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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톨릭 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솔빛
'제자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 틴토레토
2010년 5월 7일 부활 제5주간 금요일
사도 15,22-31; 요한 15,12-17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요한 15,12-17)
남의 일 /장재봉신부님
초대교회에 쏟아진 성령의 은사들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곧잘 부러워합니다.
한편 초대교회를 휩쓴 탄압과 폭력을 기억하면서
몸서리를 칩니다.
그러나 그들이 감수해야 했던
죽음을 무릅쓴 순교신앙은
‘남의 일’처럼 생각합니다.
성령께서는 지금 이 시간 우리에게도
쏟아 붓고 계십니다.
우리들의 삶은
유혹과 시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순간마다
작은 순교를 실천해야하는 까닭이고
유혹을 넘어서도록 돕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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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성령이 충만한 초대교회 안에서도
“몇 사람”이
“교회의 지시”가 아닌 여러 가지 말로
교인들을
“놀라게 하고 정신을 어지럽게”하였다는 것은 뜻밖입니다.
그리고 그들처럼
지금 우리 교회 안에도
교회의 가르침이 아닌 말로
현혹하고 꼬드기는 세력,
악한 말의 유혹과 횡포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우리 가운데에도 분명히
사탄의 앞잡이가 되어
교회의 지시가 아닌 바를 주장하며
교회를 병들게 하는 무리가 있으니까요.
주님께서는 오직 사랑을 말씀하시고
더 큰 사랑으로 살 것을 명령하십니다.
우리는 그분 말씀의 종이 아니라
복음이신 그분의 친구가 되라고 청하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은 사랑의 열매임을 밝히십니다.
아울러 성령께서는 결코
상대에게 “짐을 지우지 않는” 분이심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독서가 전하는 교회의 결정이
참 따뜻합니다.
“우리는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사랑이란 상대를 옭아매는 올무가 아니며
사랑이란 상대의 힘을 북돋우는 일이란 걸 배웁니다.
사랑은 상대를 격려하고 기쁘게 해 주는 것임을 새깁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상대를 비판하고
사랑한다는 허울로 상대를 괴롭히는 일이야말로
이웃을
놀래키고 어지럽히는 못된 짓입니다.
이야말로
교회를 망신시키는 꼴뚜기의 꼴이며
교회 안에 스며든 악의 앞잡이일 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친구는
복음을 남의 일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때문에
매 순간 사랑을 실천하기를 원합니다.
온 삶에서 사랑으로 순교할 각오를 다집니다.
주님의 친구는
그날,
맨발로 달려 나와 맞아주실 그분과의 만남을 기대하고
눈물을 닦아 주실 그 위로를 고대합니다.
아울러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외면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습니다. 아멘
사랑이 사랑이라면 /김찬선신부님
언젠가 한 수도자와 대화를 하는 중에
그분이 “사랑을 베풀지 못했다.”는 말에 거부감이 든 적이 있었습니다.
자기를 뉘우치는 뜻에서 한 말이었는데도.
베풀다는 말이 상당히 시혜적으로 들렸습니다.
상당히 높은 사람이
줘도 되고 안 줘도 되는데
위에서 크게 선심 쓰듯 뭔가를 주고
그에 따른 치사를 기대하는 그 사랑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그렇게 거슬렸던 것은
저 또한 많은 경우 시혜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북한을 위해 일을 할 때에도
제가 시혜적인 태도를 취할까봐 매우 신경이 쓰입니다.
“너희는 얻어먹으면서도 어찌 그리 배짱이냐!
또 한 번 그런 식으로 하면 때려 칠거야!”
만일 이런 생각이 든다면 이것은 시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요구하는 사랑은 이런 사랑이 아닙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우리의 사랑은 계명입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그 말씀을 존중한다면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내 사랑을 큰 희생으로 주는 것이라면
줄 수도 있고 안 줄 수도 있지만
나누도록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기에
우리는 그 사랑을 반드시 나누어야 합니다.
