 감각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글에서 "환상 사지" , (phantom limb)를 언급했습니다. 참고로 이 현상은 최근 “뇌과학” (腦科學 , brain science) 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본문을 보겠습니다.
“하지만 사지 절단 수술을 받은 사람은 가끔 “없어진 팔·다리의 통증”을 느낀다고 들었다”. (6번째 명상)
“유령 팔다리” 혹은 “환상 사지 현상”은 절단되거나 없어진 팔다리가 여전히 붙어 있다고 느끼는 감각입니다. 이 증세를 앓는 사람들 중 상당한 비율은 고통스러운 유령 팔다리 감각을 경험합니다.
이 관점에서 데카르트의 “자신의 몸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라는 가설이 이해될 것입니다. 뇌(腦)과학에 의하면 우리의 뇌 속에 유령이 있다고 합니다. Phantoms in the brain.
이런 측면에서 부처의 몸에 대한 불신과 부정의 관념은 이해가 충분히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불교의 중요한 구절인 색즉시공(色卽是空)의 색(色)자 역시 단순히 물질을 말한다기 보다는 신체를 말한다고 봅니다. 석가의 색비아론 즉 나의 몸이 내가 아니다 라는 사상을 나중에 대승불교에서는 무아론(無我論)이라고 일반화합니다. 그러나 무아(無我)란 내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혹은 “내 몸이 없다” 혹은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다” 라는 사상을 말합니다. 비아(非我)에서 무아(無我)로의 변화가 소위 소승불교에서 대승불교로의 발전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필자의 용어로 색비아론(色非我論)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색비아론(色非我論)은 “신체는 내가 아니다” 라는 사상입니다. 이는 또 오온비아론(五蘊非我論)으로 나타납니다. 오온이 내가 아니라는 사상입니다.
오온(五蘊)은 불교 용어로, 인간 존재와 만물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 즉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을 의미합니다. 즉 오온은 색을 포함합니다. 이들을 각각 색온(色蘊: 육체, 물질) · 수온(受蘊: 지각, 느낌) · 상온(想蘊: 표상, 생각) · 행온(行蘊: 욕구, 의지) · 식온(識蘊: 마음, 의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열두가지의 감각 기반을 제대로 통찰한다면 그간 허깨비처럼 날뛰던 물질이나 욕망의 화재(火災)는 진화되고 갈망과 집착이 사라지며, 그리하여 진리의 길과 열반을 성취합니다. 이는 데카르트의 환상사지 경우에서 보면 곧장 납득이 됩니다. 그런데 환상사지는 고통을 수반하는 데 그 때 보이는 사지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고통을 느끼는 것이 문제입니다. 뇌과학의 원로 라마 찬드란 박사는 복잡한 방법을 통해서 환상사지의 고통을 일부 줄인 적이 있습니다. 현대 뇌과학이나 신경과학에서도 환상사지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수련이나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 등이 그런 뇌과학의 연구에 비교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브라만교에 대한 석가의 대응
위에서 우리는 석가(釋迦)의 철학적인 통찰을 간단히 보았습니다. 그의 입장은 외부적 세계의 부정적인 견해였습니다. 이런 사상은 후일에 색즉시공(色卽是空)으로 공식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더 살필 곳은 석가 당시 주류였던 브라만교 혹은 힌두교와의 연관성 및 이들 사상의 변형입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브라만교의 최고는 범아일체입니다. 다음의 구절들을 보겠습니다.
해탈은 생노병사를 벗어나는 길이다. 『불본행집경』22권
그대들은 사랑하는 친족과 세상 낙을 버리고
고행을 하여 천상에 나고자 하니
이렇게 해서 승천한다고 하나
미래에 도로 지옥에 들어가는 줄 모르네.
『불본행집경』 20권
불교 생성의 가장 초기의 경전인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에서 우선 해탈(解脫)의 의미가 뚜렷이 밝혀져 있습니다. 위의 본문 구절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해탈은 생노병사를 벗어나는 길입니다. 여기서 생노병사(生老病死)란 그냥 고통과 좌절 등 인생의 번뇌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또한 해탈은 윤회(輪回)을 벗어난다는 말입니다. 즉 해탈은 생노병사를 벗어나고 윤회를 벗어나는 길입니다.
그러나 생노병사의 해탈의 방법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세상이나 심지어는 나의 육체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입니다. 이들은 나의 환상이나 착각에 불과합니다. 이게 결국 불교 성찰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뒤에서 나타날 대승불교, 유식불교, 선불교 그리고 밀교 등 모든 불가(佛家)의 변형 및 발전이 숨어 있습니다. 이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 전통적인, 브라만교적인 천국의 이미지와 그 방법론에 대한 석가의 비판이 필요합니다. 우선 하나 중요한 항목은 석가의 경우 인식론적인 반성이 단순히 지식과 이론에 대한 학문적인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생노병사 즉 고통과 슬픔 그리고 절망 등 소위 사바세계(娑婆世界)의 삶과 직결된다는 사실입니다.
기존의 종교 즉 브라만교나 이에 연결된 각종의 집단들이 숲 속으로 들어가서 굶고 맹수의 위협을 받아서 도망치고 때로 죽음을 당하면서 고난의 해탈을 추구하지만 그들은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석가 역시 엄청난 굶주림으로 몸이 말라서 뼈만 남은 정도의 극단적인 금욕주의 고행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위의 불본행집경 20권에 나오는 구절 즉 고행을 하여 천상에서 태어나고 승천한다고 해도 석가모니의 가르침 즉 색비아론(色無我論) 그리고 오온비아론(五蘊非我論)을 모르면 그는 미래에 도로 지옥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브라만교는 다신교였습니다. 그래서 신들도 많고 이들이 천상을 각각 지배한다고 봅니다. 불교는 이를 토대로 하여 3계 28층의 하늘 세계를 구성하였습니다. 3계란 색계(色界), 욕계(欲界), 무색계(無色界)입니다. 고행을 하여 천상에 올라도 다시 지옥에 떨어지는 이유는 그들이 가진 욕구 때문입니다. 욕구란 것은 물질과 육체를 전제로 합니다. 즉 육체없이 욕구도 없습니다. 따라서 천상에 오르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그들은 다시 지옥에 떨어진다는 논리입니다. 그런 사정은 다음의 본문 구절에서 더 잘 나타납니다.
