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된 기억
이용희
하루하루가 여유다
쉼표가 어디에서나 손을 들고 놀다 가라고 잡는다. 친구들도 이웃도 이 세상에서 가장 젊은 오늘을 함께 하자고 부른다.
오늘도 약속이 있어서 점심을 함께 하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카페다. 한 잔의 음료는 테이블 위에서 우리들의 초점 없는 대화들을 듣고 있다. 사진반 선생님 같았으면 핀이 안 맞는다고 지적을 하셨을 것 같은 이야기들이 셋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 트라이앵글을 그리는데 갑자기 어머니 생각이 난다.
어머니 생각이 난다고 하니 일행은 미숫가루를 탄 듯한 오곡라떼라는 메뉴 때문이냐고 묻는다. 그렇기도 하지만 이런 음료도 드시지 못하고 가신 어머니 생각이 나는 것은 잘 해 드리지 못하고 떠나가시게 한 죄스러움 때문이겠지.
어머니는 중풍을 앓으셨다. 혈압이 높으셨는지 약은 드시고 계셨는지 아무런 기억도 없다. 누군가의 시에서처럼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으니까’ 그냥 그렇게 어머니로서만 존재하셨던 것 아닐까.
그 자리에 누워버리신 어머니는 실어증까지 오셨다. 말씀 한 마디 못하시는데도 아버지와의 의사표현은 어떻게 나누셨을까. 부부라는 연은 그렇게 표정 하나만으로도 온갖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신비스러운 관계인가보다.
이 년여를 아버지는 어머니 병 수발을 하셨고 손수 침술을 배워 매일 침을 꽂으셨다. 동의보감을 뒤적이며 화재를 지어 약을 만들어 드리시던 주글주글하고 앙상하게 여윈 아버지의 손이 생각난다. 지금은 한창인 나이 칠십이 그때만 해도 고령이었는지 어머니는 호전되는 기색도 없이 어느 단오 날에 떠나시고 말았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날 내 울음이 빗속에 감겨 이 세상에 들리지 않은 것은 얼마나 다행일까. 부끄럽고 부끄러워 어머니를 부르지 못하고 살아가기를 몇 해였는지 모른다. 나의 온갖 부끄러움을 덮어주기라도 하실 것처럼 아버지가 나에게로 오셨다.
막내딸인 나는 오지에서 보건진료소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고 남편은 주말부부라는 쓸쓸한 단어로 엮여 있을 때였다. 아이 둘은 어리고 낯선 객지 생활이 안타까워 보이셨는지 어머니 삼우제를 지내던 그날 두어 개의 옷가지를 싸 가지고 나를 따라 오셨다.
어머니 상으로 받았던 휴가를 끝낸 나의 일과는 시작되고 아버지의 존재는 그냥 덤덤했다.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부재로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니, 어머니의 존재를 도려내고 난 아버지의 속살이 얼마나 따갑고 아팠는지 생각해 보려고도 못했다. 두 아이의 엄마인 나는 철이 들지 못해 언제나 어디에서나 막내딸이었을 뿐이다.
비어있는 자리를 메우시느라 아버지는 이웃의 노인들에게 헤픈 웃음을 많이도 흘리셨다. 일 하고 계시는 어느 노인의 밭둑에도 나가 앉아 계시고 어느 분의 산자락 밭에 들깨를 함께 경작하러 다니시고는 했다. 술을 못하시는 아버지는 ‘한 잔 집’이라는 별호를 달고 계시는데도 술친구들은 이 집 저 집 많았다.
손주를 데리고 술집을 다녀오시던 아버지 손목에 잡혀 과자 하나 들고 좋아라고 뛰던 철없는 나의 아들과 나는 무엇이 달랐을까. 철없고 생각 없는 막내딸은 직장이면서 관사인 집을 지키고 업무를 해 내고 살림을 하느라 어떻게 아침을 맞고 밤을 보냈는지 물살에 흘려가듯 그렇게 보냈다.
아침을 드시고 간간히 외출을 하지 않으시고 누워 계시던 아버지다. 두 눈 멀뚱히 뜨고 쳐다보시던 천정에 어머니의 모습이 들어 계시다는 것을 나는 왜 몰랐을까. 옷소매로 눈을 훔치시던 아버지께서 그 때 얼마나 어머니가 보고 싶으셨는지 왜 나는 짐작조차 못했을까. 어느 먼 나라 은하 세계의 별에서 온 듯 멀기만 했던 아버지의 속내가 왜 이제야 눈물을 흘리게 하는 가시가 되었을까.
관사 뒤란에 집을 지어 놓고 오리를 기르시던 아버지가 그 때 그 꼬물대는 생명체에게 얼마나 위안을 얻으며 대화를 나누셨을지 지금은 귀에 들리는 둣하다. 딸이 해 주는 눈치 밥 한 그릇 비우시고 오리를 몰아 개울로 나가시던 아버지의 손에 잡혀있던 자그마한 회초리가 눈에 선하다. 오리를 몰아 개울에 넣으시고 달팽이 몇 개를 손에 쥐고 오시던 아버지다. 무릎까지 걷어 올린 바지 사이로 보이는 종아리가 얼마나 야위었었는지 기억조차 시리다.
어머니에게 놓아 주시던 침통은 반들반들해졌는데 진료소에 들어오시는 주민들에게 그 침을 놓으실 때마다 나는 왜 아버지의 그 허한 가슴을 느끼지 못했을까. 불법 의료 행위라고 하지 말라고 말리기만 했지 그 아버지의 손에 잡히는 사람들의 몸에서 녹이시던 아버지의 얼어붙은 가슴 속을 까맣게 몰랐다.
지금 단 한 번도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보고 싶으시냐고 물어보지 못했던 그 때가 가슴 아프도록 후회스럽다. 어머니 보내시고 몇 십일이 지나도록 청심환을 드시던 아버지의 고통스럽던 상처를 나는 한 번도 보듬어 드리지 못했다. 왜 그때 아버지 곁에 누워서 잠들면서도 엄마가 보고 싶다고 함께 울어드리지 못했을까. 아마도 금기된 언어라서 큰 형벌이라도 내리는 줄 알았다면 모를까 그토록 까맣게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보지 못했다.
그 때 아버지가 꺾어 들고 오시던 들꽃 속에서 아버지가 사무치도록 그리워하신 어머니의 얼굴을 읽었더라면 그렇게 덤덤하게 받아 들지는 않았겠지. 허한 눈동자의 끝에 어머니의 웃음이 구슬처럼 매달려 눈물이 되셨을 아버지의 그 남은 몇 년이 한이 되어 남았다. ‘어머니 보고 싶으세요?’ 라고 다정하게 묻고 어머니 생전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어 드렸더라면 지금 이렇게 후회스럽지는 않을 것 같다. 노인이 되면 부부도 혼자가 되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되었던 그 철없던 때를 돌아보기가 너무 죄송하기만 하다.
등교 때마다 막내의 머리를 양 갈래로 꼭꼭 땋아 주시던 아버지 앞에 앉아서 종알거렸을 나의 유년은 어디로 가고 한 마디 위로의 말씀을 드리지 못하는 바보가 되었었는지 오늘도 하늘만 바라보며 한 숨만 내 쉰다.
아버지는 삼 년여를 어머니 안 계신 세상을 나와 함께 살아가시다가 떠나셨다. 이제 어머니 곁에 함께 계시겠지만 그 헤어져 계시던 때의 아픔을 함께 나누어 드리지 못한 막내의 한은 오월 단오가 되면 새록새록 아픈 잎사귀처럼 돋아난다.
23.05. 19
23. 사친문학 제 8집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