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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대문과대교우회 원문보기 글쓴이: 정창래 사학74
1. 영종대교 및 인천대교
(1) 영종대교
영종대교(Yeongjong Bridge, 永宗大橋)는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와 인천국제공항철도를 구성하는 영종도와 인천 육지를 잇는 다리이다. 인천광역시 서구 경서동(장도)과 인천광역시 중구 운북동(영종도)를 잇고 있으며, 인천국제공항이 영종도에 건설됨에 따라 영종도와 인천광역시의 육지부를 연결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총길이 4,420m, 교량너비 35m, 주탑높이 107m, 교각 수 49개의 다리로 1993년 12월에 착공하여 2000년 11월에 완공했다. 현수교와 트러스교, 강상형교가 혼합된 복합교로 영종도측에 1,140m, 인천측에 480m 걸쳐있다. 윗층에는 6차로의 도로가 지나고 아랫층에는 4차로의 도로와 복선철로가 지나가는 도로·철도 병용 2층 교량이다.
주교량인 현수교는 길이 550m, 주탑높이 107m, 통과높이 35m로 주탑과 주탑을 잇는 케이블을 다리 상판에 직접 걸어놓는 방식으로 시공한 세계 최초의 3차원 케이블 자정식(自定式) 현수교이다. 케이블이 단부교각의 정착부에서는 교량 폭만큼 벌어져 있으나, 주탑 위에서는 약 3m로 좁아지며 다시 중앙경간부에서는 교량 폭만큼 확장되는 구조이다. 이에 따라 행어로프도 수직이 아니라 주케이블과 보강형 트러스에 경사진 3차원 형상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3차원 케이블과 경사 행어로프는 교량의 내풍안정성 확보에 뛰어나며 케이블의 모양이 한국 전통한옥의 처마 모양을 띠게 되어 매우 아름답다. 이 현수교에 사용된 케이블은 지름 5.1㎜의 와이어 6.720가닥을 겹쳐 만든 것으로 총연장 8,145㎞, 총중량이 1,315t에 이른다. 이 현수교를 중심으로 좌우쪽에 2250m의 트러스교와 1620m의 강상형교가 연결되어 있다.
영종대교 육상구간 인천측 480m 라멘교는 하부 형식이 강제라멘 교각이다. 강상형 라멘교는 강제라멘교각과 강결로 일체화되어 중간에 게르버 형식의 연결구조로 되어 있는 점이 특징이다. 영종도측 접속교량 1140m도 같은 형식으로 설계되어 영종대교 가운데 1,620m가 강상형 라멘교로 구성되었다. 현수교 부분은 복층 와렌 트러스 블럭을 여러 개 제작하여 해상 크레인으로 운반하여 조립하는 방법으로 시공되었고, 주탑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교각들은 지질 구조를 고려한 다양한 가물막이 공법이 적용되었다. 국내 최초의 도로 및 철도 병용 교량이며, 교량 아래로 10,000톤 급의 선박이 통행할 수 있다.
(2) 영종대교기념관
국내 최초의 민자유치시설사업인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는 국내의 우수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2000년 11월 20일에 국내외 기술진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며 대 역사를 이뤄냈다. 이러한 역사가 후대에도 하나의 표본이 되게 하기 위하여 2001년 3월 27일 영종대교 기념관이 탄생하게 되었다. 대지면적(10.115㎡), 연면적(4,376.26㎡)에 1층부터 3층까지 구성된 전시실은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영종대교 건설 과정을 비롯하여 고속도로 전 구간에 관한 건설과정을 담은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하고 있다.
영종대교 기념관은 전문 기술인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교육의 장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일반인들에게는 건설분야에 관한 시각을 새롭게 할 뿐만 아니라 훌륭한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인천국제공항을 연결하는 요지에 위치한 만큼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에게도 국내의 우수한 기술력을 알리는 홍보사절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3) 인천대교
인천국제공항과 인천송도국제도시를 연결하는 교량으로 해상 교량 12.34㎞, 연결도로 8.93㎞를 합하여 총연장 21.27㎞로 인천국제공항, 송도국제도시, 청라지역을 삼각축으로 연결한다. 2005년 6월에 착공하여 2009년 10월 완공예정이다.
해상다리는 사장교 1480m, 접속교 1778m, 고가교 8400m와 요금소 광장 685m로 이루어지며 국내 사회간접자본사업 최초로 영국의 AMEC사가 시행사로 참여하였다. 다리 너비는 31.4m이고 왕복 6차선이다. 초속 72m의 폭풍과 진도 7의 지진에도 견딜 수 있는 내진 설계가 되어 있으며 100년 이상의 수명을 가지도록 설계되었다. 또한 충동방지공 모형실험을 통해 10만t급 선박과 충돌할 때에도 교량이 안전하다. 사장교는 주경간이 800m로 국내 최장이며, 사장교 형식 다리로는 세계에서 5번째로 길어 10만t 급 선박의 교차통행이 가능하다. 주탑은 높이 238.5m로 국내에서 가장 높으며 내풍 안전성에 유리하고, 인천항의 관문적 경관성을 고려하여 높이 238.5m의 역Y형 콘크리트 구조로 설계되었다. 고가교의 상부는 50m 경간장을 가지는 5경간 연속 PSC박스 거더 형태이고, 하부는 현장타설말뚝과 교각을 일체로 한 벤트 타입 구조를 적용했다. 접속교는 상부의 경우 각 경간을 145m로 하여 7경간 연속 PSC박스 거더 형식으로, 하부는 현장타설말뚝 기초와 사각형 중공교각으로 구성되었다.
