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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칸디나비아 반도는 따뜻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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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초반 빡빡이 소년들의 세계 지도 지명 찾기에서 눈에 익었던 이름자들이다.
하와이나 뉴욕처럼 쉽게 찾기도 했으나 그렇지 못한 곳이 있으니 그게 헬싱키 코펜하겐 오슬로 스톡홀롬 등과 그 언저리 도시 이름들이다. 그랬다.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북유럽의 끝이요, 북극과 가장 가까운 장소라서 북쪽 끄트머리는 아예 색깔조차 하얬었다. 계란 색깔의 노르웨이가 주황빛 스웨덴을 덮친 듯 올라타 있고 덴마크는 북부 바다를 향해 뙤똑하니 서 있으며 핀란드는 조금 소외된 채 러시아 쪽에 붙어있었다. 유년 시절, 왠지 차가운 파도를 헤치는 바이킹의 모습이 지난하고 고독하게 떠오르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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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러시아에서 헬싱키로 지나던 지상 4,000미터 상공으로 날아가던 중.
‘아내의 알람’이 울렸다. 출발을 위해 새벽 세 시에 맞춘다는 걸 오후 세 시로 맞췄으니 열두 시간 뒤에 비행기에서 기상 벨이 울린 것이다. 북유럽이 가까워오면서 지상이 내려다보인다. 온통 숲과 호수다. 지금은 행복의 낙원처럼 보이는 저 스칸디나비아반도가 100여 년 전만해도 열강의 침략에 몸살을 알았으리라. 제국주의 쇠붙이들이 약탈하고 노예로 끌고가는 야만의 시국도 거쳤으리라.
지상 4,000미터 비행기에서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려서 오래도록 가슴이 싸-했다. 기압 차를 견디기 힘들어서 울고 있지만 정작 자기가 왜 우는지 모른 채 소리만 지르고 있는 것이다. 끝없이 펼쳐지는 구름 바다를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뛰어내리고 싶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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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효도관광처럼 발빠른 일정이었다.
먼저 코펜하겐이다. 안데르선, 그룬투비가 유년을 채워줬고 청년 시절엔 키에르키고르의 센티멘털에 젖었던 그 나라다.
우선 자전거가 많았다. 국회의사당까지 등원하는 자전거들이 즐비한 게 이색적이었다. 여왕이 사는 궁전으로 수상이 수요일마다 브리핑을 해준단다. 건물들은 동화 속 그림처럼 붉고 뾰족했지만 거리에는 간판도 없고 술집도 들물었다. 설사 술집이 있다손 치더라도 너무 비싸다고 귀뜸해준다. 덴마크 사람들은 대개 거주하는 아파트 이외에 따로 ‘공원 주택’을 하나씩 소유해서 주말농장으로 사용한단다. 하지만 실내 장비는 턱도 없이 어설펐다. 엘리베이터는 창고 문을 여는 것 같았고 번호판도 없었다. 가이드도 엘리베이터라고 하지 않고 그냥 승강기라고 불렀다.
학교에서 교사가 체벌하지 않는 것 정도는 예상했던 바이지만 부모도 자식을 때리지 못한다는 정보는 새로웠다. 부모가 때렸을 경우 역시 고발하면 경찰이 개입하고 부모와 자식을 결별시킨다. 음주운전을 중죄로 취급하며 실내 흡연의 경우 기십만 원 이상의 벌금이 부과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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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KT ANNAE 스쿨(덴마크 예술학교)은 음악 재능을 체크하는 명문학교다.
쫄바지를 입은 여자 부교장이 자연스러운 자세로 브리핑을 하며 음악 교육에 대한 동영상과 오페라 종합 예술장을 보여준다. 부교장은 왔다갔다 움직이거나 피아노에 기대어 답변을 하기도 한다. 교사는 무서우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책상에 올라앉거나 누운 채로 교사들과 소통하고 있었다. 수업은 경쟁식이 아닌 스스로 이해하고 따라오게 하는 방식이라고 자부심있게 말한다.
