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자대전 제172권 / 묘갈명(墓碣銘)
석주(石洲) 권공(權公) 묘갈명 병서(幷序)
아! 여기 고양현(高陽縣) 위양리(渭陽里)는 석주(石洲) 권 선생이 묻힌 곳이다. 그의 세덕(世德)이 왼편에 있는 선대(先代)의 묘비에 모두 새겨져 있으니, 선생은 바로 습재공(習齋公: 권벽(權擘)의 다섯째 아들이다.
아, 선생이 살았을 때 사대부(士大夫)들이 그의 의리를 사모하고 풍도에 심취되어 한번 그를 본 사람이면 영광으로 여겨 자랑하였고, 그가 죽었을 때는 창자를 짜내는 눈물을 흘렸으며, 그를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사람들까지도 모두 슬퍼하고 탄식하여 두고두고 잊지 않았는데, 나는 왜 그렇게 했는지 알 수가 없다. 혹시 그가 시(詩)를 잘해서 그런 것이었을까.
선생의 휘(諱)는 필(韠), 자는 여장(汝章)인데 그의 사람됨이 질탕(跌宕)하고 호걸스러워 뜻은 우주(宇宙)를 덮었고 눈에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이 세상 부귀영화와 빛나고 아름다운 것과 모든 사람들이 사모하고 바라는 모든 것을 초연한 자세로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고 오직 시와 술로 일생을 즐겼으며, 과거(科擧)는 한두 번 보았을 뿐 마음을 쓰지 않았다.
송강(松江 정철(鄭澈)) 정공(鄭公)이 멀리 귀양 갈 때 선생이 길에서 그를 만나 보았는데 송강이 깜짝 놀라 탄복하기를, “내가 오늘 천상(天上)의 신선을 만나 보았으니 이 길이 어찌 다행한 길이 아니겠느냐.”하였다. 제공(諸公)들이 가난한 그를 위하여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제수받게 하였는데, 선생은 하찮게 여기지 않고 곧 문을 열고 생도(生徒)들을 받아들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의관을 갖추고 예조(禮曹)에 가서 참알(參謁)해야 합니다.”하니, 선생은 무연히, “나는 그런 일에 서툰 사람이오.”하고는 그 길로 그만두었다. 강화부(江華府)로 들어가 집을 마련하여 살았는데 원근에서 책을 가지고 찾아온 학도들이 매우 많았고, 아무리 그들에게 천한 일을 시켜도 그들은 수고롭고 괴로움을 모르고 고분고분하였다.
부(府)의 관원이 뇌물을 받고 아버지를 죽인 자의 죄를 늦추어 주자 선생이 그 죄를 바로잡고는 그대로 강화를 버리고 현석강(玄石江) 가로 갔다. 월사(月沙 : 이정귀(李廷龜) 이공(李公)이 한번은 중국 사신 고천준(顧天俊)을 맞아 대접하게 되었는데 고씨는 글 잘하기로 세상에 이름이 있었다.
월사가 자기는 적수가 아님을 알고 서둘러 종사할 문사(文士)를 뽑았는데 선생이 백의(白衣)로 거기 참여하게 되었다. 선조(宣朝)께서 ‘권모의 시를 몇 편 써 올리라.’ 하여 써 올리니, 상이 보고는 감탄하여 마지않으면서 항상 서안(書案) 위에 두고 보았다.
이보다 앞서 임진왜란 때 선생이 죽창(竹窓) 구용(具容)과 함께 대궐에 나아가 상소하여, 강화(講和)를 주장하면서 임금의 뜻만 맞추려고 하는 두 상신(相臣)을 목 벨 것을 청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선생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많았다. 또 이이첨(李爾瞻)이 선생과 사귀기를 몹시 바랐는데도 만나 주지 않았고, 한번은 남의 집에 갔다가 그가 오는 것을 보고는 곧 담을 넘어 피해 간 일이 있었으므로 이첨이 원한을 품었다.
광해군(光海君)의 비(妃) 형제들인 유희분(柳希奮) 등이 은총을 믿고 방자하게 굴자 소암(疎庵) 임숙영(任叔英)이 정대(庭對)하면서 심하게 나무랐는데, 군소(群小)들이 그를 미워하여 그의 관직을 삭탈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선생은 개연히 궁류시(宮柳詩)를 써 풍자하였다.
