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애살수(懸崖撒手)’란 벼랑에 매달려 잡고 있는 손을 놓는다는 뜻으로, 손을 놓으면 죽을 수 있는 상황에서 손을 놓는 용기나, 결단을 말한다.
따라서 사람들이 결연한 의지를 말할 때 인용하는 글귀 중 하나다. 역대 선승들의 화두를 모아놓은 <벽암록(碧岩錄)>에 전한다.
懸 : 매달 현. 崖 : 벼랑 애. 撒 : 뿌릴 살. 手 : 손 수.
참선의 순간순간을 낭떠러지에서 손을 놓아야 할 지경까지 몰입하라는 말이다.
낭떠러지에서 잡고 있는 손을 놓는다는 겉 뜻대로 해석하면 매정하고 무서운 의미다. 그러나 그 진성 의미는 그게 아니다. 그런 뜻이라면 세상에 회자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현애살수는 견인(堅忍-끈질기게 견딤), 그리고 나아가 초월(超越)을 의미한다.
낭떠러지에 실낱같이 의지하게 될 때까지 그 사람은 모든 의지와 힘으로 분투하며 최선을 다하다가(懸崖). 거기서 더 한 걸음 나아가라는 말이다(撒手).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초월을 하라는 말이다.
나무에 오를 때 가지를 잡고 오르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으나 낭떠러지에 매달렸을 때 손을 놓는 것이 대장부라며, 결단할 때는 과감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와 비슷한 말이다. 백척 난간에 한 발자국만 떼도 천 길 낭떠러지다. 그러면 결과는 뻔하다. 그런데도 감행한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털끝만큼도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그 다음 결과는 하늘에 맡기라는 의미다. 모든 걸 바쳐 추구했는데 이루지 못했다 해서 가치 없는 게 아니라는 의미이자, 그 경지까지 가기 위해서는 모든 걸 걸라는 말이다.
‘현애살수(懸崖撒手)’란 성어는 야보 도천(冶父道川) 스님의 저서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에도 나오는 게송(偈頌)의 한 구절이다. 야보 도천(冶父道川) 스님은 12세기 중국 송(宋)나라 사람으로 성은 적(狄)이고, 이름은 삼(三)이다. 생몰연대가 확실치 않다. 젊어서 재동(齊東)의 도겸(道謙) 선사 문하에 들어가 호를 받은 일화가 있다. “이제까지 너는 적삼(狄三)이었지만, 지금부터는 도천(道川)이라고 한다. 지금부터 등뼈를 곧추세워 정진한다면 그 도(道)가 시냇물(川)처럼 불어날 것이다.”라고 했다는 말이 전한다.
야보 스님은 후에 고향 재동에 돌아와 <금강경야보송>을 지었다. 이 저서는 <금강경> 해설을 시로 표현함이 독특하고 간결해 한 번에 내리치는 듯한 그의 활구(活句)가 백미다. 아래 글도 <금강경야보송>에서 야보(冶父) 스님이 <금강경>의 구절에 착어(着語)를 한 것이다.
득수반지미족기(得樹攀枝未足奇) - 나뭇가지 잡는 것쯤 기이할 것 없으니
현애살수장부아(懸崖撒手丈夫兒) - 벼랑에서 손을 놓아야 비로소 대장부로다.
수한야냉어난멱(水寒夜冷魚難覓) - 물은 차고 밤도 싸늘해 고기 찾기 어려우니
유득공선재월귀(留得空船載月歸) - 빈 배에 달빛만 가득 싣고 돌아오도다.
※착어(着語)---‘착어(着語)’란 '몇 마디 붙여둔다.' 이런 뜻이다. '착어한다' 하면, "내 몇 마디 하겠노라." 그런 뜻이다. 선원에서 공안(公案)이나 법문에 대한 짤막한 해설이나 평(評)을 말한다. 혹은 공안의 글귀 밑에 자신의 해석이나 비판을 붙인 짤막한 촌평(寸評)을 일컫는다. 착어는 공안의 참구에 큰 길잡이가 된다.
※송(頌)---송은 훌륭한 덕을 칭송하는 시나 산문이기 때문에 내용을 꾸미는 것이 특이하다. 그런데 송(頌)이 <시경(詩經)>에서 출발한 것이므로 운문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보편적이다.
‘현애살수(懸崖撒手)’란 대장부가 뜻을 한번 세웠으면 그 뜻을 실천할 때는 과감하게 실행해야 한다는 말이다. 깊은 선리(禪理)가 숨어 있는 게송으로 마음이 부처라 하지만 마음도 부처도 없어야 한다는 법문이 설해져 있다.
「이 글은 야보 스님이 <금강경>의 "모든 중생이 마음으로 상(相)을 취하면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과 수자상(壽者相)에 집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법의 상을 취하더라도 곧 아상, 인상, 중생상과 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 되며, 만약 법이 아닌 상을 취하더라도 곧 아상, 인상, 중생상과 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응당히 법도 취하지 말고 법이 아님도 취하지 말라."라는 내용에 착어를 한 것이다.