둘째 우리의 사랑은 예수님께서 하신 대로 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사랑은
우리를 종이 아니라 친구로 만드신 사랑입니다.
누구를 비참하고 비굴하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군림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사랑이라면
사랑 받는 이로 하여금 자존감을 갖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황송하게도 발 닦임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우러러 나오는 마음으로 형제의 발을 닦을 때
우리는 예수님 사랑의 반열에 오릅니다.
예수님과 친구가 되어 어울리려면
예수님과 같은 수준의 사랑을 해야 합니다.
그 사랑은
으스대는 사랑,
칭송과 감사를 대가로 요구하는 사랑,
그러지 않으면 포기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받은 사랑에 대한 감사의 사랑,
받은 사랑이 하도 많아 넘치는 사랑,
사랑할 수 있음에 대한 감사의 사랑,
사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뿌듯한 사랑,
그래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계명의 사랑입니다.
친구가 되어 /김동하 신부님
800여 년 전 가녀린 나뭇잎이나 듬직한 바위나 풀을 뜯는 양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자신을 내려놓은 덕분에
눈이 트이고 귀가 열린 것입니다. 겸손과 가난을 받든 덕분에
보이는 임들 안에서 사랑을 속삭인 것입니다.
어떤 임과 친구가 된다는 것은 나를 내려놓고 임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모습도 생각도 환경도 다르지만 임을 위하여 내려놓고 받아들이기에
대화할 수 있습니다. 격을 무너뜨린 친구끼리의 대화는
사랑을 만날 수 있기에 힘이 솟고 기쁨이 넘칩니다.??
하늘에 계신 임께서 친구가 되어주시기 위하여 목숨을 내려놓으시고
죽음을 받아들이십니다. 목숨을 팔아서 당신의 임인 인간을 품속으로 사들입니다.
친구로서 보여주시는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을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임을 친구로 두었다는 것이 먹지 않아도 배부를 만큼 한량없이 기쁩니다.
사랑의 나눔 /권태문 신부님
예전에 중국 호북성의 형주시에 있는, 한국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나환자센터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 있는 나환자들은 그곳 센터로 오기 전에 모두
독거노인들이었습니다. 나병에 걸린 이후로 가족들에게서 버림받고,
도움도 없이 홀로 살아야 했던 이들이었습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환자들 대다수의 마음 안에는 따뜻한 사랑이 있다는 걸 체험할 수 있었고,
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짐승같이 살았던 나를 이렇게 사람처럼 살게 해준 수녀님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천주님을 알진 못하지만, 배우고 싶습니다. 천주님은 수녀님같이
따뜻한 분이시겠지요.” 은혜를 잊지 않는 따뜻한 그 말씀 안에, 그들 사랑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과거 나병으로 인해, 가족들로부터
버림받아 외톨이가 되어, 병은 점점 깊어지고, 정말 상처와 고통뿐인 삶이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 센터로 온 후, 수녀님들의 지극한 간호와 사랑을 받으면서,
몸의 상처와 더불어, 마음의 상처까지 깨끗이 치유된 그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 오늘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나눔에 대해 묵상하게 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수녀님들의 사랑의
나눔은 가난하고 소외된 그 나환자들의 삶을, 어둠과 절망의 그늘에서
빛과 희망의 삶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예수님의 계명 /최병조 신부님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참으로 벅찬 계명입니다. 늘 사랑하고 또 사랑한다는 것은 그리고 더욱이
예수님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입니다.
그래도 주님의 명령이니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의 결과는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더 이상 노예가 아닌 친구라고 부를 것이고, 우리는
삶의 열매를 많이 맺게 될 것이며, 그분은 아버지에게 청하여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을 얻게 해주실 것이라고요.
사랑의 열매는 참으로 위대하고 놀랍습니다. 우리가
사랑한다면 우리한테는 아무 문제도 걱정도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사가는 먼저 그분 안에
‘머물라?(stay in me)’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다음은 ‘남아있으라?(remain in me)’고 하십니다.
