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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왕국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20-21).
본문은, 12-19절까지의 논증을 마무리하는 명제(命題)라 할 수가 있습니다. 필연적인 귀결(歸結)입니다. 사도는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19) 하고, 12-19절에 대한 결론(結論)을 맺고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21) 하고, “죄의 왕국과, 은혜의 왕국”(21)을 대조함으로 총 결론(結論)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19절과, 21절을 대조해 보시기 바랍니다. 19절에는 “죄인과, 의인”이 있는데, 21절에는 “죄의 왕국과, 은혜의 왕국”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는 사람을 바라보던 눈을 들어 두 왕국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제게 있어서 20절은 과거로부터 이제까지도 계속적으로 격려와 용기를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① 20절은, “율법이 가입한 것은”,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 이를 구조적(構造的)으로 말씀을 드린다면, “율법”(律法)이 들어왔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5:12-21절 안에는 3가지가 들어왔다고 말씀하는데, “죄가 들어오고(12), 은혜가 들어오고(15, 20하), 이번에는 율법이 들어온”(20상) 것입니다.
② 이점에서 사활(死活)적으로 중요한 요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罪)가 들어오자” 하나님은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라 즉각적으로,
㉠ “내가 여자의 후손으로 네 머리를 상하게 하리니”(창 3:15) 하고, “원복음, 즉 “은혜”가 들어왔다는 점입니다. 즉 침입한 “죄”를 “은혜”로 대항케 하셨던 것입니다. 어떤 분들이 생각하듯이 율법으로 하시려다가 안 되니까 “복음”을 주신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 “율법”은 개정역 같이 “들어왔다”고 하는 것보다는, 개역본 그대로 “가입”(加入)이라는 표현이 적절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복음(원복음, 아브라함에게 세워주신 메시아언약)과, 복음”(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나타난 복음) 사이에 “끼어 넣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3:19절에서는, “더한(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왜 가입(加入)을 하셨는가?
③ 20절은 13절과 결부가 되는데,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 하느니라”(13하), 즉 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 “죄”를 모르면 어떻게 되는가?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한, “은혜”의 필요도 모르게 됩니다. 병든 자라야 의원을 찾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20상) 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7:7절에서,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 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합니다.
④ 그런데 사도는, “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하지 않고,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20상) 하고 말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뜻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정도가 아니라, “전적타락, 전적부패”로 인하여 “구제불능”(救濟不能), 즉 자력구원의 불가능성을 인식하기를 원한다는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믿노라 하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말들 하는데 자신의 “죄”를 얼마큼 알고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현대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부조리한 모든 일은 이 한 가지를 모르는데 기인한다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 바울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더 깨닫고, 더욱 깨달아”,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魁首)니라”(딤전 1:15) 하고, 고백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 상응(相應)하는 은혜를 입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 어떤 사람이 “사함 받은 일이 적은 자”인가? 자신의 죄를 적게 깨달은 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사함 받은 일이 많은 자”이겠습니까?
⑤ 사도가 이 지점에 이르러서,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20상) 하고 말씀하는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恩惠)가 더욱 넘쳤나니”(20하) 하는 말씀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 “율법을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20상) 하는 뜻이, 죄를 더 짓게 하기 위해서라는 뜻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죄를 발견하고 더욱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 그러면 “더하게” 라고 말씀하는데, 어느 정도까지 “더해야” 합니까? 죄를 깨닫고 더 깨달아 자력구원의 불가능성을 인정할 때까지입니다. 죄를 조금 밖에 모르면 은혜도 조금 밖에 모르게 됩니다. 죄의 깊이와 그 심각성을 깨달으면 깨달은 만큼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하신 그 영광스러움을 비로소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죄를 깨달은 만큼, 그래서 그 자리를 은혜로 채운 만큼 기뻐하고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을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의 의미입니다.
⑥ “죄가 더한 곳에 은혜(恩惠)가 더욱 넘쳤다” 하고 말씀하는데 언제 그랬다는 것입니까?