이 모든 중생들은 목숨을 마칠 때 큰 공포를 보기 때문에 뒷세상에 좋은 데 나기를 구한다. 그러나 나기를 구하므로 다시 그 무상함을 떠나지 못한다. 불본행집경 20권
중생들은 질병과 죽은의 공포를 느낍니다. 그래서 그들은 내세(來世)에서는 좋은 곳에서 태어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욕구 때문에 그들은 무상(無常) 즉 색(色)을 추구하는 욕망의 헛됨을 떠날 수 없습니다. 색(色) 자체의 본질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통하여 불교는 브라만교를 극복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최고의 행복 즉 범아일체의 교리도 부정합니다. 즉 우주 최고의 존재인 범천과 하나가 되고 싶어 하는 욕구도 그것이 욕구인 만큼 열반(涅槃)으로 들어 갈 수는 없습니다.
사실 석가가 알려주는 육체의 무상(無常)과 무아(無我) 교설은 현대 철학 즉 에드문트 후설의 지향성 이론으로 잘 설명이 됩니다. 즉 의식은 항상 무엇에 대한 의식입니다. 의식과 그 대상은 상호 작용 및 상호 의존 관계에 있습니다. 따라서 대상이 없으면 의식도 없습니다. 이런 의식의 구조는 보통은 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대상은 의식에 대해서 초월적으로 나타납니다. 즉 대상은 나에 대한 타자로 정립이 됩니다. 석가모니의 교설도 이런 초월적인 대상 특히 욕망의 대상을 욕망 자체로부터 분리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욕망의 대상의 뿌리를 알지 못하고 그 욕망을 나의 욕망으로 인식합니다. 인간의 자아는 이런 욕망의 자아와 비욕망의 자아 즉 순수한 자아의 결합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불교에서의 수련이란 이런 경험적 자아와 순수한 자아를 구별하고 전자를 후자에 종속시키려는 기나긴 훈련의 여정입니다. 여기에 해탈과 성불의 본질이 놓여 있습니다.
부파 불교 시대
상좌부와 대중부의 분열
싯다르타가 입멸한 후 100년이 지나자 계율(戒律) 해석을 놓고 전통적 보수파와 진보적 자유파가 대립되어 두 개의 부파(部派)로 갈라졌습니다. 전통적 보수파를 상좌부(上座部 · Theravada · 테라바다)라 하였고 진보적 자유파를 대중부(大衆部 · Mahasamghika · 마하상기카)라 하였습니다. 바이샬리(Vaisali · 毘舍離 · 비사리)에서 비구계(比丘戒)가 지켜야 하는 10가지 계율 즉 10사(事)를 두고 합법(合法)을 주장하는 측과 비법(非法)이라고 반대하는 측이 대립되어 분열되었습니다. 이를 근본 2부의 분열이라고 합니다. 비법을 주장하는 측이 700명의 비구(比丘)즉 남자 승려를 모아 집회를 열었는데 이것을 제2회 결집이라 합니다.
비구계(比丘戒)의 10가지 사항은 비구, 남자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 중 중요한 10가지입니다. 이 10가지 사항은 비구가 지켜야 할 기본적인 덕목과 금지 사항을 포함하며, 불교 교단의 질서 유지와 수행자의 바른 수행을 위해 매우 중요합니다.
비구계(比丘戒) 10사(事)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1, 살생(殺生)을 하지 말라: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지 말아야 한다.
2, 도둑질(偸盜)을 하지 말라: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허락 없이 가지지 말아야 한다. 3, 사음(邪婬)을 하지 말라: 음란하거나 부정한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 등입니다.
그런데 필자는 대승불교나 소승불교는 원리적으로 똑 같다고 봅니다. 즉 대승불교가 소승불교에서 나왔다는 말입니다. 이는 마치 개신교가 천주교에서 나왔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둘 다 성경을 기초로 합니다.
마찬가지로 소승이나 대승이나 모두 석가모니의 가르침 즉 색비아론(色無我論)에서 출발을 합니다.
즉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초기의 불교 즉 소승불교의 경전인 상윳따니까야에서 나온 색과 나의 관련에서 보는 논리가 바로 불교의 근본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말한 색비아론(色非我論)과 오온비아론(五蘊非我論)은 물질이나 신체가 내가 아니다, 감각기관이나 감각적 사물들이 내가 아니다 라는 논리입니다. 단 차이점은 소승은 여기에 머물러 있는 반면 대승은 이를 무아(無我)설로 변혁을 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자는 위에서 이를 (부정적) 인식론에서 (부정적) 존재론으로의 발전이라고 한 것입니다.
오온비아론(五蘊非我論)은 색비아론 (色非我論) 사상이 더 발전한 것입니다. 이런 용어는 다른 데서 쓰지 않습니다. 안재오 만이 씁니다.
오온(五蘊)은 불교 용어로, 인간 존재와 만물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 즉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을 의미합니다. 이 다섯 가지는 변화하고 생멸하는 모든 것을 나타내며, 고정된 실체가 아닌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임을 보여줍니다.
연기론(緣起論)
불교의 진리는 위에서 색비아론(色非我論)과 오온비아론(五蘊非我論)외에 연기론이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색비아론(色非我論)과 오온비아론(五蘊非我論)을 그냥 무아(無我)설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즉 대승불교에서는 아공(我空)설이라고도 불립니다.
이런 주관적인 반(反) 형이상학주의 즉 내가 없다 혹은 영혼이 없다는 사상 외에 다른 중요한 것이 연기설입니다.
