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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반가사유상 金銅半跏思惟像
반가사유상 半跏思惟像
반가사유상은 불전(佛典)의 내용 중에 석가모니가 태자(太子)로 있을 때 호화로운 궁전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안락하게 살아가고 있다가 어느 날 궁전 밖에서는 생로병사(生老病死)라고 하는 고통의 삶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인생에 무상함을 느끼고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중생들을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하여 고뇌하는 태자사유상(太子思惟像)에서 유래된 도상이다. 이러한 반가사유상을 ' 미륵보살 (彌勒菩薩) '로 부르게 된 것은 일본 야쮸지(野中寺)에 있는 666년에 조성되었다고 하는 반가사유상에 ' 미륵상 '이라는 명문(銘文)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른쪽 다리를 왼쪽 무릎 위에 올려 놓은 반가(半跏)의 자세로 앉아서 왼손을 오른쪽 다리 위에 두고 오른쪽 팔꿈치는 무릎 위에 붙인 채 손가락을 살짝 뺨에 두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형상을 하고 있는 불상을 일반적으로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이라고 한다. 이는 일본 학계의 명칭을 따라 반가사유상으로 불리지만, 반가(半跏)라는 말은 반쯤 앉아있다는 의미이므로 어색하다. 생각에 깊이 잠기면 자연스럽게 취해지는 자세이므로 그저 사유상(思惟像)이라고 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국보 제 78호
높이 80cm이며, 국보 제78호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삼국시대에 유행하였던 반가사유상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불상으로, 오묘한 표정과 의문(衣文)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머리에는 왕관 형식의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보관의 띠를 이마 위의 보관에 묶어 귀 좌우로 내려뜨렸다.
보관(寶冠)에는 탑 모양이나 일월(日月) 모양 또는 보주(寶珠)라고 불리는 장식이 세 가닥으로 올라갔으며, 중앙의 윗부분은 절단되었다. 이 부분들이 구슬이나 해와 달을 상징한다고 보기보다는 오히려 탑 모양에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얼굴은 네모꼴에 가깝지만 눈과 뺨이 두드러져 강인한인상을 풍기고 있다. 그러나 눈을 가늘게 반쯤 뜬 모습으로 하고 콧날을 오똑하게 하고 광대뼈를 나오게 하면서 입가를 들어가게 하여 미소를 얼굴 가득히 나타내고 있다. 이는 자연스러운 미소와 함께 개성이 뚜렷한 한국적인 보살의 얼굴을 성공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이러한 얼굴형은 중국의 동위(東魏)나 서위(西魏)의 불상과 보살상에서도 어느 정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네모꼴 얼굴에 광대뼈가 나오면서 입가를 들어가게 하여 얼굴에 가득하게 웃음 짓는 표정은 전형적(典型的)인 우리나라 사람의 특징있는 모습인 것이다. 즉, 이 불상은 한국적 불상형을 최초로 조형시킨 보살상이라는 것에서 중요한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
얼굴이 풍만하고 눈꼬리가 약간 올라갔으며, 입가에는 신비로운 미소를 띠었다. 복잡한 보관(寶冠)을 쓰고 있는 머리에서 내려오는 두 가닥의 드리개(수식..垂飾)가 보발(寶髮)과 함께 어깨까지 늘어졌다. 가슴 앞에 짧은 장식이 있고, 두 어깨를 덮은 천의(天衣)는 날개처럼 옆으로 퍼지면서 앞면으로 늘어져 무릎 위에서 ' X '자형으로 교차되었다.
상체는 당당하지만 쭉 곧고 늘씬한 모습이어서 중국 북위 말기 이래의 우아하고 귀족적인 형태미를 능숙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늘씬하고 우아한 형태는 아래로 내린 왼쪽 다리에서도 나타난다. 또한 왼쪽 허벅지에 올려 놓은 오른쪽 다리의 약간 치켜 올린 무릎과 종아리가 이루고 있는 곡선미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으며, 굽힌 두 팔에서도 잘 묘사되고 있다.