우리는 우선 성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다음에는 구체적 사랑 실천으로 늘
그분 현존을 드러내며 ‘남아있는 자’가 될 것입니다. 사랑 실천은
조건 없이, 지금, 할 수 있는 한 우리 시간과 재물과 능력을 나누는 것입니다.
‘주님! 우리의 사랑으로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하소서. 아멘.’
신을 인간으로 만나다 /손우배 신부님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믿는
신을 인간으로 만나게 됩니다. 우리처럼 느끼고, 슬퍼하고, 사랑하는 따뜻한
심장을 가진 사람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종교도 자기가 믿는
신을 우리처럼 인간으로 만나는 종교는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더욱이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당신의 살과 피를 함께 나누며
당신과 일치하도록 초대된 자녀들입니다.
그런 주님께서 오늘 우리를 벗이라고 부르십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한낱 피조물인 우리를 벗이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의 품격은 엄청난 격상을 하게 됩니다.
옹기장이는 자신이 만든 옹기를 소중히 아낄 수는 있지만, 자신이 만든 옹기를
사랑하고 또 벗이라고 부르며 심지어 자신이 만든 옹기를 위해 목숨을
바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바로 ‘나’라는 옹기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치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내어 놓으시는지요!
사랑의 스승 /김태훈 신부님
제가 수도원에 입회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의 일입니다.
아버지는 하느님을 믿지 않으셨고 집안도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었는데,
장남인 제가 수도원에 입회한다는 것은
아버지께 얼마나 큰 짐이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제 의견을 존중해 주셨고,
비록 입회를 기꺼워하지 않으셨지만 막지도 않으셨습니다.
저도 어려운 집안을 내버려 두고 떠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는데,
여하튼 하느님의 은총으로 수도원에 입회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막내 동생이 군에서 휴가를 얻어 집으로 내려가기 전에
저를 찾아왔습니다. 동생과 함께 식사하고
보낼 때가 되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래도
형인데 찾아온 동생에게 하다못해 차비라도 주고 싶었지만
전 가진 것이 하나도 없으니 마음이 무척 아팠고 몹시 미안했습니다.
수도 서원을 한 수사님들은 쥐꼬리만 해도 용돈이란 것이 있었지만
수도회에 막 입회한 지원자는 공동으로 사용하는 경비 외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식탁을 정리하는데
한 수사님이 제 곁에 남아 계시더니 저에게 조용히 다가오셔서
동생에게 주라며 제 손에 몇만 원을 쥐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저는 그 수사님에게 정말 감사했고,
제 마음을 읽으시는 주님을 느끼며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그 수사님은 그 일에 대해 기억을 못할 수 있지만 제게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때의 감동이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그 수사님의 사랑의 열매는 제 마음에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사랑에 빚졌고 그 받은 사랑에 보답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사랑을 실천해야 할지 잘 모릅니다.
다행히 제 주위에는 예수님의 사랑을 몸으로 느끼게 하는 고마운
사랑의 스승들이 있어서 한 걸음씩 사랑의 길을 배워 가고 있습니다.
오늘 스승의 날, 스승이신 예수님과 그분을 닮은 또 다른 스승을
많이 만나고 저도 그 무리에 속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십자가의 가난과 포용력의 관계 /전삼용신부님
오늘 아침식사를 신부님 한분과 함께 하면서 우리가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어떤 원로신부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처음엔 그 분의 결단력과 성품에 대해 좋은 평을 서로 늘어놓았습니다.
그 분은 정말 가난하게 사시고 교회 정신에 맞게 성인처럼 사시는 분입니다.
개인적인 삶으로는 누구도 쫓아오지 못할 정도로 열심히 사셨습니다.
그러다가 단점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포용력의 부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함께 식사하던 신부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분은 실패한 경험도 없고 당신이 완벽하셔서
다른 사제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수긍이 가는 말이다 싶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모습이 저의 모습이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제가 사는 삶이 모범이라고 생각하여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살도록 권유하고 또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왜 안 될까?’라는 생각을 많이 해 왔습니다.