연결도로는 바다 위에 건설되는 인천대교에서 뻗어나와 송도와 영종도로 이어지는 도로로서, 2005년 12월 착공되어 2009년 10월 완공예정이며 5개 공구로 나누어 공사가 진행되었다. 1공구는 복합 트러스교로 시공되며 인천광역시 중구 운서동에서 운남동까지 2.4㎞, 왕복 6차선이다. 2공구는 인천광역시 연수구 송도동 1017번지 일대의 1.66㎞로 하이브리드 중로 아치교로 시공된다. 3공구는 인천광역시 연수구 송도동 북쪽 해상에 2180m의 다리로 스트럿 부착 PSC박스 거더교로 시공되었다. 4공구는 인천광역시 연수구 송도동 해상에서 목련동까지 990m의 왕복 4차선으로 V형 주탑 강사장교로, 5공구는 목련동에서 인천광역시 남구 학익동까지 3300m의 왕복 2차선으로 엑스트라 도즈교로 시공되었다.
인천대교가 완공됨으로써 제2, 제3 경인고속도로 및 서해안고속도로와 연결되어 인천 및 서울 남부, 수도권 이남지역에서 인천국제공항까지의 통행시간이 40분 이상 단축된다. 인천국제공항에서 송도국제도시까지 걸리는 시간은 현재 1시간 이상 소요되는 것에 비해 인천대교를 이용하면 15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2005년 12월 영국 건설전문지 〈컨스트럭션 뉴스〉에서 ‘경이로운 세계 10대 건설’로 선정되었으며, 2006년 3월 〈유로머니 〉선정 ‘2005년 최우수 PF-아·태지역 교통인프라부문’상을 수상했다.
1)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긴 다리
왕복 6차로인 인천대교의 총 길이는 18.4km로서 국내 최장대교량이다. 길이로는 세계 6위 규모이고 인천항을 드나드는 대형선박들이 통행하는 주항로 구간의 최대경간장은 800m로서 국내 최대이며, 사장교 형식 교량으로는 세계 5위 규모이다.
※ 주경간장기준 세계 사장교 순위
1위 : 수통대교(중) - 1088m(2008년)
2위 : 스톤커터대교(홍콩)-1018m(2008년)
3위 : 타타라대교(일본)-890m(1999년)
4위 : 노르망디대교(프랑스)-856m(1995년)
5위 : 인천대교(한국)-800m(2009년)
6위 : 서해대교(한국)-470m(2000년)
2) 우리나라 최고높이 주탑
사장교를 지지하는 주탑의 높이는 230.5m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다. 대형선박들이 통행하는 사장교 구간의 교량 상판 높이는 바다 위로부터 74m이다.
※ 63빌딩 249m, 무역센터 228m, 에펠탑 높이 320m
3) 기타 인천대교의 특징
- 세계최대하중 말뚝재하시험 실시 : 연직하중 약 29,000톤 작용
- 세계최대규모 돌핀형 선박충돌방지시설 적용 : 100,000 DWT 선박의 교량 충돌에 대비하여 안전성 확보
- 우리나라 최초로 외국인이 사업시행자로 참여하는 민간자본 SOC 사업
- 설계와 시공을 병행하는 Fast track 방식으로 사업 진행 : 공사기간 단축
- 우리나라 최초로 교량의 상부 및 하부 구조 설계에 하중저항계수설계법(LRFD) 적용
- 우리나라 최초로 교량의 PSC 박스거더에 종방향 및 횡방향 프리텐션(pre-tension) 방식을 적용
- 우리나라 최초로 도로교에 FSLM(full span launching method)을 적용 : 길이 50m
- 우리나라 최초로 현장타설말뚝 철근망 제작에 자동화 설비 도입
- 우리나라 최대규모의 현장타설말뚝 시공 : 직경 3m, 최대길이 76m
- 우리나라 최대규모의 교각일체형말뚝(bent type pile, pile bent) 시공 : 직경 2.4~3.0m
- 우리나라 최초로 모든 말뚝마다 시추조사 및 건전도 검사 실시 : pile bent 구간
- 우리나라 최대규모의 파일캡 PC하우스 가설 : 35m×25m×5.4m / 1,800톤
- 우리나라 최장 프리캐스트 FCM 교량 : 경간장 145m
2. 영종도(永宗島)
영종도는 본래는 경기도 남양부(南陽府) 해변 영종 땅에 있었던 수군기지를 일컫는 말이었다. 1653년인 효종 4년, 수도권 방어를 위해 이루어진 조선정부의 구조조정에 의해 지금의 영종도로 영종진이 옮겨온 것. 그 후 섬 이름도 영종도라 불리게 되었다. 영종도의 옛 이름은 자연도(紫燕島)였으며, 이는 ‘제비섬, 긴 마루’ 라는 의미이다.
영종도는 인천국제공항을 위해 하늘이 내린 땅이라고 할 수 있다. 옛 선조들이 비행기라는 것을 알고 공항이라는 것을 알아 영종도라는 이름을 정하지는 않았겠지만 영종도를 해석하면 긴 마루를 가진 섬이라는 뜻으로 활주로를 뜻한다. 또한 용유도(龍遊島)를 풀이하면 용이 노니는 섬이 되며, 영종도 북쪽의 매섬의 매 이미지는 영종도에 이착륙하려는 항공기를 연상케 한다. 이렇게 보면 영종도는 예로부터 공항이 될 운명을 타고 났으며 선조들이 우리 후손을 위해 공항의 터로 미리 점지해 주셨음을 능히 가늠할 수 있다. 어찌 해석하느냐에 따라 틀리겠지만 재미있는 발상임엔 틀림없다.
영종도는 인천광역시 중구에 속하며, 해안가에 인접한 구릉성 지형을 보이고 있다. 개발로 인한 변화에도 영종은 언제나 변함없이 산과 산 사이를 벌려 길을 내주고, 산자락과 평지가 만난 곳에 마을을 내어준다. 산은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며 묵묵히 사람들의 쉼터가 되어주는 것이다. 동북아시아 미래비전의 발판으로 거듭나고 있는 영종도의 산은 전체적으로 완만한 구조를 가졌다. 영종이란 말의 의미처럼 긴(永)마루(宗)로 이어지며 인천을 널찍이 감싸고 있다.
