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덕사 큰 절 옆에 늙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습니다. 나무 그늘이 짙어 사람들은 그 아래에서 땀을 식히기도 하고, 소낙비가 내릴 땐 잠시 동안 비를 패했다가 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늦은 가을이라 황금 빛깔의 노란 잎들이 떨어져 있습니다. 동쪽으로 벋은 가지 하나에는 잎들이 죄다 떨어지고 한 잎만이 달려 있었습니다.
잎은 어머니인 둥치를 보고 말했습니다.
"엄마, 지금까지 입고 있었던 파란 옷만 해도 고왔는데, 왜 또 우리들에게 이런 고운 노란 옷을 입혀 주지?"
"응, 이런 가을이 되면 너희들과 이별을 해야 하니까 어디를 가도 귀염을 받을 수 있도록 새로 지어 입힌 거란다."
"그렇지만 난 엄마와 떨어지는 거 싫어! 왜 우리가 엄마를 괴룁힌 일이라도 있어서 그래?"
"괴롭힌 게 뭐야? 너희들은 여름내 내가 뜨거운 햇볕에 그을릴까 봐 시원하게 온뭄을 가려 준 효자들인 걸."
"그런 걸 엄마는 왜 우리들을 왜 보내려고 하는 거지?"
"지금부턴 날씨가 몹시 추워지는 거야. 찬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고, 얼음이 얼고 하면 어른인 나도 참아내기가 어려운데 어떻게 어린 너희들을 차마 떨게 할 수가 있겠니? 그래서 너희들을 잠시 편안한 곳에서 쉬고 있게 했다가 내년 봄에 다시 만나게 하려는 거란다."
"편안한 곳이라고? 저렇게 바람이 날려서 아무 데로나 굴러다니게 되는 걸!"
"걱정할 거 없다. 어디로 가서 무엇이 뒤건 너희들의 마음은 다 엄마의 마음 속에 와 있는 거니까. 한겨울 동안 긴 꿈 속에서 즐겁게 쉰다고 새악만 하면 그만이야."
그 말을 듣더니 잎은 갑작스레 눈을 크게 뜨면서 엄마를 쳐다 봤습니다.
"엄마, 엄마, 참 꿈이라니까 생각나는 게 있어. 지난 봄 초파일 불사 때 절에 같이 왔다가 저희 엄마를 잃고, 우리 이 나무 아래에서 저물 때까지 울다 간 아이 있잖았어? 난 그 아이가 어떻게 됐는지 거정이 돼서 몇 번이나 꿈에서 봤었단 말이야."
"응, 그래그래, 나이가 대여섯 살쯤 되고, 눈이 똥글똥글 귀엽게 생긴 아이였지. 사라들이 나중에 횃불을 켜 들고 와서 '귀용아, 귀용아.' 하고 찾고 있었으니까 어디에서건 만나게 되었겠지만."
그러고 있을 때에 저마다 화판을 어깨에 걸친 유치원 아이들 한 떼가 은행나무를 향해 올라오고 있는 것을 보고 이번엔 은행나무 둥치가 눈을 크게 뜨고 말했습니다.
"얘얘, 저것 봐!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던 그 아이가 저 속에 끼어 있지 뭐냐? 아이, 귀여워. 봄에 봤을 때보다 몰라볼 만큼 커 있구나. 글쎄?"
은행나무 밑에 와서 자리를 정한 유치원 아이들은 황금색으로 노랗게 단풍이 들어 있는 은행나무를 쳐다보아 가면서 열심히들 스케치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너무나도 반가워서 오래오래 그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던 은행잎은 어머니를 쳐다보며 동의를 구했습니다.
"엄마, 내가 저 아이를 좋아하는 만큼 저 아이도 반드시 나를 좋아할 거야."
그러면서 은행잎이 뚝 떨어져 그 아이의 스케치북 위에 살푼 내려앉자 그 아이는
"아이, 예쁘게 생긴 잎이!"
하곤 그 잎을 스케치북 사이에 소중스레 끼워 넣었습니다.
다음 날 유치원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의 그림 검사를 할 때 심술쟁이 짝 형보가 스케치북 사이에서 떨어진 은행잎을 집어들고 교실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귀용이는 형보를 부르며 뒤따라 달려나갔습니다.
"안 돼. 안 돼. 내 은행잎 달란 말이야!"
그러나 형보는 돌려주지 않고, 은행잎을 높이 쳐들어 보이며 약을 올렸습니다.
"용용 죽겠지? 용용 죽겠지?"
운동장을 요리조리 돌면서 빼앗으랴, 안 빼앗기랴, 스앙이를 하는 동안에 난데없이 강한 바람이 휙 불어와 그만 그 은행잎을 빼앗아 멀리 달아나 버렸습니다.
빨리 가다가 천천히 가다가 하고 있던 은행잎은 이왕 이렇게 날고 있을 양이면 어머니가 혼자 남아 있는 성덕사로나 가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은행잎은 혼자서 속으로 노래를 지어 불렀습니다.
바람아 바람아 성덕사 가자
바람아 바람아 성덕사 가자
종 소리 덩덩덩 울리는 데서
울 엄마 날 찾아 울고 있다.
그랬더니 바람은 정말 춤을 추듯이 북으로 북으로 달려가다 은행잎을 성덕사 옆 은행나무의 둥치 구멍 팬 안으로 떨어뜨려 넣어 주고 가 버렸습니다. 은행잎은 몽그작 몽그작 팬 안 구들목에 자리잡아 앉으면서 혼자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아, 따뜻해! 아아, 따뜻해! 여기 엄마의 품 속이라면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마음 편하게 푸욱 쉬고 있을 수가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