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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찬송하라(시 138:1-8)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뭔가 구입할 것이 있어, 마트에 가면, 직원들이 여기 저기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앞을 지나가면, “안녕하십니까? 감사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저를 아는 사람도 아닌데, 인사를 하고, 감사를 합니다. 그들을 만난 적도 없고, 그들에게 특별히 도움을 준 적도 없는데, 무조건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물건을 구입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기만 해도, “감사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조금 전에 봤을 때도 “감사합니다.”라고 하더니, 다시 보는데도, “감사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미안해지고, 구입할 필요가 없는 물건도, 미안한 마음에 구입할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십시오.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사실 감사하는 조건이 있을 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감사할만한 조건이 없을 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매우 힘들고 어렵습니다. 오히려 원망과 불평하는 마음을 가지기가 더 쉽습니다. 감사할만한 조건이 있거나 없거나 늘 감사하며 살아갈 때, 참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현재의 상황이 힘들고 어렵습니까? 설령 현재의 상황이 힘들고 어려워도, 과거를 돌이켜보면, 하나님 앞에 감사할 일이 많습니다. 아무리 어렵다 어렵다 해도, 과거 이삼십년 전과 비교해보십시오. 그때 그 시절에 비해, 지금은 얼마나 잘 먹고 잘 살고 있습니까? 과거 큰 어려움을 당했을 때, 하나님께서 극복하게 해주시고, 해결해주신 일을 생각하면, 더욱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고, 전화위복이 되게 하셨던 과거를 생각하면, 미래가 아무리 불확실하고, 앞길이 막막해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줄 믿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옛날과 지금 현재를 비교해보면, 감사할 뿐입니다.
한번 따라해 볼까요?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고 찬송하라”
1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송하리이다” 아멘.
시인은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시인에게는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축복해 주셔서, 감사할 일들이 너무 많았나보구나. 그러니 그렇게 감사하지”
틀리지 않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성경에 나타난 감사를 찾아보고, 면밀히 살피면, 한 가지 결론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그들이 어떤 상황에 있었든지, 감사했습니다. 상황과 관계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너무 잘해 주셨기에 감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별로 잘해 주신 것도 없는데, 감사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범사에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무엇이 있습니까? 무엇을 가지셨습니까?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한다면, 감사가 넘쳐날 것입니다. 그러나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면, 감사가 아닌 원망과 불평이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원망의 말, 불평의 말을 자꾸 하는 것을 보게 되면, 그 사람은 지금 자기의 삶에 대하여,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만족하지 못합니다. 나는 행복하지 못합니다. 나는 지금 불행합니다.”
그렇게 말할 수 없어서, 환경을 탓하고, 다른 사람에게 원망과불평을 쏟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가지고 있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가지지 못한 것만을 생각한다.”라고 했습니다.
없는 것을 생각하지 마시고, 지금 현재 내게 있는 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감사할 수 있고, 노래할 수 있고, 찬송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읽다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다가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머문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축복을 베풀어주셨는지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을 보낼 때, 굶어죽은 사람도 없었고, 발이 부르튼 사람도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옷이 낡아서 못 입었다거나, 신발이 해어진 사람도 없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불리 먹이시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반석에서 생수가 나게 하셨고, 날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여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사랑해주시고, 축복해 주셨으면, 날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양하며,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려야 마땅하나, 도리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만 했습니다. 도무지 감사를 모르는 목이 곧은 백성이 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들의 도리가 아닙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이 적어도 일년에 세 번 이상은, 하나님 앞에 정성껏 준비한 감사의 예물을 드리며, 하나님의 성막에 나아와, 감사의 절기를 보내도록 규례를 만드셨습니다. 이 세 절기가,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입니다. 그중에 초막절이, 우리의 추수감사절기와 같습니다. 따라서 이 세 절기가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에 있든지 없든지, 의무적으로 누구든지 예물을 드리면서, 감사의 절기를 지키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께서 나병환자 열 명을 고쳐주셨을 때에, 돌아와 엎드려 절하며 감사를 표시한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사하는데 그다지 익숙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해서는 안되는 원망과 불평들은 아주 쉽게 말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우찌모라 간죠는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 메마른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은 저주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은혜를 많이 입었어도, 도무지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다면, 그 마음 자체가 메마른 마음으로, 저주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을 해도, 감사하는 마음이, 충만한 사람은, 은혜가 충만한 사람으로, 은혜가 충만해지는 자체가 곧 축복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이 있을 때, 더욱 행복해집니다. 