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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시대의 여행자들] 1. 드러난 상처
“독일은 당신을 초대합니다.” 미국 관광객들을 겨냥한 관광 홍보 책자는 이렇게 선얺나다. 책자의 표지에는 가죽 반바지를 입고 깃털 모자를 쓴 어느 청년이 삼림 울창한 계곡을 걸어 건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머리 위로는 고딕풍의 성채가 우뚝 솟아 있고, 뒤편으로는 눈 덮인 산들이 매혹적으로 설광(雪光)을 반짝거리고 있다. 활력으로 넘치는 이 도보 여행자가 가리키는 액자 안에는 뉴욕 항에 정박한 정기 여객선이 그려져 있으며, 그림 속 자유의 여신상 뒤에서는 떠오르는 태양이 밝고 새로운 미래를 암시하고 있다.
놀랍도록 매혹적인 표지이지만 더 놀라운 것은 이 소형 책자의 발간 날짜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종전되고 겨우 몇 달 지난 시점에서 인쇄된 이 책자는 독일의 유수한 관광호텔들(가령 베를린의 호텔 브리스톨과 프랑크푸르트의 잉글리셔 호프 등)이 관광객 유치하기 위해 벌인 과감한 홍보 활동의 일환이었다. 당연하게도, 그리 두껍지 않은 이 책자의 어디에도 대부분 독일에 책임이 있는, 극히 최근까지 유럽을 극도로 소모되게 만들었던 그 끔찍한 경험을 암시하는 내용은 전혀 들어 있지 않다. 게다가 독일의 풍경에 대한 이 소책자의 긍정적인 문구들은 거짓이 아니었다. 전쟁을 겪은 뒤에도 독일의 자연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훼손된 곳도 거의 없었다. 전투는 대체로 독일 국경 밖에서 치러졌기 때문에 대부분의 독일 도시들은 -적어도 물질적으로는- 거의 피해를 보지 않았다. 이 관광 홍보책자는 독일의 20대 도시를 홍보하고 있는데 그 중에 에센을 소개할 때만 전쟁을 간단하게 언급했다. “한때 세계 최대의 무기고였던 이 도시는 이제 평화의 도구들을 생산하는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전쟁 전 행복한 시절의 독일을 기억하는 미국인들의 노스탤지어에 호소하면서, 이 소책자는 장래의 관광객 가슴에 낭만적이고 시적인 독일에 대한 “즐거운 회상의 파도”를 불러일으켰다. 또 독일의 대성당과 성채, 그 나라 예술 분야의 국보급 인물들인 바흐, 베토벤, 바그너 등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런 관광 초대에 솔깃하여 독일을 다시 찾은 미국인 여행객 중에는 헤리 A, 프랭크도 있었다. 그는 불과 스물일곱 살이었지만 이미 여행 작가로서 출판을 한 경력이 있었다. 종전 조약이 체결된 지 겨우 다섯 달 뒤인 1919년 4월에, 그는 라인 강 동쪽의 미 점령 지역들을 탐사하기 위해 독일 여행에 나섰다. 관광 홍보 책자의 매혹적인 표지 그림 뒤에 음울한 패전국의 현실이 도사리고 있는 상황에서 그것은 과감한 시도가 아닐 수 없었다. 책자의 표지에 등장한 청년은 참호 생활을 해본 적도 없고 포탄의 파편에 동료 병사들의 몸이 공중 높이 날아가는 광경을 본 적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광경을 실제로 본 적이 있는 사람들과, 수백만 명의 굶주리는 독일 국민들에게 그 소책자의 쾌활한 프로파간다는 웃기지도 않는 농담으로 보였을 게 틀림없다. 프랭크는 건강한 젊은이다운 열광적 흥분에 빠져서 멋진 독일 여행을 기대했겠지만, 독일의 보통 시민들 -그가 열렬히 접촉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종전 직후에 슬픔, 배고픔, 불확실함을 제외하고는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발족한 지 이틀째 되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표들이 11월 11일 종전 조약에 서명했을 때, 독일의 새로운 지도자들은 내우외환의 악몽에 직면해 있었다. 전쟁이 끝나기 전에도 이미 킬의 해군 폭동은 혁명을 촉발했다. 혁명이 전국으로 급속히 퍼져나가면서 그 뒤로 파업, 탈주, 내전이라는 후폭풍을 남겼다. 여기에다 독일 내에서는 두 정치적 세력 간에 심한 알력이 있었다. 한쪽은 고대 로마의 반란 지도자 스파르타쿠스의 이름을 딴 스파르타쿠스회로서 이들은 얼마 뒤 독일 공산당을 설립한다. 다른 한쪽은 볼셰비즘을 박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우익 민병대인 프라이코프스였다. 그런데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와 카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가 이끄는 스파르타쿠스회는 제대군인들로 구성되어 잘 훈련된 준 군사 조직인 프라이코프스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결국 1919년 8월에 이르러 스파르타쿠스회의 반란은 진압되었고, 그 지도자는 주살되었다. 그러나 사회적 불안이 독일 전역에서 여전히 꿈틀거리는 상황에서, 전후 폭력 사태에 직접 가담하지 않은 사람들도 한없이 비참한 미래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들은 국가 지도자들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렸고, 공산주의를 두려워했으며, 전시의 봉쇄가 여전히 확고하게 시행되는 가운데 지속적인 기아에 시달리고 있었다. 1919년의 독일은 관광홍보책자가 선전하는 휴가 보내기 좋은 매혹적인 나라가 아니라, 황량하고 절망적인 상태에서 신음하는 나라였다.