영종도는 뭍과 바다의 풍요로움을 모두 갖춘 곳이다. 덕분에 일찍부터 이 섬에는 사람이 모여 살았다. 사람이 모여살고 도성으로 오가는 길목이니 자연스레 나라를 위한 시설들도 많이 자리했다. 외교를 위해 도성으로 드나들던 사신들의 쉼터, 도성을 지키는 군영, 나라의 말을 키우던 말목장 등이 이곳에 있었다.
백운산 기슭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깃들여 살았다. 그들은 산이 바다를 향해 뻗어간 동서남북 어느 자락이든 자연을 벗 삼은 마을을 이루었다. 서로의 농사를 도우며, 뱃일을 도우며 희로애락을 나누었던 사람들의 추억이 골골이 깃든 마을이다. 서해바다에 떠있던 자그마한 섬들이 팔을 벌려 이웃 섬과 손을 잡고 너른 품을 만들었다. 바다로부터 안전한 넓디넓은 땅을 품었다. 이제 그 품속에 새로운 세상이 펼칠 것이다. 동아시아의 물류 중심인 인천국제공항과 더불어 세계인이 머물 수 있는 삶의 터전이 만들어지는 것. 첨단 공법으로 만들어지는 편리한 주거공간은 물론 영종도가 가진 천혜의 자연환경도 고스란히 누릴 수 있는 새로운 생활공간 ‘영종하늘도시’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인천광역시 중구에 속한 섬으로 월미도에서 서북쪽으로 약 2.5㎞ 지점에 있다. 주위에 있는 삼목도·용유도와는 연륙도로로 이어져 있으며, 신불도와는 금흥염전으로 연결된다. 1989년에 경기도 옹진군에서 인천직할시로 편입되었다.
섬은 전체적으로 삼각형이며, 중앙에 솟은 백운산(白雲山 : 256m)이 최고봉으로 북쪽으로 금산(167m)·석화산(147m) 등이 있을 뿐 평지가 많아 농경지와 취락이 분포한다. 곳곳에 있는 소규모의 만을 대부분 방조제를 축조하여 농경지와 염전으로 이용하고 있다. 간석지가 발달해 간조시에는 용유도·운렴도 등과 이어진다. 기후는 한서의 차가 심하며, 겨울철에는 몹시 춥다. 주민은 대부분 농업과 어업을 겸하나 농업에 더 많이 종사한다. 농산물로 쌀·보리·콩·감자·고구마·땅콩·마늘·고추·딸기 등의 생산이 많으며, 특히 보리는 계약재배되고 있다. 돼지·닭·오리·염소 등 축산업도 활발하다. 연근해에서는 숭어·게·우럭·낙지 등이 잡히며, 바지락·가무락 등의 채취와 굴·백합 등이 양식되고 남서쪽에서는 염전업이 이루어진다. 취락은 섬의 남서쪽인 운남동과 운서동에 분포한다.
중산동이 위치하는 동쪽 바닷가 작은 섬에 자리한 구읍은 현재 토할 구(歐)자를 쓰는 구읍이지만 예전에는 섬 모양이 거북이처럼 생겼다 하여 거북이 구(龜)자를 붙여 구읍이라 불렸다고 한다. 월촌은 달이 떠오르면 가장 먼저 달빛이 닿는 곳이라 하여 월촌이라 불렸으며, 돌팍재는 박석이 많아 돌박재라 부르던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돌팍재라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사람이 자연을 거스를 수는 없다. 자연 그대로를 입에 담아 마을을 이룬 곳. 바로 중산동이다. 영종진과 경원정이 자리하고 있었던 이곳은 비변사 토지가 있던 곳에 아직도 비변사라는 이름이 남아있기에 예전 군사들이 주둔하던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의 정치군사를 관장했던 비변사는 군인들의 식량공급은 물론 월급을 주기 위한 토지를 경작했다. 영하마을은 방어영 부대가 주둔하던 곳으로 영아래 마을이라는 뜻이며, 석화산 북쪽에 자리한 마장포도 훈련된 군용마와 역마, 하역마 등을 키우던 말목장이 있던 곳이다.
중산동은 다리가 놓여 본토와 연결되기 전까지 충실하게 영종도의 관문역할을 해왔다. 다리가 놓인 지금도 월미도를 오가는 바닷길이 여전히 이곳에서 시작된다. 그렇다보니 바다사람들의 이야기도 여기에서 시작이 된다. 배가 가라앉을 만큼 만선을 이루고 돌아오던 아침의 기억, 만선 깃발을 주고받으며 나누었던 이웃 간의 정, 고기를 따라 남쪽 바다까지 열흘씩 내려갔던 기억… 이제는 모두 기억 속에 살아있는 기쁨들이 될 것이다.
운남동에는 마을이 가진 자연조건이나 풍경이 이름으로 붙은 경우가 많다. 마을 가운데로 작은 하천이 흘러, 이를 건너는 작은 다리들이 많이 놓여있다 하여 이름 붙은 ‘잔다리’, 백운산 남쪽 도로 인근에 자리하고 있다하여 남도마을이라 불리다 끝자가 변형된 ‘남디’, 풍수지리적으로 좌청룡 우백호가 있어야 좋고 길한 땅(길안)인데, 반쯤만 길한 땅이라 하여 이름 붙은 ‘반길안’ 등이 그것이다. 백운산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운남동은 시린 북풍은 산이 가려주고 따사한 햇살은 많이 받을 수 있는 살기 좋은 곳이다. 산 앞에 자리하고 있다하여 전소라 이름 붙은 이 마을은 행정중심지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도 가장 많은 사람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이 바로 이 곳이다. 지금처럼 전소에 행정기관들이 모이기 전 임시로 관청이 설치되었던 운남 12통의 관창말은 구한말, 외국의 문물이 들어오는 관문마을이라 하여 관창말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모두 자리하고 있기에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운남동은 영종의 중심지이다. 상점, 병원, 은행 등이 모두 이곳에 자리잡고 있다. 과자봉지를 들고 있는 어린아이, 농사철을 앞두고 농기구 정리하러 나온 어르신, 가족들 반찬걱정에 조심스레 음식재료 고르는 아주머니 등 이 정감어린 풍경이, 시끌벅적한 곳이다.
