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봉의 문학풍경 /
미국과 한국에서 거의 동시에 출간된 폴 오스터의 신작 소설 <어둠 속의 남자>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는 듯하다. 한국 출판사가 배포한 보도자료는 “이 작품은 아마도 오스터가 쓴 가장 훌륭한 소설일 것이다”(<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라는 서평 문구를 앞세웠다. 서평은 이렇게 이어진다: “이건 어쩌면 불공평한 평가일 수도 있다. <어둠 속의 남자>는 오스터가 지금까지 써 온 어떤 소설과도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일요일자 <뉴욕 타임스> 북리뷰에 기고한 서평에서 동료 작가 톰 르클레어는 이 소설을 “폴 오스터에 대한 삼류 모방”이라고 혹평한다. 같은 작품에 대해 이렇듯 상반된 평가가 나오는 일이 아주 낯설거나 예외적인 것은 아니다. 이런 경우에 대개 그러하듯 진실은 양극단 사이의 어디쯤엔가 있을 것이다.
<어둠 속의 남자>에서 흥미로운 한 가지는 이야기 속 등장인물이 그 이야기를 만드는 이(=작가)를 살해하려 한다는 설정이다. 소설 주인공은 일흔이 넘은 은퇴한 도서비평가 오거스트 브릴. 얼마 전 아내를 잃고 교통사고까지 당한 그는 불면증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꾸며 내는 것으로 긴긴 밤을 견딘다. 소설은 브릴이 그렇게 뒤척이며 보내는 하룻밤의 이야기를 다룬다. 예의 서평에서 르클레어가 유진 오닐의 희곡 제목을 비틀어 쓴 대로 ‘낮을 향해 가는 밤의 긴 여로’(a long night’s journey into day)라 할 법한 설정이다.
그가 꾸민 이야기의 주인공이 오언 브릭이다. 이야기 속에서, 어느 날 문득 잠에서 깨어난 브릭은 자신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음을 알게 된다. 앨 고어를 낙마시킨 대통령선거 결과에 불복한 몇몇 주들이 연방 탈퇴를 선언하면서 미국이 심각한 내전에 돌입해 있는 것. 그에게는 이 참혹한 사태를 종식시킬 임무가 주어진다. 방법은? 이 모든 것이 오거스트 브릴이라는 늙은이의 머리에서 빚어진 상황이므로 그를 죽여야 한다는 것. 문제는 브릴을 죽일 경우 그가 만들어 낸 인물인 브릭 자신도 덩달아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름도 비슷한 브릭과 브릴의 경우는 장자의 호접몽을 떠오르게 한다. 보르헤스의 단편 <원형의 폐허들>의 주인공은 어떤가. “자신 또한 자신의 아들처럼 다른 사람에 의해 꿈꾸어진 하나의 환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사내 말이다.
“누군가가 내 머릿속에 들어앉아 있어요. 나의 꿈조차도 나의 것이 아니에요. 내 인생이 몽땅 도둑을 맞았어요.”
이것은 <원형의 폐허들>의 주인공이 아니라 브릭의 절규다. 그 역시 브릴의 이야기 속 인물인 브릭의 상관은 16세기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다노 브루노의 생각을 소개하며 그를 위로하고자 한다. 브루노의 이론인즉 우주에는 하나의 현실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 각각의 세상은 누군가가 꿈꾸고 상상하고 글로 쓰는 바 그대로의 세상이라는 것이다. 텍스트와 콘텍스트, 이야기와 현실 사이의 구분을 무화시키는 이 주장으로 브루노는 결국 화형을 당했다. 그러나 자신의 머릿속에서 이야기를 꾸며 내고, 역시 심각한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있는 외손녀와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서로의 아픔을 위무해 주는 브릴(당연한 말이지만 그도 또한 오스터가 만든 이야기 속 인물이다)의 ‘이야기’는 이야기로서의 문학의 힘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