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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문학
들어가며
누구에게나 잊고 싶은 기억이 한 가지씩은 있듯이, 우리 문학사에도 잊고 싶은 기억이 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지금부터 논의하려는 친일문학이 아닐까 한다. 일제 강점의 시절, 정말 좋아서 친일문학을 한 사람은 몇이나 될까마는 일제가 우리를 괴롭게 했던 것만큼이나 그들의 친일 행위는 우리 민족에게 큰 아픔이었다. 그러나 그 아픔을 그냥 덮어두는 것은 그리 발전적인 일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아픔인 그 양상을 다시 한번 살핌으로써, 만에 하나 우리나라에 다시 시련이 온다해도 이런 일은 되풀이되지 않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친일문학의 개념과 흐름
이인직으로부터 시작한 문학의 친일 오욕은 대략 50여 년을 굽이치다가 해방이 되어서야 현실이라는 타의에 의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친일의 오욕은 당대에 해결된 것이 아니고 지금까지 민족의 정신사를 훼절했던 원죄처럼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중이다. 을사조약과 경술국치 때부터 등장한, 아니 그 이전부터 기세가 등등했던 친일파 세력은 1930년대 중반에 들어서자 급증하기 시작했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식민통치는 더욱 잔악해져 일제가 전쟁 수행을 위한 총력체제 구축을 독려하면서 친일파들은 본격적인 친일적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1939년 10월 총독부 학무국의 지시 아래 ‘조선문인협회’가 결성되자 조선의 문학가들은 숭일황도(崇日皇道)의 광란에 빠져들었다. 이 단체는 1943년 4월 17일 ‘조선문인보국회’로 개편하여 세계제일의 황도문학을 깃발로 내걸고 친일의 오욕으로 매진했던 친일문학의 본산이다. 총독부는 1940년 8월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폐간하고 1941년 『인문평론』과 『문장』마저 없애 버렸다. 그러자 그 해 친일문학의 온상 『국민문학』이 등장했다.
이 당시 조선 문인들의 대응 방식은 각기 달랐다. 양심적인 작가의 경우, 대부분 붓을 꺾고 쓰지 않거나 쓰더라도 발표는 하지 않았다. 작품을 한글로 쓰고 친일을 하지 않는 경우와 일본어로 쓰고 친일을 하지 않는 경우는 달리 인식해야 하지만 두 경우 모두 시대가 만든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반면 대다수의 문인들이 친일을 했다. 일본어로 작품을 쓰면서 일제의 지도 아래 만든 문인보국회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는가 하면 나아가 황국신민의 정신을 전파하는 전도사로 자임한 일군의 문학자들이 있었다. 이들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친일문학가로 비판하는 대상인데 이광수 최남선 최재서 김용제 김동인 유진오 정인택 등 당대의 명망가를 망라(網羅)하고 있었던 것이다.
친일문학은 바로 이 시대에 생산된 친일적 요소를 지닌 작품을 일컫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제강점 전이나 해방 후에도 친일 성향의 문학이 나타날 수 있으므로 일제말기의 작품을 전체적 흐름 속에서 논의하여야 할 것이지만 일제말기만을 일반적으로 친일문학으로 부르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식민지 치하에서 문자화된 모든 문학은 친일문학이라는 단재(丹齋)적 관점도 가능하겠으나 친일문학이란 대략 1930년대 후반부터 1945년까지의 문학 중, 일제에 야합하는 내용이거나 일본적 형식(일본어로 작품을 쓰거나 단가(短歌)처럼 일본 문학 양식을 차용하는 경우)을 지닌 작품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내용상 친일은 다시 단순한 친일적 내용인가, 반민족적 요인을 가지고 있는 내용인가를 구별해서 논의해야만 할 것이다. 친일이면서 반민족적인 내용의 문학을 좁은 의미에서의 친일문학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단순히 일본문학의 형식을 차용한 경우와 형식을 차용하면서 친일의 요소를 함께 가지고 있는 경우는 다르다. 그러므로 형식만 차용했다고 할 수 있는 최남선의 신시들(「해에게서 소년에게」등 7·5조 리듬의 시가)과 일본적 형식에 일본적 내용을 담고 있는 시들을 달리 취급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친일문학은 내용상 중일전쟁 전후의 전쟁문학, 그 뒤를 이은 애국문학, 40년대 전반의 국민문학, 그 후의 결전문학 등과 복종 봉사의 문학 등 일본 추종의 문학까지 포함하고 있다.