예술학교라서랄까, 아이들은 법학과 윤리학을 어려운 과목으로 생각하고 연극이나 음악을 편안하게 상각하는 좌측 뇌가 발달된 구성원들이다. 언어와 과학 엘리트들은 따로 접촉하여 교육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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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역시 다양한 피부 색깔이 혼재된 사회다. 길거리에는 젊은이들보다 노인들의 행보 비율이 더 높다. 18세 이상 젊은이들처럼 노인들 역시 독립해서 사는 게 자연스럽다. 65세의 여자 가이드 김정선님처럼 나이 많은 사람들의 활동이 눈에 두드러진 것은 선진국형 풍경이다. 유모차와 노인들 그리고 장애인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저마다 독립된 활동을 하는 의미다.
마트는 5시 -9시까지만 개방하며 수입이 아주 작은 곳만 특별히 12시까지 연장시키기도 한다. 우리나라처럼 24시간 개방 편의점이나 24시간 PC방은 찾아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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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도록 체류한 나라는 노르웨이다.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발에 스키를 신고 나온다는 뭉크와 입센의 그 나라다. 여름인데도 바퀴 달린 스키를 신고 아스팔트를 달리는 모습이 언뜻 보이기도 했다. 가이드는 18세 이상이 되면 결혼이 가능하며 성 문제에 개방적이라고 내세웠지만 기실 성(性) 문제는 개방화의 가부를 결론처럼 말할 수 있는 종류는 아니다.
소떼 몰듯 15분이나 30분 사진 찍고 이동하길 반복했다. 어느 공원에서인가, 고개 숙인 처칠 흉상이 떠오른다. ‘바닥에 떨어진 내 시거는 어디로?’하는 자세란다. 덴마크처럼 관광버스 기사들은 물을 팔았는데 아마도 팁의 의미가 컸으리라. 가이드는 지나가는 여자들에게 나이를 묻지 말 것이며 예쁘다고 하지 말라고 주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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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 박물관은 오슬로(하느님의 푸른 광장이란 뜻) 대학 부설이다. 원래 바이킹은 ‘해안선에 사는 사람’이란 뜻이다. 배에 쓰는 나무는 참나무와 전나무다. 척박한 환경 속에 파도를 헤치는 생존의 실루엣이 떠오르기도 했다. 바다에 용이 산다고 믿는 그들은 죽는 순간 용의 품안에 몸을 바쳤단다. 보통 자가용 배 하나에 선원이 30명인데 주인이 죽으면 노예들도 함께 묻어버렸다니 분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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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사회는 당연히 여성들의 활동력이 강하다.
국회의원이나 CEO의 3분의 2가 여자일 정도로 여성 활동이 높지만 실제로 여자들이 가장 바라는 직업은 전업주부란다. 가이드는 수시로 ‘남자와 여자는 태어날 때 몸의 구성부터 틀리다.’라는 말을 반복했지만 페미니즘 입장에서는 ‘틀리다’라는 표현보다는 ‘다르다’라는 어휘를 사용해야 옳다.
안타까운 것은 수리로 눈에 띄는 중동의 여인들이다. 땡뱉 아래 히잡을 칭칭 두른 채 거리를 걷는 그들 사회도 언젠가 개방화의 물결을 타면 타월을 벗고 맨살로 활보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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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사람들은 식당문화가 거의 없으며 주말인 금요일 오후에 차를 끌고 가 술과 식료품을 사서 가족과 함께 캠프를 떠난다. 대개 자기 집 이외에 산장과 바닷가 별장과 캠핑카, 요트까지 있으니 안락한 놀이 문화가 형성될 조건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외로움이다. 가족이 없거나 독거노인들은 그만큼 더욱 고독한 노년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노르웨이인들은 우울증이 많으며 남녀를 불문하고 흡연율이 높다. 10월 -11월의 흑야 기간에는 더욱 그렇다. 얼핏 상가 유리창으로 비친 쪼글쪼글한 노파의 양주병 고르던 실루엣이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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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숲과 꽃과 물 천지였으므로 우리들은 여러 차례 배를 타고 이동하면서 풍경에 빠졌다. 사진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절경 천지가 존재하는 것이다. 까마득한 암벽 그리고 들꽃 사이로 빙하 폭포가 수도 없이 쏟아져내렸다.