감사함으로 자신도 행복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행복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마음이 없을 때, 불평, 불만이 생기고, 자기 자신은 더욱 불행하게 됩니다. 불행하기 때문에, 원망과 불평을 하기보다는, 원망과 불평을 자꾸 하다보니까, 행복을 누리기 보다는 불행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은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송하리이다”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시는 다윗의 시로, 시편 전체가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과거를 돌이켜 볼 때,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와 축복이 얼마나 컸는지를 깨닫고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인하여 감사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간구할 때마다, 주께서 응답하셨던 과거를 돌이켜보며 감사했습니다. 사실 다윗의 생애를 보면, 얼마나 위기가 많았는지 모릅니다. 죽음의 고비도 수십 번 넘겼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위험한 고비 때 마다, 자신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응답하시고, 위기에서 건져주셨던 과거를 돌아보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위태로울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우리의 기도가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응답을 해주셔서, 오늘날 이렇게 살아있지 않습니까? 문제는 과거에 그러한 체험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잊어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시 103:2)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을 잊지 않고 사는 방법은, 다윗처럼 늘 간증하며, 감사하며, 찬양하며 사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감사한다”는 단어는 “기억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감사의 뜻은.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반대말은, 배은망덕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원망과 불평이 많았던 것은, 배은망덕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홍해 앞에 있을 때에,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홍해를 갈라, 육지같이 건너가게 하심으로, 그들을 살려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흘 뒤에 도착한 마라라는 곳에 이르러, 물을 찾았을 때, 물이 써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불과 사흘 전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먹고, 원망,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광야 1세대는 원망, 불평이 습관이 되어 망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살았습니다. 늘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장 큰 고통이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께 기도가 잘 되지 않고, 기도해도 응답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기도 응답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불행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벽이 생기면, 기도를 해도, 응답이 되지 않고, 말씀도 잘 들리지 않습니다. 이는 영적 위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가, 어느 순간, 번뜩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사람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깨달아지는 것은, 더욱 더 큰 축복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장 행복한 때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여 감사가 넘칠 때입니다.
여러분! 감사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곰곰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있을 때 기쁨이 있고, 평강이 있으며 행복이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더 큰 복을 받습니다.
전심으로 감사하십시오. 입으로도 감사하고, 마음으로 감사하고, 몸으로도 감사하고, 물질로도 감사하며 사십시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거리는 떨어졌지만 한 동네에서 구멍가게 겸 잡화점을 운영하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새벽에 문을 열고, 저녁 늦게 가게 문을 닫는 것은 두 집 다 같습니다. 그런데 3년이 지난 후, 두 가게는 전혀 달라졌습니다. 한 집은 3년 만에 문을 닫았고, 한 집은 슈퍼마켓으로 발전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먼저 문을 닫은 집 이야기부터 해 보겠습니다. 남자가 40대 후반에 소위 명퇴로, 회사 임원을 그만두고, 망설이다가, 아내의 권유로 퇴직금을 털어서, 가게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회사 임원 시절의 향수를 버리지 못합니다. 아침이면 승용차와 기사가 대문밖에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회사에 도착하면, 직원들이 차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사무실에 들어가면, 여비서가 맞아 주고, 커피를 준비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구멍가게라니, 짜증나고, 한심하고, 원망스럽고, 그러다보니 아침 일찍 일어날 이유도 없고, 10원, 100원, 500원 남는 물건 팔이가, 얘들 장난처럼 보였습니다. 걸핏하면, 때려치우자며, 아내와 다퉜습니다. 3년 만에, 때려치우기 전에, 가게 스스로 문이 닫혔습니다.
슈퍼마켓으로 발전하고, 종업원이 20명으로 불어난 집 이야기를 해보십시다.
이 집의 경우, 역시 남자가 40대 초반이었습니다. 감원 바람이 불자, 본인이 명퇴를 신청하고, 퇴직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내와 의논 끝에, 구멍가게를 시작했습니다. 승용차도, 용달겸용 차로 바꿨습니다. 부부가 함께 가게를 운영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태도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건강 주신 것 감사하고, 일거리 주신 것 감사하고, 아이들 잘 자라는 것 감사하고, 부정으로 쫓겨나지 않고 명퇴한 것 감사합니다.”
새벽부터 일어나 일을 하지만, 일이 즐겁습니다, 피로가 빨리 풀립니다, 손님들이 기뻐합니다. 대형 유통점이 들어서도, 동네 사람들이, 친절한 가게라며 찾아옵니다. 작은 기업으로 성공한 것입니다.
감사하면 길이 열립니다. 원망하면 길이 막힙니다.
여러분!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2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 아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집인 교회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인자하시고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4절에서, “여호와여 세상의 모든 왕들이 주께 감사할 것은 그들이 주의 입의 말씀을 들음이오며”라고 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곳이 하나님의 집인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짐으로 인하여,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이요, 성서주일입니다.