이는 아마 나와 같은 수준의 사람을 만들어서 나를 이해
해주는 누군가를 갖기를 원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저도 같은 사제들을 보면서 많이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나중엔 제가 생각하기에 좋지 않은 모습들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어찌할 수 없다는 생각에 그냥 내버려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사제가 목자로서 신자들을 잘 이끌면 되지.’라고 생각하여
사제들보다는 신자들에게 먼저 신경을 쓰며 살게 되었습니다.
사실 사제들보다 신자들이 더 좋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그 신부님의 말씀을 듣고 제 자신을 돌아보니 저도
혼자서는 잘 살지만 함께 받아들이며 사랑하는 형제적인 모습을
이루는 것에는 많이 부족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최후의 만찬 때에 당신이
뽑으신 사도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이 뽑으신 사도들은 모두가 성인들이 아니었습니다.
부족한 사람들도 있었고 좀 더 완전한 사람들도 있었고,
유다와 같은 배신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도단을 성인들이 아닌 보통 사람들로 구성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보통 사람들이 모여 당신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모범을 사람들에게 보이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포용하는 마음이 있어야합니다.
유다는 그런 면에서는 다른 사도들의 스승이었습니다.
다른 사도들이 거짓말쟁이이며 도둑이고 배신자인
유다를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유다가 배신자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합니다.
모두가 유다를 형제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그렇게 참고 받아들이고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성장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종이 아닌 친구로 부르시는 것을 보면서
정말 완전하신 하느님께서 어떻게 이렇게 흠이 많은 인간을
친구로 여길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모범은 당신의 생명까지도
벗을 위해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주신다는 뜻은
자신을 온전히 비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이 많은 사람은 자신을 온전히 남에게 주어서
자신을 비웠기에 누구도 이해하고 안아줄 수 있는
무한한 포용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내가 나로 가득 찰수록 사랑이 줄어들어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이 있으면
부딪혀서 감정이 상하느니 그냥 외면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누구 하나
놓치지 말고 품어줄 수 있는 어머니의 마음을 가지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 넓은 마음은 또한 모든 것을 내어놓는
사랑의 마음에서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부족하면 상대방을 감싸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온전히 비워버린 십자가의 예수님을 묵상해봅시다.
당신의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아끼지 않고 주실 수 있었던 사랑,
그렇게 자신을 비울 줄 아는 사랑을 가져야만
우리도 예수님의 진정한 친구가 될 것입니다.
"참 좋은 친구" /이수철신부님
주님은 우리 모두의 참 좋은 친구입니다.
친구인 주님과 속내를 털어 내놓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세월 흐르면서 색깔 바래지듯,
대부분의 인간관계도 그런 것 같습니다.
한 때는 색깔 짙었던 관계들도
지금은 희미하게 자취만 남아있기도 할 것입니다.
다 퇴색해가더라도
주님과의 우정은 날로 짙어져 갔으면 좋겠습니다.
예전에 써놓은 글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 당신
언제나
거기 있음에서 오는
행복, 평화
세월 지나면서
색깔은
바랜다지만
당신 향한
내 사랑
더 짙어만 갑니다.
안으로
안으로
끊임없이 타오르는
사랑입니다.
세월 지나면서
계속
새로워지고
좋아지고
깊어지는
당신이면 좋겠습니다.’
물론 당신이 지칭하는 대상은 주님이십니다.
매일의 복음 말씀이
초심으로 돌아가 주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깊게 합니다.
날로 색깔 바래져 가는 사랑이 아니라,
날로 짙어져가는 사랑입니다.
이 주님과의 사랑이
허무를 딛고 초록빛 열정으로 살게 하는 힘입니다.
마지막 친구는 주님 하나뿐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친구’라는 호칭,
얼마나 영예롭고 고마운지요.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천하면
비로소 주님의 친구가 된다 합니다.
주님과의 우정의 깊이는
저절로 형제들 사랑으로 표출됨을 깨닫습니다.