독일의 새로운 지도자는 사민당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Friedrich Ebert)였다. 그는 양복쟁이의 아들로 태어나 마구상을 직업으로 갖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에베르트는 프로이센의 왕이자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이며 독일의 황제인 과거의 국가원수 빌헬름 2세와 근본적으로 아주 다른 사람이었다. 심지어 초라한 몰골에 몸집도 뚱뚱해 세련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외모였다. 그러나 외국인들은 곧 그의 솔직담백한 매너에 빠져들었다. 한 영국인 관찰자는 이런 소감을 남겨 놓았다. “작고 둥글면서도 날카로운 그의 두 눈은 정직하고 선량한 유머로 반짝거렸다.” 1918년 12월 10일, 에베르트는 베를린의 브란데부르크 문 앞에서 귀국하는 프로이센 왕실 근위대 소속 연대의 병사들을 맞이했다.
아들론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유명한 호텔의 창립자인 로렌츠 아들론(Lorenz Adlon)은 호텔 발코니에서 병사들이 “우로 봐!” 지시에 일제히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아들론 같은 군주제 지지자들이 볼 때, 그것은 아주 씁쓸한 광경이었다. 이제 병사들의 시선은 멋진 말 위에 올라타 화려한 제복을 입은 카이저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병사들은 검은 연미복에 중산모를 쓰고 연단 위에 서 있는 국민대표 위원회 의장(그러니까 당시에는 에베르트)의 땅딸막한 몸집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강력한 군주제 지지자들마저도 에베르트가 병사들을 향해 “그대들은 패배하지 않은 채로 귀국하였다.”라고 소리칠 때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독일군이 패배하지 않았다는 확신은 뿌리가 깊었다. 외국인들은 이런 신념을 도처에서 확인하게 될 터였다. 프랭크는 종전 후 독일 여행을 나서기 전에 미국 해외 파견부대(American Expeditionary Forces, AEF) 소속 장교로 라인 강변의 코블렌츠 시에서 근무했었다. 거기서 수십 명의 독일 병사들을 인터뷰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그 결과를 이렇게 보고했다. 독일 병사들은 하나 같이 군사적 관점에서 보면 자신들이 의심할 나위 없는 승자라고 믿고 있었고, 베를린에 있던 사악한 정치가들이 자기들의 등 뒤에서 칼을 찔러댄 것이며, 협상군의 비겁한 봉쇄 작전으로 식량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항복한 것뿐이라고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프랭크는 병사들의 이런 주장을 거듭하여 들었고, 북부 도시 슈베린에 사는 사촌 형제들에게서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은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사촌들은 이렇게 말했다. “영국이 우리를 굶어 죽게 만들었을 뿐이야. 그게 아니었더라면 영국은 결코 승리하지 못했을거야. 전선에 나가 있던 우리의 용감한 병사들은 결코 항복하지 않았어. 본국에서 허물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단 일 야드도 후퇴하지 않았을 거야.” 프랭크는 병사들에게서 죄책감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후회를 표시한 독일인은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그들은 정쟁을 자연스럽고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는 듯했다. 그건 생활의 한 부분이었다. 도박 테이블에 나선 도박사가 돈을 잃으면 불운 탓을 하며 아무 후회도 하지 않는 것과 비슷했다.
