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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래운 선생의 생애와 업적
―교육민주화 운동의 기수
이은봉
성래운 선생(본관: 창녕昌寧)은 말년의 1년을 광주경상대학 학장으로 살았다. 생애의 마지막 1년을 광주광역시 남구의 시민으로 산 것이다. 성래운 선생이 이 광주경상대학 3대학장에 취임한 것은 1989년 3월 1일의 일이다. 우선 그는 이 광주경상대학를 종합대학교로, 다시 말해 광주대학교로 승격시키는 일에 주력했다. 그와 김인곤 이사장 등의 노력으로 광주경상대학이 종합대학교로, 곧 광주대학교로 승격된 것은 동년 10월 28일의 일이었다. 다음 해인 1990년 3월 1일부터 종합대학교, 곧 광주대학교로 개교하도록 인가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광주대학교의 총장으로 일하지는 못했다. 그해 12월 25일 급성 백혈병이 악화되어 이승을 하직했기 때문이다.
성내운 선생은 광주에 와 살기 훨씬 전부터 광주사람이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끝나고 1년 뒤인 1981년 5월의 일이었다. 광주와이엠시에이(YMCA) 백제실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 1주기 기념행사가 열렸다. 성내운 선생은 이날의 추모사에서 “나는 고향이 충청도이지만 이제 본적을 광주로 옮기겠다”고 외쳤다. 의기소침해 있는 광주시민과 전라도민들을 격려하기 위해 한 말이었다. 그날 낮 그는 전경들을 내세운 전두환정권의 방해를 뚫고 5·18 묘역(옛 망월동묘역)을 참배하고 온 터였다.
성내운 선생의 고향은 물론 충청남도 공주이다. 이 점에서 나는 성내운 선생과 깊은 인연이 있다. 나도 충청남도 공주 출신이고, 지금 광주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충청남도 공주군 신풍면 산정리에서 태어난 것은 1926년 3월 29일이었다. 아버지 성의강과 어머니 이복덕 사이에 생산된 외아들이었다. 비교적 넉넉한 농사꾼 집안이었지만 홍수로 논밭을 떠내려 보낸 뒤 그의 어머니는 떡장사를 하기도 했다.
1934년에는 부모가 고향 공주군 신풍면을 떠나 함경남도 원산으로 이사해 그도 따라 잠시 그곳에서 살았다. 물론 가난 때문이었다. 그런 뒤 1936년에는 그도, 그의 가족도 충청남도 대전으로 이사했다.
성내운 선생이 보통학교 저학년 때부터 공부를 잘 한 것은 아니었다. 나중에 점차 나아져 고학년 때는 성적이 우수해졌고, 졸업을 할 때는 우등상을 받았다. 1939년 경성사범학교 예과에 입학할 때는 성적이 좋아 장학생으로 뽑히는 영광을 안았다.
경성사범학교는 일제가 식민지교육의 중심기관으로 세운 곳이었다. 하지만 이 경성사범학교에서 그는 오히려 민족 현실에 대해 눈을 떴다. 1940년 의식 있는 일본인 담임교사한테 자기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라는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이 일본인 담임교사가 아무도 몰래 그에게 말했다.
“지금 자네는 제 나라를 힘으로 강점하고 총칼로 수탈하며 백성을 마음대로 죽이는 침략자의 나라를 찬양하고 존경하도록 교육받고 있다. 진정 자네가 사람답게 살려면 지금 당장 학교를 자퇴하라. 그리고 민족을 위해 옳은 길을 찾아 길을 떠나라.”
일본인 교사의 이런 얘기를 듣자 그는 당장 학교를 지퇴하고 싶었다. 하지만 경성사범학교에서는 제도상 장학생의 경우 자퇴를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끝에 그는 자신의 몸을 해치는 길을 택하기로 했다. 몸이 상하면 자퇴를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큰누나네 집 장독대의 숯이 둥둥 떠다니는 조선간장을 한 바가지 퍼마셨다. 조선간장을 퍼마시면 고열과 기침이 나는 등 폐결핵과 같은 증세가 나타난다는 얘기를 들은 터였다. 폐결핵의 증세가 나타나면 진단서를 첨부해 학교에 제출하고 자퇴를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신열에 들떠 혼수상태에 바진 그에게 의사는 ‘한 주간의 입원과 안정을 요함’이라는 진단만을 내렸을 뿐이다.
