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소개
재일교포 출신으로 북한으로 건너가 한일고대사 연구에 매진했다. 임나는 가야계가 일본 열도에 건설한 소국, 분국이라는 김석형의 분국설을 계승한 학자다. 1988년 『초기조일관계사(상)』에서 지금의 오까야마(岡山) 기비(吉備) 지역에 가야의 분국인 임나가 있었다고 논증했다.
주요저서: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1990), 『독도이야기』(2007, 황명철 공저), 『고구려 이야기』(2007), 『조선단대사』 중 「가야편」(2010), 「백제편」 1, 2(2010), 『조선단대사』의 「고구려편」(2011).
책소개
2012년 북한에서 발간한 북한역사학자 조희승의 저서 『임나일본부 해부』에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이 각주와 해제, 그리고 일본 고대 유적지 답사 사진을 추가해서 만든 책이다. 조희승은 일본의 임나일본부설(남부조선지배론)은 조선침략 구실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일본군 참모본부가 주도하여 만든 사이비 학설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의 핵심 내용은 일본과 한국의 강단사학자의 주장과는 달리 임나는 가야가 아니라 가야가 일본 땅에 세운 소국이라는 것이다.
저자 조희승의 후기 중에서
일제가 패망한 지도 근 70년을 가까이 한다. 과거 일제가 우리 인민에게 저지른 특대형 반인륜범죄는 력사에 전무후무한 것으로서 우리 인민의 가슴속에 원한의 응어리로 남아있다. 그런데 일제가 외곡 조작하여 조선침략과 조선민족말살의 리론적 근거로 악용하였던 『임나일본부』설은 그 허황성, 비과학성이 낱낱이 까밝혀 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일본사회에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 각급 력사교과서들에서는 계속 종전대로의 반동적 『임나설』을 고집하고 있으며 자라나는 청소년들은 과거 『임나일본부』설이 왜 나오게 되였는지 또 그 위험한 독소가 어떤 것인지도 잘 모르고 있다.
이러한 실정은 필자[조희승]로 하여금 통칭 『임나설』이라고 부르는 이 사이비학설이 어떠한 사회력사적 배경하에서 나오게 되였고 그것이 디디고 선 『학술적 근거』란 것이 얼마나 허황한 것인가에 대하여, 기비 가야국의 실체에 대하여 력사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알기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글이 있어야 한다는 마음속 충동을 느끼고 이 글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책 속으로
그런데 「임나일본부」설의 제창자들은 자기의 자주적인 국권을 가지고 오래 동안 존재한 가야국에 기내 야마또정권이 4세기 중말엽경으로부터 6세기 중엽 사이의 200년간이나 「미야께」를 설치하고 식민지 지배하였던 것으로, 이 「미야께」는 후세의 조선총독부와 근사한 정치적 성격과 권능을 가졌던 것으로 외곡 날조하였던 것이다. --- p. 42
「임나일본부」에 관한 문헌적 근거는 바로 이 「일본서기」가 유일무이한 것이다. 조선의 세 나라에 대하여 쓴 력사책들인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도 또 당시의 금석문들에도 미야께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근거하여 없는 사실을 조작한 여기에 근대일본의 죄행이 있다.