운서동은 신공항 부지 매립이 되기 전까지 산 아래 바다를 끼고 있던 곳이기에 산과 바다를 아우르는 마을지명이 많다. 백운산 뒤에 자리하고 있다 해서 붙여진 지명인 ‘후소’, 마을이 넓다는 뜻의 ‘넙디’와 ‘큰말’, 마을 옆 계곡에 숯을 굽던 가마가 있었던 가마골, 숲에 가려 밖에서는 마을이 보이지 않는 마을이라는 은골, 마을 옆 산의 모습이 승천하는 용의 모습을 닮았다하여 용이 지켜주는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용수말 등 모두 산에 기대 만들어진 마을이름들이다. 바다와 관련된 마을 이름 중 대표적인 것은 젓개마을이다. 영종도 북쪽 바다에서 새우를 비롯한 물고기가 많이 잡혀 마을의 모든 집마다 젓을 잡는 배가 있었다고. 젓배마을이라 불리다 젓개마을로 변형되었다. 이밖에도 모래가 많은 마을임을 알 수 있는 모래말,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드나들던 곳이어서 갯벌에 갈대가 무성하게 자란다하여 새뻘이라 부르다 변형된 세퍼리 등이 있다. 운서동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내어주는 것이 인천국제공항 이후로 두 번째이다. 바다를 내어주고 삶의 터전은 그대로 남겨둔 첫 번에 비해 지금은 그 터전을 내어 주어야 하기에 그들의 상심은 더욱 크다. 이곳 대부분의 사람은 건설된 신도시로 옮긴다 한다. 콘크리트 가득하지만 내 고향이 가장 가깝기 때문이란다.
백운산 북쪽에 자리한 운북동은 어업 또는 무역업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살던 곳이다. 대표적인 곳은 예단포이다. 효자가 많은 마을이라 하여 예대포라 불리다 예단포로 변했다는 설과,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으로 왕실이 강화도로 옮겨왔을 때 임금님께 드릴 예단을 싣고 오가던 곳이라 해서 예단포라 부른다는 설이 있다. 논농사가 많은 영종도의 특징을 마을이름으로 가진 곳도 있다. 토질이 좋고 넓은 논이 있어 집집마다 한섬지기 논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풍요로운 땅임을 상징하듯 논골이라 이름붙인 운북 24통이 있으며, 덕수 장씨가 개척하고 살았다 해서 장씨촌이라 부르다 장촌이라 부르는 운북25통 장촌마을이 있다. 하나의 성씨가 모여 집성촌을 이룬 것이 마을이름으로 변한 것이다. 영종의 북쪽은 또 다른 세상을 향한다. 발을 내딛으면 그대로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그곳까지 파도를 따라 갈 수 있을 것만 같다. 파도가 밀려나간 아래에는 곱디고운 개펄이 펼쳐져 있고, 배들은 개펄에 기대어 나른한 시간을 보낸다. 반쯤 기울어 갯벌을 베고 누운 작은 어선들의 고단함을 시원한 바닷바람이 어루만지며 위로해준다. 편안히 기대 함께 졸고 싶은 어느 오후의 풍경이다.
동쪽 중산동에 구읍나루터가 있고 나루터 남쪽 해안일대의 공유수면을 매립한 곳에 농수산물 가공 센터가 있다. 유적으로 운남동에 고인돌이 있으며, 고려시대에는 예성강 포구에서부터 고군산군도·흑산도 등을 경유해 중국의 명주까지 연결되는 항로의 거점으로 객관(客館)이 세워지기도 했다. 조선 숙종 때는 교동수영에 속했고, 영조 때는 새로 진(鎭)을 설치하는 등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시되었다. 또한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가 이 섬을 지나 강화도까지 가기도 했다. 2001년 3월 인천국제공항이 개항되면서 공항 고속도로가 건설되어 수도권과 연결되었다. 면적 63.81㎢, 인구 25,036, 가구 10,619(2004).
3. 신도, 시도, 모도, 장봉도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를 따라 달리다가 비행장에 도착하기 전에 화물터미널 이정표를 보고 오른쪽 길로 빠지면 약 5분 만에 삼목선착장에 이른다. 이곳에서는 신도, 시도, 모도, 장봉도 등을 운행하는 배편이 있다. 자동차도 실어 나를 수 있는 배가 운항되는데 ‘풀하우스’, ‘슬픈연가’ 등의 관련 사진이 선창 곳곳에 붙어 있다. 딱히 관심을 끌지 못하다가 풀하우스라는 드라마가 인기 급부상하면서 관광지로 거듭나게 된 곳이다. 신도까지만 가면 시도와의 사이를 잇는 연육교가 있고 시도와 모도 사이는 잠수교가 설치돼 있어 썰물 때 자동차로 건너갈 수 있다.
삼목항에서 신도까지의 거리는 아주 짧지만 어김없이 갈매기 떼가 모여든다. 인간들이 새우깡에 길들여 놓은 탓이다. 자그마한 선착장, 그 주변 바닷가에는 한갓지게 낚시대를 드리우는 사람들이 있다. 이정표를 따라 섬여행을 즐기면 된다. 섬은 작아서 반나절이면 충분히 돌아볼 수 있다. 신도를 비껴 찾아가는 곳은 시도(矢島)다. 시도는 한자어 그대로 화살섬이란 뜻으로 살섬이라고 부른다. 고려말 이성계와 최영의 군대가 강화도 마니산에서 신도를 과녁삼아 활쏘기 연습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 때부터 이 섬은 살섬으로 불렀다. 그것을 알려주는 조형물이 있다. 신도와 모도를 잇는 연육교 초입 오른쪽에 세워진 화살탑(시도리 당재 너머 노루메기 잠수도로 입구 언덕위)이다. 당시 사용됐던 것으로 추정되는 화살촉이 이곳에서 발견됐다고 하나 겉으로 보기엔 조악한 탑일 뿐이다. 화살탑에서 바다를 향해 서면 보이는 섬이 강화도이다.