법이란 진리며 도(道)다. 진리나 도가 좋은 것이라고 해서 그것에 집착하게 되면 진리와 도는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고 인간의 집착만 남게 된다. 진리나 도를 마음에 잡아 두는 일이 장한 일이기는 하다. 마치 높은 벼랑에서 나뭇가지를 잡고 매달리는 것과 같다. 그러나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비로소 장부가 할 일을 마쳤다고 할 수 있다. 법이나 진리나 도(道)마저도 마음에 남아 있지 않아야 한다.
마치 높은 벼랑에서 나뭇가지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아 버리고 상신실명(傷身失命) 해야 비로소 대사각활(大死却活)하는 도리가 되기 때문이다. 즉, 크게 죽어야 제대로 사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심(禪心)을 아무리 설해 봐야 아는 이가 없으니, 부처님도 수보리도 또한 야보 스님도 외로울 뿐이다. 고기를 잡으러 갔다가 물은 차갑고 고기는 물지 않아 할 일 없이 빈 배에 달빛만 가득 싣고 돌아올 수밖에.
그러나 알아듣는 이가 없어도 이러한 선경(禪境)이 있는 데야 그 아름다운 경치를 숨길 수가 없다. 언젠가는 이해하고 감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혹 또 이렇게 동문서답하는 말석의 후학이 있어 먹이를 덥석 물지는 못하더라도 미끼를 집적이는 날이 있을 때를 기다려서다.」- 무비 스님
살수(撒手)라는 말은 모든 분별과 망상을 놓아버리는 것을 뜻한다. 득수반지미족기(得樹攀枝未足奇)라, 아주 높은 천길만길 되는 벼랑에서, 그것도 한손으로 나뭇가지 하나 잡고 매달린다는 것이 대단한 일이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 낭떠러지에 가까이 서는 것만으로도 겁이 나는데, 낭떠러지 쪽으로 뻗은 나뭇가지 하나 잡고 매달린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귀한 것이 아니고, 거기서 손을 놓아버려야 진짜 장부라는 말이다.
현애살수장부아(懸崖撒手丈夫兒)라, 주관과 객관, 나와 너, 옳고 그름, 선과 악, 마음과 경계 등 모든 것들을 부정해 버리고 놓아버린 상태가 상수(撒手)이다. 그래서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와 비슷한 의미라는 것이다.
모든 분별을 놓아버리면, 일체개공에 이르면 어떤 설명도 쓸데없는 소리가 된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미끄러져 절벽에 떨어지게 되었다. 다행히 미끄러지면서 나무뿌리 하나를 잡았다. 사력을 다해 두 손으로 그 나무뿌리에 매달리고 있었다. 이때 어디선가 예사롭지 않은 음성이 들렸다.
“두 손을 놓아라!” 이때 신앙심이 깊은 상근기(上根機) 사람이면 두 손을 놓는다.
그러나 신앙심이 약한 사람은 절대로 무서워서 손을 놓지 않는다. 떨어지면 죽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끝까지 절벽에 매달려 있을 뿐이다. 사실은 매달려 있는 지점이 지상에서 1m밖에 안 되는 높이지만, 이 사람은 아래를 내려다보지 못하므로 수십m 높이에 매달려 있는 줄만 안다. 내 자리가 아니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과감하게 내려놓는 것이 결국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는 방책이다.
한 때 공주 마곡사(麻谷寺)에 숨어들어 승려생활을 한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이 이 구절을 좋아했다고 <백범일지(白凡日誌)>에 나와 있다. 백범 김구(金九) 선생이 스무 살 때, 안중근(安重根) 의사 아버지 안태훈의 집에 머물렀었다. 거기서 고능선(高能善) 선생을 만나 가르침을 받을 때, 백범에게 사람은 과단성이 있어야 한다고 하며 가르쳐 준 글이라 한다. 고능선 선생은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이며 학맥으로는 화서학파(華西學派)에 속하는 선비로서, 백범의 청년 시절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때 고능선은 김구의 결단력이 부족함을 알고 그에게 평생의 좌우명이 될 만한 글로서 이를 가르쳤다고 한다. 고능선은 백범에게 아무리 밝고 지혜롭게 판단한 일일지라도 행동이 뒤따르지 않으면 소용이 없음을 자주 강조하면서 이 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에 백범은 현애철수(懸崖撤手)의 장면을 잊지 않으려고, 낭떠러지에 매달린 원숭이를 그린 그림을 벽에 붙여놓고 그림을 쳐다보면서 ‘원숭이야 매달린 손을 놓아라’고 되뇌곤 했다고 한다. 실행할 과단성을 키워 ‘진정한 대장부가 되리라’고 하는 생각에서였다.
사람들은 원숭이처럼 나무를 잘 타서 높은 가지 끝까지 오를 수 있는 사람을 일러 ‘참 기이한 재주를 가졌다’며 칭찬하지만 실은 그렇게 나무에 잘 오르는 것은 기이한 일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벼랑 끝에 매달려 있을 때 구차하게 살려 하지 말고 과감하게 손을 놓을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대장부라는 의미이다.
스승 고능선은, 예로부터 천하에 흥해보지 않은 나라가 없고, 망해보지 아니한 나라도 없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는 데도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 있고 더럽게 망하는 것이 있다. 국민이 의로써 싸우다가 힘이 다해 망하는 것은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요, 그와 달리 백성이 갈라져서 동포끼리 싸움만 하다가 망하는 것은 더럽게 망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주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