그런 일이 있고난 뒤부터 그는 몰래 조선어로 된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책을 부지런히 찾아 읽었다. 나아가 영어공부에도 깊이 몰두했다. 이때의 경험으로 그는 일제의 학교교육이 갖는 한계를 깨닫게 되었고, 식민지 노예교육의 모순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는 이 일본인 담임교사를 통해 정권의 노예가 되지 않는 교사, 진실을 가르치는 교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되었다.
1946년에는 서울사범대학으로 편입했다. 1948에는 미국의 교육자들이 한국에 와 한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몇 개월 동안 강의했다. 이때 그는 미국의 교육자들의 강의내용을 한국 학생들에게 통역을 했다. 같은 학생이지만 남달리 그가 영어를 잘 했기 때문이다. 당시 그가 통역한 과목은 〈초등학교 언어교육법〉과 〈초등학교 사회과교육법〉이었다. 이미 그는 영어실력이 뛰어난 수재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서울사범대학에 다닐 때는 자전거로 막걸리 배달을 하는 알바를 하면서도 영어단어장을 들고 다니며 외웠다. 하지만 그는 글을 쓸 때는 반드시 한글로 썼다. 대화를 할 때도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영어를 섞어 쓰지 않았다.
만 20세가 되는 1946년에는 이우영 여사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만 23세 때인 1949년부터는 서울대학교에서 교육학 강의를 시작했다. 이를 바탕으로 1950년에는 『새교육개론』이라는 책을 써 서울의 홍지사에서 발간했다.
1953년에는 국립교육연구기관인 〈중앙교육연구소〉에서 연구부장으로 일했고, 1954년에는 짧은 기간 동안이지만 직접 미국교육을 시찰하기도 했다. 〈중앙교육연구소〉에서 연구부장으로 일하던 무렵에는 성균관대학교 문리과대학 이인기 학장의 제의로 성균관대학교 교육학과의 겸임교수로 출강하기도 했다.
이 해에 그는 한국교육문화협회에서 간행하는 《교육문화》 2월호(한국교육문화협회)에 「서울특별시 국민학교 학급의 집단과정」이라는 비교적 긴 글을 썼다. 이 글에서 그는 “사람은 오직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만 사람답게, 무럭무럭 자라날 수 있다는 것도, 학문이 밝혀준 사실이”라며 “경쟁을 통한 교육은” “너도나도 함께 잡아먹히게 하는 교육”이라고 피력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 글에서 “남을 잡아먹는 기술이 이 나라에 가득 차 있었기에 마침내는” “온 나라가 송두리째 일본에 삼키임을 겪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 나라의 “백성이 헐벗음과 굶주림을 면치 못하는 까닭도 경쟁을 통한 교육이 자랑삼는 이른바 ‘우등생’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더불어 그는 학생들에게 “힘을 길러 주려 하기 전에 사람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협동을 통한 교육”을 강조하는 한편, “자포자기에 떨어진 학생에게 ‘나도 하면 되겠구나, 나도 사람이었구나' 하는 느낌을” 갖도록 해야 한다고, 그렇게 해 “다시 인생을 출발하게 하는 일”이 교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때 이미 그는 참교육의 정신을 강조했던 것이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제2공화국이 출범하자 그는 문교부 수석장학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런 경력은 그가 이미 서구식 근대교육의 핵심에 서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다른 동료들처럼 제3공화국에 협력했더라면 그도 얼마든지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박정희 군사정권의 교육정책을 결코 바르게 보지 않았다. 무엇보다 박정희의 군사쿠데타 자체를 용납하지 못했다. 그가 보기에는 모든 국민을 사병처럼 훈련시켜 순종형 인간으로 개조하려는 것이 박정희 군사정권의 교육정책이었다. 마침내 그는 1963년 들어 박정희 군사정권을 거부하고 부정하는 길로 들어섰다.