연기설이란 쉽게 말해서 인과율(因果律)입니다. 물론 이것은 자연과학적인 측면보다는 종교적인, 구원론적인 측면에서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우선 초기 불교 경전에서 연기설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즉 그냥 연기설과 12연기설입니다. 우선 그냥 연기설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연기설은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남(uppada)으로써 저것이 일어나고, 이것이 존재하지 않을 때 저것이 존재하지 않고, 이것이 멸함(nirodha)으로써 저것이 멸한다. (상윳따 니까야)
연기설은 이처럼 사물들간의 상호의존을 말합니다. 즉 A가 있으면 B가 있다 또 A가 없으면 B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것, 저것이란 단순한 자연적인 현상을 말하기 보다는 위에서 언급한 종교적인 문제 즉 윤회와 카스트제도로부터의 이탈을 지향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숫타니파타 1장에서 우리는 이것과 저것의 의미를 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천한 행위를 하면 천한 사람이 되고 선한 행위를 하면 바라문이 됩니다. 물론 여기서 선한 행위란 윤리적인 행위가 아니라 종교적인 행위 즉 깨달음입니다.
행위로 말미암아 천한 사람도 되고
행위로 말미암아 바라문도 되는 것이오”(숫타니파타 1장)
행위로 말미암아 바라문이 됩니다. 물론 석가는 바라문이 되기 보다는 아라한(阿羅漢) 또는 보살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라한이란 불교에서는 수행 끝에 번뇌가 소멸되어 더이상 윤회하지 않는 경지에 도달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수행을 하면 아라한이 되고 열반의 경지에 들어갑니다.
석가모니는 이런 수행의 방법을 팔정도(八正道) 라고 했습니다. 팔정도(八正道)는 불교에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여덟 가지 바른 길을 의미합니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며, 열반에 도달하기 위한 실천 방법으로 제시됩니다. 팔정도에는 팔정도의 여덟 구성요소 또는 여덟 개의 길은 다음과 같습니다.
정견(正見): 바르게 보기
정사유(正思惟) · 정사(正思): 바르게 생각하기
정어(正語): 바르게 말하기
정업(正業): 바르게 행동하기
정명(正命): 바르게 생활하기
정정진(正精進) · 정근(正勤): 바르게 정진하기
정념(正念): 바르게 깨어 있기
정정(正定): 바르게 삼매(집중)하기
여기서 주요한 포인트는 수행을 하면 열반에 든다는 것입니다. 즉 원인-결과의 연관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는 연기설(緣起說) 역시 이런 인과관계의 일종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욕구와 탐욕이 사라지면 생명 역시 사라집니다. 이 법칙은 부처가 발명한 것이 아닙니다. 부처 이전부터 존재하는 우주의 법칙입니다.
고타마 붓다는 《잡아함경》 제12권 제299경 〈연기법경(緣起法經)〉에서 연기법은 자신이나 다른 깨달은 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며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고 출현하지 않음에 관계없이 우주(법계)에 본래부터 존재하는 보편 법칙, 즉 우주적인 법칙이며, 자신은 단지 이 우주적인 법칙을 완전히 깨달은[等正覺] 후에 그것을 세상 사람들을 위해 12연기설의 형태로 세상에 드러낸 것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2연기설의 내용은 뒤에서 다시 보겠습니다.
연기설과 색비아론(色非我論)과 오온비아론(五蘊非我論)의 관계를 한 번 보겠습니다. 연기설은 중생들이 부정적 인식론적 해탈설을 알지 못하고 자꾸 미망에 빠져 윤회의 굴레에 빠져드는 원인을 설명합니다.
색비아론(色非我論)과 오온비아론(五蘊非我論)을 알고 여기서 벗어나기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하는 구도자의 길을 가지 못하는 원인이 무명(無明)이고 여기서 그 다음의 과정이 일어나는 필연적인 과정을 설명하는 이론이 연기설입니다. 위에서 말한 12연기설이 바로 그것입니다. 따라서 연기설의 핵심은 중생들 즉 열반의 길을 가지 못하고 윤회의 굴레에 빠져서 이 세상에서 욕망을 따라 살다가 병들고 죽는 삶의 과정을 설명하는 이론입니다.
인도의 초기 대승 불교
대승 불교의 성립
대승 불교가 성립된 것은 기원전 1세기경이나 이 움직임의 태동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대승 불교의 대두로 인하여 이전의 6세기 간에 걸친 불교를 통칭하여 소승 불교라 불러 대승 불교와 함께 오늘날까지 불교의 성격을 규정하는 2대(二大) 유파로 간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승 불교의 대두로 소승 불교는 쇠퇴 · 소멸의 길을 달린 것이 아니라 소승 불교의 부파들은 서로 정통을 주장하며 계속 부파적 발전을 하여, 스리랑카와 같은 남방 국가로도 퍼져갔습니다.
소승에 대해 대립적 자세를 취하며 일어난 대승 불교는 종래의 관점을 혁신하였습니다. 수행관(修行觀)에 있어서 자기 완성을 주장하기보다 대중의 구원을 우선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대승불교의 기본 교재는 반야경(般若經)입니다. 대승불교는 대자대비(大慈大悲) 즉 타인이나 다른 생명에 대한 평등과 이타심을 의미하는 불교교리를 말합니다. 대승불교는 열반의 상태에 안주해 버리는 아라한(阿羅漢 · Arhan) 대신에 보살(菩薩 · Bodhisattva)이라는 새로운 이상적 인간상을 제시하였고 이미 열반에 들어간 역사적 인물로서의 붓다 대신에 법신(法身) · 보신(報身) · 응신(應身) 또는 화신(化身)의 삼신설(三身說)과 같은 초월적 불신관(佛身觀)을 내세웠습니다.
삼신(三身)은 부처를 법신, 보신, 화신 등 세 가지 종류로 표현한 것입니다.
법신은 진리를 인격화한 진리불입니다. 석가모니 불(佛)을 말합니다. 응신(應身) 혹은 화신(化身)은 대상에 따라 적절하게 변화하는 불신입니다
보신은 바라밀의 수행에 대한 과보(果報)로 얻어진 이상적인 부처입니다.
대자대비와 삼신설 등은 대승불교의 근본 교리인 “부정 존재론적 해탈주의”에서 유래합니다.
대승 경전의 성립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에 이르는 사이 대승 운동의 결실로 수많은 대승 경전들이 출현했습니다. 초기 대승 경전 가운데 중요한 것들은 《반야경(般若經)》·《유마경(維摩經)》·《법화경(法華經)》·《아미타경(阿彌陀經)》· 《십지경(十地經)》 등입니다. 이 가운데 《반야경》은 대승 경전을 대표하는 경전으로, 이 경전에 실린 공 사상(空思想)은 대승 불교의 기본적 교리로서 불교 사상의 근본 사조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법화경(法華經)》은 중국에서 천태종의 경전으로 자리매김 됩니다.
