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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사도신경>에서 빠진 중요한 교리들
<사도신경>은 『사도들의 신앙 고백』이며, <사도신경>을 암송하지 않으면 “이단”이라고 배웠고, 어렸을 때부터 습관적으로 암송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이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 관심도 없었고 또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것으로 예배를 시작하고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것으로 예배를 마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많은 교회에서 많은 목사님과 많은 성도들이 모두 <사도신경>을 암송하기 때문에 당연히 <사도신경>이 『사도들의 신앙고백』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사도신경>이 『사도들의 신앙고백』일까요?
만약 <사도신경>이 『사도들의 신앙 고백』이 아닌 사람들의 전통이라면?
무지(無知)는 무죄(無罪)가 아닙니다.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속지 말라. 하나님은 조롱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이기 때문이라"(갈6:7)
첫째. 점진적으로 발전한 <사도신경>초대 교회에는 여러 사람들이 만든 ‘다양한 믿음의 규칙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믿음의 규칙들은 처음 구원받은 신자들에게 바른 신앙의 길을 가르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사람이나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존재하던 믿음의 규칙들을 2세기에 리용의 감독이었던 이레네우스(Irenaeus)가 하나의 믿음의 규칙으로 만들어서 교회의 근본 교리로 승격시켰습니다. 이레네우스가 만든 ‘믿음의 규칙(Rule of Faith)이 바로 <사도신경>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이레네우스가 만든 ‘믿음의 규칙(Rule of Faith)’은 음녀 로마 카톨릭 교회와 여호와의 증인들의 비성경적 믿음을 뒷받침하는 이단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이레네우스는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 교회를 세웠으며 로마 교회의 감독은 사도권의 계승자이며, 세례, 안수, 만찬과 같은 여러 가지 의식(Sacrament)은 구원과 관계되는 ‘생명의 약’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또 마리아는 ‘둘째 이브’이며, 교회는 ‘어머니 교회’(Mother Church)라고 불려야 한다고 주장하므로서 ‘마리아 숭배 사상’에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예수님의 지상 생애를 통해서 아담의 모든 저주를 회복하셨다는 ‘생애 반복설’을 주장하여 ‘유아 세례’의 근거를 마련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유일하고 전능하신 하나님과는 동등하지 않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여호와의 증인들의 핵심 교리이기도 합니다.이런 비성경적인 부패한 신앙을 소유한 이레네우스의 믿음의 규칙으로부터 다양한 믿음의 신조들도 만들어졌습니다.그 후 4세기 암브로스 감독의 글에서 처음 <사도신경>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점진적 발전을 계속한 <사도신경>은 8세기에 샤를마뉴 대제(AD742-814)가 국가적으로 사용하도록 명령하기도 합니다.12세기에 이르러 카톨릭 교회의 프리미니우스(Priminius)에 의해서 현재의 <사도신경>과 같은 내용으로 완성되었는데, 이것을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신앙고백>으로 사용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처럼 <사도신경>은 사도들과는 관계없이 로마 카톨릭 교회에 의해서 “점진적으로 만들어진 사람들의 작품”에 불과합니다.
둘째. 전설에 근거를 둔 <사도신경><사도신경>이 “사도들의 신앙 고백”이라고 믿게 된 다른 이유는 4세기경 루피누스(Rufinus)가 ‘사도 신조의 주석’에서 언급한 전설 때문입니다.
이 주석에서 “<사도신경>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10일째 되는 날 12사도들이 영감을 받아 직접 한 줄씩 쓴 것”이라고 주장합니다.이것은 4세기 루피누스가 주장하기 이전에는 누구도, 어떤 기록에도 전혀 언급되지 않는 만들어진 전설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10일째 되는 날에 사도들이 영감을 받아 기록한 것이라면 어떤 신약 성경보다도 가장 먼저 ‘기록된 성경’이며, 다른 성경들이 섭리적으로 신중하게 보존되었듯이 보존되었을 것입니다.아무리 선한 목적일지라도 ‘꾸며 낸 전설’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까?거짓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까?위의 두 가지 만으로도 <사도신경>은 사도들의 <신앙고백>이 결코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사도신경> 자체의 증거입니다.