박정희의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일은 물론 쉽지 않았다. 그에 따른 외로움과 두려움도 컸다. 하지만 그는 거듭 용기를 냈다. 우선 그는 국가재건최고회의 문교사회위원회 전문위원 직부터 사퇴했다. 그런 다음 그해 바로 연세대학교 교육학과의 교수로 일하기 시작했다.
1964년에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소아재활원 부속초등학교의 교장 직을 맡았다. 이 일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치료받는 지체 장애아들을 교육하는 데 역점이 있었다. 그는 이 일에 온 정성을 다 기울였다. 민주교육과 인간교육에 대한 성내운 선생의 믿음과 실천력을 오롯하게 보여준 것이 이 일이었다. 이 때의 얘기는 그가 쓴 《세 학교의 이야기》(학민사, 1983)에 잘 나와 있다.
1968년에는 연세대학교 교정에 윤동주 시비를 건립하는 일을 추진하고 완성했다. 연희전문학교 시절 윤동주가 기거하던 기숙사 앞에 동생 윤일주의 설계로 세워진 시비에는 윤동주의 대표작 「서시」가 새겨져 있다.
박정희의 10월 유신체제도 2년여가 지나자 전국에서 봇물 터지듯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성내운 선생은 당시 연세대학교 학생처장이었다.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연세대학교에서도 김찬, 김동길 교수와 많은 학생들이 구속되었다. 학생운동에 앞장 선 학생들을 제적시키라는 당국의 압력에 그는 쉽게 굴복하지 않았다. 곧바로 그는 구속된 교수와 학생들의 석방을 촉구하는 교수기도회를 이끌었다.
1975년 7월 9일 박정희의 유신독재정부는 사회안전법, 민방위법, 방위세법, 교육관계법, 이른바 4대 전시입법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이 가운데 교육관계법 개정안은 교수 재임용제를 신설하려는 것이었는데,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교수의 재임용을 막으려는 것이 그 일차적인 목표였다. 이 법은 1976년 2월 28일 처음으로 적용되었는데, 그로 인해 전국교수의 4.7%인 460명이 재임용에서 했다. 이화여대 김윤숙 교수, 덕성여대 염무웅 교수, 한양대 리영희 교수, 연세대 송리성 교수 등이 그들이었다.
물론 연세대학교의 성래운 교수도 그 일로 해직이 되었다. 그가 재임용에서 탈락되어 해직교수가 된 데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학생들과 교수들의 석방을 위한 기도회, 정부의 교육정책에 대한 비판 등 때문이었다. 1977년에는 김병걸 김찬국 염무웅 백낙청 등과 함께 ‘해직교수협의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을 맡았다. 그리고 이들 해직교수 13명의 이름으로 「민주교육선언」을 발표했다. 그런 뒤 그는 좀 더 적극적으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이 해에 그가 ‘한국인권운동협의회’의 부회장을 맡은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였다.
성내운 선생이 이 나라의 역사, 특히 교육운동사에 더욱 큰 기여를 한 것은 1978년 6월 27일 전남대 송기숙 교수를 비롯한 11명이 발표한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을 주도한 일이었다. 이 사건은 박정희의 군사독재정권이 1968년 12월 5일 공포한 「국민교육헌장」 중심의 교육정책을 반대하는 데 초점이 있었다. ‘국민에 대한 국가의 우위’로 요약되는 이 「국민교육헌장」은 일왕에 대한 절대복종과 절대충성을 강요하는 일제의 ‘교육칙어’를 그대로 본뜬 것이었다. 1993년 교과서와 정부의 공식행사에서 사라질 때까지 이는 군사독재 정권의 국민통제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례 중의 하나였다.
