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명찬지(大明天地)와 만절필동(萬折必東)
심의섭(명지대 명예교수)
가끔 ‘대명천지에 그럴 수가 있나?’라고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다. 대명찬지(大明天地)는 환한 대낮, 밝은 세상, 밝은 해가 뜬 환한 세상이란 뜻으로 무심코 쓰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이 대국인 명(明 368~1644) 나라의 세상, 위대한 명나라가 지배하는 세상이라는 참뜻을 알면 다시 써서는 안되는 말이다. 명나라가 망한지가 언제이고, 명을 이은 청(淸 1616~1912) 나라도 망하여 대청천지(大淸天地)가 될 바도 없었는데 아직도 명나라에 사대를 하자는 것인가? 알고보면 기가 찰 노릇이다.
대명천지를 들먹일 때는 반드시 송시열(1607~1689)이 등장한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조선 임금의 신하가 아니라 명나라 임금의 신하라고 자처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군사를 지원한 명의 신종(神宗)과 명의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의 사당으로 만동묘(萬東廟)를 집 근처에 지으려고까지 했다. 송시열이 낙향하여 기거했던, 노론의 본산인 괴산의 화양에 화양서원과 만동묘가 있다. 만동묘(萬東廟)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을 파병한 명 신종을 기리고자 1704년 숙종 30년 충청도 괴산 화양동에 세운 사당이다. 화양서원은 1695년 숙종 21년에 송시열을 제향하기 위해 그의 문생들이 세운 것인다. 흥선대원군이 유생들의 소굴인 서원과 만동묘를 철폐하였으나(1865) 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난뒤 1874년 고종 11년에 재건하였다.
괴산의 화양구곡 바위에 조선 선조의 어필 만절필동(萬折必東)과 숙종의 어필 화양서원(華陽書院)이란 글씨가 남아있다. 명 의종의 글씨 비례부동(非禮不動, 예가 아니면 운직이지 않는다)과 송시열의 글씨인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도 각자(刻字)되어 있다. 숭정일월에서 숭정은 의종의 연호이니, 숭정(명)의 세상(일월)이란 뜻이다. 선조의 친필휘호인 만절필동 재조번방(萬折必東 再造藩邦)은 임진왜란때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에 감사하다는 뜻이다. 만절필동(萬折必東)은 ‘황허강이 수없이 꺾여 흘러가도 결국은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뜻이고, 재조번방(再造藩邦)은 말 그대로 풀이하면 ‘변방의 나라를 다시 세워주셨다’는 뜻이다. 명나라 신종과 의종의 신위를 모신 만동묘(萬東廟)는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세운 사당이다. 만동묘라는 이름은 만절필동(萬折必東)에서 따온 것이다.
이처럼 사대주의는 조선시대에 각인된 역사의 굴레이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현실은 어떠한가? 사대의 대상만 바뀌었을뿐 그 DNA는 더 단단해지지 않았나 우려된다. 잘 생각해보면 친미 외교에, 친일 외교에, 친중 외교에서 삐죽삐죽 나타난다. 구한말에 소용돌이 외교가 반복되는 느낌을 과민한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입에 배어서(体化) 깊은 생각없이, 관용적으로 썼다면 역사의 반복설을 눈팅을 하는 것 같다. 근간에 있었덛 몇몇 사례를 더듬어 보자.
2017년 12월 5일 노영민 당시 주중대사가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신임장 제정식 때 방명록에 ‘만절필동 공창미래(萬折必東 共創未來)’라고 썼다. 그리고 그 밑에 한글로 ‘지금까지의 어려움을 뒤로 하고, 한·중 관계의 밝은 미래를 함께 열어나가기를 희망합니다’라고 썼다. 이 말의 함의와 뉘앙스는 외교적 수사이기 때문에 당연히 논란은 붉어질 수 밖에 없다.
2017년 12월 15일, 문재인 대통령은 베이징대학에서 ‘중국은 높은 산봉우리 같은 나라’라고 연설하였다. “중국은 단지 중국이 아니라, 주변국들과 어울려 있을 때 그 존재가 빛나는 국가입니다. 높은 산봉우리가 주변의 많은 산봉우리와 어울리면서 더 높아지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문 대통령은 연설문 곳곳에서 중국을 ‘높은 산봉우리’, ‘대국’이라고 치켜세우고 한국을 ‘작은 나라’라고 지칭하면서 중국이 주변국을 보다 넓게 포용해줄 것을 강조하였다. 하필이면 시진핑은 트럼프와의 회동에서(2017.4) ‘한국은 사실 중국의 일부였다(Korea actually used to be a part of China)’라는 외교적 망언에 대한 한국의 반중 여론이 사그러지지 않았던 때 이었다. 그럼에도 문 대통령이 연설에서 현대판 ‘만절필동(萬折必東)’을 은근히 풍겼건만 외교적 홀대는 이어졌던 것이다.
2019년 2월 12일, 문희상 당시 국회의장(왼쪽)이 워싱턴 DC 의사당에서 낸시 펠로시 연방하원의장을 만나 만절필동(萬折必東)이라고 쓴 친필 휘호를 선물하였다. 아무리 해석을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식으로 하더라도 본 뜻은 중국에 충성을 서약하는 내용으로 볼 수 있는 휘호를 미국 의회 지도자에게 증정했다 것은 한국의 국회 의장이 국가와 국민의 자존심을 자폄(自貶) 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2024.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