1.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사역은 “아버지 하나님 한 분만의 창조 사역”이 아닙니다.창조의 사역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동역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사역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심으로 시작됩니다.그러나 창세기 1장 2절과 욥기 26장 13절과 시편 33장 6절, 시편 104장 30절 말씀을 통해서 ‘성령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에 함께 동역하셨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아들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역하신 사실은 요한복음 1장 1- 3절과 골로새서 1장 15-16절과 히브리서 1장 2절 말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사도들이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에 동역하신 사실을 부인하는 신앙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2.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born of the Virgin Mary)
예수님께서 ‘처녀 마리아(virgin Mary)’에게서 탄생하신 것은 사실입니다.그러나 마리아는 “신성을 소유한 동정녀 마리아(Virgin Mary)”에게서 탄생하신 것은 아닙니다.한글로는 구분이 되지 않지만 영어로는 대문자 ‘Virgin’을 사용하여 마리아를 ‘신성을 지닌 인물’로 고백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이것은 마리아를 “죄없는 여인”으로,“하늘의 여왕”으로 부르고. 로마 카톨릭 교회를 ‘어머니 교회’라고 부르며, 마리아를 숭배하는 카톨릭의 부패한 신앙을 그대로 드러내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죄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첫 아들을 낳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모세의 율법인 레위기 12장 8절 말씀을 순종하여 죄 있는 여자가 드려야 할 번제 헌물과 죄 헌물을 드려야 하였습니다.누가복음 2장 22-24절에 의하면 마리아는 산비둘기 한 쌍이나 집비둘기 두 마리로 희생물을 드리고자 하였는데 이 기록들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죄 있는 여인’이었음을 확증하는 것입니다.사도들이 성경 기록을 모르고, 마리아를 ‘신성을 지닌 하늘의 여왕’으로 신앙 고백을 하였을까요?
3.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도록 허락한 것은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가 고백해야 할 것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가 아닙니다.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바로 "죄인들의 죄로 인해 고난을 받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벧전2:21)친히 나무에 달려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지셨으니(벧전2:24a)사도들이 죄인으로 인해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받으셨으나 부활하신 사실을 고백하기보다 죄 없는 예수님을 죽이도록 허락한 빌라도를 기억하는 고백을 하였을까요?
4. <거룩한 공회와>(The Holy Catholic Church)
"거룩한 공회"는 ‘The Holy Catholic Church'(거룩한 카톨릭 교회)를 번역한 것입니다.
일부에서는 “The Holy Catholic Church”는 "거룩한 보편적인 교회"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The Holy Catholic Church”는 기록된 그대로 ‘거룩한 카톨릭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12세기 <사도신경>을 완성한 ‘프리미니우스(Priminius)’는 거룩한 어머니 교회를 믿는 로마 카톨릭 교도였습니다.“The Holy Catholic Church”는 "거룩한 공회"도 아닙니다.
“The Holy Catholic Church”를 "거룩한 공회"라고 번역이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공회(The Holy Council)’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왜냐하면 성경에 기록된 모든 "공회(The Council)"는 항상 하나님과 성도들을 대적하고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마26:59), 사도들(행5:27) 스데반(행6:12) 바울(행23:1)도 모두 "공회(The Council)"에 끌려가 고초를 당하였습니다.하나님께서는 ‘거룩한 공회’는 없으나 “하나님과 성도들을 대적하고 박해하는 공회는 있다”고 말씀하십니다.사도들이 “거룩한 공회나 거룩한 카톨릭 교회를 믿는다”는 반성경적인 신앙 고백을 하였을까요?