친일문학의 전개 - 작가 중심으로
⑴ 이인직(李人稙)
이인직은 1862년에 태어나 1916년에 사망하였다. 1904년 러·일 전쟁시 일본군의 조선어통역관으로 종군하였고 1906년 『국민일보』주필, 1907년 『대한신문』사장을 역임하였다. 이인직이라는 이름은 아직도 우리 근대문학사의 서장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신소설의 개척자로서 우리는 아직도 「혈(血)의 루(淚)」(1906)를 최초의 신소설로 신주단지처럼 모신다. 그런데 조금만 주의하면 이 작품은 제목부터 일본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식 어법이라면 이 제목은 그냥 ‘혈루’이거나 ‘피눈물’이 되어야 하는데 일본어의 특징에서 나타나는 명사와 명사 사이에 ‘の’(의)가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제목뿐만 아니라 그 문체도 일본식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어제아침 이방 피난 때
昨日朝에 此房에서 避難갈 時에는
-「혈(血)의 루(淚)」 부분
한자어에 토를 달았는데 그 방식이 일본식의 문체이다. 이 번거로운 일본식 문체는 이미 봉건시대부터 한글전용의 전통을 견지하고 있던 우리 소설 문체에 대한 일대 후퇴인 것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 작품의 시각이다. 청일전쟁(1894)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 작가는 청군의 부패를 맹렬히 규탄하면서도 일본군의 만행에는 짐짓 눈감고 고난에 빠진 여주인공 옥련을 일본 군의관으로 하여금 보호하게 함으로써 일본이야말로 조선의 구원자라는 의식을 교묘하게 심어 주고 있는 것이다. 옥련은 일본에서 다시 조선 청년 구완서에 의해 위기에서 벗어난다. 그런데 이 청년 또한 수상하다. 비스마르크를 흠모하며, 우리나라를 야만으로 은근히 멸시하는 이 민족허무주의자는 일본과 만주를 합하여 대연방을 건설하겠다고 꿈꾸니, 그 꿈은 만주침략(1931)에서 실현되었던 것이다. 이 작품이 발표되었던 1906년에, 조선인으로서 이미 1931년의 사태를 예견하고 있는 구완서는 일본군국주의의 첨병이 아닐 수 없다.
⑵ 이광수(李光洙)
이광수의 일본식 창씨개명은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이다. 그는 그의 창씨개명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2천 6백년 신무천황께옵서 즉위를 하신 곳이 복원인데 이곳에 있는 산이 향구산입니다. 뜻 깊은 이 산 이름을 씨로 삼아 香山이라고 한 것인데 그 밑에다 光洙의 光자를 붙이고 洙자는 내지식으로 郞자로 고치어 이라고 香山光郞한 것입니다.”
-「지도적제씨의 선씨고심담」 중에서
이광수는 조선민중의 행복과 실생활의 편의를 위하여 창씨개명을 했던 바, 그것은 곧 내지인과 차별없이 되기 위한 노력이었고, 현실적으로는 정치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치는 문제라는 것이 그의 이론이었다. 그는 조선민중을 위해서 황민화운동을 해야 된다는 자신 나름의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독립운동을 해도 성공을 못할 바에야 천황의 신민이 되어 희생을 막자는 논리이지만 이것은 도대체 말이 안 되는 논리이다. 독립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될 것이 아니었지 않은가?
그러나 이광수는 제 나름의 신념대로 조선민중의 황민화 운동에 앞장섰고, 그러한 논리를 글로 썼다. 또한 그는 “국가 국민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그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 것임을 깊이 느끼고 이 국가 생활을 통하여서 인류의 최고 이상을 실현하자는 감격을 가진 작가의 작품”이 바로 국민문학이라고 했다.
따라서 그것은 “일본인의 인생관”에 뿌리를 두어야 하며 “조선에서 생길 국민문학은 황민생활을 하는 작가의 손으로 된 황민생활의 기록이라야”하는 것이다. 40년대 전반에 이광수는 이러한 문학정신에 입각해서 작품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장·단편소설, 수필, 평론, 시, 번역, 심지어는 일본의 전형적 문학형식 5·7·7·7조의 와카(和歌) 창작에까지 이를 만큼 광범위하였다.
