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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7 - 존 왕과 의회주의의 시작 마그나카르타 그리고 헨리 3세!
프랑스 앙주 백작으로 부터 시작되는 1154년 영국 플랜타지네트 왕조의 사자심왕 리처드 1세는
제 3차 십자군에 참가한후 귀국하다가 배가 난파되는 바람에 이탈리아 동북부에 상륙해 독일
을 거쳐 돌아오는 중에, 십자군 아크레성 함락후 불화를 빚은 오스트리아공작 레오폴드 5세
의 영지인 비엔나에서 생포되어 독일에서 재판을 받은후 거액의 보석금을 지불하고 풀려납니다.
리처드는 영국에 돌아온후 동생 존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를 부추긴 프랑스왕 필립 2세
와의 전쟁에서 승리해 잃었던 프랑스내 영국 영토를 되찾는 가운데, 프랑스왕
에게 붙은 리모주 자작이 농성한 샬루-샤브롤 성을 공격하는 중인..... 1199년
3월 25일 석궁 화살에 부상을 당해 그 후유증으로 1199년 4월 6일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자 항복해 용서를 받았던 동생 존이 영국왕에 오르는데 존은 요한에게서 비롯된 이름
임에도 불구하고 사후 그의 이름을 가진 왕이 없으니 인기가 없다는 뜻인데, 부왕
헨리 2세의 다섯 아들 중 반란에 참가하지 않은지라 가장 총애하는 막내아들이니
헨리 2세는 막내 존에게 알짜배기 영지인 아키텐 지방을 물려주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아버지 헨리2세에게 매우 총애받은 존은 형 리처드 1세가 다시 아버지에게 반란
을 일으키자 원래는 헨리 2세 편에 붙었다가 전황이 형인 리처드 쪽으로
기울자 아버지를 배신하고 형에게 가담했으니, 이 일로 헨리 2세가 엄청나게
실망해 충격으로 상심하였으니 사망의 원인이 되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 입니다.
존은 리처드 1세가 십자군 원정에 나가 있는 동안 실질적인 왕조의 지배자임을 내세워 왕이
되려고 필리프 2세 프랑스왕에게 붙어 리처드 1세를 배신하고 반역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는데, 리처드가 돌아온다는 말을 들은 필리프 2세가 존 왕에게 보낸 편지에
"그대의 몸을 돌보시오. 악마가 풀려났소.(Look to yourself. The devil is loose.)" 였습니다.
1199년 리처드 1세 사후에 넷째 형인 제프리 2세의 아들이자 브르타뉴공작이던 조카 아서와
왕위 계승 분쟁이 발생했으니, 프랑스왕 필리프 2세는 처음에는 아서를 지지했지만
존에게서 거액의 뇌물과 벡쌍, 에브휴 두 영지 그리고 왕세자 루이의 결혼 상대인
카스티야국 블랑슈의 막대한 지참금을 받고 존 지지로 입장을 바꾼지라 존이 즉위하게 됩니다.
존은 1200년 첫번째 부인 글로스터의 이사벨과 이혼하고 이미 뤼지냥의 위그 9세와 약혼한
14세인 앙굴렘의 이사벨과 재혼하는데, 이에 뤼지냥가 전체가 존 왕에게 반기를
들었지만 실패하고는 주군이던 필리프 2세에게 제소하여 필리프 2세는 존을
프랑스의 법정에 소환했는데 프랑스내 땅을 가졌으니 프랑스왕의 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출두 기일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필리프 2세 왕은 존 왕이 가지고 있던 프랑스내
잉글랜드령을 몰수해 아서에게 하사하지만 그냥 명분뿐 실제로 그리 되지는
못했는데, 1203년 아서는 할머니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를 사로잡기 위해
공격하지만 존 왕은 신속히 역공을 가해 오히려 아서를 포로로 잡는 데 성공합니다.