그 시를 본 여러 유씨들이 광해에게 하소연하니 광해는 매우 화가 났지만 그러나 그를 다스릴 꼬투리를 찾지 못하였다. 그후 임자년 3월, 무옥(誣獄)이 일어나자 광해가 그 옥에 연루된 집의 서적들을 모두 가져다 뒤져 보다가 우연히 그 시를 조수륜(趙守倫)의 집 책 속에서 발견하고는 누가 지은 시인가를 힐문(詰問)하였다. 선생의 시라는 것을 알아낸 광해는 친국(親鞫)하면서 혹독한 형벌을 가하였다.
당시 대신(大臣)이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이공(李公)이 힘껏 주선하여 겨우 죽기를 면하고 정배되어 동성(東城) 밖에서 죽으니, 이때가 4월 7일이었다. 그로부터 12년 후인 천계(天啓) 계해년(1623), 인조대왕(仁祖大王)이 반정(反正)하여 선생에게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추증하고, 그의 아들 항(伉)에게는 관직을 제수하였다.
배(配)는 송씨(宋氏)이고, 딸은 최계창(崔繼昌)에게 시집갔는데 아들은 선(宣)과 헌(憲)이다. 항이 아들 속(謖)을 낳았으나 일찍 죽고 후사가 없어 재종질(再從姪) 수(𢢝)를 입양하였다. 속에게 서형제(庶兄弟) 둘이 있는데 밀(謐)과 조(調)이다.
아, 세상에서 시로써 선생을 칭하는 이들은 선생을 깊이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다. 선생은 내행(內行)이 매우 독실하여 어렸을 때 아버지 명령으로 자기 숙부 별(撆)에게 양자로 가 양어머니 김씨(金氏)를 섬기면서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병이 들면 잠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또 그의 뜻을 조금도 어기는 일이 없었으니 그것을 미루어 보면 그 나머지는 알 수 있는 일이다.
처음에는 곧이곧대로 행동하여 마음에 가릴 것이 없이 비록 선정(先正)들이라도 마음대로 시로 조롱하여, 헐뜯는 말이 파다해도 아랑곳하지 않다가 얼마 후 곧 심기일전하여 성리학(性理學)에 종사하였다. 그가 남에게 준 편지에 이르기를, “앞으로 산야(山野)에 묻혀 마음과 성정을 수양하면서 옛사람들이 말한 도(道)라는 것을 찾으려 하였다.
그래서 주(周)ㆍ장(張)ㆍ정(程)ㆍ소(邵)ㆍ주(朱)ㆍ여(呂)의 글들을 펴 놓고 읽고 또 생각하였더니, 스스로 어떤 소득이 있다고 감히 말할 수는 없지만 그 문의(文義)를 보는 동안 마음에 맞는 것이 있는 것 같기에 마음을 굳히고 학문을 하기 시작한 지 지금 6, 7년이 되었다.”
하였다. 아, 이 서신을 보면 선생의 뜻을 알 수가 있겠다.
선생이 죽던 날, 어떤 친한 이가 들어가 보았더니 그의 베갯머리에 《근사록(近思錄)》 등 주자(朱子) 글 10여 편이 있었다 한다. 아, 선생같이 천분(天分)이 높은 분으로서 정녕 죽지 않고 지향(志向)하였던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면 그 성취됨이 어찌 한량이 있었겠는가. 나이 겨우 40에 날카로운 재주를 다 쓰지 못한 채 갑자기 그렇게 되고 말았으니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사문(斯文)에 종사한 선배로서 그가 기수(沂水)에 목욕한다던 증점(曾點)의 기상이 있다고 칭한 이가 있었으니, 선생이야말로 염락(廉洛)의 서여(緖餘)를 얻었음을 알 만하다. 그렇다면 끝내 시만 가지고 선생을 평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계곡(谿谷 장유(張維)) 장 문충공(張文忠公)이 선생의 시집에 서문을 쓰기를, “세상 사람들이 시 이전의 사람부터 보지 않기 때문에 항상 사람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하였는데 그 말이 사실이다.
