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성격이 내성적이고 낯가림을 많이 하는 편이라서 아무나 사귀지 않고 나름대로 판단하여 신실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면 마음을 주고 한 번 마음을 주면 완전히 믿으며 매사를 좋게 보려고 하는 것이 내 장점이자 약점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칠십 평생을 살면서 제대로 산다고 하였지만 잠깐 판단을 잘못한 결과 금전 거래로 인한 인간관계의 실패를 경험한 적이 몇 번 있는데 첫 번째로는 대학 친구로 날이면 날마다 같이 붙어 다니며 서로의 집으로 가서 놀기도 하고 밥도 먹고 식구들과도 너무나 잘 알고 편하게 지내던 친구로 내가 평택의 면소재지 작은 시골 마을에 살 때 우리 집에 와서 며칠을 묵으면서 같이 지내기도 하고 내가 부산 청학동 그 친구 집에 가서 한 달간 신세를 진적도 있어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 후로 그는 외항선을 타고 외국으로 다니며 내가 우표 수집을 하는 것을 알고 각국의 우표를 보내오기도 하고 늘 편지로 안부를 주고받으며 가까이 지내고 내가 결혼하고 부산으로 신혼여행을 가서는 친구를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부부가 같이 만나서 자연농원 지금의 에버랜드로 야외 놀이를 가기도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돈이 필요하다고 하여 얼마를 빌려주었는데 그 뒤로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어지고 지금은 소식도 모르고 지내게 되었지만 돈을 빌려준 것이 조금도 아깝거나 서운한 마음이 없고 친한 친구였으니까 그 정도는 친구의 정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한 경우는 상황이 조금 다르고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괘심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다. 고향에서 천리나 떨어진 낯선 타향 땅 경기도 평택에서 교사로 있을 때 신임교사로 온 분이 고향 사람이라는 것 하나로 너무나 반가워서 가까이 지내게 되었고 그는 바로 대전으로 가게 되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서 급하게 돈이 필요하다며 있는 대로 좀 빌려달라고 하여 월급 중에서 한 달 기본 생활비만 제하고 3만원을 빌려주었다. 1973, 3월경으로 내 월급이 4만원이 채 안 되었는데 지금으로 보면 3백만 원은 족히 되었을 것이다. 그러고는 이런 방구도 없고 돈을 갚을 생각을 안 하여 어느 날 대전으로 찾아가서 돈을 달라고 하였더니 겨우 1만원을 주면서 나머지는 다음에 주겠다는 것이다. 그 후로 같이 근무하던 다른 선생님에게도 비슷한 일이 있었고 그 선생님에게 돈 안 줄까봐 대전까지 받으러 와서 돈 달라 하여 쪽팔렸다며 나를 험담까지 하더라는 것이다. 그 뒤에도 몇 번을 독촉하였지만 결국에는 남은 2만원은 못 받고 말았다. 크게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또 다른 한 경우는 서울의 북쪽 변두리 학교로 와서 2년을 근무했는데 거기서도 마침 고향 사람을 만나서 친하게 지내며 퇴근 후에 그의 집에 가서 밤늦게까지 같이 놀기도 하고 지리산 등산도 같이 하며 잘 지내던 중 내가 서울의 북동쪽 끝에서 남서쪽 끝으로 학교를 옮기게 되었고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와서 학업 준비와 업무에 열심을 다하며 정신없이 지내는 어느 날 전화로 만나자고 하여 중간 지점인 영등포 어느 다방에서 만났더니 급하게 쓸 데가 있다며 있는 대로 돈을 좀 빌려 달라는 것이 아닌가. 나는 말 그대로 믿고 수학여행 갔다 온 후 아이들의 사진 값을 받은 돈이 있어서 호주머니에 있는 돈을 다 챙기니 약 10만 원정도가 되는 것을 몽땅 빌려주었다. 그런데 그 뒤로는 아무 소식이 없어 알아보니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을 두고 술집 여자와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가게 되었고 학교도 무단결근을 하여 부인이 와서 퇴직 처리를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심한 배신감과 고향 사람이라고 믿고 돈까지 빌려준 것이 한심하고 바람피우는데 뒷돈을 대준 꼴이 되었으니 정말로 기분이 찝찝하였다.