5.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the Communion of Saints)”은 ‘살아있는 성도들이 서로 교제한다’는 말이 아닙니다.로마 카톨릭 교회의 <사도신경>에는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라고 번역되었습니다.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는다”라는 고백은 레위기 19장 31절과 신명기 18장 11절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금지하시고 미워하시는 가증스러운 반성경적인 고백입니다.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말하는 “성인(Saint)”은 살았을 때 많은 선행과 많은 공덕을 축적한 사람들로서 죽은 후에 교황청의 심사를 거쳐 교황에 의해 성인(Saint)으로 선정된 “죽은 남자와 여자”들을 말합니다.
카톨릭 교회의 구원 교리는 죄인이 구원을 받으려면 “구원받을 만큼의 선행과 공덕”을 쌓아야 한다는 “공덕 축적설”입니다.만약 구원받을 만큼의 선행과 공덕이 없는 자는 “연옥”에 있게 되며, 이때 살아있는 사람들이 “연옥”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죽은 ‘성인(Saint)들에게 기도하여 성인들의 선행과 공덕의 도움을 받아 “연옥”에서 벗어나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고 합니다.
죽은 성인에게 기도하여 선행과 공덕을 나누어 받는 것을 "통공, 혹은 성인 통공"이라고 합니다.예수님의 십자가 피흘리심이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시기에 부족해서 죽은 성인의 선행과 공덕에 도움을 받아야 할까요?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죽은 자들과 교통)하는 반성경적인 신앙 고백을 하였을까요?마법사나 부리는 영에게 묻는 자나 마술사나 강신술사가 너희 가운데 있지 못하게 할지니라(신18:11)
넷째. <사도신경>에서 빠진 중요한 교리들
1) 믿음의 근원이며 하나님의 법이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한 고백이 전혀 없습니다.
2) 예수님의 죽으심만 언급하였을 뿐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신 이유에 대한 고백이 전혀 없습니다.
3) 사람과 같은 육체로 세상에 오셨으나 죄 없이 사신 예수님의 거룩한 삶에 대한 고백이 전혀 없습니다.
4)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은 믿으나 죄 사함 받는 올바른 방법에 대한 고백이 전혀 없습니다.
☹ 이방 종교들도 죄를 사하여 주는 것은 믿습니다.
5)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고백이 전혀 없습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고백이 전혀 없습니다.
6) 어느 곳에서 영원히 사는 것인지에 대한 고백이 전혀 없습니다.
☹ 지옥도 고통 중에 영원히 사는 곳입니다.
<사도신경>은 '사도들의 신앙 고백'이 결코 아닙니다.사도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신앙을 고백할 수 있습니까?늦기 전에 !1986년 아시안 게임에서‘우샤’라는 인도선수가 다른 선수보다 100M이상 앞서서 골인하여 금메달을 받았으나 곧 금메달을 박탈당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선수의 레인을 침범하여서는 안 된다’는 경기 규칙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레인 침범은 고의가 아니었고, 실력도 뛰어났으며, 열심히 경기를 하였으나 경기장의 법을 지키지 않은 열심은 ‘헛수고’입니다.1988년 올림픽 100m 경기에서 금메달을 박탈당한 ‘벤 존슨’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과 동메달을 박탈당한 인도선수 ‘수니타 라니’는 모두 경기 규칙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메달을 박탈당하는 수치를 겪게 되었습니다.메달을 받으려면 열심보다 경기 규칙을 지켜야만 합니다. 하나님께 상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법대로 열심히 그러나 바르게 법을 지켜서 신앙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상속과 왕관은 세상의 금메달과 비교할 수 없는 귀하고 큰 상입니다.하나님께서 주실 상속과 왕관을 무시하시렵니까?무지는 무죄가 아닙니다.심판석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고, 빈손이 되시렵니까?