1517년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마틴 루터는 죽음의 공포 때문에 카톨릭 신부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법대생이었을 때, 집에서 학교로 돌아오는 길에 들판에서 천둥을 동반한 폭풍을 만났습니다. 그는 피할 곳이 없는 가운데, 자기 바로 옆에 떨어지는 벼락으로 인해, 극도로 죽음의 공포를 느꼈습니다. 그 때 그는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살려 주면, 장차 신부가 되겠다는 서원을 하였습니다. 그는 그날 살아났고 그의 서원대로 나중에 신부가 되었습니다. 신부가 된 후에는 선행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선행을 하려고 할수록, 그는 자신 안에 있는 죄된 본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는 로마서 1:17절에 나오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통해, 선행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그 대학의 신학교수였던 마틴 루터는 “95개조 반박문” 대자보를 비텐베르그 성당의 정문 벽에 붙여 부패한 교회를 비판합니다. 이렇게 출발한 종교개혁의 기폭제는 면죄부였습니다. 당시 교회는 죄인들에게 죄를 고백하는 고해성사를 철저히 의무화시켰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제를 찾아가, 고해성사를 합니다. 그러면 고해성사를 받은 사제가, 그 당사자의 죄를 보속-죄짐을 벗겨주는 선행이나 고행-하기 위한 과제를 내줍니다. 그러나 보속행위도, 사람들에게 온전한 참회가 되기에 부족했습니다. 교리적으로, 누구든지 영세를 받았으면, 지옥에는 가지 않지만, 대부분은 괴롬과 고통이 많은 연옥으로 가게 됩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이 연옥에 대한 공포가 얼마나 컸던지, 경건한 사람일지라도, 값비싼 면죄부를 사지 않고, 배겨낼 도리가 없었다고 합니다.
루터는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 면죄부를 사야하고, 면죄부를 사기 위해서는 돈을 마련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가르치는 교회에 대항해서, ‘아니요!’라고 외쳤습니다. 구원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흘린 보혈의 공로요, 구속의 은총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 개혁신앙이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래서 루터는 “오직 믿음(sola Fide)으로”, “오직 은혜로(sola Gratia)”로 구원을 받는다는 구원의 진리를 분명하게 세웠습니다. 여기에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가 더해져, 개혁신앙의 세 기둥이 세워졌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우리 신앙과 영성생활에 미친 가장 지대한 공헌은 단연 “성경”입니다. 당시에는 보통사람들은 성경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독점적으로 읽을 수 있는 구별된 소수가 존재하고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사제들이었습니다. 성경은 사제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사제들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는 “어떤 이유, 어떤 이름”으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독점적으로 읽을 수 있는 구별된 소수”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성경을 독점하고 있던 사제들에 대항하여, “만인사제론”을 주창합니다. 루터의 “만인사제론”으로 우리 신앙과 영성생활은, 그 누구의 도움 없이도, 직접 말씀을 통하여, 주님과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종교개혁 이후에, 라틴어로만 읽던 성경을, 누구나 읽을 수 있는 독일어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리고 세계 모든 나라들이, 자기 나라 말로 성경을 번역하여 읽을 수 있게 했습니다. 루터 종교개혁이 남긴 지대한 공헌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나올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하십시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된다는 사실에 감사하십시오. 또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을 수 있음에 감사하십시오.
3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 아멘.
7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아멘.
여러분! 살아계신 하나님을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경험합니다. 원수 앞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합니다. 간구하는 날에 성실과 인자로 응답하시고,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넘어지거나 실족하지 아니하도록 역사하시고, 오히려 새롭게 하시고,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며, 우리를 오른손으로 건지시고 붙드시는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독일의 어느 작은 마을에 피아니스트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피아노 독주회를 가지려고 지방 신문에 광고를 내게 되었는데 어떻게 하면 자신을 좀 드러낼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그 당시 유명한 피아니스트 리스트의 제자라고 소개했습니다. 몰론 거짓입니다. 리스트의 제자이기는커녕 리스트를 한 번도 만난 적도 없었습니다.
거짓이 들통나려고 그랬던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연주회 몇 일 전, 리스트가 공교롭게도 이 마을을 방문하게 됩니다. 큰 일 났습니다. 거짓이 탄로 나면, 음악가로서의 자신의 일생이 끝장나고 맙니다. 전전긍긍합니다. 아무리 후회해도 이미 늦었습니다. 수습할 길이 없습니다. 그는 생각하다가, 용기를 내어 리스트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찾아가 사죄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리스트 앞에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빕니다.
“선생님! 제가 선생님의 이름을 도용했습니다. 제가 아직 부족함이 많은 피아니스트인 주제에 감히 선생님의 제자라고 속였습니다. 제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 사실을 듣고는 리스트는 조용히 웃으면서 입을 엽니다.