늘씬한 팔이나 체구에 비해서 손이나 발은 상대적으로 큰 편이다. 그러나 뺨에 대고 있는 오른손은 길고 유연하며 곡선적이면서도 탄력이 있어 전체적인 형태미와 조화가 잘 이루어지고 있다. 더구나 신체 전체의 부피감은 탄력 있고 매끄러우며 부드럽고도 율동적이어서 이 보살상의 우아한 모습과 잘 어울리고 있다.
나형(裸形)인 상반신과 가는 허리가 신라불상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두 팔에는 팔찌를 끼었고, 왼손은 반가(半跏)한 오른발을 잡고 있으며, 오른손은 오른쪽 무릎에 팔꿈치를 얹고 손가락을 볼에 대어 사유(思惟)하는 상을 나타내었다.
왼발은 밑으로 늘어뜨려 단판연화좌(單瓣蓮花座)를 밟고 있다. 하반신에 걸친 상의(裳衣)는 배 앞에서 매듭을 지어 내려오면서 도식화(圖式化)된 옷주름을 가늘게 표현하였고, 왼쪽에 한가닥의 끈이 드리워졌다. 뒷머리 부분의 흔적으로 보아 원래 광배(光背)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균형 잡힌 자세, 명상에 잠긴 오묘한 모습, 우아하고 화려한 옷무늬 등이 뛰어나다. 이 불상은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코발트 60의 방사선을 투과하여 촬영한 결과 7~8세기경 머리부분과 몸체 부분을 따로 주조한 다음 연결, 용접하여 만들어졌음이 확인되었다.
천의(天衣)는 목 뒤로 돌아 양쪽 어깨를 덮어 일단 새 깃처럼 반전된 뒤 다시 가슴쪽으로 흘러내려 왼쪽 다리에서 서로 교차된 다음 양 무릎을 지나 두 팔로 감아 내렸다. 천의 자락이 이루는 부드럽고도 율동적인 곡선미는 유연한 형태미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하체에 입은 치마(常宜. 裙衣)는 다소 두툼하면서도 탄력이 있게 나타내었으며, U 자형의 옷주름 선을 능숙하게 처리하고 있다. 치마는 맞뚫림조각 모양의 돈자를 덮기 위해서 비현실적으로 과장되고 있다. 오른쪽 다리의 무릎 밑에 두꺼운 옷자락을 받친 점이나 옷자락이 흘러내려 돈자를 전체적으로 감싸고 있는 상현좌를 이룬점 등에서 과장성을 충분히 볼 수 있다.
치맛자락은 앞면과 측면에 걸쳐 다리를 포함해서 네 가닥으로 흘러내렸다. 뒷면은 규칙적인 주름이 돈자덮개에서 한 번 물결치다가 돈자에서 다시 두 가닥의 자락을 이루고 있다. 이 옷자락들은 U자형을 이루며, 사이에 알파형의 주름을 이루었다. 허리띠는 배에서 한 번 나비매듭을 짓고, 양 허리에서 흘러내려 엉덩이 밑으로 들어간 띠는 다시 나와 매듭을 지은 뒤 흘러내리고 있다.
띠에는 구슬무늬와 격자무늬를 정교하게 새겨 넣었다. 큼직한 왼쪽 발은 족좌(足座) 위에 듬직하게 올려 놓았으며, 타원형의 발 대좌에는 연꽃을 곧추 세운 힘찬 연꽃무늬를 뚜렷하게 부조하였다. 네모난 얼굴에 광대뼈가 나오게 한 반면 만면한 미소를 띠고 있는 이 불상은 바로 한국적인 얼굴을 훌륭하게 묘사한 것으로 크게 주목되고 있다.
정면에서 이 반가사유상을 보면 허리가 매우 가늘어 여성적인 느낌을 주고 있지만, 측면에서 바라보면 상승(上乘)하는 힘이 넘쳐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탄력(彈力)이 넘치는 신체의 곡선(曲線)이 강조되었고, 양쪽 어깨로부터 끝이 위로 올라와 날카로움을 한층 더해 주고있는 천의(天衣)자락은 유려한 선을 그리면서 몸을 감싸고 있다.
