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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연예인들은 몸매가 착해야 한다?
이택광(문화평론가)
연예인들이 자살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여자' 연예인들이 자살했다. 이들은 왜 스스로 목숨을 끊는가? 한국의 자살률이 OECD국가 중 최고라는 건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아리따운 20대 여자 연예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 그리고 우울증 때문에 그랬다는 것이 주요 관심사다.
뒤르켕의 말을 굳이 거론할 필요도 없이, 모든 자살은 사회의 책임이다. 스스로 죽고 싶어서 죽는 사람은 없다. 살 수 없기 때문에 죽는다. 여자 연예인들의 자살은 한국의 자살률이라는 통계 뒤에 감춰진 죽음들을 드러내는 스크린이다. 그래서 이들의 자살을 바라보는 시선은 외설적이다. 죽음에 대한 윤리적 판단, 장례식에 어떤 연예인들이 왔니, 안 왔니 하는 문제가 중요할 뿐이다.
무엇이 여자 연예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갈까? 언론의 보도대로 우울증 때문일까? 나에게 이런 자살들은 훨씬 더 깊은 속내를 감추고 있는 것 같다. 우울증은 하나의 증상일 뿐, 자살의 원인이라고 보기 어렵다. 어떤 심리학자의 의견에 따르면, 우울증은 에고의 분열을 막기 위한 자구책이다. 말하자면, 무엇인가 원인은 따로 있는 셈이다.
삶을 즐길 수 없을 때, 우리는 자살을 생각한다. "힘들어서 죽겠다"는 말은 실제로 삶을 즐기고 싶다는 말의 반대다. '아버지'가 명령한 "인생을 즐겨라"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할 때 우리는 불쾌해지는 것이다. 여자 연예인들의 죽음은 이런 즐거움의 메커니즘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여자 연예인들은 더 이상 자신에게 부여된 명령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울했다.
그 명령은 '착한' 여자 연예인이다. 마음이 착하다는 뜻이 아니다. 외모가 착하다는 것이다. 몸매가 착해야하고, 얼굴이 착해야 한다. '~착하다'는 것은 이제 전혀 다른 의미가 되었다. 예쁜 몸매나 얼굴로 즐거움을 주어야한다는 뜻으로 바뀐 것이다. 미학과 윤리의 절묘한 결합. 이런 결합은 지금 한국 사회를 작동시키는 욕망의 구조를 그대로 드러낸다.
20킬로그램을 감량한 옥주현의 다이어트 성공에 찬사를 보내면서, 한 연예잡지 기자는 "외모지상주의가 지배하는 무시무시한 연예계 현실에서 놀라운 일을 해냈다"고 말했다. 무시무시한 현실의 바깥을 전혀 상상하지 못하는 이런 발언은,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이데올로기의 십자포화를 성공적으로 벗어나기 위해 몸매 관리를 초인적으로 해낸 옥주현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말은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외모지상주의를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필연의 조건이라고 받아들이게 만든다.
영화 <미녀는 괴로워>는 바로 이런 역설적 욕망의 문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영화다. 미녀는 괴로울 게 없다. 그런데 왜 괴로운 걸까? 바로 미녀가 되는 과정이 괴로운 거다. 그러나 일단 미녀가 되고 나면, 뚱녀에서 미녀로 변신하는 과정은 고난을 딛고 고통을 이겨낸 십자가의 승리로 추앙 받는다. 착한 미녀는 한국의 남성 판타지가 내리는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다. 이 남성 판타지를 구성하는 건 한국 자본주의의 경쟁 구조다.
문제는 여자 연예인들이 이런 경쟁 구조 바깥을 전혀 상상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가상현실을 실감하면서 살아갈 뿐이다. 이들은 인형이고, 그래서 더 이상 재미가 없으면 폐기되어야 한다. 섹시한 여가수를 원하지만, 제일 섹시한 여가수를 제외한 다른 여가수들은 싸게 놀려 먹을 수 있는 대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경쟁구조는 한국의 산업구조에 문화산업이 주요한 주력으로 간주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문화산업의 높은 투자 위험률은 연예인들, 특히 여자 연예인들의 '물화'를 촉진시켰다. 심리적 차원에서 본다면, 물화는 노동자가 자기 자신을 사물과 동일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 현상이다.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가 잘 보여주듯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기계의 부품으로 전락하고, 이런 삶의 조건은 컨베이어벨트 이상의 세계를 상상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여자 연예인들의 자살은 한국의 문화산업 구조에서 일개 노동자의 처지로 전락해가고 있는 연예인들의 운명을 드러내는 징후다. 이들의 자살은 겉으로 화려하게 보이는 연예계가 사실은 냉혹한 자본의 논리가 가장 노골적으로, 가장 직접적으로 관철되는 지점이라는 것을 증언한다. 한국 자본주의의 회전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연예계라는 기계장치도 더 빨리 돌아갈 수밖에 없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논리는 바로 속도다. 속도가 빠른 이가 모든 것을 먹는다. 이런 속도의 논리가 남성의 것이라면, 이런 남성의 욕망 구조에 복무하는 것이 여자 연예인들의 이미지다. 이 욕망 구조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그 결과는 뻔하다.
여자 연예인들은 착한 몸매와 얼굴로 남성의 시선을 즐겁게 해줘야지만 연예인다운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이들을 소비해줄 시장은 연예계에 없다. 빈자리를 채워줄 예비상품들은 널리고 널렸다. 영혼이 필요 없는 복제인간들처럼, 이들은 하나의 대체물로서 자신에게 주어질 짧은 시간을 기다린다. 너도 나도 한류의 영광을 부르짖고 있을 때, 정작 그 한류의 주역들은 소모품으로 전락한 자신의 삶에서 아무런 희망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사회의 실재는 이제 바깥에서 출몰하지 않는다. 우리의 내부에서 서서히 이 괴물들이 깨어나고 있다. 죽음 이외에, 이 끔찍한 디스토피아를 벗어날 방법이 없다고 여자 연예인들은 침묵의 항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