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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2800여㎞ 11년간 걸으며 교우촌 찾아다닌 참 목자
▲ 가경자 최양업 신부는 매년 2800여km를 걸으며 교우촌을 방문, 성사를 집전했다. 그래서 최양업 신부를 ‘땀의 순교자’라 부른다. 사진은 최 신부의 사목 중심지였던 청주교구 배티성지 초막에 세워진 최양업 신부상
▲ 11년 동안 국내에서 사목에 헌신한 최양업 신부는 과로와 장티푸스가 겹쳐 1861년 6월 15일 선종했다. 사진은 원주교구 제천 배론성지에 조성돼 있는 가경자 최양업 신부 무덤.
시복 운동 20년 만의 결실이다.
한국 교회가 최양업(토마스, 1821~1861) 신부의 시복 시성 추진을 본격화한 것은 1996년 10월이다. 주교회의가 그해 가을 정기총회에서 최 신부의 시복 추진을 공식 승인한 이후 20년 4개월 만인 지난 4월 26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최양업 신부를 ‘가경자’로 선포했다. 이어 주교회의 시복시성특별위원회는 15일 가경자 최양업 신부 기적 심사 법정을 종료하고 교황청 시성성에 그 자료를 제출했다.
이를 계기로 평화신문은 가경자 최양업 신부의 시복을 기원하며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 연재를 시작한다. 가경자 최양업 신부가 남긴 편지들을 토대로 국내 사목 발자취를 더듬어 가며 최 신부의 삶과 영성을 살펴보는 연재 기획이다. 그 첫 번째로 이번 호에는 최 신부의 생애를 개략적으로 알아본다.
가경자 최양업 신부는 1821년 3월 1일 충청도 청양 다락골에서 성 최경환(프란치스코)와 복녀 이성례(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최양업은 이곳에서 만 6살 때까지 살았다. 1827년 무렵, 가족은 서울 낙동으로, 이후 강원 김성, 경기 부평, 안양 수리산으로 박해를 피해 이주를 거듭하면서 신앙을 지켰다.
한국인 첫 신학생
1836년 2월 6일 경기 부평에 살던 15살 최양업은 모방 신부로부터 한국인 첫 신학생으로 선발됐다. 뒤를 이어 신학생으로 선발된 최방제, 김대건과 함께 그해 12월 3일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다. 정하상(바오로), 조신철(가롤로), 이광렬(요한)이 국경 넘어 변문까지 동행했다. 이후 중국 서만자 출신으로 앵베르 주교와 샤스탕 신부의 조선 입국 길을 안내했던 서만자와 마카오 사이의 파발꾼 투안 마리아노와 첸 요아킴이 세 신학생을 데리고 마카오까지 갔다.
1837년 6월 7일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 도착해 신학 공부를 시작한 세 신학생에 대한 신부들의 평가는 좋았다. 교장 칼르리 신부는 “3명의 조선 소년들은 훌륭한 사제로서 바람직스러운 덕목이나 신심, 겸손, 면학심, 스승에 대한 존경 등 모든 면에서 완전하다”고 평했다.
시련은 곧 닥쳤다. 그해 11월 27일 최방제가 열병으로 숨졌다. 또 마카오 민란으로 1839년 4월에서 11월까지 최양업과 김대건은 교수 신부들과 함께 필리핀 마닐라 근교 롤롬보이로 피신했다. 이 시기 조선에서는 기해박해(1839년)로 아버지 최경환이 서른다섯의 나이로 순교했다. 또 이듬해인 1840년 1월 31일에는 어머니 이성례마저 순교했다. 이 사실도 모른 채 최양업은 피난지 롤롬보이에서 아버지에게 그리움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조선 입국로 개척가
김대건이 1842년 2월 마카오를 떠나고, 최양업은 1842년 7월 파리외방전교회 조선 선교사와 함께 마카오를 떠나 요동반도 태장하 해안 백가점을 거쳐 11월 소팔가자에 이른다.
최양업은 이곳에서 김대건과 함께 신학 교육을 받고 1844년 12월 소팔가자에서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1808~1853)에게 부제품을 받았다. 이후 김대건은 조선 입국에 성공한 후 배를 타고 상해로 건너와 페레올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고 주교와 함께 조선 재입국에 성공했다.
반면, 최양업은 소팔가자에 머무르면서 두만강과 압록강을 통한 조선 입국 루트를 개척했다. 그러다 1846년 겨울 그해 병오박해로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소식을 듣게 된다.