신도와 시도는 597m길이의 연육교로 이어져 있다. 시도에는 풀하우스와 슬픈연가 등 두 개의 드라마 세트장이 있다. 바닷가 옆에 있는 한 채의 전원주택 같은 세트장, 넓은 해안을 배경으로 지어진 드라마 ‘풀하우스’ 촬영 세트장에는 4명의 남녀 주인공들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할 수 있는 벤치를 비롯해 다양한 사진 촬영 포인트를 만들어 주었다.
그들의 사진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하는 사람들, 표정에서도 느껴진다. 하지만 입장료(5,000원)가 비싸서 드라마에 관심없는 사람들은 그냥 겉만 보고 발 돌리기 일쑤다. 연예인들에게 우리는 왜 이렇게 열광하는 것일까? 특별한 사람들이라는 것에 대한 막연한 기대심리 같은 것일게다.
이 세트장에서는 그저 그런, 건물보다 더 관심을 끄는 것은 흰 모래사장이 눈부시게 펼쳐지는 ‘수기해변’이다. 더우면 때이른 물놀이를 즐겨도 좋다. 썰물 때라면 한두 시간 머물며 바닷가 암반 지대나 모래밭을 거닐어도 좋다. 그렇게 10~15분 바다 길을 따라 가면 산 능성이로 오르는 나무 계단이 나타난다. 차가 잇어서 다시 돌아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잠시라도 몸을 움직여주는 것이 여행을 더욱 즐겁게 해준다. 풀하우스 세트장 또한 관심의 대상은 아니다. 언덕받이에 조망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인데, 드라마 속 유명 연애인들의 사진이 사람 크기만큼 걸려 있다는 정도다.
이제 여행의 끝자락은 모도섬이다. 모도는 가장 작은 섬이다. 모도 앞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할 때 고기는 잡히지 않고 띠만 걸려 띠자를 써서 모도(茅島)라 불렸다고 한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시간’의 촬영지라고 한다. 성형미인에 대해 사회적인 이슈를 담은 영화인데, 어떤 장면이 이곳에서 연출되었을까? 아주 자그마해서 더욱 한갓지게 느껴지는 모도는 매력적이다. 이곳에 유명한 조각공원이 있다. 이름도 독특한 배미꾸미 해변에 있는 조각공원은 조각가 이일호씨가 만든 것이다.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 카페로 건물 주변으로 전시된 대형 조각품이다. 해괴하기도 하고 에로스 적인 느낌이 드는 작품들이 많은 것도 특징 중 하나다. 흰 모래 사장과 넓지 않은 바다가 카페(032-752-7215)와 조각공원이 어우러져 그윽한 커피 한잔 마시도록 유혹한다. 배미꾸미 해변 위로 비행기가 날아간다. 이 해변 바로 앞이 인천공항이기 때문이다. 문득 삶의 활력이 불끈 솟는다. 바로 움직였기에, 행동을 취했기에 얻어진 결산물인 것이다.
4. 무의도와 실미도
(1) 무의도(舞衣島)
인천광역시 중구 무의동에 속한 섬으로 섬 북쪽에 용유도가 있으며, 부속 도서로는 소무의도·실미도·무도·해녀도·사렴도 등의 작은 도서가 있다. 소무의도와 구별하는 의미로 본섬을 대무의도라고 부른다. 영종도의 잠진 선착장에서도 연락선이 매일 수시(매시 30분 간격으로)로 운항하고 있다. 섬의 이름은 옛날 선녀가 내려와 춤을 추었다 하여 무의도라 했다고 전해진다. 최고봉은 호룡곡산(246m)으로 섬의 남쪽에 솟아 있으며, 북쪽에도 높이 230m의 산이 솟아 있다. 산지 사이에는 소규모의 농경지와 취락이 분포한다. 해안에는 간석지가 넓게 발달해 있고, 북서쪽 해안일부는 해식애가 발달했다. 기후는 한서의 차가 심하다. 주민 대부분은 농업과 어업을 겸한다. 농산물로 보리·감자·콩·땅콩·고추·마늘 등이 생산된다. 연근해에서는 새우·숭어·꽃게 등이 많이 잡히며, 김·굴·바지락·백합 등의 양식이 활발하다. 인천에서 출발하는 정기여객선이 왕복운항되며, 부속 도서들 간에는 도선으로 연결된다. 취락은 큰무리·개인·포내·샘꾸미 등의 자연부락이 산간곡저와 해안에 분포한다. 면적 9.43㎢, 해안선길이 18.7㎞, 인구 657, 가구 310(2006).
주요 관광지는 하나께해수욕장과 실미해수욕장 등 2개의 해수욕장이 있으며 하루 코스의 등산로(국사봉, 호롱곡산 : 등반하는데 각각 30분 정도 소요)로 인해 인근 도시 (인천, 서울, 경기도 등) 에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자주 방문하고 있다. 무의도는 용유도와 마찬가지로 대규모 관광단지를 조성할 계획이 있다. 그러나 하나께해수욕장은 드라마 천국의 계단의 촬영지로 널리 알려져 왔다.
(2) 실미도
실미도(實尾島)는 한반도 중서부의 서해에 위치한 섬으로 인천국제공항에서 가깝다. 흔히 '실미도 부대'라고 부르는 684 부대는 실미도에 있었던 북파부대이다. 684 부대는 1·21 사태에 대한 보복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침투해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받았으나, 남북 화해 분위기로 인해 임무 수행이 계속 늦어지자, 1971년 8월 23일 기간병들을 살해하고 서울로 잠입하여 실미도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실미도》가 흥행에 대성공하면서 관광지로 개발되었다.