그대 벌써 지원하였는가, - 특별지원병을 - / 내일 지원하려는가 - 특별지원병을 - // 공부야 언제나 못하리 / 다른 일이야 이따가도 하지마는 / 전쟁은 당장이로세 / 만사는 승리를 얻은 다음날 일 / 승패의 결정은 지금으로부터 / 시각이 바쁜지라 학교도 쉬네 / 한 사람도 아쉬운지라 그대도 부르시네 / 1억이 모조리 전투배치에 서랍시는 오늘 // 그대는 벌써 뜻이 정하였으리, / - 나가리이다, 나가 싸우리이다 - / - 싸워서 이기리이다 - / - 미영(米英)을 격멸하고 돌아오리이다 - / 조국의 흥망이 달린 이 결전 / 민족의 운명이 결정되는 마루판 / 단판일세, 다시 해볼 수 없는 끝판 / 그대가 나가서 막을 마루판싸움 // 아세아 10억 - / 칠 같은 머리 / 흑보석 같은 눈 / 황금색 살빛. // 자비와 인과 맑은 마음과 / 충과 요와 정렬(貞烈)과 / 예의와 겸손과 / 근면과 화평과 // 이러한 정신, / 이러한 문화, / 온유하고 순후한 // 10억의 운명이 달린 결전. / 거룩한 우리 향토 / 아세아의 성역(聖域)을 / 짓밟아 더럽히던, / 적을 쫓으라 - 하옵신 결전. // 이 싸움 이기고 나서 / 아세아 사람의 아세아로 / 천녀의 태평이 있을 때 / 그 어떤 문화가 필 것인가 / 아세아는 세계의 성전(聖展) / 세계의 낙원, 이상향 / 신앙과 윤리와 예술의 원천 / 그러한 아세아를 세우려고 / 맹수 독충을 몰아내는 성전(聖戰). / 일본 남아의 끓는 피로 / 아세아의 해(海)와 육(陸)을 / 깨끗이 씻어내는 성전(聖戰) // 이 성전의 용사로 / 부름받은 그대 - 조선의 학도여 / 지원하였는가, 하였는가 / - 특별지원병을 - / 그래, 무엇으로 주저하는가 / 부모 때문인가 / 충 없는 효 어디 서리, / 나라 없이 부모 어디 있으리. // 그래 처자를 돌아보는가 / 이 싸움 안 이기고 어디 있으리 / 부모길래, 처자길래, 가라, 그대여. / 병역의 의무 없이도 / 가는 그대의 의기(義氣) - / 그러므로 나라에서 / 특별지원병이라 부르시도다. / 의무의 유무를 논하리, / 이 사정 저 형편 궁리하리, / 제만사 제답잠하고 // 나서라 조선의 학도여 / 그대들이 나섬은 / 그대들의 충의(忠義)가문의 영예 / 삼천만 조선인의 생광(生光)이요 생로(生路), / 일억 국민의 기쁨과 감사. // 남아 한번 세상 나, / 이런 호기(好機) 또 있던가, / 일생일사(一生一死)는 저마다 다 있는 것, / 위국충절은 그대만의 행운. // 가라 조선의 6천 학도여, / 삼천만 동향인(同鄕人) 되라, 총후(銃後)의 국민의 큰 기탁(寄託)과 / 누이들의 만인침(萬人針)을 받아 띠고 가라. // - 11월 2일 새벽 네시.