최 부제는 1847년 초 홍콩 극동대표부로 돌아가 페레올 주교가 프랑스어로 쓴 「기해ㆍ병오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해 파리로 보냈다. 이 문서에 기록된 기해년(1839년)· 병오년(1846년) 순교자 82위 중 79위가 시성됐다.
그해 7월 최양업은 매스트르 신부와 프랑스 군함을 타고 4번째 조선 입국을 시도하다 서해 고군산도 인근에서 난파하는 바람에 상해로 돌아간다. 최양업은 1849년 4월 15일 상해에서 강남대목구장 마레스카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두 번째 한국인 사제였고, 그의 나이 28살이었다.
한국인 첫 해외 선교사
사제 수품 후 그해 5월 최양업 신부는 매스트르 신부와 서해 뱃길로 다섯 번째 조선 입국을 시도했으나 또 실패하고 요동지방 양관과 차쿠에서 베르노 신부를 보좌해 중국 신자들을 사목했다. 이로써 최 신부는 한국인 첫 해외 선교사로, 차쿠는 한국인 첫 해외 선교지로 기록된다. 최 신부가 차쿠에서 사목한 기간은 7개월가량으로 1849년 5월 말에서 12월 말까지다.
길 위의 사제
최 신부는 1849년 12월 압록강을 넘어 13년 만에 귀국한다. 1850년 1월 서울에 도착한 최양업 신부는 다블뤼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집전하는 것으로 조선에서의 첫 성무를 시작했다. 이후 최 신부는 잠시도 쉬지 못한 채 교우촌 순방에 들어갔다.
페레올 주교는 서한에서 “최양업 신부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제가 무거운 짐을 다 짊어져야 했을텐데, 최 신부의 입국으로 하느님께서 저에게 얼마나 큰 도움을 주셨는지 잘 짐작하실 것”이라고 썼다.
최 신부가 1년 중 순방해야 할 교우촌은 전체 교우촌의 약 70%에 해당하는 120여 곳으로 해마다 2800여 ㎞를 걸어야 했다.
우리말 교리서와 기도서 펴내다
교우촌을 다니던 최 신부는 우리말 교리서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의 여덟 번째 서한에서 “쉬운 한글 덕분으로 세련되지 못한 산골에서도 신자들이 빨리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구원을 위한 훈계를 받을 수 있다”며 주요 교리와 기도문을 가사체로 노래한 천주가사를 편찬한다. 그는 1859년 여름 다블뤼 주교를 도와 한국 교회 최초의 공식 교리서인 한문본 「성교요리문답」과 한문본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를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완성했다. 한글본 「성교요리문답」은 1934년에 「천주교 요리 문답」이 나오기까지 공식 교리서로 쓰였다. 한글본 「천주성교공과」는 1972년 「가톨릭 기도서」가 출간되기까지 110년간 사용됐다.
땀의 순교자
최 신부는 갈수록 쇠약해졌다. 12년간 해마다 7000여리를 걸어 교우촌을 순방한 그는 지쳤다. 1861년 6월 15일, 최 신부는 과로와 장티푸스가 겹쳐 경북 문경 인근에서 쓰러지고 만다. 그는 배론에서 급히 달려온 푸르티에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고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되뇌다 선종했다. 그의 나이 만 40살이었다. 조선에 들어와 사목한 지 11년 6개월 만이었다. 최 신부의 유해는 선종지에 가매장됐다가 훗날 배론에 안장됐다.
최 신부의 죽음은 ‘조선 교회 전체의 초상’이었다. 베르뇌 주교는 1861년 9월 4일자 서한에서 “(최 신부는) 12년간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감화하고 성공적으로 영혼 구원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안타까워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증조부 때부터 최양업 신부 일가가 살아온 신앙 못자리
▲ 청양 다락골 성지에는 최양업 신부 생가터인 새터와 병인박해 순교자 37위의 줄무덤이 있다. 사진은 다락골 성지 성당 전경.
▲ 최양업 신부 생가터. 커다란 감나무가 켜켜이 이어온 최양업 신부 일가의 신앙 내력을 증언하고 있다.
칠갑산 굽잇길을 켜켜이 돌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 들어서면 다락골이라는 고즈넉한 시골 마을이 나온다. 최양업 신부 일가가 일군 교우촌이다. 다락골에는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1821~1861) 신부의 생가터인 ‘새터’와 150년 전 병인박해 때 홍주 감영이나 공주 황새바위에서 순교한 무명 순교자들이 묻힌 ‘줄무덤’이 성지로 조성돼 있다.