이때 존 왕은 동맹이던 앙주 영주를 무시하는 행동을 했고 포로로 잡은 귀족들을
가혹하게 취급했는데, 태양빛 한점 안 들고 침수돼서 썩은 물이 바닥에 흥건한
지하 감옥에 가둬두어 굶기고 22명이나 옥사하게 만드니 3차 십자군 때 활약
했던 리처드 1세의 부하들도 이때 포로로 붙잡혀서 아사했을 것이라 추정됩니다.
조카 아서가 포로로 잡힌 상태에서 행방이 묘연해지자 잉글랜드와 프랑스에는 존이 아서를
죽였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는데, 마감수도원에는 "존 왕이 아서를 붙잡고
술에 취해 직접 목을 졸라 죽여버리고는 세느강에 무거운 돌을 달아 던져버렸다" 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니 직접 죽였건 명령을 내렸건 존 왕이 아서를 죽였을 거라고 봅니다.
이 때문에 전투에서 이겼음에도 프랑스내 브르타뉴와 앙주의 영주들이 전부 프랑스
편으로 돌아서게 되는데, 유럽의 봉건제도에서는 주군과 봉신과의 관계는
상호 계약관계로 원칙적으로 봉신의 봉신은 주군과 주종관계가 아니며 실제
로는.... 평시에 공작의 봉신인 백작도 왕의 명령을 듣지 않을 수는 없었다고 봅니다.
문제는 공작이 왕에게 반기를 든 경우인데.... 백작은 중세법상 원칙적으로 자신의 주군인 공작편
을 들어야 하지만 반란 명분이 약할 경우 왕의 편을 드는 경우도 있었으니, 왕이 반란을
진압하면 서약위반을 이유로 공작의 작위를 몰수할수 있고 왕이 백작의 직속상관이 되면 반기를
든 백작을 좋게 볼리 없으니 공작에게 붙을지 왕에게 붙을지 눈치싸움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만 백작이 공작을 따라 왕과 싸웠다고 해도 봉건계약을 충실히 수행한 것이므로
그게 중세법상 죄가 되지는 않았으니, 왕이 귀족들을 포로로 잡아도 승자의 권리
로 몸값 정도는 받을 수 있었지만 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므로 이를 처형한다면
폭정이 되니 존 왕이 공개적으로 귀족들을 처형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하물며 처형도 아니고 감옥에서 비참하게 귀족들을 굶겨죽인 것은 당시 시각에서
명백히 폭정이므로...... 프랑스령의 귀족들이 존 왕을 버리고 필리프 2세에게
붙었다고 해도 먼저 중세법을 위반한건 존 왕이기 때문에 정당성이 주어지는
것이므로 교회에서도 후세에도 별 문제 제기 없이 그대로 프랑스령이 된 것입니다.
필리프 2세 왕은 노르망디를 착실하게 하나씩 공략하자 존은 노르망디의 가야르성을 공성
중인 필리프군을 공격했는데, 수군까지 동원해 필리프를 양면에서 공격하는 입체적인
작전이었다고 하지만 실패했고, 필리프 왕의 프랑스군은 노르망디 전체를 유린
하였으니 존 왕은 노르망디마저 상실해 아키텐을 제외한 프랑스령 전체를 잃어버립니다.
1205년에는 캔터베리 대주교 임명 문제로 교황 인노첸시오 3세와 대립해 1207년 잉글랜드
전체에 성무 정지, 1209년에는 존 왕에 대해 파문 선언까지 내려오자, 분노한 존 왕이
1209년부터 1211년까지 성직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교회의 소득을 국가에 귀속
하기도 했는데 1213년에는 교황이 아예 필리프 2세의 잉글랜드 침공을 지지하고 나섭니다.
결국 잉글랜드를 교황에게 봉헌하는 형태로 용서를 받았으니 프랑스령 상실과 파문 소동으로
잉글랜드 귀족과 평민은 존 왕에게 정나미가 떨어지자, 존왕은 프랑스령을 빼앗긴게
억울했던지 1214년 잉글랜드 북부 귀족들의 높은 원성에도 불구하고 대대적으로 세금을
거두고 신성로마 제국의 오토 4세와 플랑드르 영주 등을 끌여들여서 프랑스령을 침공합니다.