-「조선의 학도여」 (『매일신보』 1943년 11월 4일)
황은지극(皇恩至極)하옵시니 / 피로써 나라를 지키라고 말씀하옵신지 얼마 안되어 이제 또 정치력으로 황철(皇澈)을 익찬(匿贊)하여 받들라고 하옵신다. 조선의 아들들이 총을 들고 전선에서 싸우는 것과 같이 충성스런 경륜을 안고 의정나상(議政壇上)에 나서리. / 병역의 엄숙한 의무이며 존귀한 황민의 특권이었듯이 국정 참여는 공민의 특권인 동시에 극히 엄숙한 의무이니라. / 황국은 앞서 삼천만의 폐하의 고굉을 더하였음과 같이 황국은 이제 또 삼천만의 보필(輔弼)의 신(臣)을 더하였다. / 일억일체로 황국을 지키사 일억일체로 황모(皇謨)를 익찬하자. 이제 피(彼)와 차(此)가 없다. 오직 하나니라. // 자, 조선의 동포들아 / 우리들이 있음으로써 더 큰 싸움을 이기게 하자. / 우리들이 있음으로써 대아시아 건설을 완수시키자. / 이러므르써 비로소 큰 은혜에 보답하여 받들음이 되리라. // 아아, 조선의 동포들아, // 우리 모든 물건을 바치자 // 우리 모든 땀을 바치자 // 우리 모든 피를 바치자 // 우리 충성에 불타는 머릿속을, 심장을, 바치자. // 동포야 우리들, 무엇을 아끼랴 // 내 생명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하지 말지어다. // 내 생명 그것조차 바쳐올리자 // 우리 임금님께, 우리 임금님께
「모든 것을 바치리」 (『매일신보』 1945년 1월 18일)
⑶ 최남선(崔南善)
최남선은 이광수와 같이 1910년대, 소위 2인 문단시대라고 일컫는 시기에 우리나라의 문학을 근대문학으로 이끌었고, 3.1운동 독립선언문을 초안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1940년대에 들어와서는 변질을 하여 우리 조선민중의 가슴에 크나큰 상처를 주었다. 지금도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는 최남선의 「독립선언문」이 실려있는데, 친일파가 쓴 독립선언문을 학생들에게 가르친다는 건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최남선이 쓴 글로 「조선문화 당면의 문제」(매일신보.1937. 2. 9∼11)라는 글이 있다. 이 글에서 그는 그 문제라는 것을 근대화, 일본화, 그리고 전통 생활과의 마찰관계 처리문제 등 셋으로 크게 구분한 후에, “제1의 근대화문제는 인류생활의 보편적 귀추라는 점에서, 또 시대에 순응하는 자기발달의 당연 과정으로의 인식”함으로써 대가없이 진행해 나갈 것이니 결국 문제의 초점은 일본화가 아닐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조선민중이 일본화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을 주장하기 시작한 그는 문화국(文化國) 일본의 문화를 국민생활을 바르게 인도하고 강하게 유지케 하는 빛나는 독자문화의 존재로 인정하였다. 그에 의하면 이러한 “문화원리”야 말로 정책이나 통치라는 개념보다 우월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후의 최남선의 친일적 문학활동은 『매일신보』 시국대중판(37. 8. 15)에 발표된 「내일의 신광명 약속」이 있다. 그는 여기서 동양적 내셔널리즘에 입각하여 만주사변의 역사적 유래를 설명하면서 비상시국하의 국민의 각오를 논했고, 다시 수필 「성전의 설문」을 발표하여 성전의 의의를 규명한 그는 「아시아의 해방」(『매일신보』1944. 1. 1)에서 대동아전쟁은 “진실로 일본정신을 발단자, 중추세력, 또한 지도원리로 하는 전 동아의 해방운동”이고, “세계개조의 중대한 중계자인 동시에 인류역사의 세계를 현전케 하는 기연”이라고 정의하면서 학도병 출정을 권장하는 글들을 발표하였다. 학도병 관계의 글로 「보람있게 죽자」(『매일신보』 1943. 11. 20)등이 있다.
나는 원컨대 입영까지 유종의 미를 거두도록 건전한 신체와 열렬한 순국의 결의로 매진하여 미·영 격멸의 용사로서 황군이 된 참 정신을 발휘하는 가운데 잘 싸워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 제군, 대동아 성전은……세계 역사의 개조이다. 바라건대 일본 국민으로서의 충성과 조선 남아의 의기를 발휘하여……한 사람도 빠짐없이 출전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보람있게 죽자」
이 외에 그는 역사학자로서도 이름이 높았는데, 1920년대 당시에는 단군문화를 연구하여 「不咸文化論」을 내세워 조선의 주체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후에 연구 성과를 변질시켜 일본의 내선일체에 협력하고 만다.
⑷ 주요한(朱耀翰)
주요한의 창씨명은 마쓰무라 고이치(松村紘一)이다. 여기서 고이치(紘一)란 일본의 건국 이념인 ‘팔굉일우(八紘一宇 : 아시아 대륙의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첨가된 이데올로기적 슬로건이다. 즉 ‘전 세계가 한 집안이나 같다’는 생각이다. 이 낱말을 지은 것은 다나카 지가쿠(田中智學)로서 한창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던 1903년의 일이었다)’에서 따온 것임이 너무나 분명하다. 이름조차도 일본 정신에 철두철미하게 따르겠다는 의지에서 나온 것일까?