반야경 즉 반야바라밀다경의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는 바로 반야바라밀다로서 이는 대승불교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지혜 즉 (반야)를 통해 깨달음의 경지 곧 (피안)에 이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야경의 중요한 사상은 부처의 기본적인 가르침 즉 색비아론, 오온비아론 무아설과 무색론으로 변합니다. 서양철학적으로 말해서 인식론이 존재론으로 전향한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석가는 데카르트에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생각하는 자아 중심의 철학자입니다. 석가는 자아의 본질이 – 서양철학적으로 볼 때는 정신인데 따라서 이를 물질과 동일시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존재론적으로 전향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식론적 비아론이 존재론적인 무아설로 바뀐 것입니다. 이를 부처가 보았다면 반대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여간 저는 여기서 불교의 존재론적인 전향이라는 말을 씁니다. 석가모니는 간단히 말해서 물질이 나와 다르다 혹은 신체가 나와 다르다 등의 인식을 통해서 신체적인 자아를 부정하고 또 그런 것이 고통의 해방을 뜻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반야경은 아예 물질도 공허하다, 나도 공허하다 라고 담대히 주장을 합니다. 석가라면 후자는 분명 반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문장의 주어로서“나”는 긍정합니다. 즉 “내가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자아 혹은 주관에 대한 2중적인 요소가 나타났습니다.
즉 내용으로의 나는 부정하고 형식으로서의 나는 긍정합니다. 예를 들어 나의 몸이나 감각은 부정합니다. 위에서 말한 색비아론입니다.
여기서 나는 정신과 거의 같은 뜻입니다. 초기 불교 경전에서도 이미 공부한 것처럼 색비아론은 “신체는 내가 아니다” 라는 사상이었습니다. 이것이 붓다 사상의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혹은 “오온은 내가 아니다” 라는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초기 불교의 문서인 잡아함경에는 물질이 색비아론 즉 “물질이 내가 아니다” 라는 사상과 그 반대 즉 물질이 내가 아닌 것이 아니다 즉 물질이 나라는 말도 동시에 성립하고 또 더 나아가서 둘이 함께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라는 말이 나옵니다. 본문을 인용합니다. 잡아함경 47권, 1266. 천타경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천타가 대답하였다.
“나는 눈과 안식과 또 물질이 없어지는 것임을 보고 없어지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눈과 안식과 또 물질은 나가 아니요, 나와 다른 것도 아니며, 둘이 함께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나란 실은 정신으로 치환하면 석가의 사상은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으로 규정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꾸 정신 대신에 그냥 나, 자아가 등장합니다. 어쨌든 자아와 물질의 관계는 단순히 다른 것을 떠나서 양자는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동시에 양자는 서로 다르지 않다는 변증법적인 관계로 규정이 됩니다. 자아와 물체가 다르지 않다 라고 한 것은 일상적인 경험의 세계 때문입니다. 일상적인 생활에서 사람은 항상 “정신과 육체의 통일” 이라는 전제하에 움직입니다.
또 위의 인용문에서 물질과 자아가 함께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석가모니가 이런 예를 다른 데서 들고 있기에 이해가 금방 됩니다, 즉 나의 팔이 떨어져 나가도 나는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머리가 떨어져 나가면 나도 떨어져 나갑니다, 즉 죽습니다. 이런 면에서 나와 육체는 다르지 않고 또 그렇다고 해도 둘이 같이 있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한 석가 모니 사유의 최초의 발견인, 즉 상윳따니까야에서 발견된 색비아론 혹은 오온비아론은 나중에 즉 잡아함경 속에서는 변증법적인 관계로 발전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또한 몇 백년 후 용수의 중론 사상으로 정착이 됩니다. 중론이란 말 역시 잡아함경에서 석가모니가 쓴 개념입니다.
그런데 반야경에서는 오온이 내가 아니가 색이 내가 아니다 라는
사상이 더욱 과격하게 발전하여 오온이 공이다, 색이 공이다 그리고 나도 공이다 는 식으로 발전이 됩니다. 이 때 공은 완전히 없다 는 것이 아니라 역시 감성과 이성의 변증법적인 관계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반야심경의 주제인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그런식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반야경과 대승불교
반야경도 여러 가지 버전이 있습니다. 그 중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반야바라밀다경 이며 다른 이름은 “팔천송반야경”이라고도 합니다. 금강경도 반야경 계열의 한 판본입니다. 반야심경은 반야경의 핵심만 짧게 뽑은 요약본입니다. 반야바라밀다는 ‘지혜의 완성’과 ‘지혜로써 피안에 도달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이 단어의 뜻을 아는 것이 반야경을 아는 데 핵심적인 무기가 됩니다. 우선 대승불교를 논의하겠습니다. 불교에서는 소승불교와 대승불교가 나뉘어지는 데 대승불교의 정의가 바로 반야경에서 나옵니다. 대승과 반야바라밀다 구절은 거의 같은 뜻입니다. 즉 반야바라밀다를 믿고 따르는 불교가 대승불교입니다. 그만큼 반야바라밀다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문을 보겠습니다.
이 말을 듣고 수보리 장로가 세존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반야바라밀다의 경계를 넘어 대승을 아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너는 절대 그러하지 않았느니라.” “수보리야, 너는 반야바라밀다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대승을 보여주고 있느니라.”(팔천송반야경, 전순환 번역 58쪽 이하 반야경으로 줄입니다.)