많은 사람들이 가면 옳은 길일까요?간교한 마귀는 많은 사람들을 속일 수 있습니다.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고 들어가는 사람이 많습니다.찾는 자가 적은 좁은 문이지만 영원한 상속과 왕관이 보장된 안전한 길을 가지 않으시렵니까?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빠른 때입니다.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5:29)[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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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이정석 박사의 글 전문(http://blog.daum.net/-sraok/12451682)
그리스도는 음부에 내려갔는가
사도신경(使徒信經, Symbolum Apostolicum)은 신조중의 신조로서, 로마 카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그리고 개신교회를 포함하여 세계의 모든 기독교회가 다 함께 고백하는 성경적이며 사도적인 신앙고백이다.
따라서, 이 세계교회 신조(Ecumenical Creed)는 웨스트민스터 신조나 루터교회의 일치 신조 등과 같은 교파 신조와 달라서, 사도신경의 거부는 정통적인 기독교회로부터의 탈퇴로 간주되어 이단(異端)으로 정죄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다.
이러한 이유로, 심지어 사도신경의 일부를 문자적으로 불신하는 자유주의적인 교회도 이를 거부하지 않고 자기들의 신학적 해석을 달리한 채 사도신경을 여전히 고백하고 있다. 교회사적으로 자기들의 신학과 배치되는 사도신경의 일부를 수정 혹은 삭제하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19세기 독일에서 자유주의신학이 발호하면서 사도신경에서 동정녀 탄생 구절을 제거하려는 운동이 강력히 일어났으며, 오늘날에는 여성신학의 영향으로 "하나님 아버지" 구절을 수정하자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일시적인 호응은 있었으나, 사도신경의 수정이나 삭제는 세계교회에 의해 거부되어 왔다.사도신경의 삭제그런데 한국 개신교회는 모든 교파가 공동으로 사도신경의 한 조항을 삭제(削除)하는데 성공하였다.
이것은 전 세계교회에 유례가 없는 일로서, 세계교회가 교파와 신학을 초월하여 고백하는 한 조항을 한국 개신교회가 고백하기를 거부하는 중대한 불상사이며, 세계교회와 보조를 같이하지 못하는 일면을 가지고 있음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더욱이 한국교인의 절대다수가 이러한 사실을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있으며 세계교회도 한국교회의 사도신경에 한 구절이 삭제되어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나아가 이 구절을 삭제해야 될 분명한 신학적 이유도 없이 일종의 사고(事故)와 같이 삭제되어 한국적 신학의 문제도 아니며 이에 대한 신학적 변증도 연구도 없기 때문에,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국제 교회회의나 외국교회에 가서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에는 아무 문제없이 이 구절을 고백하면서도 이를 회복하려는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음은 매우 애석한 일이다.
바로 그 문제의 구절은 "음부에 내려가시고(Descendit ad inferna)"라는 구절로서, 사도신경 원문에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어, 음부에 내려가셨다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며"로 되어 있다.
교회 역사상 예외없이 고백되어 왔으며 지금도 세계의 모든 장로교회와 개혁교회들을 포함한 모든 세계교회들이 고백하는 이 구절을 왜 한국교회는 공동적으로 고백하기를 거부하는가?
일찍이 1938년에 박형룡 교수도 이 문제를 지적하였으며, 최근에 김영재 교수는 이 구절을 삭제한 이유가 아마도 "설명이 곤란해서 슬쩍 빼 버렸든지 아니면 문자적 번역을 피하여 의역한 것"이리라고 추측하였다.
그러나 보다 역사적인 설명은 김용준 목사가 1963년 {기독교 사상}지에 2회 연재한 "사도신경의 개역의 필요성"이라는 논문에서 발견된다.
그는 한국교회의 초기문서들을 분석한 결과, 이 구절의 삭제가 감리교회의 영향에 의한 것임을 발견하였다. 1894년 언더우드 선교사의 사도신경 번역판이나 1905년 장로교 선교사 협의회에서 번역한 사도신경에는 이 구절이 들어 있는 반면, 1897년과 1902년, 그리고 1905년에 번역된 감리교회의 사도신경에는 한결같이 이 구절이 삭제되어 있다.
