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은 새로운 발견이고 모르는 것을 알게하는 배움이기도 하다.따라서 익숙하고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
신세상으로의 탈주를 여행이라고 말하기도 한다.이럴때는 당연히 고정관념을 버리고 오감(五感:보는것,듣는것,
느끼는것,맛,냄새)을 열어 놓아야 한다.필자도 여행을 좋아하지만 테마적 여행을 할때마다 자신의 한계를 많이
느끼고 경험할때 마다 그랬었다.여행은 환상을 지움(기존관념)과 동시에 또 다른 만남이 기본이다...
1, 전쟁이나 내란,혁명(유신),개혁(혁신)이란 용어가 그런대로 구색을 갖출려면 반드시 돈이 있어야 한다.이런
정치적,역사적 용어들의 성공적 탄생 이면에는 돈이많이 들어가는 사업이란 것을 말해준다.실패의 경우도 많은
돈이 들어간다.정치사업은 목숨을 걸고하는 투기 사업이다.착하고 순진한 사람들은 개인과 집단의 의지로
개혁(유신)들이 가능하다고 할지 모르나 그것 역시 많은 돈이 들어간다.목숨을 걸고하는 크나큰 이권 사업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불꽃이 튄다.돈(재물)없이는 농본주의 사회에서 조차도 개혁은 불가능 하다.
일본 역시 명치유신의 성공에는 신분의 변화와 상승을 바라는 중하급 무사들의 저돌적인 의지와,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서구 자본가들의 잉여 자본의 투여(투자)가 결합한 열매라고 할수가 있는 것이다.일본 쇼군의 막부가
무너진 때가 1867년이고,1868년에 명치왕의 '왕정복고'가 겨우 이루워지나 이 모든 것의 이면에는 모두 돈(재물)
들이 작용점에 있었다.이때부터 일본의 유신세력들은 서양따라 잡기에 분주했다.부국강병과 기업의 활성화란
서양따라 잡기가 만만치 않았던 것은 한말의 한국 사례에서 보듯이 꽁자로 되거나 저절로 오는 것은 아니다.그
만큼의 시행착오와 희생이 따르는 것이 당연했고 당시의 세계의 자본질서도 인정사정 없던 적자생존,약육강식
의 시대였다.
2, 사실 일본의 명치 유신이란 변화(개혁)의 기본축은 1868년~1869년 동안 이루워진 '여행'을 통해 이루워진다.
명치유신 세력들은 일단 돈을 빌려 유신을 단행하기는 했으나 견문이 없거나 좁아 산업화와 근대화란 것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했다.이에 명치유신 신세력들은 서구의 조력자(동조자)들의 권고로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를
단장으로 하는 100명 이상의 이와쿠라(岩倉) 사절단을 꾸려 구미여행(1871~1873년)을 시켜 시각을 바꾸게 한다.
이 여행단에는 '이와쿠라와 이등박문을 비롯한 고급관료 46명,수행원 18명,여성 5명,유학생 43명등 다양하게
꾸려졌다.
평균 나이는 32세였고,6세의 어린이 까지 포함되어 있었다.이들은 1년 7개월 간의 긴 구미여행을 마치고 귀국해
'구미(歐美회람실기'란 제목의 기행문 5 권을 펴내 많은 일본인들에게 일본 이외의 발전된 산업화의 세상을 알리
는데 기여했다.일본의 명치유신 성공도 일본의 단독으로 성공한 것이 아니다.일본도 변화를 싫어하는 귀족들이나
부호들은 '지금 이대로' 란 구호속에 개혁(유신)을 반대 했었다.그러자 러시아의 동아시아 진출과 남하를 저지
하거나 막으려고 했던 영국을 비롯한 구미 자본가들은 방향을 틀었다.즉 일본을 육성함에 있어 귀족들 보다 중하급
무사출신들을 이용한다.신분 이동과 싱승을 노리고 있었던 중하급 무사들과 서구의 자본가들 사이에 서로의 추구
가치가 교환되는 의견일치를 보는 거래와 여정속에 명치유신이란 것이 마침내 탄생한다.
3, 아무튼 이와쿠라 사절단 속에는 1863년에 밀항으로 이미 영국의 런던유학 경험(23살때)을 했었던 '이등박문'이
있었고,같은 영국 유학동지이자 후에 주한국공사를 역임했던 '이노우에 가루오(井上馨)'도 있었다. 모두 명치유신
을 성공으로 이끈자 들이다.또 유신성공의 핵심 공신인 '모리 아리노리(森有社),야마카타 아리토모(山縣有朋;일본
육군의 대부),카쓰라 타로(桂太郞:태프트 카스라 밀약의 당사자),후쿠자와 유키치(1만엔 짜리 도안인물,개혁가)'등
많은 개혁인물들이 구미여행에 참가하고 있었다.