세상사는 이치가 서로 속이고 속는 것이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망각에 한동안 사람에 대한 불신이 내 마음을 짓눌러서 불편하였지만 지금은 오랜 된 옛 이야기로 한 편의 추억이라 생각한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친구들을 사귀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나는 사람 친구보다는 색다른 친구들이 많다. 누구나 나이가 들면 나와 마찬가지로 원하든 원하지 않든 친구를 가까이 하게 되어 있는 것이 삶의 이치라는 생각이 든다. 그 중에 가장 가깝고도 친한 친구는 여행이다. 우리나라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이야기를 듣고 보는 재미는 여행의 백미다. 학창시절부터 시작한 여행은 지금도 내 생활의 가장 중요한 요소요 늘 가까이 두고 지내는 편이다. 코로나로 조금 뜸하기는 하지만 그런 틈새를 이용하는 것도 놓치지 않고 즐기고 있으며 앞으로도 다리에 힘이 다하여 걸음을 멈출 때까지 옆에 두고 같이 하리라 다짐하는 바이다.
또 퇴직한 후부터 가깝게 된 친구가 하나 있는데 그가 바로 등산이다. 젊은 시절 시골 학교 근무할 때에 농번기 가정실습으로 3~4일 쉬는 기간을 이용하여 어김없이 배낭을 메고 산으로 가던 추억은 지금도 아름다운 기억으로 퇴직 후의 등산에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퇴직교사들이 모임을 구성하여 매주 월요일은 정기산행으로 서울 근교의 산들을 다니고 분기별로 전국의 이름난 산을 찾아 1박2일이나 2박3일간 원정 산행을 하며 또 주중에 한 번은 혼자 가까운 집 근처 산으로 다니면서 여가를 활용하며 건강도 챙기는 것이 지금의 가장 중요한 친구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글 친구다. 옛날 안중근은 하루만 책을 읽지 않아도 입안에 녹이 슨다고 할 만큼 책을 통해서 머리를 채우며 마음의 양식을 쌓아가는 것이 사람이 하는 일 중에 가장 의미 있고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건강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 하루에 백자의 글을 쓰고 천 자의 글을 읽으라고 권하지만 그런 규격화된 것보다 자유롭게 읽고 쓰는 것이 편하고 좋다. 나는 매일 같이 꼭 읽는 것이 성경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를 하고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성경을 읽고 신문을 본다. 그리고 시간이 되는 대로 책을 읽기도 하고 이메일을 열어보고 인터넷의 검색을 통해서 좋은 글들을 챙겨 보는 편이다. 그리고 글쓰기는 잘 쓰고 못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좋은 내용이나 나름대로 영감이 떠오르면 시를 쓰기도 하고 여행을 하고 나면 기행문을 반드시 쓰는 습관을 가지고 지금도 어김없이 실천하고 있으며 중요한 것은 빼놓지 않고 늘 기록을 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덕분에 자서전도 간행하게 되었고 보잘 것 없지만 시집도 내게 되어 나름대로 보람을 느끼고 있다.
다른 친구는 내 몸에 지니고 사는 것들이다.