㉠ 그것은 어느 한 순간(瞬間)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인류의 시조가 타락한 현장에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그리고 이제도 계속적으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행해주시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벌써 무산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 죄를 범한 것은 인간입니다. 그렇다면 죄를 범한 인간이 대항하여 물리쳐야 옳은 것이 아닙니까? 바로 이것이 7장에서 언급한 율법 하에 있는 상태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한다는 것은 죄를 깨닫고 더 깨닫고 더욱 깨달아 자력구원의 불가능성을 인식한 사람의 비명인 것입니다.
⑦ 그래서 하나님은, “더욱 넘치는 은혜”로 대항하도록 해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죄를 대항해준 “은혜”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15중)라고 말씀합니다. 12절 이하에서 계속적으로 아담의 범죄와, 맞서고 있는 또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대조적으로 말씀해 왔습니다.
㉠ 그것은 마치 장기 두는 장면을 연상하게 되는데, “장군하면, 멍군” 하듯 하는 것에 비할 수 있습니다.
㉮ 18절에서는 “장군”하듯이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게 됩니다. 이제는 패했구나 싶어집니다. 그러나 “멍군”하듯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아 생명에 이릅니다.
㉯ 19절에서도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 20절에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자 죄는 이를 악용하여(7:8) “범죄를 더하게” 합니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합니다.
⑧ 말씀은 “죄를 더하게 하려함”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나” 하고 말씀합니다.
㉠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20하) 하고 선포합니다. 그 많은 죄를 의가 덮어 버리고도 남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형제여, 죄를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무엇인지 깨달으셨습니까? 은혜만이 죄를 대항해 줍니다. 죄를 겨우 상쇄해 주는 것이 아니라 더욱 넘칩니다.
㉡ 죄는 파상(波狀)적으로 공격해 옵니다. 그러나 은혜는 더욱 넘친다고 말씀합니다. 넘친다는 말은 그 이상은 없다는 최상급(最上級)입니다. 넘침 보다도 더욱 넘친다는 뜻입니다. 하지박사는 이를 설명하기를 은혜가 죄에 대하여 승리(勝利)함을 여기서 가장 밝게 표시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 20절은 개인적인 신앙 여정에서도 적용이 됩니다. 우리는 번번이 실수하고 넘어집니다. 그 때마다 우리의 양심은 죄책감에 빠집니다. 간교한 사탄은 송사해 옵니다. “너는 안돼 포기하라”하고, 정죄하면서 낙망하게 만듭니다. 이럴 때 어떻게 대항하십니까?
⑨ 스가랴 3장을 보면 사탄이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대적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뭐라고 대적을 했겠습니까? “네가 대제사장이라고 네 주제를 보라, 그런 주제로 하나님 앞에 서서 섬길 수가 있느냐? 당장 포기하라” 하고, 낙망시키려했을 것입니다.
㉠ 그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해주셨는가? 사탄을 책망하시면서, “더러운 옷을 벗기라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슥 3:4) 하십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여 진단 말입니까? “내 종 순(旬)을 나게 하여,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슥 4:8, 9) 하십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 것”입니다. 이 장면은 우리가 상고하고 있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 하는 20절에 대한 절묘한 예표라 할 수가 있습니다.
⑩ 그리스도인들이란 “그러나”를 외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 “그러나”는 넘어지고 패배하게 된 사태를 역전(逆轉)시키는 위력이 있습니다.
㉠ 우리가 실수하고 넘어졌을 때에 벌떡 일어날 수 있는 용기가 어디서 주어지는가?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하고 선언하는 데서 옵니다.
㉮ 자신에게는 자격도 공로도 없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더욱 넘치는 구속의 은혜”를 믿기에, “그래 나는 너의 송사를 인정한다. 변명하진 않겠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3:21),
㉯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7:6),
㉱ 나는 연약하여 넘어지나 “그러나”…
㉲ 나는 경건치 못하나 “그러나”…간교한 사탄의 궤교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그러나”를 외칠 줄 알아야만 합니다.