“매우 큰 실수를 하셨군요. 그러나 누구든지 실수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이 실수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생각하고 부끄러워하는지 알만합니다. 이렇게 용기를 내어 고백해줘서 고맙소.”
여기까지는 평범합니다. 그런데 다음이 소중하고 특별합니다. 그 소리를 들은 리스트는 피아노를 연주해 보라고 권합니다.
거절해도 자꾸 권하자, 도리가 없어 부끄러워 벌벌 떨면서, 피아노의 대가 리스트 앞에서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리스트는 중간 중간에 끊고는, 자세하게 연주를 교정해 줍니다. 연주를 마치자, 리스트가 그에게 말합니다.
“단 한번만이라도 내가 당신을 가르쳤으니 당신은 분명히 내 제자 아니오. 그러면 당신이 연주회 하는 날 당신의 연주가 끝난 다음에 내가 연주하면 안되겠소. 그리고 관객들에게 당당히 소개하시오. 내 제자라고”
여러분! 하나님이 리스트만 못하겠습니까? 138편을 지은 시인도, 그 무명의 피아니스트처럼 잘못을 저지른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그 잘못을 너그럽게 봐 주시는 정도가 아니라, 잘못의 내용을 분명하게 깨닫게 하시고는, 그 잘못을 구체적으로 교정해 주시고, 떳떳한 주의 백성으로 세워 주십니다. 그러기에 그의 온 맘은 감사로 가득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의 뚜껑을 열면, 곧바로 감사가 튀어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시인은 간구하는 날에 그 영혼의 기도를 들으실 뿐만 아니라, 그의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의 영혼을 새롭게 하십니다. 또한 강하게 하십니다. 그의 삶에 힘을 주시고, 용기 있고 담대한 자로, 자신을 키워가고 계심을 깨닫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자신의 험산준령을 거뜬히 넘을 수 있었습니다.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나아가 시인은 이것이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그는 하나님을 자신 안에만 묶어 놓을 수 없었습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는 전 세계에 걸쳐 나타나고 있음을 확신합니다.
5절 말씀을 보면, “그들이 여호와의 도를 노래할 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크심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다윗의 시라면 다윗의 통치가 어떠했습니까? 많은 이웃의 왕들이 다윗에게 조공을 바쳤습니다. 다윗이 섬기는 하나님 앞에 무릎 꿇었습니다. 다윗이 섬기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솔로몬 시대에는 스바의 여왕이 다윗의 하나님, 솔로몬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사람조차도, 하나님의 행하시는 행동을 보면,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애굽의 강퍅한 지도자 바로도 하나님의 역사 앞에서,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살렘왕 멜기세덱도 찬양합니다. 페르시아왕 고레스도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앞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찬양의 감사는 다윗만의 것이거나 솔로몬만의 것이 아닙니다. 세계의 열왕이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홀대하는 자는 멸망합니다.
이런 역사가 나타나게 된 것은 다윗의 통치력에 있거나 솔로몬의 통치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치력이 아니라 그들의 삶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 때문입니다. 인자로 그들의 삶을 채우시고, 성실로 그들을 섭리하시고, 그들의 간구에 영혼을 새롭게 하시고, 강하게 하시는 그 하나님의 역사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의 삶의 내용을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어떤 분은 지금 고민과 고통과 근심과 걱정 가운데 예배에 참석하셨을 것이고, 어떤 분은 그저 평상의 마음으로 예배에 참석하셨을 것이고, 어떤 분들은 평탄 대로를 즐기시면서, 여기에 나오셨을 것이고, 어떤 분은 기뻐 박수를 치시다가, 여기에 나오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인생을 당신의 인자와 성실로 채우실 준비를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아니 이미 인자와 성실로 채워 오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영혼을 새롭게 하십니다. 여러분의 간구에 응답하시고, 담대하게 하십니다. 삶의 사연을 넘어서, 감사의 길로 가게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문을 여십니다.
하나님께 여러분의 인생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감사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내면이 감사로 채워질 것입니다. 누가 여러분의 인생을 흔들어도 감사밖에 튀어나올 것이 없는 아름다운 인생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스스로도 놀랄 수밖에 없도록, 역사 하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까지도, 하나님을 찬양케 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8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인생길이 어떠할 때 안전할 수 있는가를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감사를 하나님께의 간구로 맺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의 마무리까지를 완전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그의 인생을 통째로 의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확신합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라”
우리 인생을 맡길 가장 완전한 길은 하나님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아침에도 여러분의 영혼을 감사와 찬양으로 가득 채우실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온 맘 다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지키시는 하나님 아버지!
처음부터 끝날까지, 우리를 인도하시며 지키시고 보호하여 주실 것을 믿으며,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리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