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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악해서 나쁜 일 하는 것은 고사하고, 좋은 일 한다고 하면서
남의 눈물 뺀 것, 남을 속상하게 하는 것이 더 많습니다. 그게 바로 접니다.
나쁜 일하다가 하나님 속상하게 해 드린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주의 일 한답시고 없는 사람 기를 죽이고, 동작 굼뜬 사람들의 속을 건드리고,
비겁한 사람들 더 비참하게 만들고... 따지면 그 죄가 너무 큽니다.
그러므로 거듭나지 않고 자기 열심을 가지고 충성하는 것은 조심해야 됩니다.
다른 사람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바로 옛날의 저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욥4:12절입니다.
“어떤 말씀이 내게 가만히 이르고 그 가느다란 소리가 내 귀에 들렸었나니”
엘리바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엘리바스처럼
사람들이 진리가 아니라 이치에 합당한 말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16절 “그 영이 서는데 그 형상을 알지는 못하여도 오직 한 형상이
내 눈앞에 있었느니라 그 때에 내가 조용한 중에 목소리를 들으니”
그 영이 서는데 함은 어떤 영적인 존재를 느낀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와 같은 신지식은
피조물이라면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누가 난 하나님을 믿지 않아
한다면 비록 절대자의 존재를 의식하지만 그렇게 나오는 것도 그의 신지식입니다.
17절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이보다 깨끗하겠느냐”
엘리바스는 계시가 있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일반이 말하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물론 욥도 아브라함과 달리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믿음은 아닌 건 일반입니다.
18절 “하나님은 그의 종이라도 그대로
믿지 아니하시며 그 사자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19절 “하물며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 앞에서라도 무너질 자이겠느냐”
20절 “아침과 저녁 사이에 부스러져 가루가 되며
영원히 사라지되 기억하는 자가 없으리라”
인간이 아침저녁으로 없어집니다. 지금도 음부 속으로 하루에
수백만 명씩 들어가는 겁니다. 이와 같은 이치를 일반인도 다 압니다.
다만 진리를 알고 사망과 음부를 이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이가 드뭅니다.
21절 “장막 줄이 그들에게서 뽑히지
아니하겠느냐 그들은 지혜가 없이 죽으니라”
엘리바스는 지금 엄청난 철학을 말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원인이 인간으로 출발해서 인간이 그 결과를 받는다는
인문학이나 철학의 선생들이 이 시대에도 굉장히 많습니다. 엘리바스급 목사들이죠.
욥기 4장은 원인이고 5장은 결과인데 6절 봅시다.
5장 6절 “재난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고난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그렇습니다. 티끌과 흙을 그대로 놔두면 언제나 티끌과 흙인데 거기서 무슨 고난이나
재앙이 나겠느냐? 이 말은 인간은 심은 대로 거둔다는 얘기입니다. 인과응보입니다.
그러므로 욥에게 문제가 있다는 지적입니다. 네가 고난의 원인 제공자라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과거 IMF의 때에 정부에 그 탓을 다 돌렸는데, 사실은 나라나 개인이
빚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IMF가 와서 골탕을 먹은 거지 빚 없는 사람에게는 IMF가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에 빚 없는 나라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IMF 탓이 아니라 바로 우리 탓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심은 대로 거둡니다.
다만 우리가 아담 안에서 심겨진 것을 뽑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가는 것이고,
만약 아담 안에 심겨진 것을 뽑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새로 심었으면
이제 그 심은 대로 새로 거둡니다. 원인이 그리스도이시므로 결과가 달라집니다.
흙이나 티끌은 그대로 두면 영원히 흙이나 티끌입니다. 거기서 무슨 재난이나
고난이 나겠습니까? 거기에 네가 뭔가를 뿌렸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이 엘리바스의 말은 철학적으로 참 맞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이것을
지적을 할 수는 있으나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그에게는 없다는 점입니다.
많은 분들이 신앙의 진단은 정확하게 내립니다. 어떤 사람은 문단에 데뷔도
안하고도 문학 평론가 노릇을 합니다. 그렇듯이 엘리바스나 소발이나 빌닷처럼
인생이 뭔가 하는 점에 대한 이치나 인간의 인과응보에 대해서 너무 잘 압니다.
빗나간 이야기지만 중들도 그 집에 불행이 왜 왔는지 정확하게 알아맞히잖아요.
문제는 그들이 귀신을 달래고 배고픈 귀신 먹이는 그것 밖에 못합니다. 중들한테
왜 쓸데없는 짓을 하느냐고 물어보면 귀신이 먹는 것이 아니고,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비나이다 하는 그 사람을 위로해 주려고 그런 짓 하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옛 날에 합천 해인사에 가서 절을 천 번하는 것을 보고 승려에게
왜 천 번 절을 시키느냐고 물으니까 그가 하는 말이 600미터 고지에서 절을
천 번하게 되면 마음이 깨끗해진다고 대답하더라고요. 그래서 솔직한 중이라고
여겼습니다. 절하는 사람은 뭔가를 얻으려고 하지만 승려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천 번 절해도 부처님 귀도 까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부처에게
절을 천 번을 하라고 하면 나도 천 번 절했다는 만족감 성취감과 땀을 쭉 빼고
나면 마음의 상쾌함 이것을 가지고 내려가면 열심히 살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 서비스를 지금 해 주는데 뭐가 나쁘냐는 겁니다. 그들의 말입니다.
특별한 해결책이 없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우리가 손금 본다 관상 본다 그것 별거 아닙니다. 척 보고 그 사람의 싱싱함을
체크합니다. 사람이 생명력 있고 활기차면 교통사고 조심하라 물을 조심하라 하고,
축 쳐져 가지고 오면 올해 좌청룡 우백호, 그래서 운수 대통한다고 말합니다.