※ 영화 실미도
《실미도》는 백동호의 소설 실미도를 바탕으로 만든 2003년 12월에 제작된 대한민국의 영화이다. 1·21 사건을 계기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보복하기 위해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지시로 설립된 684 부대의 설립부터 시작해서 혹독한 훈련을 통해 완전한 전투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침투하는 것이 하루하루 늦어지다가 결국은 불만이 폭발해 실미도 사건을 일으키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1108만명의 관객이 영화를 관람하면서, 한국 영화사상 처음으로 천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가 되었다. 이 영화를 계기로 오랫동안 잊혀져 왔던 실미도 사건이 다시 주목을 받았으며, 실미도 부대와 같은 북파부대에 대한 내용이 재조명되기도 하였다.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실미도도 관광지로 개발되기도 했다.
영화에서는 실미도 특수부대원들이 살인과 같은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형수들에서 뽑힌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실미도 훈련병들의 유족에 따르면, 이들은 높은 보수를 준다는 정보기관원들의 거짓 약속에 속았을 뿐, 평범한 시민들도 실미도 부대에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훈련병 8명의 유족 47명이 강우석 감독과 제작사를 상대로 사자(死者) 명예훼손 및 허위 사실 적시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하기도 했다. 실제로 실미도 부대원들 중에는 단순히 서커스 단원에 불과한 사람도 있었고 일용직 노동자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재판부에서는 1심은 물론 항소심에서도 명예훼손이 아니라는 판결을 내렸다.
학도의용군동지회 이용수 회장은 영화에 《적기가》가 4차례나 등장한다면서 이것이 "실미도 부대원들에게 살해 명령을 내린 대한민국 정부를 부정하고 반국가단체의 활동을 찬양, 고무하기 위한 의도"라고 주장하며 강우석 감독이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고 고소하기도 했다. 결국 지상파 TV방송에 나올 때에는 해당 부분이 묵음처리되어 방송되었다.
5. 용유도
인천광역시 중구에 속한 섬으로 월미도에서 서쪽으로 약 16㎞ 떨어져 있다. 주위에는 무의도·실미도 등의 섬들이 있으며, 이전에는 영종도-삼목도-용유도를 잇는 약 6.3㎞가 도로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두 섬 사이가 매립되어 연결되어 있다. 섬의 모양이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길게 이루어져 멀리서 볼 때 용이 물에서 놀고 있는 듯하다하여 용유도라 했다고 한다.
경기도 옹진군에 속했으나, 행정구역개편으로 1989년 인천직할시에 편입되었다. 최고봉인 오성산(172m)이 섬의 동쪽에 솟아 있고, 북서쪽에 161m의 구릉이 있으나 대부분 100m 이내의 낮은 구릉지와 평지로 되어 있다. 섬의 북쪽과 남쪽 해안에는 깊고 넓은 만이 형성되어 있으며, 대부분은 간석지가 넓게 펼쳐져 있다.
섬의 남쪽에 뻗은 돌출부는 초름섬·잠진도 등과 방조제로 연결되어 있다. 기후는 대체로 한서의 차가 심하며, 특히 겨울철에 눈이 많다. 주민은 대부분 농업과 어업을 겸하나 농업에 더 많이 종사한다. 농산물로는 쌀 이외에 콩·땅콩·마늘·고추·참깨 등이 생산되며, 고추는 생산량이 많아 상인 직거래가 이루어진다.
연근해에서는 새우·우럭·낙지·숭어·농어·꽃게·꼴뚜기·망둥이 등이 잡히며, 바지락 등이 채취되고 김·굴 등이 양식된다. 서쪽 해안은 고운 모래와 소나무숲이 조화를 이루는 을왕리해수욕장을 비롯한 자연경관이 빼어나다. 면적 13.74㎢, 인구 3,483, 가구 1,634(2004).
※ 을왕리해수욕장
을왕리해수욕장은 인천광역시 중구 용유도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2001년 인천국제공항의 개장으로 이젠 섬 아닌 육지가 되었다. 영종대교를 건너 신공항으로 빠지다 용유도란 팻말을 따라 쭉 뻗은 해안도로를 따라 가다 보면 도로의 왼쪽에 위치한 해수욕장으로 1986년 교통부 공고 제37호에 의하여 국민 관광지로 지정되었다. 을왕리해수욕장은 평균 깊이 1.5m 정도의 완만한 경사와 백사장으로 사계절, MT 및 각종 행사 등으로 사람들이 북적대는 곳으로 수도권에서 제일 가까운 해수욕장이다.
시원스럽게 넓어 보이는 백사장과 빽빽한 송림들로 둘러쌓여 자연환경조건이 잘 갖추어진 국민관광지다. 썰물 때 물이 빠지면 바지락, 동죽, 낙지, 게 등도 잡을 수가 있어 동해안이나 남해안에서는 경험하지 못하는 추억거리를 만들 수가 있다. 인천시 중구 용유도 을왕리에 위치한 을왕리 해수욕장은 인천 시내에서 가장 가까운 해수욕장이다. 영종도 버스 정류장에서 30분 간격으로 운행되는 을왕리행 버스를 타면 되는데, 여기서 을왕리 해수욕장까지 가는 40~50분 거리(승용차로는 30분)의 해안도로가 아주 멋지다. 신호등 하나 없이 쭉 뻗은 도로 왼편으로 펼쳐진 바다도 멋지고, 바다만큼 넓은 인천국제공항의 모습도 시원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런 해안도로를 지나 용유도 덕교동으로 들어서면 노송들이 우거진 야영장이 나오고 길도 좁아진다.
이어 나타나는 곳이 바로 MT장소로 유명한 을왕리 해수욕장. 개장한 지 30년을 넘는 때문인지 횟집이 20여 개나 되고 민박, 여관, 노래방, 슈퍼 등의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또 여름엔 조개잡이 대회 등 다양한 이벤트도 마련된다. 그래서 여름 피서철이나 MT철이면 여행객들로 만원을 이룬다. 특히 해변의 길이가 1.5km에 걸쳐 반월형(초생달)으로 늘어서 있고 모래가 가늘고 고와 사계절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을왕리 해수욕장은, 해변의 동쪽에 소나무숲과 기암절벽으로 이뤄진 멋진 풍광을 간직하고 있어 젊은 연인들의 인기도 한 몸에 받고 있다.