존 왕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아키텐에서 필리프 2세의 발을 묶어두는 사이에 오토 4세
의 신성로마 제국군이 프랑스를 북부에서 공격하는 작전인 듯 했지만, 프랑스 왕자
루이가 존왕의 군대를 격퇴했고 신성로마제국~기타 영주 연합군이 진격이 늦어
지자.... 필리프 2세와 릴 외곽 부빈에서 회전이 벌어지니 연합군은 대참패를 당합니다.
비보를 전해들은 존 왕은 "나는 불운하다! 이토록 운이 없는건 내가 주님과 화해하고 왕국을
로마 교황청에 갖다 바쳤기 때문이다!" 결국 존 왕은 아무 소득도 없이 동맹으로 끌어
들이는데 지불한 막대한 돈만 쓰고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잉글랜드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가뜩이나 인기가 없었는데 부빈에서의 패배는 막대한 세금을 낭비하고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
존 왕에게 결정타였으니.... 잉글랜드로 돌아온 존 왕에게 귀족들은 더이상 세금을
못내겠다고 반기를 들었고, 그 결과가 바로 1215년에 맺은 “마그나 카르타(대헌장)” 였습니다.
존왕은 억지로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한 후에 교황에게 호소해 반란을 일으킨 귀족
들을 파문하는 등 반격을 하자, 귀족들은 당시 프랑스 왕세자였던 루이 8세를
초빙해 잉글랜드 왕위에 앉히려고 하였는데.... 그러나 1216년 존 왕이 급서
하고 어린 헨리 3세가 즉위하니 반란은 명분이 없어진지라 흐지부지 되었습니다.
1154년부터 존 왕이 프랑스령을 완전히 상실하는 1214년 까지 잉글랜드왕이 지배한 지역을
합쳐서 영국에선 앙주 제국(Angevin Empire), 프랑스에선 플랜태저넷 제국(L'Empire
Plantagenet) 이라고 부르는데..... 당시 프랑스령의 생산력이 엄청나서 프랑스 서남부
와인 산지 아키텐에서 나오는 세금만으로 “잉글랜드 전체의 세금”과 맞먹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의 절반을 계속 지배했다면 후대의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지
모를 일이니..... 영국인들은 '리처드 1세가 조금만 더 살았다면...' 하고 아쉬워
하며 '앙주 제국이 계속되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What if the angevin
empire survived?) 하고 영미권의 IF 놀이에서 종종 등장하는 소재라고 합니다.
존왕은 무능하다지만 지휘 능력은 뛰어난 수준이었다는 말도 있으니 왕자 시절 어머니
가 아키텐의 미라쥬성에서 프랑스군에 의하여 포위되었을 때, 수백명 기사들만을
이끌고 이틀만에 130km를 주파, 기습하여..... 역으로 포위군의 지휘부를 제압한
일이나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몽토방 성채를 공성하여 함락시킨 전과가 있습니다.
따라서 야전 지휘능력은 아버지와 형을 닮아 최소 평균 이상은 되었으며, 의회에 의해 마그나
카르타가 성립되자 영국 남부로 피난하여 교황의 지지와 용병의 고용이 완료된후
런던으로 진격하자, 의기양양하던 귀족들 중 아무도 그의 군사를 막기 위해 선뜻
나서는 자가 없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길목의 요새인 로체스터 성채에서 막기는 했지만....
그러나 노르망디 공격 실패나 1214년의 실패 등으로 미루어 보면 최고 군사 지휘자로서 전략적
판단에는 문제가 있어 보이니, 작전을 세울 때는 양면공격 등 화려하고 멋져 보이는데, 단순
할수록 실행하기 쉽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정치, 외교적으로는 그야말로 최악 이었습니다.