프랭크의 가계는 독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라인란트의 군사점령이 민간인에게 가하는 굴욕감에 특히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군사 점령은 낯선 군인들이 도시의 구석구석, 시민의 가정, 시민의 개인 생활에 스며드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굴뚝 뒤 벽장에다 감추어 놓은 것을 누군가 뒤져보는 것, 여유 분 침대를 내주어야 하는 것…… 당신 자신과 당신의 계획들을 점령당국의 규칙 때로는 변덕에 복종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또 독일인들이 미군 당국의 허가가 없으면 여행을 하지 못하며, 편지, 전화, 전신을 이용하지 못하고 신문을 발간하지도 못한다고 기록했다. 맥주와 와인보다 독한 술을 마실 수도 없었고, 서면 허가증이 없이는 카페에 모일 수도 없었다. 밤중에 가정집의 창문을 내려야 한다는 점령당국의 지침은 민간 생활의 아주 개인적 측면까지도 당국이 간섭한다는 뜻이었다. 코블렌츠 시에서는 시민에게 누가 그 도시의 지배자인지를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거대한 성조기가 내걸려져 온 사방 수 마일 밖에서도 볼 수가 있었다. 성조기는 라인 강 똥쪽 강둑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에렌브라이트슈타인 성채의 꼭대기에 게양되어 하늘 높이 휘날렸다. 한 영국인 대령의 아내는 “점령지 깃발치고는 유독 큰 편이네요.”라고 떨떠름하게 말했는데, 미군의 승리를 아주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표시였다.
농촌의 지방 도로는 “양키 병사들로 넘쳐났다”. 그들을 태운 군용 차량들은 도끼에 맞아 짝 갈라진 독일군 헬멧의 표식을 과시하듯 부착하고 있었다. 도처에서 몸에 맞게 줄인 군복을 입은 어린 소년들이 기념품, 가령 ‘신이여 우리와 함께 하소서(Gott mit uns)’라는 글귀가 새겨진 혁대 버클이나 정수리에 꼬챙이가 달린 투구들을 사달라고 졸라댔다. 낡은 회색 군복을 입은 청년들은 밭에 나와서 굵고 못생긴 순무를 뽑아서 수레에다 실었다. 순무는 전쟁 기간 내내 독일인의 아사를 막아준 유일한 식품이엇다. 도로에는 이처럼 군용 차량이 즐비하다면, 라인 강은 바야흐로 당일치기 관광객으로 변신한 협상군 병사들을 태운 유람선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라인 강의 가장 유명한 지형지물인 로렐라이의 언덕을 지나가면서 반독일적 노래들을 마구 불러 젖혔다. 프랭크는 이런 논평을 했다. “바이데커(여행 안내 책자 제작사) 자신도 고국 땅이 1919년 봄에 외국인 여행자와 관광객들로 가득 들어차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 다른 미국인 트루먼 스미스 중위도 전쟁에 참전했고 프랭크와 마찬가지로 미국 해외 파견 부대에 근무했다. 그는 라인 강을 “아주 아름답다”고 생각했으나, 소나무가 울창한 언덕, 포도원, 폐허가 된 성탑 등으로 인해 “어둡고 오싹한” 곳이라고 기록했다. 종전 조약의 체결 몇 주 후에 스미스는 뉴잉글랜드의 아내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훈족과 관련해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분위기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많을 거야. 그런데 그건 어려운 문제야. 간단하게 파악할 수 있는 정보가 아니지.” 하지만 그는 곧 독일인을 “스핑크스와 같이 수수께끼여서 그 속셈을 알 수가 없고 게다가 자부심이 강하다”라고 썼다. 적절한 작업 도구가 부족한데도 그들이 종전의 근면한 태도로 신속히 복귀하는 것에 대해 감탄을 표시하기도 했다. 스미스는 이런 논평도 썼다. 독일인들은 미국의 라인란트 점령을 아무 이의 없이 받아들이지만 새 공화국은 아주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적은 뒤, “그들은 볼셰비즘을 아주 두려워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스미스는 또 다른 무명의 미국 관찰자의 이러한 논평에도 동의했을 것으로 보인다. “독일에 오래 머물면 머물수록, 독일인들의 단순함(때로는 병적으로 순진하고 때로는 화가날 정도로 어리석은)과 다정다감함에 더욱 더 놀라게 된다.” 이 무며으이 논평자는 독일인들의 예기치 못한 인간적 따뜻함을 기이하게 여기다가, 영국이 점령한 퀼른 지역의 한 독일 여자로부터 그 이유를 듣게 되었다.