바다와 어울려 멋진 풍경을 만들어내는 그곳 2km의 오솔길은 오래 전부터 낙조 명소로도 알려져 낙조 무렵이면 산책길 곳곳을 차지하고 앉은 연인들로 번잡해진다. 그래서 혼자 여행을 간 경우나, 가족끼리 갔을 경우에는 방파제가 있는 포구 쪽을 배경으로 해 낙조를 감상하는 게 좋다. 묶어둔 배들이 해변의 바위들과 어울려 아주 멋스런 낙조 풍경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6. 세계여행문화원
세계여행문화원은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 교수(1926~2003)’가 수십 년 동안 세계여행을 하면서 모은 자료를 전시한 곳이다. 영종도 구읍선착장 인근에 위치한 '세계여행문화원'은 월미도에서 배를 타고 30분 정도 걸리는데, 한국과 세계의 젊은 배낭객들이 자신이 사랑한 세계여행에의 꿈을 계속 이어 나가기를 바라는 고인의 뜻에 따라 2001년에 조성되었다.
크기는 일반 가정집보다 작은 규모로 세계여행 시에 사용한 여권, 신발, 배낭, 나침반, 카메라 등의 유품과 각종 여행사진 10만 여장, 일기 편지, 여행서적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도시개발 계획에 의하여 지금은 잠정적으로 개방하지 못하고 있다.
별채에 여행도서관이 있고 계단식 잔디밭은 야외공연장으로 이용할 수 있다. 차와 음료를 마실 수 있는 휴게실이 있으며, 주변경관이 너무 좋아서 친구와 함께 또는 가족 나들이도 좋은 장소이다. 일몰시간에 바다 너머로 휘황찬란한 월미도를 중심으로 인천시가 한 눈에 들어오는 장관이 펼쳐진다. 요새는 인천대교가 건설되어 더욱 아름다운 모습이다.
7. 인천국제공항
인천광역시 중구 운서동에 있는 국제공항으로 1992년 11월 착공해 2001년3월 개항했다. 인천국제공항은 김포국제공항이 여객 및 화물 수송의 증가를 감당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이를 대체할 신국제공항으로 건설되었다. 공항부지면적은 1,171만 6,000㎡이며 승객들이 항공기를 타기 위해 이용하는 여객터미널은 49만 6,000㎡이다. 또한 개항 당시인 2001년 3월 기준으로 연간 여객 2,700만 명, 화물 170만 t을 처리할 수 있으며, 2010년에는 여객 3,287만 명, 화물 337만 t, 2020년에는 여객 1억 명, 화물 700만 t 처리를 목표로 하고 있다.
여객터미널에는 에스컬레이터 130대, 엘리베이터 104대, 자동보도 46대, 수화물 운송설비 4대 등 승객 편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으며, 매장·면세점 등 각종 상업시설과 귀빈실 등이 마련되어 있다. 활주로는 길이 3.75km, 폭 60m짜리 2개가 설치되어 있어 활주로가 1개뿐인 여타 공항들과 비교해 항공기의 이착륙이 편리하고 각 활주로마다 초대형 여객기의 이착륙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관제탑은 높이 100.4m에 넓이 179㎡로 세계에서 3번째 규모이다.
인천국제공항은 지리적으로 동북아시아 교류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다. 비행거리 3시간 이내에 있는 인구 100만 이상의 도시가 43개에 이르고 미국 동부까지도 중간기착 없이 비행할 수 있는 등 지리상의 이점이 커 세계적인 공항으로 발돋움할 전망이다. 그러나 인천국제공항은 육지가 아닌 섬 위에 세워진 관계로 공항이 위치한 영종도와 인천 육지부를 연결하는 인천국제공항 고속도로를 통해서만 공항에 접근할 수 있어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인천국제공항(仁川國際空港, Incheon International Airport, (IATA: ICN, ICAO: RKSI))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국제공항으로 대한민국 대부분의 국제선이 이곳을 통해 운항한다. 원래는 서울특별시 강서구에 있는 김포국제공항이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국제공항이었으나, 김포국제공항 바로 옆에 발산동, 마곡동, 방화동 등의 거주지가 있어 더 이상 확장을 하지 못 하는 상황에서 입·출국 수요가 계속해서 늘어나는 것을 해결하고자 용유도와 영종도, 그리고 일부 바다를 메워서 건설한 신공항이 바로 인천국제공항이다. 또한 김포국제공항이 인근 거주지로 인해 비행기의 이·착륙 시간이 제한되어 있는 데 반해 인천국제공항은 공항신도시가 공항과 다소 떨어져 있어서 24시간 운항이 가능하다. 아시아나 항공, 대한항공, 폴라에어 카고가 이 공항을 허브로 사용하고 있다.
위치는 인천광역시 중구 운서동( 북위 37°27′5″, 동경 126°26′4″)이며, 2007년 3월 23일에는 인천국제공항철도가 개통되었다. 공항 운영은 인천국제공항을 위하여 설립된 인천국제공항공사(IIAC)에서 담당하고 있다.