천의 (天衣) 끝자락의 미학
중국의 사유상(思惟像)은 대체로 돌로 조각한 것이 많으며 크기도 20cm 내외이다. 그런데 이미 6세기 후반 고구려에서는 1m에 가까운 등신대(等身大)의 금동제 사유상이 만들어 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사유상이 주존(主尊)의 주변이나 소규모의 감실(龕室)에 봉안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등신대의 사유상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법당의 주존(主尊)으로 모셨음을 웅변하는것이다. 스님이나 신자들은 그 주변을 돌면서 예배하므로 옆면과 뒷면 모두 깨끗하게, 훌륭하게 조각하게 된 것이다.
이 사유상의 옆면을 보면 신체의 굴곡이 매우 탄력적으로 표현됐으나, 이 사유상에 아름다움과 힘을 부여하고 있는 것은 바로 천의(天衣)이다. 목에 두르며 신체의 양쪽으로 흘러내려오는 숄 같은 긴 천의가 어깨를 타고 내려오다가 갑자기 넓어지고 첨예한 끝은 힘차게 위로 뻗쳐 올라간다. 그리고 천이는 다시 가늘어져서 신체의 굴곡을 따라 밀착하여 내려오다가 배 부분에서 교차(交叉)하며 좌우로 내려오고 있다.
번잡함을 피하기 위하여 신체에 밀착하여 둔부 밑으로 일단 들어갔다가 뒤로 다시 나와 흘러내리되 좌우로 뻗치면 조형상 좋지 않으므로 뒤로 힘차게 뻗치고 있다. 그것을 더 강조하기 위하여 끝을 다시 넓게 하여 갑자기 끝이 식칼 같은 형태의 두 가닥으로 갈라지면서 뒤로 뻗치고 있다. 현재는 복원되었지만, 오른쪽 천의 끝자락 윗부분이 파손되었으며, 왼쪽의 천의(天衣) 끝은 두 가닥 모두 파손됬었다. 일제강점기의 파손된 상태와 복원된 후의 사진을 비교해 보면 조형상의 큰 차이를 엿 볼 수 있다.
보살(菩薩)의 정신을 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형태를 변화시킬 수 밖에 없다. 예술의 특권(特權)은 변형(變形)에 있다.그것이 허용되지 않으면 예술은 존재할 수 없다. 고대인들은 이미 그것을 충분히 터득하고 있었다. 일상적 표현이 아니기에 오늘날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지도 모른다.
얼굴을 들어 중생(衆生)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하여 위로 들어올린 오른쪽 무릎을 힘차게 솟구쳐 받쳐주는 치마의 끝을 보라. 그 부분이야 말로 이 사유상의 영기(靈氣)를 가장 강력하게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사유상에는 언뜻 보기에는 고요한 자세로 보이고 있지만, 보관, 천의, 치마 등을 통해 위대한 보살 정신의 생명력(生命力)이 역동적(力動的)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천의(天衣)의 끝자락 부분을 복원한 것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미소
우리 문화유산에 나타난 한국 최고(最高)의 미소(微笑)는 단연 이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의 미소이다. 원만하고 결 고운 얼굴 선을 타고 눈매와 입가로 번져가는 고요하고 그윽한 미소...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리(眞理)와 영생(永生)을 깨우친 깨달음의 미소..
인간사의 번잡함을 초월한, 선악(善惡), 미추(美醜), 애증(愛憎)을 넘어선 영원의 미소. 바로 종교적, 철학적인 신비(神秘)의 미소이다. 이 미소는 그래서 찰나적이거나 즉흥적(卽興的)이지 않다. 여운(餘韻)은 길고 감동(感動)은 깊다. 최순우 전국립중앙박물관장은 이 미소를 ' 슬픈가 하면 슬프지 않고 미소 짓는가 하면 거기 준엄한 기운이 깃들어 있다. 슬프다, 너글럽다, 슬기롭다 하는 인간의 감정이 하나의 화음(和音)으로 빚어진 미소이다 '라고 묘사하였다.
