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과 사제직
25, 1 - 31, 18
여기서는 십계명의 석판이 안치될 성막(계약의 궤)을 건립하는 세부적인
지시가 나온다. 대사제와 사제들의 임직식과 사제복에 관한 규정도 함께
나온다. 모세 및 아론과 그의 가족들이 이 규정에 저촉을 받았다 하더라
도, 또 약간의 규정들이 출애굽 시대에까지 소급될 수 있다 하더라도 이
것은 그 형태로 보아 7세기 이상이 뒤늦은 유배동안이나 유배 이후에 나
왔던 규정들임이 틀림없다고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 생활이 끝난 다음 팔레스틴에 한 공동체로 정착
하였고, 이 공동체가 흥망성쇠를 체험하면서 솔로몬의 영광인 성전을 건
립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바빌론에 의해서 모든 것이 약탈되고 말았다.
사제 전승은 유배를 놓고 자기들이 알았던 성전예배에 대한 아름다운 추
억으로 과거를 회상하였고, 모든 것이 황폐된 초토로부터 다시 아름답게
세워질 성전을 바라보는 꿈이 실현될 예루살렘 귀환의 때를 전망하였다.
사제 전승은 과거에 있었던 것을 회상하고 미래에 있을 것을 전망 했던
것이다.
바빌론 유배 때의 예언자 에제키엘은 사제들과 같은 방향으로 생각 했는
데, 이 방향에서 에제키엘은 희망했던 완전한 성소(聖所)를 귀환(에제40
-48)이후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활 중심으로 보려고 했다. 그러나 사제
전승을 쓴 작가들은 자기들의 생각을 영광스러운 과거에로 돌렸고, 자기
들이 알았던 것처럼 예배의 모형을 시나이 산으로부터 들린 YHWH의 음성
에 돌렸는데, 그것은 광야 생활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알맞는 성전의
첫 구조에 대한 지시 내용이었다.
여기서 우리에게 제시된 성막생활에 대한 여러 가지 내용들은 사실(寫實)
적인 것이 못되며 광야생활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이 모든 것들은 불가능
하다고 본다.우선 사제들의 화려한 옷차림, 값진 보석들, 희귀한 목재와
귀금속들,특히 그들의 세공기술 등 이 모든 것들은 시나이 산 부근의 생
활 조건으로 보아서,에집트에서 탈출한 오합지중인 탈출자들의 상황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서적인 표현 대로 말한다면 그런 것들에 대한 역사적인 근거는
다소 있다고 보나, 전승이 지나치게 미화시켰다고 본다.
사실 초기 단계에서부터 계약의궤는 있었다. 출애굽 당시의 형편으로 보
아 그것은 나무로 되어 있었음이 분명하다.(신명10,1) 계약의 궤의 목적
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산에서 다짐 했던 계약을 그들로 하여금 상기케
하고, 가나안으로 가는 그들의 여정에 있어서 이스라엘 사람들과 동행하
는 YHWH 현존의 상징인 증거판을 보관하는 데 있었다.(민수10,33-36)
만남의 장막 또는 성막이라고 불리워지는 그 안에 계약의 궤가 있었다.
(27,21) 그러나 이것은 YHWH가 당신의 백성들을 만나는 장소(33,7-11 삼
하7,6)로 상징하는 것 이외에 베두인의 천막과 다를 바 없는 양털로 짠
천막이었다.
성막과 사제직을 놓고 분리 해서 생각한다면 그리스찬인 우리는 어느 한
편을 거절할 수도 있다. 성서는 둘로 보지 않고 하나로 보는데,그것들의
공동 목적과 그 계속성을 추적하려는 우리의 시도 안에서 본 제장(諸章)
에 나오는 유다교의 의식(儀式)이나, 유다교의 사제직, 그리고 유다교의
제사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만남의 장막, 계약의 궤로 상징되는 오늘날의
교회를 볼 때 그런 것들을 쉽게 찾아 볼 수가 있다.
이 모든 것들은 구약종교의 외적인 형태에 속하는 것들인데 구약 종교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대치되었으며, 신약 기자들은 구약 종교를, 아브라함
에서 시작하여 모세와 예언자들을 거쳐 우리의 주님과 당신의 제자들에
게 이르기까지 간직되어 온 신앙과 증거의 참다운 궤도에서 탈선한 것으
로 보고 있다.
우리는 시나이 산의 계시 순간을 굳게 고수하려는 자들과 더불어 신앙의
공동체에 결속되어 있음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시나이 산의 계시 순간은
마치 하늘이 열려 하느님의 음성이 십계명의「너희는.....말라」의 엄한
표현 아래서 당신의 뜻을 선포하려고 했던 것처럼 보인다.
이스라엘의 부르심과 성소에 대한 산 증언이 될 두 석판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기를 원하는 것은 하나의 요청인데 우리는 아직도 그 요청의 중요
성을 간직하고 있고,또 그것은 하나의 회상인데 이스라엘의 고대 수호신
(palladium)이 십계명을 놓고 광야에 있어서나 후일의 예루살렘에 있어
서 교회가 자기 성원들에게 지우는 의무로 아직도 생각하는 인간에게 내
린 하느님「말씀」의 상징으로 수 세기 동안 간직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스라엘을 광야 시대에 있어서 하느님의 계속적인 명령을 듣고
또 예배시에 하느님과 대면하기 위해서 만남의 장막을 중심으로 모였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의 예배를 이스라엘의 예배에 결속 시키는
전승임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다.