새삼 우리와 주님과의 우정의 상태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날로 바래져가는 상태입니까?
날로 짙어져가는 상태입니까?
둘 중 하나지 중간은 없습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았던 숱한 성인들,
참으로 주님의 참 좋은 친구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의 다음 두 사도들에 대한 묘사도 감동적입니다.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
예루사렘 교회가 두 사도에게 붙여준 명예로운 칭호대로
두 사도들 주님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정도의
주님의 참 좋은 친구들이었습니다.
이미 타계한 불교의 고승 성철 종정의 좌우명도 생각납니다.
종신불퇴(終身不退),
몸이 다하더라도 결코 물러나지 않겠다는,
몸 다 바쳐 진리를 수호하겠다는
수행자의 결연한 의지가 우리를 숙연하게 합니다.
주님을 위해 평생 배수진을 치고 살았던
주님의 참 좋은 친구들인 바르나바와 바오로요,
역시 진리 수호를 위해
평생 배수진을 치고 살았던
진리의 참 좋은 친구, 성철 종정이었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주님의 말씀처럼
우리를 친구로 택하셔서
우정을 깊게 하시기를 바라시는 주님이십니다.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이
부활하신 주님과의 우정을 깊게 하면서
우리를 주님의 참 좋은 친구로 만들어 주십니다.
아멘.
비밀 /노성호 신부님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습니다. 좋은 일이어서 소중히 여기려는 마음에 혼자만
간직하고 싶은 비밀도 있고, 별로 좋은 일이 아니기에 들춰내고 싶지 않고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 이롭지 않다고 생각하여 혼자서 삭히고 마는 비밀도 있습니다.
그런데 완전한 비밀은 결코 없는 것인지, 언젠가는 누군가를 통해서 알려지게
마련입니다. 사실 비밀이라는 것을 말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말하는
사람의 전 인격이 노출될 수도 있고, 때로는 입이 가볍고 형편없는 사람으로
각인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도 그 비밀을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그 사람을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바로 비밀을
말해 줄 수 있고, 말해 주고 싶은 좋은 사람, 그는 바로 친구입니다. 저는 학
생들을 만나면 늘 “오~ 내 친구들! 어서 와. 반가워” 하고 인사를 나눕니다.
사제라면 어려운 존재로 여겨질 것 같은 벽을 허물고자 함입니다. 때로는 수많은
난관에 처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그들과 하나 되려고 노력하면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로운 비밀들을 알려 줍니다. 그 비밀은 작고 소박해 보이지만,
친구들이 맺게 될 열매를 더욱 풍성하게 해 줄 소중한 비밀이기에 우리 모두를
‘친구’라고 불러주신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면서 살며시 알려주는 게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님께만
속삭여 주셨던 아름다운 비밀이었습니다. 이젠 우리가 속삭여 줄 차례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가뭄 끝 단비 같은 고마운 존재 /양승국신부님
오랜만에 단비가 내리는군요.
모심기를 준비하시는 농부들에게 반가운 손님 같은 고마운 비입니다.
저 역시 덩달아 기분이 좋아집니다. 이번 비로
단숨에 쑥쑥 키가 클 모종들 생각하니 흐뭇할 뿐입니다.
시원하게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우리가 서로에게
‘가뭄 끝 단비’와 같은 반갑고도
고마운 존재여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당부하시는데,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오래 기다리던 단비처럼 존재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아닐까요? 존재 자체로 서로에게 스트레스의 원천이 아니라
행복의 원천, 기쁨의 원천이 되고자 노력하는 것이겠지요.
업무 차 지방에 갔다가, 돌아오니 꽤 시간이 늦어졌습니다.
버스가 끊어져 택시를 탔습니다. 게다가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각,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목적지를 대니 기사님의 얼굴에 조금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제가 사는 곳이 꽤 외진 곳이거든요. 게다가 강의록이랑
영적독서 책을 넣어 안주머니가 불룩한 새까만 잠바를 입었지요.
