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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21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Pray or Nothing’ - 3. 사랑하는 만큼, 관심 있는 만큼
본문 : 창세기 18장 32절
아브라함이 또 아뢰었다. "주님! 노하지 마시고, 제가 한 번만 더 말씀드리게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거기에서 열 명만 찾으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 <창세기 18장 32절, 새번역>
도대체 얼마나 기도해야 합니까? 꽤 오랜 시간동안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어쩌면 여전히 고민거리인 기도와 관련된 주제가 바로 ‘기도의 양’에 대한 문제입니다. 얼마나 기도해야 기도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차라리 하나님께서 ‘양’을 정해 주셨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보았던 적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루에 한 시간씩이라던가, 안식일처럼 1주일에 하루라던가, 이슬람교처럼 하루 5번 등 정해져 있는 기도의 양이 있다면 차라리 나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하나님은 기도의 양을 정해 두지 않으셨습니다. 분명 정해 주지 않으신 의도가 있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조심스레 어쩌면 기도의 양을 ‘Unlimited’, 제한을 두지 않는 양의 영역에 두고 싶으신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닐까요?
쉬지 말고 기도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 개역개정>
양을 궁금해 하는 우리를 향해 ‘늘’이라고 하면서 양은 한계를 두지 않으시고, 시간적으로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이야기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기도가 참 어렵다고 생각이 드는 것 같습니다. 양을 정해주셨으면 그 양만 채우면 되는 것을, 시간을 이야기하시니 뭔가 기도의 시간을 적게 드리는 순간 마치 불효를 저지르고 있는 것 같고, 제대로 된 믿음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찔리는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양에 대해서 고민하느라 정작 기도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적은 시간 기도 할 바에야 그냥 하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늘 하지 못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는 생각까지 도달하게 되면 정말 이제 기도 없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쉽게 말해 이런 고민을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아버지께 불효가 맞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된 믿음 생활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맞습니다. 왜냐하면 그 고민을 하는 시간을 기도로 바꾸었다면 이미 우리가 드린 기도의 양이나 시간은 정말 상상을 초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충분히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이 우리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단지 그 시간에 기도하지 않고, 기도에 관한 것으로 대체했기 때문에 뒤돌아보면 부족해 보였던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Pray or Nothing’을 주제로 함께 1월을 보내고 계시는 동역자 여러분! 사실 기도의 양을 정하는 방법은 아주 쉽습니다. 바로, 사랑하는 만큼, 관심을 가진 만큼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따라서 우리 기도의 양이 비례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욱 더 기도의 시간이 많아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점점 더 기도의 시간이 많아져야 하는 당연한 이유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이 기도이기에, 기도할 제목들 하나하나를 두고 기도하는 것이 당연한 삶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를 얼마나 해야 하는지 양에 대한 질문 전에 이 질문부터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이 맞다고 생각됩니다. 바로,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하나님께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게 되면, 사실 기도의 양에 대한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어 지는 아주 쉬운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한 기도는 해도 해도 부족한 것입니다. 그것도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으로 기도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특별히 자녀를 위한 부모의 기도가 쉴 시간이나 있겠습니까? 늘 해도 모자란 것 같고, 계속해도 부족한 것 같은 기도가 자녀를 향한 부모의 마음이 담긴 기도 아닐까요? 그렇게 사랑하는 만큼, 관심 가지는 만큼, 생각해 주는 만큼, 양에 상관 없이 늘! 쉬지 않고! 기도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비단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종교에서 더욱 더 사랑하는 만큼, 관심 가지는 만큼 기도해 주는 것이 활성화 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이 달라야 하는 것일까요? 그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사랑하는 이를 위한 기도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더 관심을 두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실로 사랑하는 마음과 기도의 양은 비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정말로 중요한 것입니다.
당신들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신명기 6장 5절, 새번역>
하나님을 향한 이 사랑이 전제가 되면 기도는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많은 양의 기도를 드린다 하더라도 지치지도 않고, 피곤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힘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대한 넘치는 사랑과 관심으로 기도하는 이들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어려운 가장 큰 이유를 역설적으로 아직 하나님을 그렇게까지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께 관심을 두고 있지 못하기 때문은 아닌지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기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솔직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아직 ‘사랑’이라는 말을 붙이기가 어렵다면 아마 우리의 기도도 딱 그 정도로 흘러나올 것입니다. 오히려 너무도 뜨겁게 불타오르는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어떨까요? 기도하지 말라고 명령해도 기도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왕이 금령 문서에 도장을 찍은 것을 알고도,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서,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그 다락방은 예루살렘 쪽으로 창문이 나 있었다. 그는 늘 하듯이, 하루에 세 번씩 그의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감사를 드렸다. <다니엘서 6장 10절, 새번역>
다니엘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했는지 아십니까? 왕이 금령 문서에 도장을 찍었기에 기도하는 것이 발각되기만 하면 사자 굴에 던져지는 것을 알고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알고도 하루에 세 번씩 하던 대로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키실 것을 확실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하는 순간 포기하게 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다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이 있는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결코 망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이 모든 것은 모두 이방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마태복음 6장 31~32절, 새번역>
그렇게 하나님을 너무도 사랑하셨던 예수님은 아무리 피곤한 여정 속에서도 기도하는 것을 잊으신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관심사는 하나님의 나라와 뜻에 있었기에 그 관심사를 기도로 표현하며, 다시 기도로 충전하며,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확인해 보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 스스로 솔직하게 한 번 체크해 보신 후에야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도 늦지 않습니다.