주요한의 전향은 1938년 12월 24일 전수양 동우회를 대표하여 국방헌금조로 일금 4천원을 종로서에 기탁한 것이 그의 표면적 행동의 시초였다. 그리고 그의 친일적인 문필활동은 『삼천리』1940년 11월호에 시 「동양해방」을 발표했던 전후로 잡아야 할 것이다. 그의 친일적인 시는 네 계열로 나뉜다.
그 첫쨰 계열은 황국신민으로서의 희열을 읊은 것이다. 이 계열의 시로는 「동의어」, 「부여의 꿈」, 「송가」 등의 작품이 있다. 다음 두번째 계열로 징병되는 청년학도를 예찬하고 지원병으로 가기를 권고하는 시들이 있다. 「첫피」(『신시대』 1941. 3)에서 그는 지원병인 이인석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보아라 // 너들의 피 // 내 핏줄을 통해 // 여기 뿜는다. // 2천3백만의 // 뜨거운 피가 // 1억의 피로 // 한 덩어리가 되는 // 처음의 피가 // 지금 내 핏줄에서 // 콸콸 솟는다.
-「첫피」
세번째 계열은 전쟁을 예찬한 전쟁시들이다. 「마음속의 싱가폴」(『신시대』 1942. 3. 1)은 싱가폴 함락을 예찬한 시이고, 「승리의 태평양」(『춘추』 1942. 12.)은 태평양전쟁의 승리를 노래한 것이며, 「12월 7일의 꿈」에서는 미·영의 격멸의 꿈과 증산의 각오를 노래하였다. 네번째 계열은 일본 및 일본정신, 팔굉일우 정신들을 예찬한 시들이다. 이 계열의 시로는 대표적인 것이 「성전찬가」(『매일신보』 1942. 12. 8)이고, 그 외에 「대동아행진곡」(『춘추』 1942. 2),「팔굉일우」(『삼천리』 1942. 1)등이 있으며, 「손에 손을」또한 같은 계열의 작품이다. 이외에도 수필, 평론 등 수 편의 친일적인 산문작품이 있다.
역사가야 붓을 버려라 / 네 붓이 너무 무질렀다 / 역사가야 책을 던져라 / 네 책이 너무 낡았다 // 새 붓을 예비하여라 / 새 책을 펼쳐 놓아라 / 새 먹을 갈아서 / 새로운 시대의 / 첫 페이지를 적어라 // 이천하고 육백 또 일년 / 섣달은 초여드레 / 이날 미명에 / 태평양의 물결이 끓었느니라 / 역사가야 / 이렇게 쓰려느냐 / 아니다 아니다 // 이날 하루에 / 폭려미국(暴戾米國)의 태평양함대가 / 순식간에 반신불수가 되니라 / 이날에 / 루즈벨트는 간을 얼리고 / 처칠은 담을 떨어뜨리니라 // 이날에 / 말레이반도와 루송에 / 불비가 나리니라 / 이렇게 / 그대는 첫 페이지를 쓰려느냐 / 아니다 아니다 // 이날에 / 영미의 시대가 끝나고 / 아세아의 세대가 시작되니라 / 오직 이렇게 그대는 써라 / 역사가야 // 이날에 / 침략의 악몽이 막을 내리고 / 공여의 여명이 터오니라 / 오직 이렇게 / 그대는 써라 / 역사가야 // 새로운 역사의 첫 페이지에 / 명기하라 / 12월 8일/ 아세아의 붉은 태양이 / 세계를 비추려 떠오른 날을 / 폭탄의 세례와 / 프로펠레의 선률 속에 / 새로운 시대의 탄생 곡을 / 분명히 파악하여라 / 그대 / 역사가야
-「명기하라 12월 8일」(『신세대』 1942년 1월호)
⑸ 김동인(金東仁)
1939년 4월 12일 황군작가위문단이 결성되어 부민관에서 성대한 장행회가 열린 후, 김동인은 박영희·임학수와 함께 중국전선을 돌면서 일군장병을 위문·격려하였다. 북경·석가장·태원 등을 거쳐 약 1개월 여의 ‘종군작가’ 활동을 벌인 것이다. 이때 임학수는 『전선시집』을, 박영희는 『전선기행』을 각각 책으로 펴냈지만 김동인은 여행 도중 두 차례나 졸도하고 의식불명 상태를 빚어 글을 쓰지 못하였다.