「국민교육헌장」은 뜻있는 교육자들에게는 오랫동안 두통거리였다. 그러다 보니 1975년 3월 1일 민주회복국민회의는 「국민교육헌장」를 비판하는 가운데 “우리는 자유와 평화와 정의를 사랑하고, 압제와 불의를 거부하는 민주 국민이다”로 시작하는 ‘민주국민헌장’을 발표하기도 했다.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이 교육운동사에서 더없이 중요한 까닭은 이 선언이 현재 전교조를 비롯한 교육민주화운동의 씨앗이, 출발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선언은 전남대 교수 11명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하지만 이 선언을 주도하고 전문을 쓴 사람은 성내운 선생이었다. 처음에는 전국의 교수들 50명에서 100명 정도가 참여해 이 선언을 발표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이 잘 안 되자 주최측에서는 선언의 발표를 그만두기로 했다. 그러나 성내운 선생은 그냥 주저앉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서울에서 덜컥 이 선언을 발표한 다음 그는 곧바로 광주로 내려갔다. 그런 뒤 송기숙 교수를 만나 이 선언을 발표했으니 감옥에 갈 준비를 하라고 알렸다. 다행히 서명을 했던 교수들 11명은 끝까지 의연하게 이 선언에 참여했고, 박정희의 유신독재정권에 큰 타격을 주었다. 박정희의 유신독재정권은 〈우리의 교육지표〉 선언을 긴급조치 제9호 위반이라고 해 그에 서명한 대학교수 11명을 즉각 해직시켰다. 앞장을 섰던 송기숙 선생이 구속되자 성내운 선생은 서둘러 잠행했다. 다음 해인 1979년 1월까지 잠행하다가 끝내 수감이 된 그는 감옥에서 내내 독서와 시낭송을 하며 지냈다. 감옥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옆방에서 송기숙과 통방을 해주던 무등산 타잔 박흥숙을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감옥에서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를 읽고 이 책을 편집한 이오덕도 알게 되었다.
그렇게 감옥에서 지나다가 1979년 8월 15일 그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같은 해 11월 그는 「나라의 민주화를 위하여」라는 공동선언을 주도해 계엄정부에 의해 다시 수배가 되었다. 그는 1980년 ‘서울의 봄’에야 그는 사면되었고, 1980년 3월에야 연세대학교에 복직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1980년 7월 전두환의 신군부에 의해 또다시 해직이 되고 말았다.
해직교수인 성내운 선생은 1982년 ‘『에밀』의 교육이념과 실천’이라는 부제가 달린 책 『인간회복의 교육』(한길사)을 간행했다. 장자크 후소의 책 『에밀』을 바탕으로 저술된 이 책 『인간회복의 교육』에서 그가 주장하는 핵심 내용은 어린아이는 자연 속에서 개구쟁이나 말괄량이로 뛰어 놀면서 자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1983년에는 미국에 가 3개월 동안 교포들을 대상으로 시낭송과 강연을 하면서 조국의 민주화운동에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했다. 돌아와서는 바로 한국공해문제연구소 이사를 맡았다. 그리고 1984년에는 〈민중문화운동협의회〉 고문을 맡아 도처에서 뛰어난 시낭송 솜씨를 바탕으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1985년 8월에는 널리 잘 알려져 있는 『민중교육』 지 사건이 터졌다. 변호인단 측 증인으로 재판에 출석한 그는 이 무크지에 실린 교육문제에 관한 글들이 얼마나 옳고 바른가에 대해 강하게 증언했다. 이 『민중교육』 지는 교사들 중심의 문학운동 그룹인 『오월시』와 『삶의문학』, 그리고 〈YMCA 교사협의회〉가 중심이 되어 만든 문학과 교육 중심의 무크지였다. 교사로서, 문인으로서 소박한 자각을 담고 있는 이 무크지를 전두환의 신군부가 문제로 삼은 것은 ‘학원안정법’을 통과시키기 위한 술수 때문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서울과 대전에서 전인순, 전무용, 강병철, 송대헌, 황재학 등 수많은 교사들이 해직되는 한편 『오월시』 쪽의 교사들인 김진경, 윤재철. 고광헌, 그리고 실천문학사의 송기원이 구속이 되는 참화가 일어났다. 이 『민중교육』 지 사건에는 필자도 깊이 연루되었다. 책을 기획하고 필자를 선정하는 일 등에 적극 참여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의 대전 측 배후주동자로 몰린 필자는 시간강사직에서 해직되는 등 얼마간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성내운 선생이 바로 이 사건의 변호인단 측 증인으로 재판에 참여했던 것이다.