㉡ 한글 성경에서는 “그러나”를 많이 생략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는 사태를 역전(逆轉)시키는 전환점인 것입니다. 이 “그러나”는 제게 있어서도, 백번, 천 번도 더 넘어져 좌절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서 붙들어주고 일으켜 세워주는데 용기를 준 말씀입니다. 이는 원자폭탄보다도 엄청난 위력을 가진 것이기에 이 말씀이 어린 아이에게 주어질 때 잘못 사용될 수도 있다는 위험성을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이토록 엄청난 것입니다.
⑪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21상) 합니다.
㉠ 5장은 “두 왕국”을 보여줌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는 많은 나라 많은 민족이 있을지라도 영적 논리로는 두 왕국이 있을 뿐입니다. 한 나라는 사탄이 왕 노릇하는 사망의 왕국이요, 또 한 나라는 만왕의 왕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 노릇 하시는 생명의 왕국입니다.
㉡ “죄가 왕 노릇” 하게 된 것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기”(12) 때문이요, “은혜가 왕 노릇” 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을 보내주실 것을 말씀하신 때부터 라고 말할 수 있지만, 성취가 된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3:24) 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두 왕국 중 어느 하나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두 왕국에 동시에 속해 있다는 것이 불가능 하듯, 어느 곳에도 속해 있지 않는 중간(中間)은 없습니다. 우리도 전에는 사망의 왕국에 속해 있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의 나라로 옮겨진 것입니다.
⑫ “왕 노릇” 하기 위해서는 권세(權勢)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죄”라는 왕에게는 어떤 권세가 있는가?
㉠ “죄가 사망 안에서”, 즉 죄에는 “사망(死亡)의 권세”(히 2:14)가 있는 것입니다. 이 권세는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 하신 말씀에 의해서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권능(權能)은 율법이라”(고전 15:56) 하는 것입니다. 만일 “죄”에게 사망(死亡)이라는 권세가 없다면 죄가 두려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⑬ 그러면 “은혜”라는 왕에게는 어떤 권세(權勢)가 있는가?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즉 “의롭다고 여겨주는” 권세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 이 권세는 주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권세인 것입니다. 만일 “은혜”에게 “의롭다고 여겨주는” 권세가 없다면, 하나님 존전에서 추방을 당한 아담의 후예들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 “은혜”가 무엇이며, 어떻게 주어지게 되었는가를 다시 한번 상기하시기를 바랍니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하십니다. 그런데 오신 것만으로 “의롭다”고 여겨주는 권세가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교훈이나 기사이적으로 주어진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4:25)를 통해서만 주어졌다는 점에 확고해야만 합니다.
⑭ 메시아예언으로 유명한 이사야 53장에서는,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사 53:10, 11) 하십니다.
㉠ 오직 “구속”으로 말미암아 어떤 죄인이라도 믿기만 하면 의롭다고 여겨주실 수 있는 권세가 주어졌는데, 이것이 은혜(恩惠)입니다. 우리가 실수하고 넘어집니다. 사탄이 송사합니다. 그러면 은혜가 얼른 그리스도의 의로 우리 죄를 덮어 버립니다. 사탄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입니다.
㉡ 21절은 “두 왕국”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상태를 보여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망의 왕국은 패퇴하는 왕국이요, 망해가는 왕국이요, 마지막 발악하고 있는 왕국이라는 점입니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전에는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⑮ 그리하여 “죄와 사망”은 간곳이 없이 사라지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21하) 하고,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화로우심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 죄의 왕국은 멸망하고, 은혜의 왕국만이 영원(永遠)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21절은 죄의 왕국과 은혜의 왕국의 단순한 대조가 아니라, 은혜의 왕국의 최종적인 승리(勝利)를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 요한계시록 20장에서는,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 못에 던지우니”(10),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니…”(14) 합니다. 마귀도 없습니다. 사망도 없습니다. 음부도 없습니다. 변화 산상의 세 제자가 본 것같이 모세도 엘리야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담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함이라”(21하),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계십니다.
㉢ 5장의 마지막 말은 “영생”(永生)입니다. 6장의 마지막 말도 “영생이니라”(6:23)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그 때에는 17절 말씀대로,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우리도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