오토강 꼭대기에는 양떼를 키우는 목장이 있었는데 기껏 백여 마리 정도란다. 그 절벽으로의 이동도구는 사다리가 유일한데 세금을 받으러 올 때 주인이 사다리를 치워버리면 징수의 방법이 없다고 했다. 코달 농장에서는 150마리의 염소를 사육하는 여자 목동도 눈에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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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롬펠러(해발450미터) 열차에서는 선생님들이.
가이드가 시키는 대로 함성을 내지르는 바람에 풍경에 몰입하기 힘들었다. 소스 폭포는 93미터의 엄청나고도 기괴한 형상이었다. 폭포 사이로 빨간 옷차림의 산발한 여자가 춤을 추니 그게 전설의 훌드라 귀신이다.
천 년 묵은 불여우가 미녀로 환생하기 위해선 남자를 만나 아이를 낳아야 진정한 인간으로 환생한다. 그런데 훌드라는 그 용모가 너무 아름다워서 남자들이 감히 접근을 하지 못하므로 계곡에서 춤을 추며 남자를 유혹한다는 서사성이 내포되어 있다. 그들은 지금 눈앞의 관광객 앞에서 산발한 머리채로 춤을 추는 중이다. 총 세 명의 훌드라 귀신이 연출하는데 폭포 쪽이 가장 위험해서 남자 알바생을 쓰고 있다. 특별히 제작된 속내의에는 안전벨트까지 착용했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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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에는 ‘인형의 집’을 쓴 입센과 ‘페르켄트’를 작곡한 그리그라는 음악가가 가장 대표적인 명사이다. 그리그는 이종사촌 여동생과 결혼을 했는데 모두 155센티 이하의 단신들이라서 응접세트가 아담하다. 그는 바다를 바라보는 바위에 자신의 무덤을 만들고 지금은 그 속에 들어간 상태다. 노르웨이 표현주의 호가 뭉크의 ‘절규’라는 작품은 오슬로 뭉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했다. 예술의 소용돌이에서 평생을 살았다가 거품으로 사라지는 것은 비현실적이면서도 리얼리즘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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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는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글자를 가르치지 않는단다.
자치구와 정부에서 책임을 지고 대학원까지 가르쳐주며 소말리아나 아프카니스탄의 난민까지 무료 교육을 시켜준다. 외국인들이 10% 가량되는데 주로 문맹자와 여자들이다. 이들은 사회학과 언어를 포함한 300시간 이상의 교육을 통과해야 영주권을 부여하며 그게 안 되면 500시간까지 수업을 연장한다. 아기를 낳을 경우 1년치 월급을 준다. 교육비가 드는 경우는 자기 일을 위해서 배우는 경우에만 해당한다. 방문하기로 한 학교의 교사들은 동맹 파업 중이어서 평생 학습관을 방문하였다. 여자 교장이 나와 화사한 표정으로 브리핑에 들어갔다.
“교육의 해법이 뭐죠?”
버스 안에서 가이드가 난감한 질문을 던졌다. 그런 선문답 질문에 침묵이 답이다. 그미가 규정한 답이 아니면 해답이 아니기 때문에 대답을 한다는 자체가 아마추어 화법에 걸려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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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랜드 산맥은 눈으로 덮여있었다. 신기하다. 산꼭대기에는 눈이 덮여 있고 바닥에는 초원과 꽃들의 지천이다. 얼음 벌판을 지나면 ‘남진의 뽕짝’처럼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에서의 푸른 초원과 그림 같은 집들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한 때 식민지 민족이었던 그들에게 천연 가스가 발견되고 평화협정이 체결되면서 젖과 꿀을 선사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 나라 역시 사회 문제 투성이다.
우선 기후 관계로 우울증 환자가 많아서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 브레이빅이란 사내가 총기를 난사하여 80여 명의 사상자를 낸 ‘우토야 섬의 비극’이 그렇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 살인마는 대한민국의 가부장 제도를 가장 존중한다 하여 우리들을 민망하게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학살의 섬이 보이는 그 벌판에는 보랏빛 루피꽃 천지였다. 벌판이 화원보다 아름다움을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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某여선생님의 부탁으로 루피를 꺾기 위해 벌판으로 뒤뚱뒤뚱 다가섰다.