그리하여 한국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는 이 구절에 대해서 상반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1908년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합동 찬송가}를 발간하면서 사도신경의 통일이 불가피하게 되었는데, 이 때 한국 장로교회는 양보해서는 안 될 양보를 하고 말았다.
이후로 한국 장로교회는 부당한 감리교회의 삭제를 추종하고 있으며, 심지어 독자적으로 찬송가를 발행할 때에도 이를 회복하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였다.중대한 손실역사적으로 1440년 Reginald Pecock이 이 구절의 삭제를 제안한 적이 있으며, 종교개혁 시대에도 Walter Deloenus가 유사한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이를 강력히 반대하면서 그의 {기독교 강요} 2권 16장 8절에서 이렇게 경고하였다:"
이 구절은 우리 구원의 총체를 이해하는데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만일 이 구절을 삭제하면,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주는 은택의 많은 부분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개혁교회들은 이 구절을 중시하여 왔다. 비록 해석상의 차이는 존재하였고 중요성의 정도에서도 어느 정도 차이가 있어 온 것은 사실이지만, 이 구절의 삭제란 생각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감리교회는 교리보다는 실천적인 면을 강조하면서 역사적인 정통교리 중에서 난해하거나 상식을 초월하는 일부 교리를 제거하는 작업을 감행하였다.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John Wesley가 1784년 작성한 감리교신조는 영국교회의 신조인 '39신조'에서 발췌한 25신조인데, 이때 칼빈주의적인 부분들이 많이 제거되면서 39신조의 제3항인 "그리스도의 음부 강하에 대하여"가 전부 생략되었다.
한국 감리교회의 사도신경 번역에 이 구절이 삭제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음부 강하의 의미그리스도의 음부 강하(陰府降下)는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크게는, 실제로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 그의 영혼이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실재설(實在說)과 음부 강하를 상징적으로 이해하는 상징설(象徵說)이 있다.
로마 카톨릭교회는 이때 예수님께서 구약시대의 성도들이 모여있는 Limbus Patrum에 가셨다고 주장하며 연옥설의 근거로 이용하는가 하면, 루터교회는 사탄의 세력에게 그의 승리를 보이기 위해 음부에 내려가셨다고 이해하고 이를 승귀의 제1단계로 본다. 그리고 영국교회는 낙원과 음부를 동일시하여 3일동안 낙원에 가 계신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상징적으로 이해한다. 즉 예수님께서 실제로 음부에 내려가셨다기 보다는 죽음의 상태를 묘사하거나 혹은 음부적인 고통의 경험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개혁주의의 상징적 이해에는 두가지의 입장이 있다.
개혁주의 신학은 대륙에서 개혁교회를, 영국에서는 장로교회를 형성시켰다. 이 두 교회는 공히 칼빈의 신학에서 유래하였으므로 신학적 연대성을 가지고 있으나, 교회정치와 신조에서 다소의 차이를 가지고 있다. 장로교회의 신조인 웨스트민스터신조는 사도신경의 음부 강하 구절을 3일동안 죽어 있었다는 단순한 의미로 이해한다.
대요리문답 제50문, 즉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 그의 낮아지심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이렇게 대답한다:"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 그의 낮아지심은 장사됨과 죽은 자의 상태를 계속하시고 제삼일까지 사망의 권세 아래 계신 것이니, 이를 다른 말로 '그가 음부에 내려가셨다'고 표현한다."칼빈의 해석그러나 칼빈은 이러한 해석을 다음 두가지 이유로 반대하였다. 첫째로 쉬운 말을 다시 설명하기 위해서 어려운 말을 쓰는 법이 없다.