최씨(崔氏)의 아들 선(宣)이 나에게 와 선생의 묘문(墓文)을 청하였는데, 내가 그의 학력을 질문해 보니 《주역(周易)》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 혹시 선생의 정본(定本)에서 들음이 있어 그런 것은 아닌가.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아, 선생은 / 嗚呼先生
뜻이 호탕하고 기가 거세었네 / 志豪氣麤
처음엔 연허를 사모하다가 / 始慕燕許
뒤에는 정주를 본받았네 / 後則程朱
어쩌다가 화기를 밟아 / 俄蹈禍機
거기에서 그치고 말았네 / 而止於斯
내가 두려운 건 후인들이 / 我懼後人
그의 시만 전송할까 하여 / 只傳其詩
남이 모르는 걸 밝혀 / 式闡其幽
끝없는 후세에 알리려 하네 / 以告無期
ⓒ한국고전번역원 | 양홍렬 (역) |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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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石洲權公墓碣銘 幷序
嗚呼。此高陽縣渭陽里者。石洲權先生之所藏也。其世德俱刻于其左先墓石。先生卽習齋公之第五子也。嗚呼。先生在時。大夫士慕義趨風。一見顏面。則誇以爲榮。其沒也。腸摧淚淫。以至未嘗過門者。亦悲嗟愴歎。愈久而不能已。愚未知其以何然耶。豈以其能詩而然耶。先生諱韠。字汝章。其爲人跌宕豪放。志蓋宇宙。眼空一世。凡世之富貴榮利。紛華盛麗。人所艶慕歆願者 。一無所入於其心。惟以詩酒自娛。嘗一再入場屋。復不屑也。松江鄭公嘗遠謫。先生於道往見之。松江驚服曰。吾今日見天上仙人。此行豈不幸哉。諸公爲其貧也。除童蒙敎官。亦不屑於辭。便開門授徒。或告曰。當束帶詣禮曹參謁。先生憮然辭曰。此非吾所能也。遂謝去入江華府。築室以居。遠近學子負笈而至者甚衆。雖役之以鄙事。而亦不知其勞且苦也。府官溺貨。故緩弑父獄。先生正其罪。遂棄江華。歸玄石江上。月沙李公嘗儐詔使顧天俊。顧以文名天下。月沙懼非吾敵。極選文士以從。先生以白衣與焉。宣廟敎曰。權某詩可寫若干篇以進。旣進。上歎賞不已。常置案上。先是壬辰倭變。先生與具竹窓容詣闕上疏。請斬主和媚上二相臣。不悅者已多。李爾瞻願交甚切。固不許。嘗於人家見其至。輒踰垣而避之。爾瞻甚銜之。光海妃兄弟柳希奮等恃寵豪縱。疏菴任公叔英庭對譏切甚至。群小憾怒。遂削其科。先生慨然作宮柳詩以刺之。諸柳入訴。光海怒甚。然猶無以得當以治之也。壬子三月。誣獄起。光海雜取坐人家書籍以見。偶得其詩於趙公守倫家冊面。詰問誰出。遂親鞫。酷加刑訊。時大臣白沙李公力爭。得減死編配。至東城外。以其四月七日死焉。越十二年天啓癸亥。仁祖大王反正。贈先生司憲府持平。官其子伉 。其配宋氏也。女爲崔繼昌妻。宣與憲其二子也。伉生子謖。夭無嗣。以其再從姪𢢝爲後。謖有庶兄弟二人謐,調。嗚呼。世之以詩稱先生者。豈非淺之爲知也。先生內行甚篤。幼以習齋命出爲叔父撆後。事所後母金氏。極其誠敬。有疾未當離側。其意未嘗少違。推此以往。其他可知已。始則直情徑行。心有所不槪。雖先正。亦以詩譏議。詆訶溢世而不之顧也。旣而便回頭轉身。從事於性理之學。其與人書曰。思將退伏山野。收心養性。以求古人所謂道者。於是日取周,張,程,邵,朱,呂諸書。讀而思之。雖不敢自以爲有得。而於其文義之間。似有犁然而當於心者。故決意向學。于今六七年矣。嗚呼。先生之志可見於此書矣。死之日。親賓入見。則枕邊有近思錄,朱子書十許編矣。噫。以先生天分之高。苟無死以卒其志業。則其所成就。何可量哉。而年纔強仕。鋒穎未銷。遽至於此。可勝惜哉。惟其斯文先達。遽稱以曾點浴沂。則其得濂洛之緖餘者可知已。然則終不可以詩觀先生也明矣。故谿谷張文忠公嘗序先生詩曰。世之人不以人觀詩。故不得其人。斯實語也。崔氏子宣來謁先生墓文。余叩其學。蓋深於易者。豈有聞於先生之定本者耶。銘曰。
嗚呼先生。志豪氣麤。始慕燕許。後則程朱。俄蹈禍機。而止於斯。我懼後人。只傳其詩。式闡其幽。以告無期。<끝>
宋子大全卷一百七十二 / 墓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