그러나 건강이 회복되면서 1939년 1월 문필보국과 내선일체를 표방하는 조선문인협회 간사직을 맡았다. 이에 앞서 1938년 봄 한 마디 넋두리 때문에 ‘천황모독죄’로 일본 헌병대에 끌려갔다가 나와서는 자진해서 총독부 학무국을 찾아가 친일하겠다고 자청하여 화제가 되었다. 조선문인협회의 간사도 자청하여 얻게 된 것이다.
김동인의 대표적인 친일 작품으로 1941년 『백마강』이 있다. 이 작품 곳곳에서는 내선일체를 강조하고 일본의 풍습을 찬양하는 구절을 읽을 수 있다. 다음은 복신이 의자왕에게 일본 사신의 내방을 알리면서 하는 말로 『백마강』의 일부분이다.
네… 그 사이 양국의 사이가 약간 소원하게 되었던 게 실수옵지 왜 소원하리까? 첫째로 혈통으로 보아서 우리 부여씨(백제 왕실)의 혈통에 저 나라 피가 얼마나 많이 섞이었습니까? 또 우리 부여씨의 피가 저 나라 왕실에는 얼마나 많이 섞이었습니까?
위로서 이같은 피가 얽힌만치, 아래 백성으로도 우리나라 백성이 얼마나 많이 저 나라에 건너가서 잡거해 살며, 저 나라 백성은 또 얼만 우리나라에 건너와 잡거해 삽니까? 잡거해 살면서 혼인하고 자손이 생기고 이렇듯 서로 피가 교류되기 몇 백년에 먼저 생긴 자손들은 각각 사는 나라의 백성으로 화하고 지금 와서 내 백성을 서로 가릴 수가 도저히 없게 되지 않았습니까? 위와 아래가 한결같이 어느 족속인지 구별 못할 종족들이 다만 나라를 각각 달리하기 때문에 내 나라 네 나라 구별하는 뿐 본시로 말하자면 형아 아우야 하고 지낼 사이올시다.
-『백마강』 부분
김동인이 쓴 글들 중에서 친일적인 색채가 가장 짙은 것은 수필 「감격과 긴장」(『매일신보』 1942. 1. 23.)이다. 「엄숙한 심경」이라는 대제목 밑에서 몇 사람이 릴레이식으로 쓴 이 글은 그야말로 왜색일조이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으로 일제에 협력하는 글을 쓴 것은 1944년 이후였다. 1944년에 조선의 역사소설은 김동인에 의해서 조선의 역사를 버리고 일본의 역사에서 소재를 취하는 넌센스를 빚고 있다. 그 역사소설의 제목은 「성엄의 길」(『조광』 1944. 8∼12.)이다. 또한 그는「결전하는 문단인의 결의」라는 표제 아래 수필 「총동원태세로」(『매일신보』 1944. 1. 1∼4)를 썼고, 「징병제실시수감」이라는 표제로 「반도민중의 황민화」(『매일신보』 1944. 1. 16∼28)를 논했으며, 수필 「일장기 물결(『매일신보』 1944. 1. 20.)에서는 학병을 보내는 감격을 표명했다. 이 외에도 종군기자로 일제에 협력하는 활동을 했고 다수의 친일적인 작품을 썼었다.
⑹ 그 외의 많은 작가들
이번에 연구 과제를 준비하면서 참 곤혹스러웠던 것은 친일 작가에 대한 자료가 너무도 많다는 사실이었다. 이미 알고 있던 친일 작가들 외에도 ‘이 사람도……’하며 놀라게 하는 작가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이들을 객관적으로 정리하기에 앞서 일단의 자괴감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이 너무 많은 작가들을 일일이 위처럼 자세히 소개할 수는 없는 일이라, 그 외의 작가들은 작품 소개로 대신하려 한다.