금동반가사유상의 아름다움
반가사유상이 지닌 아름다움의 특색은 사색하고 있는 무처의 깊고 맑은 정신적인 아름다움이 인체 사실(寫實)의 원숙한 조각솜씨와 오묘한 조화를 이루어주는 것에 있다. 슬픈 얼굴인가 하면 그리 슬픈 것 같이 보이지도 않고, 미소 짓고 있는가 하고 바라보면 준엄한 기운이 입가에 간신히 흐르는 미소를 누르고 있어서 무엇이라고 형언할 수 없는 거룩함을 뼈저리게 해 주는 것이 부처의 미덕이다.
인자스럽다, 슬프다, 너그럽다, 슬기롭다 하는 어휘들이 모두 하나의 화음(和音)으로 빚어진 듯 머릿속이 저절로 맑아오는 것 같은 심정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그러한 부처가 중생들에게 내리는 제도(濟道)를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도(濟度)란 부처가 생(生)과 사(死)를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세상에서 중생을 건져 내어 열반(涅槃)에 이르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반가좌의 자세도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것은 허리를 약간 굽히고 고개는 살짝 숙인 채 팔을길게 늘어뜨린 비사실적(非寫實的)인 비례를 통하여 가장 이상적인 사유(思惟)의 모습을 창출해낸 조각가의 예술적 창의력에서 비롯되고 있다. 더욱이 뺨 위에 살짝 댄 오른손의 손가락은 내면의 법열(法悅)을 전하듯 손가락 하나하나의 움직임이 오묘하다.
한마디로 이 불상의 조형미(造形美)는 비사실적(非事實的)이면서도 자연스러운 종교적 아름다움, 곧 이상적 사실미(事實美)로 정의할 수 있다. 고졸한 미소와 자연스러운 반가좌의 자세, 신체 각 부분의 유기적 조화, 천의 자락과 허리띠의 율동적인 흐름, 완벽한 주조기법(鑄造技法) 등 우리는 이 사유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반가사유상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사유상은 내부가 흙으로 채워진 중공식(中空式) 주조기법을 사용하였다. 크기가 1m에 가까워서 금동불로는 비교적 큰 것임에도 불구하고 청동의 두께가 2~4mm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얇은 두께를 고르게 유지하기 위하여 머리까지 관통하는 수직의 철심과 어깨를 가로지르는 수평의 철심을 교차시키고, 머리 부분에 철못을 사용하여 주조틀을 고정시켰다. 고도의 주조기술이 뒷받침되었기에 이처럼 아름답고 생명력이 있는 불상의 제작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이 반가사유상은 보관의 형식과 어깨에서 위로 뻗치고 있는 천의자락, 옷주름 등으로 미루어 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제작 국가로는 고구려, 백제, 신라 등 당시 우리나라에 존재하였던 三國이 모두 거론되고 있으며, 현재까지의 연구 성과로는 하나의 특정국가를 지목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실정이라고 한다. 이는 반가사유상이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은 범용적 예술성을 지지고 있어 더욱 그러하다고 한다.