필리프와 전쟁 초기만 해도 잉글랜드의 프랑스령 영주들은 존 왕을 따랐지만 자신을
도와주던 영주를 무시한다든지 포로를 죽게 내버려 둔다든지 해서 얼마든지
제 편으로 삼을 수 있는 봉신들을 모조리 적으로 돌려버렸으니, 프랑스령의
봉신들이 필리프 2세에게 붙은 것은 존 왕 개인의 인격적인 결함이 문제였다고 봅니다.
그의 인기는 형 리처드 1세에 반비례하여 형편없이 낮았으니 아이반호나 로빈 후드 이야기
를 보면 쉽게 알수 있는데, 멜 브룩스의 못말리는 로빈 후드라는 코미디 영화에는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온 리처드 1세가 "이제부터는 영국의 화장실을 존(john) 이라고 불러라"
는 포고령을 내리는데...... 실제로 소문자로 시작하는 존(john)은 화장실이라는 속어 입니다.
화나면 두렵지만 굉장히 쿨했던 친형 리처드와는 다르게 매우 오만하였으며, 무엇
보다 패자나 약자를 관용하는 정신이 전무했으니 무능과 패착이 겹쳐져
후세의 오명으로 이어지게 되었지만, 잉글랜드 - 영국의 왕통이 리처드 1세가
아닌 존 왕의 후손으로 대대로 이어지게 된 점은 재미있는 점이라 할 것입니다!
존왕이 아들 헨리 3세가 뒤를 이었는데 프랑스 내 필립 2세 왕에게 빼앗겼던 프랑스
서남부 가스코뉴 지방을 회복했지만 마그나카르타의 연장인 옥스퍼드 조례를
지키지 않아, 시몽 드 몽포르를 위시한 귀족들에게 폐위되었으나 이후 아들인
에드워드의 활약으로 복위하였지만...... 실질적인 통치는 에드워드 1세가 하였습니다.
헨리 3세는 아버지 존 왕이 무능한 정치로 악평만 쌓인채 급서하자 9세 나이로 왕위에 올랐는데,
초창기에는 프랑스 왕태자 루이 8세가 왕위를 노린 침공을 감행하기도 하였으나 잘 물리치고
섭정인 펨브룩 백작 윌리엄 마셜등 정신(廷臣)의 보좌를 받다가 20세에 친정(親政)을 시작합니다.
아버지 존 왕이 억지로 서명한 마그나 카르타에 대해 불만을 품고 추인을 거부하자
귀족들이 아예 존 왕을 폐위시키고자 프랑스 왕세자 루이 8세를 초빙해
잉글랜드의 왕위에 앉히려 하였는데, 당시 플랜태저넷 왕조는 프랑스와 매우
가까웠고 혈연으로 프랑스 왕실과 얽혀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가능했습니다.
루이 8세는 프랑스군을 이끌고 침공을 감행해 런던을 점거하고 스스로 영국 왕위에 올랐으며
존 왕은 도주하고 많은 제후들이 루이를 지지하여 위기에 빠졌으나, 존 왕이 급서하고
어린 헨리 3세가 즉위하자 영국 귀족들은 새로운 왕 헨리 3세와 싸울 명분도 없었고
강대한 프랑스 루이가 왕위에 오르기보다 어린 헨리가 왕위에 오르는 것이 더 낫다고 느낍니다.
링컨 전투에서 윌리엄 마샬이 친 프랑스 반란 귀족들과 싸워 대승을 거두고는 샌드위치
해전에서도 영국 해군이 승리하자 반란파의 기세는 꺾였으니, 헨리 3세와 섭정
윌리엄 마샬이 수정된 마그나 카르타를 추인하자 영국 귀족들은 다시 태도를 바꿔
루이 8세에게 철군을 요구하니 루이는 잉글랜드 왕위를 포기하고 프랑스로 철군합니다.