1986년에는 유상덕 김진경 고광헌 등 『민중교육』지 사건 해직자 및 구속자를 중심으로 결성된 〈민주교육실천협의회〉의 공동대표를 맡았다. 그리고 이 〈민주교육실천협의회〉의 기관지인 《교육과 실천》의 발행인이 되었다. 그는 교육민주화운동을 하는데 필요한 일과 자리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뛰어다녔다. 그러면서 그는 시낭송 및 연설을 통해 교육민주화운동을 위해 힘겹게 싸우는 교사들을 위해 힘을 보탰다. 이 해에 그는 교육민주화운동에 함께 참여해온 동지들로부터 회갑기념 논문집 『민족교육의 반성』(성내운선생화갑기념논총편집위원회 편, 학민사)을 헌정받기도 했다.
성내운 선생은 자타가 공인하는 시낭송가이기도 했다. 이런저런 집회에서 듣는 그의 시낭송은 청중들을 늘 전율케 했다. 저음으로 시작해 고음으로 치닫는 그의 시낭송을 듣고 있으면 주먹이 불끈 쥐어지기 일쑤였다. 그가 주로 낭송하는 시는 윤동주의 「서시」, 고은의 「화살」, 신경림의 「농무」, 조태일의 「국토」, 양성우의 「겨울공화국」, 김남주의 「학살」 등이었다. 이들 시 외에도 그는 수백 편의 시를 암송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소설과 시 등 문예작품을 직접 창작하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동시 「달라질래요」 아직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우리 반 동무들은 모두 달라요
얼굴도 다르고
키도 달라요
모두가 똑같아지면 우스울 거야.
우리 반 동무들은 모두 달라요
생각도 다르고
재주도 달라요
모두가 똑같아지면 우스울 거야.
어머니는 아버지와 달라서 좋고
오빠는 언니와 달라서 좋아요
서로가 똑같으면 우스울거야.
나는 나는
동무들과 달라질래요
오빠와 언니와도 달라질래요
모두가 똑같으면 우스울거야.
나는 나는
이 세상의 누구와도 달라질래요
달라져서 더 좋은 사람이 되고 말 거야.
1989년 3월 광주경상대학 학장으로 취임한 뒤에도 그는 각종 변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우선 그해 5월에는 광주지역 10개 대학총장들이 참여한 영광핵발전소 11,12호기 건설반대성명을 주도한 뒤 조선대 생 이철규 군 변사사건 진상규명촉구 성명을 주도했다. 이 해에는 전국교직원노조가 결성되기도 했다. 전국교직원노조는 결성 직후부터 곧바로 정권의 탄압을 받았다. 그러자 그는 전국교원노조탄압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공동의장으로 참여했다. 6월에는 이한열 추모사업회의 이사장으로 취임하는 한편, 9월에는 조선대 이돈명 총장 해임 반대 및 학원민주화 성명을 주도했다.
그는 이 나라의 변혁운동에 이처럼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중 급성백혈병 진단을 받고 입원 치료를 하다가 불현 듯 1989년 12월 25일 이승을 떠났다. 본래 그는 자신의 건강을 적극적으로 챙기던 사람이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그는 새벽 4시경에 일어나 손수 정해둔 코스를 따라 북한산을 산책했다. 약 1시간 내지는 1시간 반 정도 소요되는 거리를 새벽의 찬 공기를 마다 않고 그는 걸었다.
건강에 대한 성내운 선생의 관심은 그를 중심으로 모여 등산을 즐기던 무명산악회를 통해서도 확인할수 있다. 그가 회장이었던 이 무명산악회에는 당대의 민주인사들인 신경림, 현기영, 안종관, 정희성, 김종철 등이 주로 참여했다. 그 자신이 산을 좋아해 평소 믿고 의지하던 민주인사들이 무명산악회라는 이름으로 모여 매주 일요일 북한산에 올랐던 한 것이다. 이 ‘무명산악회’는 지금도 신경림 선생을 회장으로 삼아 계속되고 있다. 이처럼 늘 건강을 챙겼는데도 불구하고 스트레스가 겹쳐 그는 문득 급성 백혈병으로 이승을 하직한 것이다. 아쉽지 않을 수 없다.(『역사를 배우며 문화에 노닐다―광주광역시남역사인물』, 광주광역시남역사인물간행위원회 편, 2015.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