우리는 보통 대승불교란 나만의 수련과 그 결과인 해탈을 목표로 하는 개인적인 불교를 소승불교라고 하고 그게 아니라 중생 전체의 열반을 목표로 정진하는 불교를 대승불교라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통상적인 대승, 소승의 구분에 앞서서 반야경에 나오는 반야바라밀다 사상을 대승불교의 본질로 규정합니다. 그럼 우선 반야바라밀다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나옵니다. 그것은 위에서 이미 밝힌 바처럼 “지혜의 완성”과 ‘지혜로써 피안에 도달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낱말풀이를 지나 그 종교적, 철학적 의미를 보아야 합니다. 우선 이런 구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교시가야, 바로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다를 습득하고, 마음에 새기며, 낭송하고, 통달하며, 널리 퍼뜨리고, 가르치며, 보여주고, 선언하고, 되새길 선남자나 선여인에게도 끊임없이 논쟁이나 논박, 반박들이 생겨날 것이다. (반야경 96)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반야바라밀다가 비교적 짧은 문장 구절 혹은 주문이라는 것입니다. 주문이란 구절은 이 책의 뒤에 여러 번 나옵니다.
여기서 참고로 반야심경의 주문 구절 즉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반야경의 주문 구절이 이와 같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필자의 견해로는 그냥 “반야바라밀다”일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6바라밀”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6바라밀다는 보살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해야 할 여섯 가지 덕목, 즉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바라밀을 의미합니다. 이는 대승불교에서 특히 중요시하는 실천행입니다. 긴 수련의 과목과 과정을 뜻하는 6바라밀다와 달리 “반야바라밀다”는 낭송하고 통달하며, 널리 퍼뜨리고, 선언할 언어적 표현입니다, 즉 주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대승불교 혹은 반야바라밀다 불교가 쉽게 말하자면 종교의 전도 메시지와 같은 성격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마치 기독교에서 “예수 믿으면 천국간다” 와 같은 성격을 가진다는 점입니다. 석가모니의 불교는 깊은 성찰과 수련 위주의 힘든 종교였고 또 금욕을 통한 해탈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대승불교 혹은 반야바라밀다 불교는 이와 달리 대중성에 초점을 둡니다. 즉 반야바라밀다 하나만 있으면 만사형통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기이한 점은 석가모니의 철저한 금욕주의와 현세 부정의 윤리와는 달리 반야마라밀다를 널리 퍼뜨리고, 가르치며, 보여주고 선언하는 선남선녀는 현세에서의 댓가 즉 “현세의 공덕”도 얻게 된다는 점입니다.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교시가야, 누군가가 전장에서 칼이든 봉이든 돌덩이든 다른 그 어떤 것을 던져도 선남자와 선여인의 몸에는 맞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교시가야, 반야바라밀다는 위대한 주술이기 때문이니라.”(반야경 98)
더 나아가 반야바라밀다를 기록하여 책의 형태로 만들고 믿음에 믿음을 더하고 낭송하는 자들은 무려 21가지나 되는 복덕을 얻습니다. 복덕이 욕심이나 욕망의 목표인 것을 생각하면 반야바라밀다 불교는 석가모니의 불교 혹은 소위 소승불교와는 많이 다릅니다.
불교에서는 덕업을 쌓고 불심이 깊은 사람만이 죽어서 도솔천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반야경에서는 도솔천계에서 죽더라도 인간계에서 다시 태어날 것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계와 도솔천계에는 반야바라밀다가 널리 유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반야경 628) 석가모니가 말한 생노병사로 점철된 인간의 세계는 이제는 반야경 때문에 복락이 넘치는 곳이 되었습니다. 도솔천계에서 죽더라도 인간계에서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말은 인간계가 도솔천보다 더 낫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상은 앞에서 우리가 본 초기 불교의 염세주의와는 완전히 그 프레임이 바뀐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초기에는 해탈은 생노병사를 벗어나는 길이다 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낙을 버리고 고행을 하여 천상 즉 예를 들어 도솔천에서 나기를 바랬습니다. 세상에서 복덕을 받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난 사람들은 거의 다 죽어서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아니면 윤회를 통해서 짐승이나 벌레 등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대승불교란 불교의 대중화, 현실 긍정 그리고 어려운 염세주의적인 금욕주의와 이것의 해결로서의 열반이 아니라 주술적인 언어 하나로서 수행을 대신하고 그 안에서 삶을 즐기는 모양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서 불탑을 짓고 절의 온갖 화려한 장식들도 종종 등장합니다.
반야바라밀다와 공사상
이런 대승불교의 현실적인 모습을 떠나 이제는 그 이론적인 면을 살펴 보겠습니다. 이는 주로 법 즉 다르마, dharma에 관한 것들입니다. 이 부분을 필자는 부정 존재론적 해탈주의라고 규정한 바 있습니다. 즉 석가의 원래적 사유는 위에서 밝힌 것처럼 물질이나 감각이 내가 아니다 즉 색비아론 그리고 오온비아론이었습니다. 나를 나의 신체와 감각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일 이것이 수련이고 그 결실은 열반이었습니다. 이를 필자는 부정 인식론적 해탈주의 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면 이제는 반야공의 부정 존재론적 해탈주의를 한 번 보겠습니다.
이 분야의 유명한 학자 콘즈, (Edward Conze)는 그의 논문 “반야바라밀다의 존재론”The Ontology of the Prajnaparamita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부정과 공허함
Lamotte, Conze, Yin Shun과 같은 대부분의 현대 불교 학자들은 Sunyata (공허함, 허무함, 텅비어있음) 를 반야경 즉 Prajnaparamita 경전의 중심 주제로 보았습니다. Edward Conze 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위키백과)
이제 반야바라미타(Prajnaparamita)의 주된 가르침은 자존(自存)이 "공(空)"하다는 것입니다. 산스크리트어는 svabhava-sunya 입니다. (···) 대승불교 에서는 이를 법(法) 즉 다르마, (dharma)는 어떤 자존도 공 하다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즉, 다르마는 그 자체로 궁극적인 사실이 아니라 단지 상상되고 잘못 구분된 것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다르마는 각각 그 자체가 아닌 다른 것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약간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는 완전한 영지(gnosis)로 볼 때 다르마가 공과 동일한 자존을 드러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다르마는 자존 안에서 공 합니다.