① 노천명
남아면 군복에 총을 메고 / 나라 위해 전장에 나감이 소원이리니 / 이 영광의 날 / 나도 사나이였드면 나도 사나이였드면 / 귀한 부르심 입는 것을 // 갑옷 떨쳐입고 머리에 투구 쓰고 / 창검을 휘두르며 싸움터로 나감이 / 남아의 장쾌한 기상이어든 // 이제 / 아세아의 큰 운명을 걸고 / 우리의 숙원을 뿜으며 / 저 영미를 치는 마당에랴 // 영문(營門)으로 들리는 우렁찬 나팔소리 // 오랜만에 / 이 강산 골짜구니와 구석구석을 / 흥분 속에 흔드네….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매일신보』 1943년 8월 5일)
얼마나 기다렸던 아침이냐 / 동아민족은 다같이 고대했던 날이냐 / 오랜 압제 우리들의 쓰라린 추억이 다시 새롭다 // 일본의 태양이 한번 밝게 비치니 / 죄악의 몸뚱이를 어둠의 그늘 속으로 / 끌고 들어가며 신음하는 저 영미(영미)를 / 웃어줘라
-「싱가폴 함락」 『매일신보』 1942년 2월 19일)
이 외 「부인근로대」,「직업여성과 취미」 등 다수
② 모윤숙
새 날이래서 / 상차려 줄기지 않겠습니다 / 입던 옷 그대로 / 먹던 밥 그대로 / 달가와 새 아침을 /맞이하렵니다 / 비단치마 모르고 / 연지분도 다 버린 채 / 동아의 새 언덕을 쌓으리다 / 온갖 꾸밈에서 / 행복을 사려던 지난날에서 / 풀렸습니다 / 벗어났습니다 // 들어보세요 / 저 날카로운 바람 사이에서 / 미래를 창조하는 / 우렁찬 고함과 / 쓰러지면서도 / 산 발자욱 소리를 / 우리는 새 날의 딸 / 동방의 여인입니다.
-「동방의 여인들」 (『신시대』 1942년 1월호)
이 외 「어린날개」, 「네가 날아가는 곳에 꽃은 웃으리 잎은 춤추리라」, 「여성도 전사다」 등 다수
③ 서정주
귀국대원의 푸른 영혼은 / 살아서 벌써 우리에게로 왔으니 / 우리 숨쉬는 이 나라의 하늘 위에 / 조용히 조용히 돌아왔으니 우리의 동포들이 밤과 낮으로 / 정성껏 만들어 보낸 비행기 한 채에 / 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 / 소리 있어 벌이는 고은 꽃처럼 / 오히려 기쁜 몸짓하며 내리는 곳 / 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군함! //‥‥‥장하도다 /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 /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 / 한결 더 짙푸른 우리의 하늘이여
-「마쓰이오장 송가」 (『매일신보』 1944년 12월 9일)
이 외 「스무살 된 벗에게」, 「징병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 등 다수
④ 정지용
낳아 자란 곳 어디거나 / 묻힐 데를 밀어 나가자 // 꿈에서처럼 그립다 하랴 / 때로 진한 고향의 미신이리 // 제비도 설산을 넘고 / 적도 직하에 병선이 이랑을 갈 제 // 피었다 꽃처럼 지고 보면 / 물에도 무덤은 선다 // 탄환 씰리고 화약 싸아한 / 충성과 피로 고아진 흙에 // 싸움은 이겨야만 법이요 / 씨를 뿌림은 오랜 믿음이라.
-「이토(異土)」 (『국민 문학』 1942년 2월호)
※이토 : 남양 여러 곳에 징용으로 끌려가서 외로운 넋이 된 죽음을 영광의 죽음으로 각색하고 있는 시
이 외에도 많은 작가들이 친일문학의 대열에 서 있는데, 위와 같은 시인이나, 소설가들 외에 현대 한국 희곡의 선구자라 할 유치진도 거기에 이름을 올리고 있으니 당시 조선문학은 거의 전 장르를 망라해 친일을 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 외에도 김동환, 김팔봉, 백철, 이효석, 정비석, 채만식, 최재서, 최정희, 이무영, 박영희 등 많은 작가들이 친일문학에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쏟았으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유치진의 친일 행각에 대해서는 『친일파 99인』반민족문제연구소. 돌배게. 1993. 中, 박영정 「친일 ‘국민연극’ 주도한 근대 연극사의 거두」 참조.
※『친일문학론』 (임종국. 평화출판사. 1966)에는 28명의 친일작가 및 작품론이 실려있고, 1941년을 전후로 등장한 작가들은 따로 기타의 항목을 두어 다루고 있다.
친일문학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제 이 같은 친일 문학을 우리 문학사는 어떻게 다룰 것이며, 또 무엇을 다룰 것인가 하는 본질적인 문제가 남는다.