일본 국보 제1호
일본의 국보 제1호는 목조미륵반가사유상(木造彌勒半跏思惟像)이다. 참고로 일본의 국보 제1호는 이 반가사유상뿐 아니라 여러 개가 있다. 한쪽 다리를 다른 다리의 무릎 위에 올리고 앉아 오른손으로 가볍게 턱을 괸 모습인데, 이 불상은 현재 교토 고류지(廣隆寺)에 있다. 이 목조사유상은 신라 사람에 의하여 신라의 소나무로 조각, 전래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다만 일본당국이나 일본인들이 자기 나라 국보 제1호가 다른 나라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지 않을 뿐이다. 일본의 정사인 ' 일본서기 '에는 신라에서 건너온 불상을 고류사(廣隆寺)에 안치하였다는 기록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고류사 廣隆寺
고류사(廣隆寺)는 603년 우리나라에서 이주해 온 직물기술자 진하승(秦何勝 .. 히타노 가와카스)이 건립한 절이다. 그는 일본의 쇼도쿠(聖德)태자와 절친한 사이이었다. 쇼됴쿠태자가 불행하게도 48세에 홍역으로 급사하자, 그를 기리기 위하여 자신이 세운절, 고류사에 모실 미륵보살상을 신라에 주문하였다. 이에 신라의 장인은 시일이 촉박하여 청동(靑銅) 대신 적송(赤松) 통나무로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깎아 금을 입혀 일본으로 보냈는데, 봄에 죽은 '쇼도크태자'의 명복을 기리기 위하여 조성된 보살상이 623년 7월에 일본에 도착하였다. 이러한 기록은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부러진 새끼 손가락
이 사유상은 위의 "일본서기" 기록뿐만 아니라 불상의 재질이 한반도에서 자라는 소나무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규명되기도 하였다. 1980년대 초, 불상의 미소에 반한 일본인 대학생이 자기도 모르게 불상에 접근하였다가 실수로 불상의 오른손 새끼 손가락을 부러뜨리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큰 소동이 일어났지만 다행스럽게도 정밀 조사를 통해 재질이 한국에서만 자라는 적송(赤松)임이 밝혀졌다. 이 적송은 일명 춘양목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경상북도 봉화에서만 자라는 소나무이다. 즉 적송으로 조각한 것은 한국의 목조불상의 특징인 것이다. 그리고 조각의 방식이 전통 일본 조각방식과는 다르게 목리(木裏)에서 목표(木表)로 조각하였다는 사실들이 증명되어 소나무와 접속된 신라미의 위대한 창조물로 각광을 받아왔다.
일본의 목재 재질학자 고하라 지로오(小原二郞)박사는 일본 목조불상의 대부분이 활엽수인 녹나무인데, 이 반가사유상만이 유일하게 침엽수인 소나무이고, 그 뿌리를 소급하여 보니 한반도에서 자라는 적송(赤松)의 일종이며, 일본에서는 유일하게 목조불상 중 역조(逆彫) 방식으로 조각되었음을 밝혀 낸 것이다.
활엽수는 같은 나무라 해도 색조나 질감이 고르지 않을 뿐더러 나뭇결이 무질서하여 만약 사유상을 그것으로 조각하였다면 오묘한 아름다움은 창출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사유상에 숨겨진 그 오묘한 아름다움의 뿌리 가운데 하나는 소나무 특유의 목리(木裏)처리에 있었다. 이 불상이 지닌 완곡한 부위, 이를테면 걸친두 다리의 무릎, 굽힌 팔꿈치, 유연한 곡선의 젓가슴, 코를 복판으로 하여 양쪽으로 스러지는 두 볼의 곡선 등을 유심히 보면 목리가 동심원을 그리도록 처리되어 있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소나무 한 토막으로 그 많은 둥근 부위의 동심원 목리(木裏)를 동시에 표출시킨 놀라운 예술적 계산에 의하여 소나무가 비장한 최고의 아름다움을 들추어낸 셈이다. 만약 이 소나무의 동심원(同心圓) 목리를 표출하는 데 실패하였다면 이 사유상이 지닌 볼륨감과 원만감이 보는 이의 시각에 강조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보는 이의 사고(思考)에 평화와 안정을 유발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눈매와 입매는 웃고 있지 않은데 미소를 느끼게 하는 비밀은 조각한 사람의 예술적 심도(深度)의 깊이에 이겠지만, 단단하기 비길데 없는 소나무의 재질이 칼을 통해 조각한 자의 영감(영감)과 공명하고 있음을 감수할 수 있으며, 소나무가 아니었던들 가능했을까 하는 의심을 갖게 한다.
한국 국보 제83호 그리고 일본 국보 제1호
머리에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오른쪽 다리를 왼쪽 무릎위에 살짝 올려놓은 모습은 서로 닮았다. 서로 다른점은 한국국보는 재료가 금동이고, 일본의 것은 목재라는 점, 왼발이 밟고 있는 연꽃좌대의 꽃잎이 한국의 것은 단엽이고, 일본의 것은 복엽(複葉)인 점이 다르다.