반면 저는 하나님을 너무도 많이 사랑한 것처럼 보이는 이들 중에서 아쉬운 기도의 양을 가진 이들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아쉬운 기도의 양을 가지고 있었을까 많은 의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기도가 저는 오늘 함께 본문으로 읽었던 소위 ‘아브라함의 기도’입니다.
아브라함을 찾아온 주님은 소돔과 고모라에서 들려오는 울부짖는 소리가 너무 크고, 사람들이 엄청난 죄를 짓고 있기에 심판하실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아브라함에 말씀해 주시고 아브라함의 반응을 기다리십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다급한 마음이 생기기 시작한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렇게 주님께 질문합니다.
아브라함이 주님께 가까이 가서 아뢰었다. "주님께서 의인을 기어이 악인과 함께 쓸어 버리시렵니까? <창세기 18장 23절, 새번역>
조카 롯이 의로운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라 확신했기에 롯만큼은 살려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나님께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롯과 그의 가족만을 구해달라고 바로 말하지 못하고 먼저 50명의 의인을 조건으로 내세우게 됩니다.
그 성 안에 의인이 쉰 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주님께서는 그 성을 기어이 쓸어 버리시렵니까? 의인 쉰 명을 보시고서도, 그 성을 용서하지 않으시렵니까? <창세기 18장 24절, 새번역>
그리고 50명을 시작으로 그 유명한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가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아브라함은 두려움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의를 구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공정한 판단을 요구하면서, 점점 인원을 줄여가기 시작합니다.
50명, 45명, 40명, 30명, 20명, 10명까지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매 번 인원수를 줄여가는 아브라함을 거절치 않으시고 그 기도대로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서 부터가 문제입니다. 아브라함은 10명까지 내려와서는 그만 기도를 멈추어 버립니다. 도대체 왜 일까요?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왜 그는 10명에서 멈췄을까요? 자신이 아는 대로 롯은 두 딸과 사위들, 아내까지 하면 6명이었습니다. 혹시라도 교류하지 못하는 사이에 손주들이 생겼다고 생각했을까요? 어쨌든 그래도 최종 마지노선으로 6명까지는 다시 한 번 기도하며 구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 솔직히 말해서 최종적으로 5명, 4명, 3명, 2명, 1명이 될 때까지 하나님께 아뢰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화를 내지는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10명에서 멈추어 버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향한 사랑이 딱 거기까지이기 때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라는 땅에 대한 관심이 딱 거기까지이기 때문입니다.
‘설마 10명도 없겠어?’ 걱정스럽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쯤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이 정도로 기도했으면 됐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아브라함에게 이런 기도를 하게 하신 것일까요? 어쩌면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위한 아브라함의 진짜 사랑과 관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던 것은 아닐까요?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가 더 이상 무너지지 않도록 하나님의 뜻을 전하길 바라셨던 것은 아닐까요? 소돔과 고모라를 향한 애끊는 마음으로 단 한 명의 의인을 위해서라도 간절히 기도하기를 바라셨던 것은 아닐까요? 정말 어쩌면 요나처럼 소돔과 고모라를 구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아브라함은 날려 버린 것은 아닐까요?
안타깝게도 결과는 너무도 비참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는 의인 10명조차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기도가 딱 한 번만이라도 더 필요했던 것입니다. 한 번만 더 사랑으로, 한 번만 더 관심을 가지고 기도했었더라면 상황은 완전히 바뀔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기도는 성경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하게 됩니다. 겨우 빠져 나온 롯 역시도 그리 의인다운 삶은 영위하지 못하므로 이제는 영영 역사 속에서 사라지는 인물이 되고야 맙니다.
만일 소돔과 고모라에 이삭이 있었다면 아브라함이 저렇게까지만 기도했을까요? 분명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은 1명 이삭이 남을 때까지 하나님께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들어 주실 때까지 기도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 측정할 겨를도 없이 쉬지 않고 금식하며 기도하면서 이삭을 살려달라고 애원했을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기도의 양에 대해서 궁금하십니까? 매일 매일 얼마나 기도해야 할지 궁금하십니까?
사랑하는 만큼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관심을 가지는 만큼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과 관심이 기도의 양을 결정할 중요한 키워드가 되는 것입니다.
많이 기도하고 싶으십니까? 그럼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 관심을 두셔야 합니다.
2024년 교회에 주신 표어를 위한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과 관심을 실천하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사랑하는 만큼, 관심을 가지는 만큼 그런 교회가 되는 것에 가까이 다가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관심을 가지고 이웃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면 그 때부터 자연스럽게 이 2024년 표어대로 ‘사랑과 관심을 실천하는 교회’가 되기를 더욱 더 간절하게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삶과 기도가 하나로 일치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 사랑하는 동역자들의 기도의 양이 넘치도록 충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하나님을 넘치도록 충분히 사랑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뜻에 대한 관심이 충분함을 넘어 넘쳤으면 좋겠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아쉬움을 남긴 기도가 되지 않도록 좀 더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좀 더 관심을 가지길 소망하고 축복합니다.
결단 찬양 - 더 원합니다 & 우리의 기도 후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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