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여우모자(foxhat)》와 《얀얀(yarnyarn)》의 작가 김승연씨(32)를 홍대 앞 카페에서 만났다. 김승연씨는 그림책 작가일 뿐 아니라 1인 출판사 대표이기도 하다. 그가 운영하는 그래픽 스튜디오이자 그림책 전문 독립 출판사 텍스트컨텍스트(www.textcontext.kr)에서는 현재 《여우모자》와 《얀얀》의 뒤를 이을 세 번째 그림책을 준비 중이다.
“이야기 만드는 것을 좋아해요. 전문 일러스트레이터라고 하기엔 많이 부족하고, 글쓰는 사람으로서도 부족하죠. 하지만 쓰고 그리는 걸 좋아해요. 저의 이런 ‘표현 욕구’를 표현하기 위해 그림책이라는 매체를 빌린 셈이에요. 학교 다닐 때는 영화 소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만큼 영화를 좋아했어요. 영화와 그림, 텍스트를 모두 아우르면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어떤 매체든 기본이 되는 것이 스토리텔링이거든요. 저는 이야기를 먼저 구상한 후 그림을 그립니다. 출판일은 시장 상황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시작한 일이라 각오가 되어 있었어요. 종이책 시장이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렇다고 종이책이 없어질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는 홍익대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한 후 안그라픽스 디자인사업부에서 북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한국디자인진흥원의 차세대 디자인 리더로 선정된 그는 2009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도 참여했다. 《여우모자》는 깨어나고 나면 기억도 나지 않는 꿈을 계속 꾸면서, 혼자 있을 때가 가장 좋다는 붉은 머리 소녀의 이야기다. 소녀가 어느 날 숲에서 엄마여우를 만나고, 엄마여우의 부탁으로 아기여우를 돌보면서 세상과 만난다는 이야기. 이 책은 올봄 프랑스 디디에(Didier)주니어출판사에서 프랑스어로도 출간되었다.
“에이전시의 말에 의하면 초판이 다 팔렸다고 합니다. 그쪽에서도 이례적인 일이라고 해요.”
《여우모자》는 단편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돼 CGV 상암 무비꼴라쥬에서 상영됐다. 그림책을 기본으로 거기에서 파생되는 다양한 일을 하고 싶었던 그의 소원과 계획은 하나씩 이루어지고 있다. 얼마 전에는 아동복 브랜드 스웨번(Sweven)의 패션 디자인을 맡았다.
“내년 SS 컬렉션에서 선보이는데, 그림책 속 ‘얀얀’이 입을 것 같은 옷이 콘셉트예요. 동화책 룩북 같은 느낌이지요. 동화책에 등장하는 6명의 캐릭터에 어울리는 옷을 각각 디자인했습니다. 옷과 모자, 타월, 헤어밴드 등 액세서리도 함께 디자인했어요. 이 일을 하면서 그림책이 가지는 무한한 가능성을 다시 한번 확인했어요.”
그의 그림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패션 감각이 유난히 뛰어난 것은 이유가 있다. 엄마가 옷가게를 운영했기에 어릴 적부터 옷가게에서 놀았던 그에게 옷은 워낙 친숙했다. 아홉 살 때 아버지가 췌장암으로 돌아가신 후 엄마는 남매를 키우기 위해 옷가게를 열었다. 그 영향인지 그의 그림책 속 주인공은 매일매일 다른 옷을 입는다.
“어느 날 숲 속으로 들어간 소녀는 황금 털을 가진 엄마여우를 만났다. 엄마여우는 먹을 것을 구하러 떠난다면서, 자신을 대신하여 아기여우를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소녀는 엄마한테 혼날까 봐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한참이나 서성였다. 그런데 아기여우가 소녀의 머리 위로 폴짝 올라갔다.”
동화책 속 엄마여우는 어릴 적 그의 엄마를 연상시킨다.
“《여우모자》 덕분에 엄마와 더 가까워진 것 같아요. 나이 들면서 엄마가 더 귀엽게 보여요. 이런저런 이유로 집안이 어수선할 때도 엄마는 화장실 거울에 꽃무늬 스티커를 붙이실 정도였어요. 그때는 ‘엄마는 이런 상황에서도 꽃무늬를 붙이는구나’ 생각했었죠.”
그림책 전용 슬라이드 프로젝트 ‘메리 메리 드림’. |
《여우모자》를 읽은 엄마의 반응이 의외였다고 한다.
“‘책에 아빠가 없네’ 하시는 거예요. 엄마는 혼자 저희 남매를 키우시면서도 항상 밝은 분위기를 만들려고 하셨지요. 엄마를 위해 아주아주 작은 도서관을 만들고 싶어요. 1층에는 엄마가 팥죽을 파는 카페, 2층은 살림집, 3층에는 다락방 같은 작은 도서관이 있는 집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작은 도서관에서는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신간 발표회를 하는데, 아이들이 잠옷과 베개를 가져와서 이야기를 듣다 잠이 드는 거지요.”
그가 현실에서 꾸는 꿈 역시 동화 같다. 두 번째 책인 《얀얀》은 아빠에 대한 이야기다. ‘얀얀’이라는 말밖에 하지 못하던 아이는 털실로는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는 엄마의 말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빠를 털실로 만들기로 결심한다.
“아빠에게 침대를 사달라고 조를 때 아빠 등에 누워 이불을 덮은 후 ‘아빠가 침대야’라고 했죠. 아빠에 관한 일이라면 아주 작은 기억까지 그리움으로 남아 있어요.”
그림책 전용 슬라이드 프로젝트인 ‘메리 메리 드림(merry merry dream)’을 개발한 것도 동화책을 읽다 잠들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자그마한 크기에 배터리로 작동하는 간편한 방식이다. 버튼을 누를 때마다 18장의 그림책 필름이 한 장면씩 바뀌어 동화책을 한장 한장 넘기는 것 같은 느낌이다.
“‘메리 메리 드림’은 아직 상품화하진 않았지만, 갤러리 전시 때 선을 보였죠. 매년 한 권씩 낼 계획이에요.”
엄마는 “네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언제나 지지해주지만 가장 역할을 자임하는 오빠는 ‘꿈만 꾸는 현실감 없는 누이’에 대해 걱정이 많다고 한다. ‘미네워터’의 캠페인에 참여하게 된 것은 세 번째 책으로 아프리카 바오밥나무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여우모자》를 읽고 감명을 받았다는 캠페인 담당자는 “세상을 바꿔보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물 한 병을 사면서도 아프리카 아이들을 도울 수 있다는 아이디어와 취지가 좋았어요. 저 역시 다음 책의 수익금 일부는 기부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거든요.”
물 부족으로 생명까지도 위협받을 수 있는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깨끗한 물을 전달하는 ‘미네워터 바코드롭(BARCODROP) 캠페인’은 2012년 칸 국제광고제 다이렉트 부문 동상을 수상했다.
“비가 내리길 바라는 아이들의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되, 너무 안쓰럽게 보이지 않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의 동화 같은 꿈은 차츰차츰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