음부 강하의 의미가 단순히 바로 앞에 분명하게 언급된 "죽으시고 장사되며"를 반복 설명하는 것이라면 그 보다 더 난해한 "음부에 내려가시고"란 말을 사용할 리 만무하다는 문학적인 반론이다. 둘째로 사도신경과 같이 압축되고 간결한 신경에 쓸데없을 뿐 아니라 나아가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중복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칼빈은 음부 강하를 단순한 사망상태의 서술로 보지 않고 음부적인 고통의 영적 체험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십자가를 육적 고통으로 음부 강하의 체험을 영적 고통으로 이해하고, 이 둘이 합하여 그리스도의 우리를 위한 대속적 형벌의 완성으로 보았다. 이러한 견해는 대륙 개혁교회의 요리문답인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44문에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다. "사도신경이 '음부에 내려가시고'라는 구절을 첨가한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나의 가장 무서운 시험 중에도 나의 주되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통해서 우리가 지옥에서 당할 불안과 번민에서 건져내 주셨다는 확신을 가지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혼은 어디에?물론 이러한 해석에 문제의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만일 음부 강하가 단지 십자가 상에서의 음부적인 고통의 체험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왜 예수님의 비하와 승귀의 과정을 시간 순서대로 열거하고 있는 사도신경에서 음부 강하를 죽음과 장사 이후에, 그리고 부활 직전에 배열하고 있는가? 정말 그런 의미라면 오히려 음부 강하를 죽음 이전에 위치시켰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죽은 자의 영혼이 무덤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 성경적인 교리라면, 예수님의 영혼은 그 3일동안 어디에 가 계셨는가?
그곳이 낙원이라면, 사도신경은
왜 "낙원에 올라가셨다가"라고 하는 대신
"음부에 내려가셨다가"라고 고백하고 있는가?
베드로전서 3장 18-20절에는 그리스도께서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아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웨인 그루뎀은 그리스도의 음부 강하를 부정하면서, 이 구절은 노아시대에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20절의 '전에'라는 시간적 언급을 간과하고 있다. 과거에 순종치 않았으므로 멸망당한 자들에게 십자가로 육체의 죽음을 당한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복음을 전하셨다는 말이다.
물론 눅 23.43에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구절과 상충되는 듯하다. 그러나 둘 다 영감된 말씀이라면 하나를 부정하고 하나를 취할 것이 아니라 둘 다 신중하게 이해해야 한다. 베드로서의 언급은 매우 구체적이기 때문에 자의적으로 왜곡 해석을 하지 않는 한 다른 해석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한편, 누가복음의 말씀은 '오늘'의 개념에 따라 조정될 수도 있다. 여기서 오늘에 해당하는 헬라어 '세메론'은 일반적으로 오늘을 의미하지만 또한 '잠시 후에'라는 단기간의 시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바로 앞절에 있는 강도의 간청, 즉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는 내용의 시점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조화로운 이해가 가능하다. 강도가 3일 동안의 행로와 부활까지 모든 과정을 그리스도와 동행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스도는 부활과 승천에 이르기까지 아직 많은 구속의 과정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원문을 회복해야 한다우리는 성경이나 신경이나 해석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해석이 다양하거나 난해한 것이 삭제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사실은 사도신경의 다른 조항들에도 다양한 해석들이 존재한다. 근본적인 문제는 한국 개신교회가 사도신경의 일부를 삭제할 권리가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리고 꼭 그래야 할 신학적 이유를 세계교회 앞에 제시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특별히 이것은 한국 장로교회가 해결해야 할 중대한 과제로서 습관적 보수주의를 지양하고 하루 속히 교회의 결의를 거쳐 원문을 회복해야 한다.
오늘날과 같은 국제화 시대에, 그리고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교회의 하나됨을 열심히 추구해야 하는 이 말세에 한국교회는 자기성찰과 자기극복을 통하여 세계교회와 대오를 같이 하는데 장애가 되는 거침돌을 제거해 나가야 한다.