그리고 옷주름이 한국 것은 굴곡이 심하여 생동감이 강하게 느껴지는 반면 일본 것은 옷주름이 잘 정돈되어 차분한 느낌을 주고있고, 한국 것은 명상 중에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듯하고, 일본의 것은 발가락이 뻣뻣하다. 한국의 반가상은 목걸이가 있고, 일본 반가상은 목걸이가 없다. 한국이 사유상은 검지와 장지를 펴서 턱을 괴었고, 일본의 사유상은 엄지와 무명지를 둥글게 맞대었다.
일본 국보 제1호로 지정된 배경
현재까지 다른 일본의 국보에는 지정번호가 매개져 있지 않다. 그럼에도 오늘날 일본이 세계에 자랑으로 삼는 이 사유상이 유독 일본 국보 제1호로 지정된 배경이 따로 있다. 그것은 매우 귀중한 문화재들이 소실(燒失)되는 화재가 잇따라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1949년 1월26일 일본 나라(奈라)의 호류지(法隆寺)의 금당벽화(7세기 초 고구려의 담징이그린 벽화)가 원인 불명의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 이듬해인 1950년 7월에는 교토의 금각사(金閣寺)도 방화사건으로 불타버렸다. 이에 당황한 일본문화재위원회는 서둘러 이 사유상을 일본의 국보 제1호로 지정하고 철저한 보호대책을 세우게 되었다. 그후 1995년 1월17일 일본 고베지역에 큰 지진(地震)이 일어나자 일본 당국은 국보 제1호의 안전을 위하여 불상 아래쪽 바닥에 지진 피해 예방대책으로 이른바 내진대(耐震臺)를 설치하였다.
로댕의 생각하는사람
나를 지나는 사람은 슬픔의 도시로
나를 지나는 사람은 영원한 비탄으로
나를 지나는 사람은 망자에 이른다.
정의는 지고하신 주님을 움직이시며
신의 권능과 최고의 지혜와
원초의 사랑으로 나를 만들었다
나보다 앞서는 피조물인란
영원한 것 뿐이며 나 영원히 서 있으리
여기에 들어오는 자 희망을 버려라
높이 186cm크기의 이작품은 1880년에 완성되어 최초에는 '詩人'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지옥의 문'의 문 윗 부분에서 아래의 군상(群像)을 내려다 보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그것을 1888년에 독립된 작품으로 크게 하여 발표, 1904년에 살롱에 전시하면서 유명해졌다. 단테의 " 신곡(神曲) "을 주제로 한 " 地獄의 門 "의 가운데 시인(詩人)을 등장시키려고 하는 로댕의 시도가 벗은 채로 바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여러 인간의 고뇌를 바라보면서 깊이 생각에 잠긴 남자의 상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전신 근육의 긴장에 의하여 격렬한 마음의 움직임을 응결시켜, 영원히 계속 생각하는 인간의 모습을 강력하게 표현하였다.
로댕의 ' 생각하는 사람 '과 우리의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서로의 차이(差異)를 통하여 서양과 동양의 사상체계(思想體系)를 비교할 수 있게 하여준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생각하는 모습이지만 '생각'보다는 근육질의 몸매를 보다 잘 보여주고 있고, 우리의 '반가사유상'은 남성인 듯, 여성인 듯한 모습으로 정신적 실존(實存)을 형상화시켰다. 똑같이 생각, 사유를 다루었지만, 이를 담고 있는 육체의 모습에서 하나는 "정신"을, 다른 하나는 "육체"를 느끼게 한다. 여기서 우리는 " 서양의 사유(西洋의 思惟) "와 " 동양의 사유(東洋의 思惟) "의 차이를 인체(人體)를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 생각하는 사람 '에 담겨있는 사상은 육체적, 물질적 외면성을 중요시하여 인간의 고뇌, 물질의 풍요 등 현실문제를 중시하는 사상이다. 그에 반하여 우리의 ' 반가사유상 '은 육체(肉體)의 가치(價値)보다는 신체와 마음의 조화(調和)를 추구하는 정신적 내면성을 강조하여 현실의 문제를 초월한 정신의 세계를 중시하고 있다. 이들이 사상 중 어느 것에 우위(優位)를 두려고 노력하는 것은 자기당착의 오류에 빠지기 쉽다.