1868년 명치유신으로 불리우는 불철저한 부르죠아 혁명과 더불어 조선침략의 길에 나선 일본은 조선과 대륙침략의 구실로서 력사학을 택하였다. 그들은 조선침략구실의 리론적 근거로서 「일본서기」의 기사를 과대확장하여 그럴듯한 학설을 만들 것을 착안하였다. 이렇게 창출된 것이「임나일본부」설이였다. --- pp. 48~49
「동조동근」론은 장차 「내선일체」론으로 번져지게 될 사상적, 리론적 기초가 된 사이비학설이였다. 「동조동근」론에 「임나일본부」설이 깔려있다는 것은 물론이다. 20세기 초 일제에 의한 조선강점이 현실화된 시점을 전후하여 「동조동근」론이 미친 듯이 선전되였다. 광기어린 「동조동근」론의 앞장에 선 것이 바로 일본의 어용사가들이였다. --- p. 55
그렇다면 발굴의 결과 그들이 얻은 것은 무엇이였던가? 「임나일본부」의 칡뿌리 만한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었는가? 대답은 간단하였다. 「임나일본부」라는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고 조선 땅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조선에 와서 조사에 떨쳐나섰던 고고학자, 력사가들은 당황하였다. 조사를 하느라 막대한 국록을 탕진해놓고도 「임나일본부」의 근거를 찾지 못했으니 말이다. --- p. 110
여기서 이상하게 여기게 되는 것은 일본사학계는 왜 패망 이후에도 계속 별로 타당성과 근거도 없는 「임나설」을 붙들고 늘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그 리유로 두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패망 후 일본학자들이 「황국사관」을 뿌리 뽑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지로는 「황국사관」을 비롯한 일제사상 잔재, 이른바 「선배학자」들이 세워놓은 학설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데 있다. 다음으로 「임나설」이 유지되여야 일본 렬도 내에 있는 방대한 조선문화를 저들에게 유리하게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 p. 114
이또지마 가야소국의 군사력이 4세기 말~5세기 초 고구려-신라를 한편으로 하고 백제-가야, 왜를 한편으로 한 조선반도의 풍운의 력사에 말려들어갔고 광개토왕릉비문에 나오는 왜가 고국 가야 편에서 고구려, 신라와 싸운 왜였다고 보는 것은 공화국 력사학계의 새롭고 참신한 제기로서 이제는 정설로 되였다. 일본학계에도 그것은 론문 소재가 되었다. --- p. 166
공화국학계는 이미 오래전에 일본 땅에 있는 고대 산성유적이야말로 조선계통 이주민들이 형성한 소국의 상징이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력사과학」 1963년 4호 18페지) 이 주장은 오늘날에도 변함이 없으며 일본에서의 고고학적 발굴과 정리에 의하여 더욱더 실증되고 있다.
일본학계는 고대조선식 산성유적의 축조시기를 7세기 이후로 몰밀어버리고 있다. 그것은 이 성유적의 주재자를 야마또 중심사관의 견지에서 고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력사적 사실을 무시하는 독선적 판단이다. 조선식 산성은 말 그대로 조선사람의 성이다. --- pp. 218~219
필자[조희승]는 언권을 요청하여 5분간 발언하였다.
「첫째로, 광개토왕릉비문에 나오는 왜가 야마또의 왜라고 하였는데 그래 고고학적으로 그것을 증명할 수 있겠는가, 야마또의 사회군사적 단계라는 것은 서부일본을 통합 못한 단계에 처해있다. 고고학적으도 볼 때도 무로노오오하까(室大墓), 찌노오까(乳岡)고분 등이 주술적 색채가 강한 유물들을 부장한 것들인데 이것을 보고 어떻게 야마또의 정권이 조선에 군사출병할 사회경제적 상태에 있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둘째로, 야마또정권이 서부일본을 통합하였다고 하면서 그 실례로서 인덕(仁德??다이센), 응신(應神??곤다야마) 두 왕릉을 들었는데 이 두 초대형고분이 과연 5세기 초에 존재해있었는가. 우리가 알기에는 다이센, 곤다야마고분이라는 것은 대체로 5세기 말~6세기 초의 축조로 안다.
아리야마, 야쭈(野中)고분을 보아도 그것은 일목료연하다.」 ---p. 241
「일본서기」 임나관계 기사에 나오는 「임나일본부」라는 것은 기비지방 임나가라에 설치된 야냐마또정권의 전권대표격인 행정적 출장기관 또는 그 기관을 책임진 관리였다. 이것이 기내 야마또정권이 파견한 「임나일본부」의 실체이고 정체였다. --- p. 263
첫댓글 궁금하네요.
전에 북한학자가 한역한
박지원의 열하일기 맘에 들었던 기억납니다.
남한학자 번역본도 물론 보았지요.
북한학자 한역이 딱 제 스타일이더라 이말씀.
이 책은
이덕일 소장님 주해하셨으니 더더욱 신뢰가 갑니다.
북한은 정치와 사회가 함께 엮힌 구조라서인지~ 역사서들도 필체가 힘이 있고 논리가 분명합니다.
특히, 이책은 저자가 밝혔듯이 역사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읽고 논리적으로 사비이설인 임나일본부를 비판할 수 있게끔 정리한 책이기에^ 반드시 읽어야 할 책입니다.
우리나라 강단학자들이 사료나 고고학적 유물이 단 하나도 없음에도 임나가 남한에 있다하는 억지 말장난과 같은 임나설은 이책으로 단 번에 무너지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