사실 명치유신후 열도에 단일통화(화폐)를 수립한 때가 1881년이고, 일본 중앙은행의 탄생이 1882년 이고 보면,
정치가 아닌 경제적인 일본의 유신성공과 진정한 전국 통일은 명치 유신후 15년이 지나서라고 말할수 있다.일본
에서 이와쿠라 여행단이 돌아온지 10여년 후인 조선에서도 산업선진국인 일본 시찰단 '조선신사유람단' 들이
일본을 찾는다.이때가 고종 18년으로 1881년 음력 4월 10일~7월 2일까지 42일간 일본을 유람한다.요즘으로
말하면 선진지 견학이라고 할수가 있다.그런데 이러한 여행에서 조선의 여행단은 모두 '양반 사대부(귀족)중 남성
64명'으로만 꾸려져 다양한 의견이나 견문을 개진할수가 없었다.대표인물을 들라면 당시의 권력 가문들인'박정양,
홍영식,어윤중'등을 들수가 있다.
4, 일본의 이와쿠라 구미 사절단과는 다르게 당시 한국의 일본여행 신사유람단은 귀국후 불행을 겪는다.이들 중에는
개혁적 실학세력(유길준,홍영식등 개화파)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일본과는 다르게 권력의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에
있었다.당시 조선의 정치나 사회상황은 개혁및 근대화 세력들이 천대를 받았고,기존의 권력 중심부 세력들은 여전히
지금 이대로가 좋다며 개혁을 단행할 맘이 없었다.아주 전혀 없었다.가진것이 이미 많고 풍족한 현실에 만족해 개혁
을 반대하는것은 세계 어디서나 공통의 사항이다.개혁을 하게되면 자신의 몫이 줄어들고 지위가 위태롭다는 것을
동물적 감각으로 체질화된 기득수꼴들은 여전히 기득의 안주만을 찾았다.
지금의 한국 부자들과 재벌들이 자신들만 챙기고 서민 중심의 진보적 개혁에 반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조선이자
한국의 기득보수들은 일본의 여행(견문)을 다녀 왔으면서도 자체의 개혁시동을 걸지 못했다.오히려 빛이 바래고 있는
교조주의적 유교 세력들과 유착하여(유인석,최익현등) '개혁,개방,근대화(산업화)'조차 반대했다.이들은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유교와 그세상만이 바른 학문이고 세상이라고 억지를 쓰며 여전히 '위정척사(衛正斥邪)'를 견지하며
다른 문물과 학문,사상을 배척했었다.그런데 동시대의 일본 명치유신 세력들은 조선의 엘리트들과 다르게 구미 여행을
통해 유럽의 감각을 배우려 했던것이 역사의 조선과 다르다.
5, 이등박문이 이노우에와 밀항을 하여 런던에서 유학을 할 즈음인 23살때 역사 조선의 유생의 거두이자 선생이었던
유인석이란 유학 엘리트가 일상으로 하는 일이란 것은 죽은지 630년 이나 지난 주자(朱子)와,죽은지 170년이 지난
송시열의 초상화(화상)를 그려 봉안해 놓고,초하루(1일) 보름(15일)에 배향하는등 한심한 일들을 했다.따라서 산업화
와 근대화에 대한 세계화의 세상 물정에는 깜깜했던 조선의 엘리트 였던 것이다.변법자강의 주인공 청나라의 강유위
(1858~1927) 조차도 1880년에 서양의 신학문을 배우라고 권장할 정도 였는데,역사 조선의 엘리트(관념주의자들)들
만 변화가 느렸고 기득권들은 추이만 살피며 변화를 게을리 했었다.그래서 타국에 의해 먹혔다.
그런데 기득층들은 조선의 당시에 절대로 필요했던 실학자 (실용주의)들인 '박지원,홍대용,최한기(지동설 주장자)'와
같은 존재들을 철저히 무시하고 배척했다.유교(문과적,관념적)에서 교조적이기 까지했던 조선의 지배층(유교세력)들은
당시 일본이 1853년 미국의 페리호 급습으로 항복한 후에 개항을 했고,15년후 명치유신을 단행했다는 것조차 몰랐다.
더하여 1875년 운양호 사건에 이은 1876년 병자수호조약이 한일간 체결됐다는 것 조차도 몰랐고,이후 1880년대 초
서구 세력들과도 수호통상 조약을 체결했다는 것 조차 무시하거나 몰랐다.그러다 20년 후인 을미(1895년)년에는 양반
들의 기득권에 금이 가는 왕명이 내려지자(단발령) 유생들이 단체로 반란을 일으켜 나라를 혼란 스럽게 했다. 이때도
이들은 철부지 처럼 '위정척사' 만를 외쳤다.
첫댓글 선생님 살아있는 말씀 감사합니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가 같이 있는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글이 권력의 틈바구니에서 다람쥐 쳇바퀴처럼 오늘 내일하면서 살아가는 민초들의 슬픔속에서
비춰주는 한줄기 빛처럼 느껴지는군요.
선생님의 글속에 묻어나오는 치열한 삶의 역사가 제 가슴속에 와닿았습니다.
오늘도 저는 저 나름의 길을 찾고자 부단히 연구중입니다.
역사를 공부하셔서 이렇게 좋은 글을 읽게 해주셔서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 합니다.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그래서 역사는 현재와 과거와의 대화라고 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