계약의 궤의 정확한 칫수(25,10), 성막의 폭(26,2), 에봇의 멜빵(28,27)
수양 내장의 요제(搖祭) (29,22-24) 「십분의 일의 밀가루와 사분의 일
힌의 기름」으로 반죽한 것과 어린 수양을 아침에 드리는 번제(29,40)등
은 외형적으로 보아서나 장소적으로 보아서 부적절하고 번거로운 것이었
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놓고 편집자들은 하느님 예배의「영광과 아름다움 」
(28,2)에 대한 강렬한 사랑을 느꼈고,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
과 일치(25,22 29,45)할 수 있는 길임을 보았다. 또 편집자들은 사제의
기능은 사제가 대표하는(28,29-30) 백성들의 궁핍을 마음 속에 간직되어
야 하는 것으로 보았고, 전 의식 즉 '야훼께의 거룩함'(28,36)을 주관할
뿐만 아니라 영성적으로 최고의 영광임을 보았다.
나아가서 구약에서 처럼 우리가 보아온 대로 이러한 의식 안에서 몇가지
핵심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새 계약 아래서의
성취를 발견할 진리탐구인 것이다. 또한 그것은 신약의 성서신학의 깊은
뜻을 이해하는 데 우리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계약의 궤와 만남의 장막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 내용은 비록 이것들이
광야에서 실행되었다 하더라도 솔로몬 성전에서 비롯된 예루살렘의 지속
적인 성전을 위한 계획과 장식을 대체적으로 반영하고 있다.즈루빠벨 성
전 즉 제2 성전에서 그 모형은 반복되었다.제2 성전은 솔로몬 성전의 터
전 위에 세워졌으며,솔로몬 성전은 BC. 587년에 파괴되어 이스라엘 공동
체가 바빌론 유배에서 귀환했던 이후 재건되었던 것이다.
이 제2 성전이 재건되어 예수님의 탄생 바로 전 헤로데 대왕에 의해서
확장되었는데 예수님 전교 당시(마르13,1 요한2,20) 까지 외부의 증축이
진행되고 있었다.본 제장(諸章)에 나오는 지시 내용들은 운반할 수 있는
장비들을 두고 말한 것인데 그것들을 가나안으로 들어 가는 여정의 남은
자들이 운반 할 수 있었던 것이라면,그것은 분명히 이동할 수 있는 성소
(聖所)이었으며 예루살렘 제 성전의 중심부에 자리잡은 영구적인 성전으
로 재현된 것이다.
예배는 아론의 후손인 사제들에게 맡겨졌다. 여기에 대한 임직식과 제복
의 규정은 28장 1절에서 29장 35절에 자세하게 나와 있으며 이것은 후대
사람들이 깊은 관심을 갖고 YHWH에 의해서 모세에게 전수 되었던 하느님
의 모형으로 볼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런데 현대 사람들이 다음의 두가지 대조적인 것을 보고 움찔해지고 있
는데, 그것은 한편으로는 사제들의 품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제복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을 새긴 보석들을 다는데 이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중재에 나설 때이고 또 우림과 둠밈- 신
탁의 보석-을 다는데 이 때는 백성들을 위해서 하느님의 뜻을 선언할 때
이다.(28,15-30)
또 한편으로는 동물을 죽일때에 피를 내고 불결한 것들을 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구약 예배의 제사적인 요소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
의식은 29장 10 - 25절에 명기되어 있다.이것은 인간을 하느님과의 올바
른 관계에 놓이게 하는 의식으로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인간을 따로 구별
하는 데 있었다.
신약이 동물의 제사를 단죄한 것은 인간적인 이유와 위생학 적인 이유에
서가 아니다. 레위기에서 우리가 충분히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것은
고대적인 의식만이 아니고 인간 내면에 깔려 있는 인간의 죄스런 상태와
하느님의 거룩함 사이에 교량을 놓아야 하는 필요성에서 나온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가 이 문제와 구약에 나오는 같은 내용을 취급하면서(히브
8,1-10,18) 동물 제사를 단죄한 것은 동물을 잡을 때의 여러가지 불결한
것들을 반대해서가 아니고,예배자들로 하여금 사제이든 평신도이든 하느
님과의 일치를 가져오게 하는 수단이 완전한 것이 못되기 때문에 반대한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황소와 염소의 피로써는 죄를 없앨 수가 없기 때문 입니
다」(히브10,4)라고 했다.그는 또 인간의 약함, 인간의 죄에 빠짐, 인간
의 죽음에 대한 한계에 의존 하는 어떤 사제직도 그 유효성을 단죄 하고
있다. (7,23-28)
우리가 알아야 하는 바 그대로 히브리서 저자가 알고 있는 것은 구약에
있어서의 사제직이란 중재와 속죄 그리고 하느님 앞 에서의 백성들에게
하느님 뜻의 선포에 있다는 것이며 우리의 대사제인 그리스도께로 향하
게 하는 안내자라는 것이다. 대사제는 자신의 희생을 통해서 성전의 의
식이 성취시키지 못하였던 모든 것을 단 한 번에 성취하신 것이다.
자료출처 : 베소라성서 김정원 토마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