영국인들이 오기 전에 우리는 굶주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돈이 돌고, 가게들에는 영국, 프랑스, 스칸디나비아에서 수입한 식품과 심지어 낙농제품들도 채워져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영국인 장교들과 사병들이 다정한 사람들이라는 걸 발견했습니다. 나는 그들 중 한 사람과 결혼했습니다. 우리 집은 두 명의 영국 장교들을 기숙시키고 있었어요. 그들이 다른 동료들을 초대하여 우리 집에서 함께 저녁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때 나는 펀치(포도주, 우유, 또는 더운물, 레몬즙, 향료, 설탕을 섞어서 만든 음료)를 만들어 내왔지요. 손님 중 한 분이 그 펀치를 맛보더니 자기와 결혼해주지 않으면 결코 퀼른을 떠나지 않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결혼하게 된 거지요. 뭐.
미국이 점령한 구역에서는 영국의 점령 구역에 비해 비친교(주민들과 어울리지 않음) 정책이 좀 더 강력하게 실시되었다. 그러나 철저히 단속하기는 어려웠다. 미군 소속의 “보병” 중 많은 이가 독일계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약 팔백만이의 미국인이 독일계 부모나 조부모를 두고 있었다. 이 젊은 병사들은 독일을 상대로 싸울 용의는 있었으나 독일 국민을 상대로는 싸울 생각이 없었다. 독일 가정주부들이 본국의 어머니처럼 그들의 옷을 빨아주고 과자를 구워주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독일 여성들에 대해서라면, “일반 병사들은 그녀가 맘셀인지 프로이라인인지 신경쓰지 않았다.” 스미스는 이렇게 논평했다. “단지 그녀를 데리고 귀국하고 싶어 했다.”
전쟁의 승자들과 점령 지역 주민들 사이의 복잡한 관계는 바이올렛 마컴을 매혹시켰다. 건축가 조지프 팩스턴 경의 손녀로 아주 자유분방한 바이올렛은 1919년 7월 퀼른에 주재하게 된 육군 대령 남편을 따라 함께 독일에 왔다. 그녀는 곧 독일인의 예의바른 태도를 보고서 깜짝 놀라게 되었다. “우리가 정복자 자격으로 함께 사는 이 독일 사람들은 정말 공손하다. 그들을 패배시킨 사람들에게 어쩌면 저리도 불평불만이 하나도 없을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그녀는 돔플라츠 광장에서 거행되는 영국군 열병식 행사에 많은 독일인들이 나타나서 구경하는 습관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협상군 병사들의 카키 제복의 물결 위로 “음울하고 거부하는 듯이” 우뚝 서 있던 대성당의 모습을 기억했다. 그러면서 이런 의문을 품었다. “만약 독일군 열병식이 버킴겅 궁전 앞마당에서 거행된다면 런던 시민들도 저렇게 많이 몰려들까?” 그런 행사들 중 특별히 기억에 남은 것도 있었다. 1919년 11월 11일, 종전 1주년에 그녀는 혹한 속에서 열병식 행사에 참가했다. 광장에는 고요한 정적이 감돌았고 “바람의 한숨소리만이 가끔 그 정적을 흔들어 놓았다”. 이어 트럼펫 주자들이 대성당의 계단 위에 서 있다가 앞으로 나서면서 <더 라스트 포스트(The Last Post>를 연주했다.
그녀와 남편이 기숙하는 집은 아주 편안했다. 퀼른의 다른 많은 집들이 그러하듯이 중앙난방을 제공하는 집이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 집의 “프라우(안주인)”과의 관계는 돈독해졌지만 일층에 사는 주인집 식구들과의 생활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마컴은 이렇게 말햇다. “심술궂은 표정의 요리사인 게르트루드는 예의와 도덕을 강조하는 여자였다. 그녀는 아주 지독하게 영국인을 미워했고 그래서 당번병들과 여러 번 싸움을 했다.” 게르트루드의 시각은 어쩌면 마컴 같은 사람이 독일에 오면서 겪으리라 각오했던 것만큼의 시각, 어쩌면 그보다 더 보편적인 시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작가 위니프레드 홀트비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친구인 베라 브리튼에게 써보낸 편지에서 그녀는 퀼른을 ‘상심의 도시’라고 묘사했다.
육군 보병들은 거리의 위아래로 행진을 했고, 아주 쾌활하고 다정하고 무책임한 표정들이었다. 그들의 숙소는 라인 강을 내려다보는 멋진 건물인 최고급 호텔에 마련되어 있었다. 호텔 밖에는 이런 공고문이 나붙었다. “독일인 출입 금지” 그들의 식비는 모두 독일인이 낸 세금에서 지불되었고 독일의 어린아이들은 환한 창문 밑으로 몰려들어 병사들이 비프스테이크를 먹어 치우는 광경을 구경했다. 그것은 내가 보았던 것들 중에서 가장 천박한 풍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