인천국제공항 건설 사업은 인천 중구 운서동 영종도와 용유도 사이 간석지를 매립하여 1,700만 평의 부지를 조성하여 1992년부터 2020년까지 총 4단계로 나누어 추진한다. 제1단계로 1989년부터 타당성조사 및 기본설계를 거쳐 1992년 11월 착공 공사인 남쪽과 북측 방조제 공사를 시작으로 1996년 여객터미널 신축공사를 착공, 2000년 6월까지 인천국제공항 1단계의 주요 공항 시설물을 준공하고 동년 12월에 마무리되었다. 8년 4개월 동안 총 공사비는 7조 8,079억 원이 투입되었다. 개항할 때까지 수차례의 종합 시운전을 시행하고 여객과 수하물 및 항공기를 동원한 가상훈련을 실시·점검한 후 2001년 3월 29일에 개항하였다. 1999년 2월 2일에 인천국제공항공사가 설립되었으며, 현재도 공항을 확충하기 위해 공항을 확장 및 건설하는 중이다. 2008년 8월 현재, 4km의 초대형 활주로와 새 탑승동 등을 건설하는 것이 목적인 인천국제공항 2단계 사업은 이미 2008년 6월 15일에 완공되어서 운영 중에 있고, 3단계와 4단계도 건설 예정이다. 그러나 현재 3단계 계획에 정부 예산이 한 푼도 지원되지 않을 거라는 논란이 있는데, 현 정부의 인천국제공항 민영화 시도로 흑자 기관을 일부러 적자인 것처럼 보이게 해서 예산을 줄인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8. 용궁사(龍宮寺)
용궁사는 신라 문무왕 10년(670)에 원효대사가 백운사(白雲寺)로 창건했다고 한다. 그 후 조선 철종 5년(1854)에 흥선대원군이 중수하여 절 이름을 용궁사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일주문을 대신하여 입구 양쪽에는 진언 ‘옴마니반메훔’이 음각된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정면으로 용황각이 있고, 표지석 지나 왼쪽으로 오르면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신 대웅보전이 있다. 최근의 건물로 역사성과는 거리가 먼 건물이다. 용궁사 경내에는 수령이 1300년쯤 되었을 오래된 느티나무 2그루가 있어 그 역사를 대변해준다.
기본도량과는 달리 중앙에 위치한 요사채에는 그 중앙에 대원군 친필이라는 ‘龍宮寺’ 편액이 달려 있다. 요사채 뒤로 좌측에 관음전, 우측에 칠성각이 있다. 정면 3칸에 맞배지붕인 관음전 4개의 기둥엔 해강 김규진이 썼다는 주련이 있다. 서산 개심사에 ‘象王山開心寺’라는 편액도 해강의 예서체 작품이다.
※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1868 평남 중화~1933. 6 서울.
서화가.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용삼(容三), 호는 해강(海岡)·만이천봉주인(萬二千峰主人)·백운거사(白雲居士). 8세 때부터 외삼촌인 서화가 이희수(李喜秀)에게 글씨를 배웠고 18세 때 중국에서 8년간 서화를 공부하고 돌아왔다. 귀국 후 서울로 올라와 왕세자인 영친왕의 사부(師父)가 되어 글씨를 가르쳤고 1902년경 일본에 가서 사진기술을 익혀 1903년 소공동 대한문 앞에 '천연당'(天然堂)이라는 사진관을 열었다. 그 후 1913년 다시 그 사진관 안에 '고금서화관'(古今書畵觀)이라는 최초의 근대적 화랑을 개설하여 표구 주문과 함께 서화매매를 알선하기도 했다. 1915년 5월에는 '고금서화관' 신축건물에 다시 '서화연구회'(書畵硏究會)라는 3년 과정의 사설 미술학원을 열어 후진양성과 전람회를 개최했다. 이때 학생들의 교재로 <서법요결 書法要訣>·<난죽보 蘭竹譜>·<육체필론 六體筆論>등을 펴냈다. 한편 '서화미술회', '서화협회'에 창립발기인으로 참가했으며 조선총독부 미술전람회의 서예부 심사위원을 맡기도 하는 등 근대서화계몽운동에 적극적인 활동을 계속하다가 66세로 죽었다. 서예의 각체에 두루 능하며 특히 활달한 대필서로 이름을 날렸다. 금강산 구룡연의 20m에 달하는 미륵불(彌勒佛) 예서, 내금강의 천하기절(大下奇絶) 초서, 법기보살(法起菩薩) 해서 등 각서(刻書)가 남아 있고 전국의 궁전·사찰·현판에 많은 글씨를 남겼다. 그중에서도 해인사의 '가야산해인사'(伽倻山海印寺), 부벽루의 '금수강산'(錦繡江山), 서울의 '보신각'(普信閣), '희정당대조전'(熙政堂大造殿) 등이 유명하다. 그림으로는 1920년 창덕궁 희정당에 그린 벽화 <총석정절경 叢石亭絶景>과 <금강산만물초승경 金剛山萬物肖勝景>이 있는데 화려한 색채와 사실적 묘사로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문인화가답게 호방한 필치가 돋보이는 묵죽(墨竹)이 뛰어나며 근대적 화풍이 엿보이는 <폭포>·<말>등의 작품도 있다.
원래 관음전에는 옥불을 모셨었는데, 일제시대 때 침탈당해 지금은 볼 수가 없다. 그 옥불에 얽힌 전설이 절이름을 백운사에서 용궁사로 바꿔 놓았다.
옛날 영종도에는 고기잡이를 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손씨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고기를 잡기 위해 늘여 놓았던 그물을 걷어 올리니 그물에 작은 옥돌부처가 걸려 올라왔다. 부처님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불심도 없었던 손씨는 투덜거리며 고기대신 걸려온 옥돌부처를 바다에 던져버렸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물을 건질 때마다 그 옥돌부처가 걸려 올라왔다. 이런 일이 반복되니 손씨로서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무슨 사연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손씨는 그 옥돌부처를 백운사로 가져가니 그때부터 백운사에 모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 후 말이나 소를 타고 그냥 백운사 앞을 지나려면 어찌된 일인지 우마의 발이 땅에서 떨어지질 않아 움직일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이 소문으로 널리 퍼지니 그 이후론 절앞을 지나려면 누구든 우마에서 내려 걸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고종이 등극할 때까지 이곳에서 은거하던 흥선 대원군이 이 옥돌부처에 얽힌 전설을 전해 듣고는 절 이름을 ‘용궁사’로 하는 게 좋겠다며, 친필 편액을 써주니, 그 편액이 오늘날의 편액이며, 절이름도 바뀌어진 것이다.
용궁사가는길 :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영종도-운서동(운남동)-용궁사(운남동 667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