반가사유상은 관념적인 인간의 세계를 실존적으로 형상화 내지는 고뇌로부터 초탈하는 인간의 모습을 정신적인 사유로 나타낸 것이지만, "생각하는 사람"은 단테의 신곡(神曲)을 주제로 "지옥의 문"에 여러 인간들의 고뇌를 바라보며 깊이 괴로움에 빠진, 왜소할 수 밖에 없는 한 인간의 외로운 모습을 서양의 이상적인 아름다운 근육미에 의해 물질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 생각하는 사람 '이 단순히 단테를 상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일반적으로 사유하는 인간의 고뇌에 찬 모습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짙다. 신비한 빛에 고양된 인간이 동물적인 차원보다 높아지려는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과정에서 최초의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치열한노력을 더욱 적극적으로 만들기 위하여 로댕은 수축된 근육(筋肉)을 묘사함으로써 숭고해지려는 인간의 정신적 노력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고뇌에 찬 몸부림인가를 공간 속에 구체적으로 구현한다.
일월식삼산관사유상 日月飾三山冠思惟像
머리에 특이한 형태의 삼면보관(三面寶冠)을 쓰고 있는데, 보관 위에 초생달과 둥근 해를 얹어 놓은 일월식(日月飾)의 장식이 표현되어 있어 이를 일월식삼산관사유상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일월식 보관은 이란의 사산조(朝) 왕관에서 유래된 것으로 중국을 비롯하여 우리나라, 일본에 이르기까지 나타나고 있다. 보관 밑으로는 관대(冠帶)가 양쪽 긑에 있는둥근 고리를 통해 두 가닥으로 나뉘어져 어깨 위까지 내려와 있으며, 목에는 가운데 끝이 뾰족한 굵은 목걸이가 장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위대한 존재의 머리 주변에는 후광(後光)을 표현한다. 인도 불상의 광배(光背 ..불상의 후광)는 단순한 편인데, 중국에 이르러 크게 변화가 일어나 광배의 넓이가 확대되고, 그곳에 다양한 역동적 영기(靈氣)무늬를 새겼다. 흔히 화염무늬라고 부르는 것은 "불꽃 모양의 역기 무늬"인것이다. 그러한 영기 무늬는 광배뿐만 아니라 보관(寶冠)에도 나타난다.
일월식사유상의 보관은 장식이 매우 복잡하고 화려하다. 보관 중앙부의 양옆으로 잎처럼 솟아오른 이상한무늬들은 평양 덕화리 1호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익히 보아온 바로 그 영기 무늬이다. 전체 모양도 영기의 싹을 3차원적으로 표현하였거니와 그 안에 선(線)으로 조각한 무늬도 바로 영기의 싹으로 그 끝에서 파장무늬가 나와 운동감을 나타낸 것은 그 벽화의 무늬 그대로이다.
게다가 보관 양쪽에도 역시 똑같은 영기무늬 다발이 역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보관 띠의 끝자락이 아니었다. 보관의 띠는 한두 가닥이면 충분한데 무려 열개가 넘는 다발을 이룬 것은 중생을 널리 구하겠다고 맹세한 보살의 위대한 정신을 마음껏 표현하기 위하여 그렇게 만든 것이다. 이를 근거로 이 사유상은 고구려의 불상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복원
복원 전... 천의(天衣) 양쪽 끝자락을 복원하기 전의 금동반가사유상. 본래 천의(天衣)는 반가사유상 등 뒤 아래로 흘러내렸다가 가장 아랫부분에서 두 갈래 곡선을 그리며 뻗어 나간 형태이었지만, 오른쪽 천의 끝자락은 윗부분이 없었고, 왼쪽 끝자락은 위아래 모두 없었다.
복원 후 ... 천의 양쪽 끝자락을 복원한 후의 반가사유상. 오른쪽과 왼쪽 끝자락 모두 두 갈래로 갈라져 뒤쪽 위로 뻗어나간 곡선의 아름다움을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