반야바라밀다의 사상에 따르면 모든 것이 공 합니다. 공하다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부질없다 혹은 헛되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존재론적인 혹은 형아상학적인 부정이 나타납니다. 이는 불교 초기 즉 석가모니의 인식론적 관점을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불교학자 콘즈씨도 반야마라밀다의 존재론 이란 표현을 썼습니다. 그는 위의 인용문에서 자존이 공하다 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자존은 다른 사람들은 자성이라고도 번역합니다. 이 말을 조금 철학적으로 나타내자면 자기 동일성 즉 self-identity 혹은 self-sameness를 말합니다. 심리학에는 자아 정체성 이란 개념이 있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몰라서 헤매는 것이 아니라 진리 자체 혹은 객관적인 실체란 것이 도무지 없다는 세계관입니다. 불교계에서 그 대표적인 실체가 법과 자아입니다. 그래서 소위 이공설이란 것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조금 그런 주장의 배경을 보면 사정은 조금 다릅니다. 즉 반야마라밀다는 영원하고 불변적입니다. 즉 반야마라밀다 라는 주술외에 다른 기존의 법들이 자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반야마라밀다 역시 하나의 사상이고 법 즉 다르마입니다. 이런 구절이 무수히 나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람들은 반야바라밀다를 습득하고, 마음에 새기며, 낭송하고, 통달하며, 널리 퍼뜨리고, 가르치며, 보여주고, 선언하고, 되새겨야 합니다. 이런 반야바라밀다를 공하다, 부질없다, 쓸데 없다, 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는 이런 일을 잘하면 현세에서 복덕이 주어집니다. 따라서 법이 공하다는 말은 반야바라밀다 외의 법이 공하다 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거기다가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하는 반야심경의 핵심 구절도 이런 방식으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공의 말도 없다는 것이 아니라 부질없다, 쓸 데 없다는 의미입니다. 법은 팔정도, 사성제 혹은 6바라밀 등의 이론일 뿐만 아니라 계율 등도 포함합니다.
그런데 필자가 느끼는 법은 공하다 혹은 제법무상의 논변은 단순히 원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인 필요성이 결부되어 있습니다. 즉 석가모니때부터 이단 혹은 외도 세력이 많이 있었고 그들과 부딪히는 일이 많았습니다. 반야바라밀다 경이 생성된 A,D, 1세기 경에도 자연히 그런 일이 많았고 경전에도 여러 번 언급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법들이 공하다는 것은 본문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수보리야, 제법은 어떻게 하여 알려지지도 보이지도 않는 것일까? 수보보리야, 그것은 제법이 공한 것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제법은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이와 같이 하여 제법은 알려지지도 (못하고) 보이지도 않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이와 같이 제법을 반야바라밀다의 덕택으로 여래가 완전히 깨달은 것이니라. 수보리야, 또한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다는 공양을 받을 만하고 올바르고 완전하게 깨달은 여래들에게 이 세간을 바라보게 해주는 것이다. 물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감각·표상·의욕·사유도 이와 같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세간을) 바라보게 해주는 것이다. 수보리야, 실로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다는 공양을 받을 만하고 올바르고 완전하게 깨달은 여래들에게 이 세간을 바라보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반야경 326~327)
여기서 제법과 반야바라밀다의 관련이 드러나 있습니다. 특히 주목할 대목은
“이와 같이 제법을 반야바라밀다의 덕택으로 여래가 완전히 깨달은 것이니라”라는 부분입니다. 여래 즉 석가모니도 반야바라밀다의 덕택으로 제법을 완전히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즉 석가모니보다 반야바라밀다가 더 높다는 것입니다. 세간을 본다는 말은 세간 즉 세상이 공이다 즉 허무하다, 쓸데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달리 말하면 사람은 세간에 살면서도 이를 무시하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공이란 말은 변증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물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감각·표상·의욕·사유도 이와 같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세간을) 바라보게 해주는 것이다 는 구절을 한번 더 보겠습니다. 인간의 가장 핵심적인 기능인 감각, 표상, 의욕, 사유 등도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석가모니는 오온비아라고 했습니다. 5가지 감각 혹은 감각적인 구성물이 자아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역시 아주 심오하고 철학적인 말이라 보통의 상식으로는 납득이 안가지만 반성해보면 이해는 됩니다. 그래서 색즉시공 또는 일장춘몽과 같은 사상이 나온 것입니다. 하여간 감각과 감각이 주는 세상은 순간적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허무하고 또 허무하다 라는 구절이 나온 것입니다.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어머니 지금은 어디에 가 계신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런 여러 가지 경우들을 반야경은 물질에 자성이 없다 혹은 법에 자성이 없다 와 같은 표현으로 나타냈습니다. 특히 법의 문제는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반야의 사상과 주술에 대항하거나 경쟁하는 당시 불교의 여러 유파들의 이론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즉 위에서 말한 외도 역시 제법무상과 직결됩니다. 이런 사상은 당연히
보이지 않는 감각·표상·의욕·사유 등은 다른 말로 환상이라고도 합니다. 오온이 환상일뿐아니라 심지어는 열반도 환상이라고 합니다. 이는 석가모니의 사상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수보리 장로가 대답했다. “천자들이여, 나는 열반까지도 환영과 같고 꿈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데, 하물며 (그 어떤) 다른 법을 (언급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 꿈과 열반은 두 개의 것이 아니며, 두 개로 나누어 지지도 않습니다. (반야경 79)
이런 면에서 법이나 열반도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기도 않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열반은 무(無)도 아니고 유도 아닙니다. 이런 상태를 부정 존재론이라고 했습니다. 단 여기서 유란 자성을 가지는 존재를 말합니다. 따라서 반야바라밀다의 모순적인 표현들은 실은 모순이 아닙니다. 존재 혹은 유라는 말은 실은 자성을 가지는 존재를 말합니다.
공은 그저 자성이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즉 공이란 사물의 완전하 부정이 아니라 절반의 부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색즉시공처럼 물질이란 완전한 무가 아니라 그 자성이 없는 물질이다 달리 말하면 환상이다 와 같은 부정입니다. 환상이나 꿈도 완전히 무는 아니고 주관적인 착각과 같은 뜻을 지닙니다.