한 신학자의 말처럼, 천국에서 모든 성도들이 다 함께 사도신경을 고백하게 된다면, "음부에 내려가시고" 부분에서 한국 개신교인들은 당황하고 수치를 당하게 되지 않을까? (2009. 8. 25. 뉴스파워 / 김철영)
때 아닌 사도신경 ‘그리스도의 음부강하’ 논란 교계에 때 아닌 사도신경 관련 ‘그리스도의 음부강하’ 논란이 일고 있다.
최근 한국성경신학회 논문발표회에서 ‘사도신경에 그리스도의 음부 강하 구절을 되살려야 한다’는 주장 제기에 이어, 이재철 목사의 저서와 관련 그의 전 소속교단에서 제기된 이단성 시비 문제가 그것이다.
한국교회 사도신경에는 ‘음부에 내려가셨다가’ 없어 사도신경은 기독교(개신교)는 물론 로마 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등 세계의 모든 교회가 함께 고백하는 신앙고백이다.
따라서 사도신경의 거부는 이단 판정의 주요 근거가 된다. 오늘날 한국교회 교인들 중에 사도신경 원문의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어, 음부에 내려가셨다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며” 구절 중 ‘음부에 내려가셨다가’가 삭제됐음을 아는 교인은 거의 없다.
이정석 교수(퓰러신학교)에 따르면, 교회 역사상 예외 없이 고백돼 왔으며 지금도 세계의 모든 교회들이 고백하는 이 구절이 한국교회에서는 고백되지 않는 것은 감리교회의 영향 때문이라고 한다.
1908년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의 ‘합동찬송가’ 발간 시 ‘음부에 내려가셨다가’가 삭제된 감리교회의 사도신경을 장로교회가 받아들인 때문이라는 것이다. “해석이 다양하거나 난해한 것이 삭제의 이유 될 수 없어” 이정석 교수는 그의 글 ‘그리스도는 음부에 내려가셨는가’에서 “일찍이 1938년에 박형룡교수도 이 문제를 지적했으며, 최근에 김영재 교수는 삭제 이유를 ‘설명이 곤란해서 슬쩍 빼 버렸든지 아니면 문자적 번역을 피해 의역한 것’이리라고 추측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 교수에 의하면, 보다 역사적인 설명은 김용준 목사가 1963년 <기독교 사상>지에 2회 연재한 <사도신경의 개역의 필요성>이라는 논문에서 발견된다. 김 목사가 한국교회의 초기문서들을 분석한 결과, 이 구절의 삭제가 감리교회의 영향에 의한 것임이 발견된 것이다.
1894년 언더우드선교사의 사도신경 번역판이나 1905년 장로교 선교사 협의회에서 번역한 사도신경에는 ‘음부에 내려가셨다가’가 들어 있는 반면, 1897년과 1902년 그리고 1905년에 번역된 감리교회의 사도신경에는 모두 삭제돼 있음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1908년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합동찬송가’를 발간하면서 사도신경의 통일이 불가피하게 되었는데, 장로교회가 감리교회의 삭제를 추종했으며, 심지어 독자적으로 찬송가를 발행할 때에도 이를 회복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이 교수는 “그리스도의 음부강하는 여러 가지로 해석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해석이 다양하거나 난해한 것이 삭제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며 “하루 속히 교회의 결의를 거쳐 원문을 회복해야 한다“고 밝혔다. (2009. 8. 25. 뉴스미션 / 이병왕 기자)
“그리스도의 지옥 강하, 사도신경에 되돌려 놓아야 ” 신약학자 김정훈, 한국성경신학회 '베드로전서 주해와 신학' 논문 발표회에서 주장(사진 생략)
▲한국성경신학회 제24차 정기논문 발표회에 앞서 예배에서 설교 중인 회장 박형용 목사
ⓒ뉴스미션 그리스도의 지옥강하를 담고 있는, 베드로전서 3장 18-20절은 성경 최고 난해구절 중의 하나다.