틈입자의 발자국 소리를 들은 루피 공주들은 두려움에 떨었지만 도피할 수 있는 다리가 없었으므로 그저 몸만 부르르 떨 뿐이었다. 내가 꽃 모가지를 잡아당기자 루피는 몸을 지키기 위해 인대에 힘을 주었다. 다시 잡아당겼지만 끊기지 않기 위해 혼신으로 버티며 시간을 버는 중이었다.
“저 꽃이 더 예뻐 보이네요. 그걸로 꺾어주세요.”
그쪽으로 몸을 이동하자 금세까지 목이 잡혔던 루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전기톱으로 잘리는 상상의 잔혹사로 비명을 지르는 꽃들의 소스라침은 은유일까, 리얼리즘일까. 그러거나 말거나 호수는 출렁거리지 않고 빙판처럼 반지르르 지켜만 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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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슬로 번화가에도 이따금 걸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동유럽 어디쯤에서 관광버스로 실려와 저마다 구역을 정한 채 행인들의 동정을 구하는 중이다. 그러나 행인이나 걸인이나 아주 잠깐 마주쳤다가 지나갈 뿐 별로 관심이 없다. 나 혼자 핏기 잃은 피부를 반갑게 느끼며 동전 몇 개 던져주었다. 까만 피부의 그 여자는 동전을 받으며 핫도그를 먹고 있었다. 상생이란, 그렇듯 노동과 동정을 번갈아 나누며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배짱이 생겨서 깨진 가로등 아래서 몰래 오줌을 누기도 하고 슬그머니 담배꽁초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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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반구 꼭대기에는 가지 못했다. 히르키네스 가는 길에는 나무가 한 그루도 없으며 길가에는 툰드라와 순록만 보인다는데 경험하지 못해 종래 아쉽다. 제 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과 소련 두 나라의 전쟁터가 되어 300회 이상 공습을 받기도 했다는 그 자리는 다음 기회로 미뤄야 했고.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국경은 없었다.
그저 이웃집 밤마실가듯 버스가 통과했을 뿐이다. 스톡홀름은 오후 7시인데 모든 상가가 이미 문을 닫아버린 상태였다. 윈도우 안의 불빛은 환하게 켜놓고 문고리만 걸어잠근 것이다. 마트에서 맥주를 한 보따리 사서 숙소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스톡홀름 거리의 쓰레기와 담배꽁초를 보면서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사람 사는 동네는아무래도 빵 봉지나 담배꽁초가 가끔씩 널브러져 있어야 나그네를 안심시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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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치면 남대문 시장이나 인사동 골목쯤 되는 스톡홀름거리에는.
사람들의 냄새가 가장 짙게 풍겼다. 노인 부부가 많았고 장애인들이혼자서 휠췌어로 등장하기도 했다. 흑인, 백인, 동양인, 아리비안까지 마치 인종집합소들이 골목골목에서 물건을 고르거나 사진을 찍곤했다. 골목길에는 야바위꾼도 있었고 거리의 악사나 쓰리꾼도 등장했다. 실제로 某여선생님의 가방이 절반쯤 열리기도 해서 모처럼 리얼영상을 실감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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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경험하고 싶었던 핀란드에서 반나절밖에 머무르지 못한 것이 아쉬운 부분이다. 대부분 교사들이 이상적 교육을 실천한다는(물론 한국과는 환경과 인구 밀도가 다르므로 동일시킬 수는 없겠지만) 핀란드를 체험하고 싶었으나 일정상 겉만 핥았다. 일찍이 핀란드는 통합형 교육과 자생성과 책무를 강조하는 나라로 세계의 주목을 받는 중이다. 다음 기회에 교사들과 가장 움직이고 싶은 나라를 꼽으라면 핀란드가 될 것이다. 우즈베키 사원과 원로원 광장 그리고 암석교회가 그나마 인상적이었지만 아쉬움이 크다. .
그리고 헬싱키.
코리아로 가는 공항에는 여전히 세계 인종들의 박람회처럼 붐비고 있었다. 흡연실에서 마지막으로 담배 한 대 피우고 비행기를 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