반야경의 공철학은 대승불교를 뒷받침하는 큰 무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인 조건이 반야바라밀다의 절대화라는 시스템은 약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공 혹은 무를 그대로 두지 않고 도리어 거기에 자성이 없다는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즉 공성은 무자성인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서양 존재론의 아버지인 파르메니데스는 없는 것은 없다 라고 못박음으로서 서양의 논리학과 형이상학을 정초하는 업적을 놓았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대승불교의 공 개념 무 개념 등은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물론 그런 과정에서 형식논리학은 지양되고 굳이 말하자면 변증법적인 논리를 밟게 됩니다. 그래서 공 역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단순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부질없다, 쓸 데 없다는 식으로 사용이 됩니다. 그래서 색즉시공의 사상이 탄생됩니다. 따라서 이런 구절이 나왔습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은 환영이고 저것은 감각이고, 이것은 환영이며 저것은 표상이고, (이것은 환영이며) 저것은 의욕이다 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감각·표상·의욕은 바로 환영이고, 환영은 바로 감각·표상·의욕입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은 환영이고 저것은 사유이다 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사유는 환영이고, 환영은 바로 사유입니다. (반야경 46)
여기서 보면 사유는 환상이고, 환상은 사유라고 합니다. 이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능가하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는 상당히 위험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불경이 결국은 사유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사유를 환상이라고 하면 모든 이론들이 환상이 됩니다, 곧 반야마라밀다까지 환상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이는 진리로서, 주술로서의 반야바라밀다와 어긋납니다.
이런 부정적인 존재론이 반야경을 대표합니다. 반야경의 본질은 공성(空性) 인데 이는 단순한 무 의 논리가 아니라 무자성의 논리와 연결이 되고 있습니다.
특히 위에서 본 것처럼 “열반도 환상이다”혹은 “꿈과 열반은 같은 것이다” 라는 사상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침해하는 폐단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제는 용수의 개혁을 보겠습니다.
용수의 중론
용수의 특징은 석가모니의 이론으로 다시 돌아가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반야바라밀다가 아니라 석가의 권위가 다시 살아납니다. 용수는 반야바라밀다의 공 사상을 이어 받으면서도 석가모니의 연기설을 다시 꺼집어 내어 이를 통해서 공사상을 정당화 내지 합리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용수는 연기설을 실은 부정적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원인에서 결과를 도출할 수 없다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점을 앞으로 다시 밝히겠습니다.
이런 경향을 중론이라고 합니다. 용수의 이론은 대단히 정치하고 또 난해합니다. 여기서 그의 모든 주제를 다 다룰 수는 없고 주로 법의 공성 문제만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우선 용수는 대승불교의 공성을 다시 문제시합니다. 반야바라밀다 불교는 공성을 통하여 잡다한 불교 이론을 통합하고 더욱이 불교를 대중화하는 큰 공로를 세웁니다.
용수가 보는 그 당시의 사상계는 공 사상이 왜곡되어 죄와 복의 문제까지도 그 차이를 무시하고 모든 것이 똑같다고 하는 오류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중론을 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입적하신 후 5백 세가 지난 상법에는 사람의 근기가 둔해져서 모든 법들에 깊이 집착해서, 12연기ㆍ5온ㆍ12처ㆍ18계 등의 결정적인 상을 구하기만 하여 부처님의 진의를 알지 못하고 단지 언설에 집착할 뿐이었다. 대승의 법에서 “모든 것이 완전히 공하다”고 하는 말을 듣고도 무슨 이유로 공하다고 하는지는 알지 못하고, ‘모든 것이 공한데 어찌 죄와 복의 과보 따위가 있다고 분별하겠는가? 그러니 세제도 제일의제도 없다’는 의심을 내어 이러한 없음의 상을 취해서 탐착을 일으켜 완전히 공한 것에 대해서 갖가지 과실을 범한다. 용수 보살께서는 이 점들을 감안해서 이 『중론』을 지으신 것이다. (중론,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이런 말을 보면 용수의 문제의식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즉 모든 것이 완전히 공하다는 대승불교의 사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은 공을 모든 것이 똑같다고 해석을 하고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죄를 지으나 선한 행동을 하나 양자는 서로 같다 와 같이 무차별적인 평등 사상이 사회를 뒤집어 놓으려는 일이 생깁니다. 더욱이 세간의 지식과 출세간의 지식이 같다고 합니다. 그러니 세제도 제일의제도 없다’는 말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수는 공에 대한 괴실을 바로 잡기 위하여 중론을 쓴 것입니다.
위에서 나타난 중론의 목적은 서양 철학식으로 말하면 동일성과 차이성의 관계를 말합니다. 즉 공 사상이 품고 있는 무차별적인 동일성과 차이성의 관계를 밝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용수는 연기설을 사용합니다. 연기설이라기 보다는 그냥 인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용수의 연기설은 석가모니의 12연기설이나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는 연기설과 다릅니다.
중론의 주요 주제는 법입니다. 여기서 법은 이론, 학설 등과 같은 의미로 씁니다. 그 중 불교의 법, 외도의 법, 세간의 법 등이 중요합니다. 세간의 법이란 경험적인 법과 규칙 등을 말합니다. 용수는 자신의 철학을 연기라고 명명을 합니다. 이렇게 연기의 원리를 압축하고 있습니다.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으며
상주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으며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네. (중론 제 1권)
이를 보면 석가모니의 연기설과는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체 문장들의 분위기는 어떤 영원불변한 진리를 서술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단 한 가지 대승불교적인 특징은 “상주하지 않는다”는 구절입니다. 이 부분이 공철학의 요소입니다. 반야경에서 우리는 자성이 멊다 즉 무자성의 원리를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상이 없다 혹은 상주하지 않는다는 같은 말입니다.
위의 4문장은 심오한 뜻을 가지고 있는 중론의 상징적, 대표적인 문장들입니다. 이 유튜브 체널에서는 주로 제일 첫 문장 즉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다 라는 이론에 대해서 알아 보겠습니다. 용수의 연기설이란 실은 이런 문제를 말합니다, 즉 발생입니다. 단순히 생물의 발생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인과율을 말합니다. 용수의 연기설은 실은 인과율의 문제입니다. 서양 철학에서는 이런 문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 이론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용수가 중론을 쓴 다른 이유는 당시 유식불교의 좌장인 세친이 내세운 아비달마학파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사정은 위의 인용문에서 미리 그 답이 나왔습니다. 이런 사정을 용수는 다음과 같이 표출하고 있습니다.