이 구절과 관련 사도신경 원문에는 그리스도의 지옥강하 구절이 있으나, 한국교회에서는 해당 문구를 누락시키고 있다. 이와 관련 베드로전서 3장 18-20절은 ‘지옥의 실존을 선언하며, 동시에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지옥 형벌이 있다는 것과 승리의 주가 계신 것을 선언하고 있다’고 주해하면서, 이러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지옥강하 내용을 사도신경 본래의 위치에 되돌려 놓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리스도의 지옥 강하는 지옥이 영적 실제임을 분명히 해” 한국성경신학회(회장 박형용)는 17일 신반포중앙교회(김성봉 목사)에서 ‘제24차 정기논문 발표회’를 가졌다.
‘베드로전서의 주해와 신학’을 주제로 진행된 발표회에서 김정훈 교수(백석대 신약학)는 ‘그리스도의 지옥 강하: 베드로전서 3:18b-20연구’를 제목으로 발제했다.
김 교수는 본문을 주해한 후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의 지옥 강하를 ‘그리스도가 악한 영들과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가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고, 사탄의 세력에 대한 영원한 승리를 선포하신 행위’로 정의했다.
그는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 후 3일 동안 노아 시대에 불순종했던 자들이 갇혀 있는 지옥에 가서, 사탄의 세력들과 그들을 향해 영원한 심판과 자신의 영원한 승리를 선포하셨다”고 밝혔다.
지옥에 있는 영들은 하나님의 심판 경고와 그의 의를 거부했기 때문에 그곳에 영으로 찾아오신 그리스도께 심판과 저주의 선언을 들어야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그리스도의 지옥 강하는 지옥이 영적 실제임을 분명히 하며, 노아 시대에 불순종했던 자들의 영혼이 노아 때부터 그리스도의 방문 때까지 지옥에 계속 머물고 있었다는 것은 심판의 영원성에 대해 암시해 준다”고 신학적 해석을 붙였다.
그는 이어 “현 세대의 사람들 역시 노아 시대 때처럼 하나님의 경고와 의의 복음을 받아들여 순종하며 살 것이냐 불순종하며 살 것이냐에 대해 선택을 요청받고 있다”며 “그리스도의 지옥강하는 이 정보를 듣는 사람들에게 경고와 소망의 메시지를 준다”고 주장했다.(사진 생략)
▲17일 신반포중앙교회에서의 '베드로전서 주해와 신학' 논문발표회 모습ⓒ뉴스미션
“교회는 천국과 지옥의 실존을 말할 수 있어야” 그러나 이러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지옥의 실존에 대해 아무 인식 없이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한국교회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는 것이 김 교수의 견해다.
세속적인 높은 파도 앞에 한국교회가 본유적 역할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현대인들은 지옥의 실존에 대해 아무 인식 없이 살아가는 것 같다”면서 “지옥은 엄연히 존재하며 보이지 않는 영적 영역으로서 불순종하는 영혼을 무제한 받아들이고, 영원한 고통과 두려움과 혐오감을 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는 “오늘의 한국교회는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는 메시지를 증거할 용기를 거의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에 “교회가 천국과 지옥의 실존을 말할 수 없다면 교회는 자신의 권리를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라면서 “지금은 한국교회가 세속주의의 높은 파도 앞에 본유적 역할을 상실한 채 실신해 있지 않은지 성찰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그는 “한국교회는 지옥의 실존을 선언함과 동시에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지옥 형벌이 있음과 승리의 주가 계신 것을 선언하고 있는 베드로전서 3장 18-20절 메시지에 다시 한 번 주목할 필요가 있을 뿐 아니라, 이토록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지옥강하 내용을 사도신경 본연의 위치에 되돌려 놓고 그 의미를 반복적으로 되새겨 봐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2009. 8. 17. 뉴스미션 / 이병왕 기자)
베드로전서 3장18절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19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20절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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