그럭저럭 집 가까이 도착했는데, 비도 많이 오고해서 수련관 건물까지
100미터 정도만 올라가면 되니 조금 더 올라가자고 부탁드렸습니다.
난색을 표하시더군요. 긴장된 얼굴로.
그 순간 약간 기분이 묘했지만,
기사님의 입장 충분히 이해가 갔습니다.
아무소리 않고 택시에서 내렸습니다.
비가 내리는 한밤, 만만치 않게 생긴 사람이 불빛도 없는
으슥한 곳으로 올라가자니 얼마나 겁이 나셨겠습니까?
요금을 받자마자 총알처럼 달려 내려가시더군요.
비를 맞고 수도원으로 걸어 올라오면서 혼자 킥킥 웃었습니다.
제 입장에서 생각하면 기분 나쁠 법도 하지만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그분 행동이 충분히 이해가 갔습니다.
우리가 눈만 뜨는 외치는 사랑이란 것, 특별한 것이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로 살아가는 것,
상대방 입장에서 서보는 것, 나 자신을 비우는 것, 나란 존재를 내세우지 않고
한 걸음 물러나서 상대방을 바라보는 것이 사랑이 아닐까요?
육체가 이끄는 대로 행동하기보다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영혼의 소리에 따라 행동하는 것, 눈에 보이는 것이 결코 다가 아니기에
보이는 것 그 너머의 것을 보고자 노력하는 것이 사랑이 아닐까요?
딱딱하기 그지없는 나란 존재를 둘러싸고 있는 오랜 허물을 과감하게
벗어버리는 일, 그래서 결국 하나의 깨달음에 이르는 일,
결국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존재, 사물, 상황은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선물임을 자각하는 일이 사랑이 아닐까요?
결국 사랑은 부드러움,
강요하지 않음,
겸손, 떠남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꽃이 저리 아름다운 것은 자기 자태를 뽐내지 않기 때문이고,
무지개가 저리 고운 것은 잠시 머물다 가기 때문입니다.
겸손, 떠남, 그것은 사랑, 아름다움의 가장 큰 배경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다른 모습으로 산다 /박상대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의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말씀(15,1-8)이 전체의 흐름을 주도한다. 복음의 주제는
어제 복음에서와 같이 예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열매를 맺는 것이다. 즉,
가지가 열매를 맺음으로써 농부에 의해 잘려나가지 않고
계속 나무에 붙어있게 되며, 역으로 계속 나무에
붙어있음으로써 열매를 맺게 된다.
열매는 가지와 나무의 기쁨이요, 동시에
농부의 기쁨이며, 농부의 지속적인 손질을 유발한다.
따라서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곧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며,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 동시에 계명을 준수하는 일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1차 고별사의 대의(大意))였던
“서로 사랑하여라.”(13,34)는 새 계명이 두 번이나 반복된다.(12절, 17절)
이는 후기편집자의 의도를 역력히 드러내는 대목이다.
이 반복은 예수님의 직접적인 발설이기보다 요한복음
공동체 안에 발생한 ‘서로의 불신과 반목’ 등을 경고하는
후기 편집자의 의도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반복되는 계명은 곧 ‘서로 간의 사랑’으로서 이 사랑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한 모범적 사랑에 근거한다.(12절)
사랑에도 등급(等級)이 있으며, 사랑도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다.
사랑은 자칫 추상적인 것이어서 “사랑한다.”는 말만으로는
가장 작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사랑은
구체적인 옷을 입고 드러나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사랑으로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3절)며 잘라 말씀하신다. 그렇다고
사랑이 벗을 위한 목숨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나아가 주인이 종에게 명령하거나 강요하여 얻어내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사랑은 자유로이 이루어지며 가장 큰 사랑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침’으로 드러난다. 이것도
예수님께서 오늘 고별의 밤을 지낸 다음 날
실제로 보여주실 모범적 사랑에 근거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아들로서 아버지와 공유하는 지식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었다는 이유로 제자들을
‘종’이 아닌 ‘친구’로 부르신다.(15절) 물론
예수님과 제자들의 ‘친구관계’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계명에 충실한
것처럼 제자들도 예수님의 계명에 충실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성립된다.(14절)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상기시키신다.