아비달마학파의 사람은 “법들이 4연에서 발생한다”고 말하는데, 왜 발생하지 않는다고 하는가? 4연이란 무엇인가? (중론 1권)
아비달마학파가 말하는 4연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아비달마 학파의 사람들은 법들이 4연(緣)에서 발생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4연은 각각 객관적인 조건, 즉 원인이 작동되기 위한 조건들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물이 끓으면 수증기로 된다” 는 자연의 법칙이 있습니다. 이 때 실제로 물과 이를 끓이는 장치가 있어야 합니다. 연이란 이처럼 법칙과 원리가 실제로 발생하기 위한 조건을 말합니다.
아비달마 학파는 법이 생성되는 원인을 여섯 가지로 분류한 6인과는 구별하여 4연으로 설명합니다. 4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 인연 :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조건입니다.
* 등무간연: 바로 앞의 법이 사라짐으로써 생기는 조건입니다.
* 소연연: 인식 대상이 되는 조건입니다.
* 증상연: 간접적으로 작용하여 결과를 돕는 조건입니다.
이 4연은 다양한 법들이 서로 관계를 맺으며 발생하는 복잡한 인과 관계를 분석하는 데 사용됩니다. 용수는 이런 인연설을 비판합니다. 다소 길지만 이와 연관이 있는 용수의 언어적 표현을 인용합니다.
모든 연은 확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러한가? 만일 결과가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면 이 때를 연이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연에서 결과가 발생하는 것을 눈으로 보았을 때에 한해서 이를 연이라 하는 것이다. 연이 성립하는 것은 결과에 연유한다. 결과가 후이고 연이 전이기 때문이다. 만일 결과가 아직 있지 않다면 어찌 연이라 이름할 수 있겠는가? 물단지의 예를 보자. 물과 흙 등이 화합해서 물단지가 발생한다. 물단지를 보고 나서야 이에 의해서 물과 흙 등이 물단지의 연들이라는 것을 안다. 물단지가 아직 생겨나지 않았을 때 어찌 물과 흙 등을 연 아닌 것이라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결과는 연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며, 연에서 발생하지 않는데 하물며 연 아닌 것에서랴?(중론 1권)
여기서 아비아달 학파의 인연론을 타파하기 위하여 연과 결과라는 새로운 관계를 창안합니다. 한문으로는 연과 과라고 기호화됩니다.
위의 문단에서 나타난 것처럼 결과는 나중이고 연은 앞선다고 합니다. 그런 현실적인 사례가 물단지와 이를 만들기 위한 재료로서의 물과 흙입니다. 물과 흙 등이 화합해서 물단지가 발생한다. 물단지를 보고 나서야 이에 의해서 물과 흙 등이 물단지의 연들이라는 것을 안다. 결과를 보고 나서 우리는 그 연(緣) 즉 재료가 물과 흙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물단지가 생겨나기 전에는 물과 흙은 연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원인 즉 연(緣)에서 결과가 발생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빠진 서양철학적인 원인론은 목적인과 능동인 혹은 형상인 등의 개념입니다. 용수는 오직 질료인 만 가지고 원인과 결과를 고찰합니다. 따라서 도공이 항아리를 만들 때는 물과 흙이 전부가 이미 항아리의 설계가 필요하고 또 이른 만드는 노동 작업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이렇게 사물을 창조할 때, 목적인과 형상인, 질료인 그리고 능동인이 다 있어야 비로소 원인에서 결과가 발생합니다.
물론 그 밖의 자연적인 현상은 법칙과 조건이라는 두 가지 요인에 의해서 발생합니다. 그러나 단지 같은 인공물의 발생에는 4가지 원인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질료인 즉 인공물의 원인으로서 그 재료만을 열거하는 것은 원인을 충분히 지시할 수가 없습니다. 재료에서 인공물이 산출될 수 없다 혹은 그런 연관성을 알 수 없다는 논리적인 이유에서 용수는 연에서 결과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또 연 아닌 것에서 결과가 발생하는 것을 알 수 없다 라고 합니다. 용수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결과는 있는 것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없는 것에서 발생하는 것도 아니네.
있으면서 없는 것에서 발생하는 것도 아니네.
어떻게 인연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중론 1권)
결국 용수는 법들은 4연에서 발생한다는 아비아달 학파의 원인론을 분쇄합니다. 그런데 필자의 관점에서는 용수의 논지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질료만 가지고 인공물을 산출하거나 예측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런 것이 용수가 말하는 공의 사상이고 연기법의 사상입니다.
또한 이를 통해서 당시 백화쟁명식으로 등장한 각종의 발생이론 혹은 생성이론을 논박을 합니다. 여기서 주제는 단순한 생물이나 존재의 발생이 아니라 법 즉 불교 이론을 말합니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반야바라밀다경에서 화제가 된 제법무상의 이론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소 긴 문장을 옮깁니다.
【문】 무엇 때문에 이 논서를 짓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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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어떤 이는 모든 사물들이 대자재천에서 생겨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위뉴천에서 생겨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화합에서 생겨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시간에서 생겨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세성에서 생겨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변화에서 생겨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자연에서 생겨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미진에서 생겨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오류를 범하기 때문에 원인이 없다한다거나, 그릇된 원인을 둔다거나, 단멸하거나 상주한다고 하는 따위의 그릇된 봄(邪見)에 떨어져서 갖가지로 ‘나’와 ‘나의 것’을 말하게 되어 바른 법을 알지 못한다. (중론 1권)
위에서 용수가 전개한 인과설 혹은 연기설은 원인과 결과의 불완전한 일치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용수의 용어로는 연과 결과의 불일치성입니다. 즉 물과 흙이 또 다른 어떤 요인을 만나야 비로소 물단지가 됩니다. 작용이라든지 계획 혹은 디자인 같은 요인이 첨부가 되어야 비로소 물단지가 만들어 집니다. 마치 현대 물리학의 불확정성 이론과 같습니다. 이를 통해서 당대의 숱한 법의 발생이론들을 물리치고 다시금 공 철학을 내세우고 또 선악의 구분 및 세간과 출세간의 구분을 합리화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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