내 나이도 어언 산수(傘壽)를 바라보게 되었으니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조금씩 망가지고 탈이 나서 때로는 불편함을 느끼기도 하고 심하면 수술을 하거나 약물치료를 통해서 달래가면서 살고 있다. 몇 달 전에는 오랜 전부터 약을 먹으며 다스렸지만 조금씩 나빠져서 차라리 수술을 하고 편하게 살자하는 마음으로 전립선 수술을 하였고, 수년 전에는 치루수술을 하고서 며칠을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고생을 한 적이 있으며 두피도 말썽이다. 가렵고 비듬이 덕지덕지 붙어서 갖가지 방법으로 치료를 해봤지만 제대로 치료가 되지 않아서 임시방편으로 약을 바르는데 지금은 나이를 먹으니까 질병도 활동이 약화되는 것인지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 눈은 학창시절부터 좋지 않아서 양쪽 눈 수술을 하였고 귀는 미세하지만 이명이 들려서 병원에 가서 의사와 상담을 해보았더니 딱히 치료방법이 없고 나빠지면 보청기를 끼라고 하는 것이다. 아직은 불편하지는 않지만 어젠가는 보청기를 낄 때가 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먹고 있다. 그리고 젊은 시절 군대를 가려고 신체검사를 하였더니 폐가 나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 이유로 군대는 방위를 받게 되었으며 지금은 완쾌가 되었지만 한 때는 약을 한주먹씩 먹었던 적이 있었다. 허리는 간간이 불편하여 한방 치료를 하면서 살고 있고 발톱도 문제가 있어서 정형외과에 갔더니 내성발톱이라는 것이다. 오른쪽 엄지발톱이 오그라지면서 살을 파고드니까 아파서 걸음을 걷는데 불편하여 수술을 받았는데 2~3년을 지나니 도로 원래 상태로 돌아와서 수술도 아무 소용이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한 가지 하는 방법이 아침마다 잠에서 깨어 일어나기 전에 누워서 양발을 마주치며 발치기를 한 덕분인지 지금은 전혀 아프지도 않고 상태가 더 악화되지 않으며 그런대로 지낼 만하여 그렇게 지내고 있다. 또 피부도 문제가 많은 것 같다. 겨울이면 각질이 많이 떨어지고 얼굴에는 마른버짐이 계속 생겨나는가 하면 몸에는 군데군데 검은 점이 생기는데 커지면 암이 될 수 있다고 하여 검사를 한 다음 제거 수술을 하였는데 몇 년이 지나니까 다른 놈들이 생겨서 자라고 있으니 크게 불편하지는 않지만 신경은 쓰지 않을 수가 없다.
입안이 허는 것도 그렇다. 다친 것도 아니고 깨물지도 않았는데 공연히 입안이 헐고 짜거나 매운 것을 먹으면 따가워서 오라메디 연고를 항상 비치해 놓고 수시로 바르며 달래고 있다.
고혈압은 수십 년 된 나와 가장 오랜 친구로 2000년 봄에 갑자기 뇌경색이 와서 병원 응급실에 가서 응급처치를 하고 8일간 입원치료를 한 후로 조기치료 덕분에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지내게 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생각으로 감사하며 살고 있다.
하루 생활 중에 세끼 밥 먹는 것 외에 챙겨 먹는 약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침 식사 후에 제일 먼저 혈압약을 먹고 면력력을 높여준다는 산양유에, 시차를 두고 눈에 좋다는 지아잔틴과 관절에 좋다는 글로코사민, 생유산균, 저분자콜라겐에 오메가3까지 몇 가지 약을 먹다보면 하루가 간다. 약과 더불어 하루를 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젊은이는 삶을 바라보고 늙은이는 죽음을 바라본다는 말이 있고 스페인에는 목숨이 길면 재앙도 길다는 속담이 있다. 사람들은 얼마나 고결하게 사느냐 보다 얼마나 오래 사느냐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고결하게 사는 것은 사람의 능력 안에 있지만 죽음은 사람의 능력밖에 있다고 했다(신*일). 비록 늙은이가 되었지만 내 능력 안에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해본다.
골골 팔심이라고 젊은 시절부터 사귄 내 몸의 친구들 가만가만 달래고 얼르며 친하게 살아야 하리라 다짐해본다.
‘有朋自遠方來하니 不易樂乎’라 멀리서 친구가 찾아오니 반갑지 아니한가? 모든 친구가 반가운 것은 아니지만 버릴 수 없고 보낼 수 없다면 마음을 열고 반갑게 맞으며 친하게 지내려는 것이 내 솔직한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