홍주 감영(지금의 홍성군청)에서 20여㎞ 거리에 있는 이 마을은 해발 791m의 오서산에 둘러싸여 형세가 마치 누각의 기둥 같아 ‘다락골’이라 불렀다. 박해자들의 근거지인 감영으로부터 걸어서 반나절 길에 있어 근황 파악에 쉽고, 앞은 틔어 있어 감시 또한 용이하며, 주위가 험한 산이어서 피신하기 좋아 교우촌으로서는 천혜의 입지 조건을 가진 곳이다.
글·사진=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최양업 신부 집안의 신앙 내력은 최 신부의 조카 최상종(원선시오)이 쓴 「최양업 신부 이력서」와 「최우정 바실리오 이력서」, 최 신부의 넷째 제수 송아가타가 구술한 「송아가타 이력서」를 통해 비교적 상세히 알 수 있다.
최양업 신부는 경주 최씨 최치원(崔致遠)의 41대손이며 조선 시대 평정공신(平定功臣)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최확(崔確)의 11대손이다. 그의 부모는 성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과 복녀 이성례(李聖禮, 마리아)이다. 둘은 장남인 양업과 의정(義鼎, 야고보), 선정(善鼎, 안드레아), 우정(禹鼎, 바실리오), 신정(信鼎, 델레신포로), 2살 때 옥사한 막내 스테파노 등 6명의 자녀를 두었다.
최양업 신부 일가가 서울에서 다락골로 이주해 ‘새터’를 이룬 때는 1791년 진산사건 이후이다. 최 신부 집안에 처음으로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인 이는 증조부 최한일(崔漢馹)이다. 그는 동생 최한기(崔漢驥)와 함께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에게 정조 재위 11년 되던 해인 1787년 서울 본가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최한일은 경주 이씨와 혼인해 외아들 인주(仁柱)를 둔 채 사망했다. 최 신부의 증조모인 경주 이씨는 1791년 박해가 일자 화를 피하려 12살 된 아들 인주를 앞세워 충청도 홍주 누곡(樓谷)이라 불리던 청양 다락골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최한기 집안은 강원도 홍천으로 피신했다가 여러 순교자를 배출한 후 지금의 풍수원에 자리했다.
이같은 최상종의 증언과 달리 최양업 신부는 조부 최인주가 1791년 박해 때 체포돼 많은 고초를 받은 후 석방된 후 다락골로 이주했다고 한다(최양업 신부의 8번째 서한 중에서).
경주 최씨 집성촌
다락골에는 경주 최씨들이 오래전부터 대를 이어 살고 있었다. 경주 최씨 화숙공파의 족보와 묘를 참조하면 적어도 1600년대 초반부터 이곳에 최씨들이 살고 있었다. 경주 최씨 집성촌에 정착한 최인주는 다락골에서 농사 품팔이를 하고, 경주 이씨는 가을걷이 품앗이와 바느질 품을 팔아 생활했다. 이렇게 생활한지 1년도 안 돼 둘은 초가를 마련하고 그나마 안정적으로 정착하게 된다. “가세가 날로 늘어 불과 수십 년 내에 몇백 석을 추수하므로 남들이 말하기를 천석 추수는 하리라 했다”(「최바실리오 이력서」 중에서).
그렇게 4~5년이 지난 후 최인주는 어머니 이씨 부인과 함께 다락골에서 700여m 떨어진 지금의 새터로 옮겨 주인 없는 버려진 땅을 개간하며 살림살이를 늘렸다. 차츰 이웃이 늘어 교우촌을 이루고 이름도 ‘새터’라 불렀다고 한다.
최인주는 이곳에서 이존창 집안의 딸인 경주 이씨와 혼인해 영설(榮說), 영겸(榮謙), 영눌(榮訥) 3형제와 네 딸을 낳았다. 그중 막내 영눌이 최 신부의 아버지인 최경환 성인이다.
최경환은 15살 되던 해에 새터에서 이성례와 혼인했다. 이성례는 이존창의 사촌 누이인 이 멜라니아의 조카 딸이다. 이 멜라니아는 김대건 신부의 조모다. 따라서 최양업과 김대건은 진외 6촌 간이 된다.
