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유재건(劉在建,1793~1880)
이책은 여러 문헌에서 채록한 내용들이 주제별로 모아져 수록되어 있다.
권2 충효(忠孝) >32(99 Page)
■ 효자(孝子) 이탁영(李鐸英)
[생졸년] 1541년(중종 36)~1610년(광해군 2)
李鐸英(이탁영) 義城戶長也(의성호장야)
이탁영(李鐸英)은 의성(義城)의 호장(戶長)이다.
爲人忠藎勤幹(위인충신근간)
사람됨이 충성스럽고 성실하여 부지런하고 유능하였다.
壬辰倭亂時(임진왜란시) 裨益弘多(비익홍다).
임진왜란 때, 공로가 많았으므로,
及亂定(급란정)
난이 평정되자,
僚友請免鄕(요우청면향)
동료 친구들이 향리의 부역을 면제받는
면향(免鄕)을 청하라고 하였다.
擢英辭謝曰(탁영사사왈)
탁영은 사양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爲人臣(위인신)
“신하가 되어
而效勞國家常分也(이효로국가상분야)
나라를 위해 노력을 다하는 것은 떳떳한 직분인 것이다"
退居芚山下(퇴거둔산하)
물러나 둔산(芚山) 아래에 살면서,
奉母至孝(봉모지효)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봉양하여,
自號孝思齋(자호효사재)
스스로 ‘효사재(孝思齋)’라 이름하였고,
所著有征蠻錄解頤錄(소저유정만록해이록)
<정만록(征蠻錄)>과 <해이록(解頤錄)>을 저술하였다.
邑誌云(읍지운)
읍지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甫十七(보십칠) 父死他鄕(부사타향)
"17살에, 아버지가 타향에서 죽어,
扶櫬數百里返葬(부친수백리반장)
수백리 길을 관(棺)을 모셔와 되돌아가서 장사를 지냈다.
母年六十(모년육십) 兩眼俱廢(양안구폐)
어머니가 나이 예순에, 두 눈이 멀게 되자,
晝夜不側離(주야불측리) 躬執匙進飯(궁집시진반)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않고, 직접 숟가락으로 진지를 드렸다.
迎醫問藥(영의문약) 不遠千里(불원천리)
의원을 부르고 약을 알아보는 일을, 천리라도 마다않고 찾아 갔으며,
病劇嘗糞(병극상분)
병이 더욱 위독해 지자 똥을 맛보기까지 하였다.
及歿(급몰) 哀毁踰禮(애훼유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애통함이 너무 지나쳤고,
非喪事不言(비상사불언)
장례에 대한 일이 아니면 말도 하지 않았다.
搆一間屋(구일간옥) 安考妣位(안고비위)
한 칸의 집을 지어, 아버지와 어머니의 위패를 안치하고,
名以慕先堂(명이모선당)
그 집의 이름을 ‘모선당(慕先堂)’이라고 하고서,
晨昏拜謁(신혼배알)
아침저녁으로 절을 하며 참배했다.
後因道啓復戶(후인도계복호)
뒤에 감사의 보고로 복호(復戶)를 하였다.
<연조귀감(掾曺龜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