가지가 나무를 선택할 수는 없다. 당연히 나무가 가지를
선택하는 것이며, 가지는 철저하게 나무에 종속된다. 즉
나무와 가지는 ‘주인과 종’의 관계에 있다. 그러나
가지가 사랑의 계명을 통하여 영원히 남을 열매를 맺는다면
이 관계는 ‘친구와 친구’의 관계로 전환된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느님 앞에
‘예수님의 이름을 통하여’ 구할 수 있는
최고의 값진 것이 아니겠는가?(16절)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17절)
사랑은 자칫 추상적인 것이어서 “사랑한다.”(I love you!)는
말만으로는 가장 작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다.
말보다 조금 더 큰 사랑은 옷을 입고 육화되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너를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구체적인 사랑은
어떤 것일까? 영어 문장의 스펠링으로 운을 띄워보자.
I : 실제로 따뜻함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다.
L : 혼자서만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남의 말도 듣는 것이다.
O : 누구도 열 수 없는 마음의 문을 열어 남에게 공간을 주는 것이다.
V : 우정을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다.
E : 신뢰심과 믿음을 실제로 보여주는 것이다.
Y : 좋은 분위기를 배려하고 조성하는 것이다.
O : 타인의 잘못을 한 번 이상 눈감아 주고 덮어주는 것이다.
U : 서로의 차이점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구체적인 행동이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나은 사랑이며,
결국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다.
“저는 최대한 인생을 즐기며 살고 싶습니다.
즐긴다는 게 맨 날 논다는 뜻이 아니라 일을 해도, 공부를 해도 즐겁게 하고,
되도록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을 때하며, 언제든지 뒤돌아서면
후회 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 그런 저를 만들어 갈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살아가면서 안 될 때도 있고 힘든 날도 있겠지만,
그 까짓것 때문에 피해가고 뒤로 물러서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고난과 역경도 저의 인생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죠. … 언제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고 헤쳐 나갈 용기가 있습니다. …”
[이 글은 1974년 7월 13일 울산광역시 우정동에서 출생, 일본 유학 중이던
2001년 1월 26일 도쿄 신오쿠보 지하철역에서 철길에 뛰어든 취객을 위해 목숨을 바친
고(故) 이수현님의 생각이다. 고인(故人)은 부산 시립공원(금정구 두구동)
7묘원 39블록 1106호에 잠들어 있고, 추모기념비는
부산 어린이대공원 내 학생교육문화회관 앞뜰에 세워져있다.]
세상에서 뽑다(요한 15,18-21) /유광수신부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세상의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주님께 뽑혔다는 것은 얼마나 큰 영광인가?
그러나"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는 것은
큰 영광이지만 또한 큰 책임감을 느끼는 말이다.
세상에서 뽑히운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살아가는 목적이 다르고, 형태가 다르고,
가치가 다르다는 말일 것이다. 세상의 성화를 위해서
특별히 어떤 사명감이 주어졌다는 말이다.
세상과 다르게 살아야 하고 다른 가치관과 다른 삶의
형태를 취하고 살아야 할 이유는 내 뜻이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를 뽑은 그분의 뜻에 달려 있다.
여기에서부터 우리들의 삶에 어려움이 시작된다. 분명히 우리들은
우리의 뜻이 있고 우리들이 살아가고 싶은 삶의 형태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뜻을 버리고
우리를 뽑은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나의 뜻과 나를 뽑으신 분의 뜻이 일치되기 전까지에는
계속 갈등이 일어날 것이다.
나의 뜻이 나를 뽑은 그분의 뜻에 일치될 때만이
우리들은 그분의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그분이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그분이 우리를 뽑은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수요일과 목교일에 한국 수도자 장상
연합회가 우이동 명상의 집에서 있었다.
폐막 미사를 집전하신 이한택 주교님께서 수도자는
"누룩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고 강조하셨다.