먼저 역사 의식의 문제다. 식민지 시대를 살아갔던 지식인으로서의 작가의 행동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 때에 맨 먼저 묻게 되는 물음은 친일 문학에 앞장을 섰던 작가들에게 진정한 역사 의식은 있었던가 하는 점이다. 민족 감정을 배제하고 냉철한 판단으로 본다해도 대답은 부정적이 될 것이다. 민족이라고 하는 것을 그렇게 쉽사리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오류고, 그런 생각이 없었다면 무지의 소치라고 보아야한다. 그러나 그 같은 역사 의식의 결여는 접어 두더라도 친일 문학에의 전향이 지식인다웠는가 하는 문제는 음미해 볼 가치가 있다.
친일 문학을 논할 때 두 번째 던지게 되는 물음은 형식의 문제다. 당시 작품평을 하고 있는 글 가운데서 우리는 단가(短歌)라는 용어를 발견하게 되고, 이광수를 비롯한 몇몇 시인들이 그 형식에 맞춰서 창작을 했다는 기록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단가(短歌)란 일본의 정형시 형식을 말한다. 이 문제는 그 표현된 언어의 문제와 함께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가령 일본어로 시조를 썼다고 가정해 보자(가정일 뿐 실제로는 불가능하겠지만). 그것은 어느 나라의 문학인가? 형식마저 일본의 정형이고 그 언어가 일본어라면 이는 당연히 일본의 문학이어야 할 것이다. 실제로 당시의 친일 문학론자들은 한국의 문학은 일본의 구주(九州)나 북해도(北海道) 같은 한 지방 문학에 지나지 않는다는 논조를 편 바 있다.
친일 문학에 대한 세 번째의 물음은 그 언어에 관한 문제다. 『국민 문학』이 1941년 5월호부터 한글판을 폐지함과 동시에 조선어 말살 정책이 자행되어 대부분의 창작 활동이 일본어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렇게 해서 일본어로 창작된 작품들의 문학사적 귀속은 어떻게 될 것인가. 속문주의(屬文主義)를 취한다면 일본 문학이고 속소재주의(屬素材主義)를 취한다면 한국 문학일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문학을 보는 시각의 문제다. 이 점에서 김윤식은 우리에게 암시하는 바가 많다. 그는 일본혼을 지향한 친일 문학이라 할지라도 ‘깊이 통찰해 본다면 그 무엇인가의 불합리, 추태, 고민이 스며 있음’을 알 수 있고 그것이 바로 우리의 것이며 우리 문학사의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문학이 진공관 속에서 이뤄지지 않는다는 영향론적 관계를 우리가 인정할 때, 이 같은 판단은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일제 말의 암흑 시대가 비록 추태이긴 하나 공백이 아니고 채워져 있는 우리 문학사의 한 대문임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김윤식의 다음과 같은 말은 친일 문학을 보는 우리의 관점 설정에 도움이 되리라 본다.
‘이러한 자기 비판이나 역사에의 변명은 제3의 관점을 도입하지 않는 한 무의미할 것이다. 즉 김사량(金史良)류처럼 조선어 제일을 떠들면서 아무 것도 안하고 붓만 끊으면 저항이냐 라는 반문과, 이태준(李泰俊)류의 일어(日語)로 작품만 쓴 것이 아무리 저항적이라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명제의 대립은 어쩌면 난쟁이 키재기 놀음인지도 모른다. 을유해방문학(乙酉解放文學)의 전개가 이 두 전제를 철저히 극복했느냐의 검정은 그 다음 차례에 논구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중요한 일이다.’
-『한국문학연구입문』 황패강 外. 지식산업사. 1982 中, 「암흑기의 친일문학」 부분
나오며
본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의 근대 문학을 세우는 일에 공헌을 한 작가들은 대부분 친일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참으로 슬픈 역사가 아닐 수 없다. 혹자는 친일 작품들과, 심지어 친일 작가들 전부를 우리의 문학사에서 빼야한다는 논의를 펴기도 한다. 실제로 현재 초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친일 작가들의 작품을 빼자는 운동이 진행 중이다.
그러나 우리 몸의 상처도 우리가 안고 가야할 우리의 몸이다. 우리는 친일문학을 우리의 문학으로 기억해야 한다. 대신 아프고,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그리하여 친일문학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이루어 질 때, 비로소 우리는 일제시대 문학의 어두운 그늘에서 벗어나 연속성 있는 우리 문학을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문헌
『친일문학론』 임종국. 평화출판사. 1966
『친일파 99인 - 3권 사회·문화편』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돌배게. 1993
『한국문학연구입문』 황패강 外. 지식산업사. 1982
『교과서와 친일문학』 교육출판 기획실 엮음. 동녘.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