나중에 왜 당신 거짓말 했냐고 하면 이 양반아 거짓말이지만 그 사람에게
용기를 주는 게 좋은 것이 아니냐 살기를 포기한 사람에게 올해 운수 대통한다고
해 주면 그 말을 믿고 아침부터 열심히 뛰다보면 운수가 대통할지 누가 알아요.
그들은 확률게임을 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이 사람들이 하는 얘기입니다.
만일 교회의 공동체에 모여서 정신승리를 위해 긍정이나 적극적인 생각을 주입시켜
집단 확신을 시키는 훈련을 하는 게 교회라면 그대로 맞아 떨어지는 사람만
그 교회에 붙어 있을 겁니다. 제가 보니 지금 그러한 교회가 참 많더라고요.
관상 사주 동양철학을 하는 사람들도 사람이 과연 복을 받은 사람인지
저주를 받은 사람인지 다 알아요. 엘리바스급은 된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그들에게 저주를 복으로 어둠을 빛으로 사망을 생명으로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는 “진리”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바꿀 수가 있습니다. 딴 길은 없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엘리바스도 인생에 대해서 알만큼 아는 사람입니다. 욥의 친구이니 급이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뭣 때문에 안 되고, 교회 성장학이니 전도학이니 인문학이니
상담학이니 하면서 뭐는 안 되고 뭐는 되고 그 뭐 때문에 안 되고 분분합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면 네가 한 번 해봐라 그러면 아무도 해내지 못합니다.
기업이나 학교 등에 다니는 강사들 자신들이 사업하고 공부하라면 할 수 있겠어요?
인간적인 눈으로 원인과 결과를 분석한다고 일이 이루지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을 빛 가운데로 구원시키는 배후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긍휼이 역사하십니다. 오직 그분이 주시는 생명의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7절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나니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
언제 어떤 목사가 야고보서를 강해하면서 불교가 인생은 고해라고 하지 않았느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생이 고해든지 주님이 말씀하시는 세상은 환난이든지
그 환난 속에서 어떤 방법으로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느냐 그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8절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지금부터 드디어 욥을 약 올립니다. 문제를 인정하라 시인하라 왜 고집 피우고
있느냐? 이 말입니다. 지금도 무책임하게 하나님을 찾으라 그의 얼굴을 구하라
전심으로 구하면 만나리라 하고 독려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문제는 욥도 그 길을
모르고 엘리바스도 하나님께 가는 길을 알지 못하는 주제에 입만 살아 있는 겁니다.
9절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큰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이것은 욥이 더 잘 아는 내용입니다. 욥이 더 아는 것을 엘리바스가 와서 살살
약을 올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심방 가서 잘못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주일마다
핏대를 올리면서 전능하신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고 기도를 왜 하지 않느냐 하고
나무라듯 설교를 하는 사람들이 많을 걸요. 신자들도 다 알아요. 과거에 다 체험해
본적이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이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다 알고
있지만 지금 고난을 통해 내려 앉아 있는데 그 앞에서 자기만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있는 것처럼 설교해 보세요. 그들이 얼마나 속이 상하고 열을 받겠어요.
그래서 많은 분들이 심방 오기를 꺼리는 겁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것 다 알고
있다니까요.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 다 알고 있다고요.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는 사실도 다 알고 있어요. 중요한 것은 내가 망했다는 것 아닙니까?
이를 어찌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어떻게 일어나는 가를 알려 줘야 하는 겁니다.
10절 “비를 땅에 내리시고 물을 밭에 보내시며”
11절 “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애곡하는 자를 일으키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느니라”
여러분은 이런 설교 많이 들어 보지 않았습니다. 방송을 틀면 거의 이런 유의 설교입니다.
그 다음 17절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완전히 엎친데 겹치듯이
상처를 박박 긁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권면이나 심방은 제발 2하지 마세요.
18절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19절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20절 “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 위협에서 너를 구원하실 터인즉”
21절 “네가 혀의 채찍을 피하여 숨을 수가 있고
멸망이 올 때에도 두려워 아니할 것이라”
22절 “네가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 하지 말라”
23절 “들에 있는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목하게 살 것이니라”
24절 “네가 네 장막의 평안함을 알고 네 우리를 살펴도 잃은 것이 없을 것이며”
25절 “네 자손이 많아지며 네 후손이 땅에 풀과 같이 될 줄을 네가 알 것이라”
26절 “네가 장수하다가 무덤에 이르리니 곡식단을 제 때에 들어올림 같으니라”
27절 “볼지어다 우리가 연구한 바가 이와 같으니 너는 들어보라
그러면 네가 알리라” 최후통첩입니다. 아주 철학적으로 고난을 위해 태어난
인간인데 너 자신을 뭘 그리 대단하게 여기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나 이건 고난 받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심방을 할 때 조심하는 것은 절대 정죄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겁니다. 물론 우리가 마땅히 벌을 받을 것은 당연히 받아야 되지만
그것이 해결이 되고 나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을 은혜가 휠씬 더 큽니다.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너무 큽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떡하면 우리가 고난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이고 그 고난을 믿음으로 승화시켜 승리하느냐 하는
그 방법을 가르쳐 주고 그 길을 제시해야지 엘리바스처럼 명분만 던지면 안 됩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도 엘리바스와 같은 인문학의 설교나 권면을 할 수도 있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만물의 원인이시며 우리의 원인이 되시는 주의 이름을 간절히 부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