이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가 2010년 칸영화제에 개막작으로 초청된 “로빈후드” 인데
“글래디에이터” 와 “킹덤 오브 헤븐” 을 찍었던 리들리 스콧 감독이 “러셀 크로우”
를 다시 캐스팅해서 만든 영화로 첫장면 프랑스 리모주성 전투는 글래디에이터
의 첫 장면인 게르만족과의 숲 전투를 찍은 런던 동남부 본우드에서 다시 찍었습니다.
두 번째 연인 마리언의 노팅엄 마을은 버밍엄 서쪽 햄프턴에 수십채의 집과 과수원을 지은후
찍었으며 프랑스군의 침입을 저지하는 해변 전투는 팸브룩스에서 찍었는데, 팸브룩셔
코스트 국립공원은 1952년에 영국에서 해안선의 절경이 아름답다는 한가지 이유로
국립공원이 되었다는데..... 트래킹, 서핑, 카약, 암반 등반에 수영과 승마로 유명한 곳 입니다.
헨리 3세는 교양있고 인정많은 국왕이었으나 결단력이 부족하고 우유부단 했는데
프로방스 백작의 딸 엘레오노르와 결혼후 처가쪽 사람들을 중용하여 잉글랜드
귀족들의 불만을 샀으며, 아버지 때 잃은 영토를 회복하려고 증세를 감행하고
프랑스와 전쟁을 시도했다가 루이 8세가 반격을 해 패하는 바람에 위신만 깎입니다.
하지만 아키텐 서남부인 보르도 일대 해안은 가스코뉴라고 불리며 백년전쟁 시기까지 잉글랜드가
지배하는데, 차남 에드먼드를 시칠리아왕으로 삼게 하려는 공작도 실패했으며 동생 콘월공
리처드를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에 올리려 했으나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0세와의 대립을
이기지 못하고 독일왕으로만 머물렀으며 시몽 드 몽포르와 싸우다가 동생과 함께 포로로 잡힙니다.
한편 헨리 3세는 귀족들의 마그나 카르타 강요와 섭정기간 동안 강해진 귀족들의 권세를
꺾으려고, 로마 교황에게 신종하고 교회를 이용해 귀족들을 견제하여 아버지 존왕
때 잃은 절대 권력을 어느 정도 회복하였으나 내부의 불만이 커지는 건 막지 못했습니다.
헨리 3세의 매제였던 시몽 드 몽포르가 앞장서서 귀족들의 요구서인 옥스포드 조례를 왕에게 전달
하였으나 왕은 지킨다고 말만 할뿐 실제론 지키지 않았으며, 여전히 강력한 통치를 이어나가자
귀족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1264년 시몽 드 몽포르를 지도자로 귀족들의 대대적인 반란이 터집니다.
반란에 놀란 헨리 3세는 동생 콘월공, 장남 에드워드 1세와 함께 친정에 나서며 몽포르의 반란군
에 용감히 맞서 싸웠으나.... 루이스 전투에서 국왕군이 크게 패하여 셋 다 포로로 잡히고
최초의 의회를 여는데 동의하였으며 이로써 잉글랜드 왕가는 의회의 꼭두각시로 전락합니다.
이듬해 맏아들인 왕세자 에드워드가 극적으로 탈출하여 왕을 따르는 귀족들의 지원을 얻어 다시 군사를
일으켜 시몽 드 몽포르를 이브샴 전투에서 패사시킴으로써 권력을 회복하였지만, 헨리 3세는 이미
고령인 데다가 위신이 많이 깎였고 건강도 좋지못해 장남인 왕세자 에드워드 1세에게 국사를 맡깁니다.
에드워드 1세는 헨리 3세의 아들이며 에드워드 2세의 아버지로, 잉글랜드 중앙집권화의 기반을
마련하고 본격적으로 잉글랜드 의회를 창설하여 그 기초를 닦은 명군으로 손꼽히지만
하지만 웨일스와 스코틀랜드의 입장에서는 잔혹한 침략자이며 학살자이니 바로 롱생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