결혼 3일 후 최경환은 인사차 처가에 갔는데 처가 식구들이 “구교우 집안사람이니 교리를 듣자”며 청했다. 사실 최경환은 교리에 밝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즉시 며칠 밤을 새워 「칠극」을 다 외우는 등 교리를 익히는 데 전념했다.
“(부친) 프란치스코는 천성적으로 진정한 신앙의 실천자였고, 정직하고 순박한 성품을 타고났습니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세속의 오락을 가벼이 여기고 오로지 천주교 교리를 듣거나 읽는 것만을 즐거워하였습니다”(최양업 신부가 1851년 10월 15일 절골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 중에서).
최양업도 이곳 다락골 새터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최경환은 나이가 들면서 가족의 신앙심이 냉담해지는 것을 보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래서 여러 번 부모들과 형제들에게 고향과 재물을 버리고 마을을 떠나서 영혼을 구원하기 편한 곳으로 이사하자고 제안했다. 가족들이 그의 말을 듣지 않자 최경환은 긴 편지를 양업에게 주면서 자기가 떠난 후 엿새 되는 날에 어른들에게 전해 주라고 일렀다. 그리고 교리에 더 밝은 신자들을 찾아 집을 나갔다.
서울로 이사했다 강원도 등 거쳐 과천에 정착
최경환이 사라지자 집안에 난리가 났다. 가족들이 당황해 하자 양업은 아버지가 준 편지를 내보였다. 삼촌들이 그 편지를 읽고 찾아 나서 그를 데려왔다. 그러고 나서 가족 전체가 만장일치로 합의해 고향과 친척, 재산을 모두 버리고, 25명이나 되는 전 가족이 서울 낙동(지금의 회현동)으로 이사했다. 최경환 일가는 다시 이곳을 떠나 강원도를 거쳐 부평으로 이주한다.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선발된 것이 이곳 부평에서 살 때였다. 이후 최경환은 다시 과천 수리산 뒤뜸이(현 경기 안양시 안양3동)로 옮겨 정착하게 된다.
다락골 새터는
17세기 초반부터 360여 년간 경주 최씨네가 산 집성촌이던 청양 다락골은 박해를 피해 서울에서 이주해온 최양업 신부 일가가 증조모, 조부모, 부모, 최 신부 형제까지 4대에 걸쳐 새터를 이루고 살던 곳이다.
최양업 신부 일가가 이룬 이 새터는 교우촌으로 성장했다. 1838년 기해박해 때는 모방ㆍ샤스탕 신부가 이곳에서 피신해 있다가 앵베르 주교의 권고로 자수했다. 또 다락골 출신의 최해성(요한)과 최대종(요셉)도 두 신부와 같은 시기에 체포돼 순교했다. 병인박해 때 관원들이 이 마을을 불사른 후 교우촌 기능이 쇠락해졌다.
하지만 다락골 새터는 최양업 신부 일가의 신앙의 못자리로 성인과 복녀, 가경자 각 1위를 배출한 성지로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더 나은 신앙생활 위해 서울로 이주
▲ (붉은 점선 안 부분) 제 조목대로 물은 즉 답왈 : 최 방지거는 죄인의 부친이라. 그 사정을 자세히 아옵니다. 태생은 홍주 다래골이요. 어느 때 문교한지 잊었으나 홍주 살 때부터 수계하고 이 마리아와 혼인한 지 수삼 년 후 서울 공덕리로 이사하기는 재물도 있고 외인 친척이 번다하여 수계함에 조당됨이 많아 사주구령하기를 위함이요. 그 후에 강원도 김성 땅에서도 살고 부평으로 이사하였다가 외인을 피하려고 과천 수리산으로 죄인 열두 살 되던 해에 들어갔는지라. 「기해ㆍ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 회차 최 베드로 증언 중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 성 최경환(프란치스코, 1805~1839)은 교리를 배우고 더 나은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고향을 버리고 25명이나 되는 가족 모두를 데리고 서울로 이사한다.
그의 둘째 아들 최의정(야고보)은 182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로 이사한 지 3년이 지나 신자임이 탄로 나 산속으로 피신했다’는 최양업 신부의 서한(1851년 10월 15일자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과 「기해일기」 내용을 정리하면, 최 신부 일가가 청양 다락골 새터에서 서울로 이주한 때는 대략 1824년에서 1827년 사이였다. 최 신부가 1821년생이니 만 3~6세 때이다.