세상에서 우리 신자들의 역할은 빛, 누룩, 소금의 역할인데
그 중에서 교구 신부님들은 빛의 역할이라면 수도자는
누룩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빛은 빛을 비추어 주기 위해서 겉으로 드러나 있어야 하지만
누룩은 드러나지 않게 있으면서 부풀린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도자는 남 앞에서 드러내는 역할보다는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 부풀리는 역할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수도자뿐만 아니라 축성봉헌의 삶을 사는 모든
이들은 세상 한 가운데 살면서 누룩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를 세상에서 뽑은 이유이고 목적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세상 속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도 안되고
세상 사람처럼 세상의 것으로 또는
세상의 것을 목적으로 살아도 안 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오늘 날 우리 사회가 이토록 타락하고 어지러운 것은
세상 한 가운데에서 누룩의 역할을 하라고 뽑은 우리들이
우리들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책임도 있다.
세상 곳곳에 얼마나 많은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이 있는가?
그러나 그 어느 곳에서도 빛 또는 누룩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우리는 다시 한번 세속에 사는 평신도의
사명에 대한 공의회의 가르침을 들어 보자.
[평신도들은 본래 현세적 일에 종사하며 하느님의
뜻대로 관리함으로써 천국을 찾도록 불린 것이다.
그들은 세속에 살고 있다. 세속의 온갖 직무와 일,
가정과 사회의 일상 생활 조건들로써 그들의
존재 자체가 짜여진 것처럼 그 속에 살고 있다.
그 속에서 그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복음의 정신으로
스스로의 임무를 수행하며 마치 누룩과도 같이 내부로부터
세계성화에 이바지하는 것이며 특히 믿음과 바람과 사랑에 빛나는
실생활의 증거로써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자신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현세의 사물들을 비추어 주고 관리함으로써
모든 것이 언제나 그리스도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자라서
창조주와 구세주에게 찬미가 되도록 하는 그것이다.](교의헌장 31항)
세상에서 우리를 뽑아 주셨다는 것은 단지
어떤 사명감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감만 생각한다면
너무나 무겁고 짓눌리고 주눅부터 들기 쉽다.
세상을 성화시키라는 사명도 주어졌지만
실상 우리들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야고보서를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절조 없는 사람들! 이 세상과 짝하면 하느님을 등지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누구든지 이 세상의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원수가 됩니다."(야고 4, 4)
세상에서 우리를 뽑아주신 이유는 무엇보다도
우리를 구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세상을 성화시켜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무겁게 생각하기보다는 우리를
하느님의 원수가 되는 길에서 우리를 구해주셨다는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드려야 할 것이다.
그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우리의 사명에 충실한다면
기쁘게 우리에게 주어진 사도직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도직을 수행하면서 받게 되는
박해까지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 뽑히운 사람들, 세상의 성화를 위해 누룩의 역할을 해야할 사람들,
그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흐르는 사랑 /강영구신부님
+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리사랑’이라는 말을 아시지요.
어버이의 하늘같은 사랑을 받고 생명을 이어온 우리는 그 큰 사랑을
되갚지 못하고 자식을 낳아서 자식 사랑으로 대신합니다.
자식들도 같은 일을 되풀이 하면서 ‘내리사랑’을 하게 됩니다.
사랑은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물 흐르듯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사랑이 살아있는 모든 것의 생명을 이어가게 하지요.
‘치사랑’도 아름답고 고귀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리사랑’을 하면서 ‘치사랑’을 대신하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요한15,9)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서 ‘내리사랑’을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우리는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게 됩니다.
이제는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우리가 ‘내리사랑’을 할 차례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요한 15,12)
그래서 온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어야 합니다.
흐르는 물은 생명을 살리고 더러움을 씻어냅니다.
그러나 고인 물은 썩습니다.
사랑 받기만 하고 사랑할 줄 모른다면 그 사람은 이미 병든 사람입니다.
당신 가슴에 가득한 하느님 사랑이 물처럼 흐르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