공덕리, 벙거지골, 난동 세 가지 다른 증언
최 신부 일가가 서울에 터 한 곳은 어디일까. 크게 3가지 다른 증언이 나오고 있다. 먼저 「기해ㆍ병오 순교자 시복 재판록」(1883년 3월부터 1901년 5월까지 105회차에 걸쳐 열렸던 조선대목구 시복 재판 기록)에는 ‘공덕리’ ‘벙거지골’에 최 신부 일가가 살았다고 한다. 또 청주교구 배티성지 양업교회사연구소가 펴낸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에선 고향에서 ‘서울 낙동’으로 이주했다고 한다(2009년 초판 1쇄, 104쪽 주16).
시복 재판에서 최경환의 아들이라고 밝힌 최 베드로(최 신부의 형제 중 베드로는 없다. 학자들은 이 증언자가 둘째 의정으로 그가 야고보와 베드로 2개의 세례명을 사용했을 것이라고 한다. 당시 병인박해 순교자 이성국은 베드로와 필립보로, 김성화는 요한 또는 야고보로 불렸다)는 “문밖에 위치한 공덕리(현 서울 공덕동)에 살았다”고 했다.
또 1834년부터 조선 교회 밀사로 북경을 왕래하며 1836년 1월에 정하상(바오로), 조신철(가롤로), 이광렬(요한)과 함께 변문에서 모방 신부를 입국시켰던 김 프란치스코도 “최(경환) 프란치스코가 고향을 떠나 서울로 와서 문밖에 큰 집 하나를 사 살다가 위험이 있어 집을 버리고 시골로 여러 곳에 이사했다”고 시복 재판에서 밝혀 최 베드로의 증언을 뒷받침해 줬다.
두 사람의 증언과 달리 현석문(가롤로)의 대자로 부평에서 최경환과 3년간 같이 산 이 베드로는 “최 프란치스코가 서울 벙거지골(현 서울 종로3가 일대) 살 때 앞집 포교가 잡으려 해 세간을 버리고 도주해 시골로 피하니 가산이 점점 없어졌다”고 했다.
배티성지 양업교회사연구소는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에서 “최경환과 형제들 가족은 1827년경 고향인 홍주 다래골을 떠나 서울 낙동(현 중구 회현동 인근에 있던 마을)으로 이주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 낙동은 기해ㆍ병오 순교자 시복 재판 기록에도 언급된 ‘난동’(蘭洞, 현 서울 회현동 2가)을 잘못 기록한 게 아닌가 여겨진다.
최 신부 일가가 서울로 이주할 당시 공덕리와 남문 밖 마포, 서강 일대, 경기 감영 앞 등 서울 서부 지역에 신자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기해일기」와 「기해ㆍ병오 순교자 시복 재판록」을 통해 서울 신자들의 거주 지역 분포를 연구한 방상근(한국교회사연구소 책임연구원) 박사는 “당시 신자들은 도성 밖에 더 많이 거주했으며, 서부 지역 거주 비율이 월등히 높았다”고 한다. 그는 “19세기 중반 서울 교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전체 신자의 3분의 2가 도성밖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이라며 “이는 박해를 겪는 과정에서 도성 안보다는 밖에서의 전교 활동이 좀더 자유로웠던 상황도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된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시복 재판록과 19세기 전반기 서울 지역 신자 거주 지역 기반 연구 자료를 토대로 종합해 볼 때 최 베드로(야고보)의 증언처럼 ‘도성 밖 공덕리’에 최양업 일가가 터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최경환 성인 주도해 가족 모두가 서울로 이주한 목적이 교리를 익히고 더 나은 신앙생활을 살기 위함이었음을 살피면 교회 지도자들을 찾아 공덕리와 벙거지골, 난동을 옮겨 다녔을 수도 있다.
▲ 오늘날 벙거짓골 일대로 창덕궁 돈화문을 중심으로 길 양편으로 귀금속, 음식, 국악기점 들이 상가를 이루고 있다. 리길재 기자
▲ 최양업 신부 일가는 서울로 이주해와 당시 교우들이 많이 살던 도성 밖 공덕리에 터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1900년께 촬영한 서울 서소문 밖의 모습. 평화신문 자료 사진
박해 후 조선 교회 ‘재건의 중심지’
최 신부 일가가 서울로 이주할 당시 조선 교회는 1801년 신유박해로 무너진 기초를 다시 세우던 시기였다. 박해를 피해 전국 각지로 흩어졌던 교우들은 연락망을 구축해 교회 조직을 추슬렀다. 주문모 신부와 평신도 지도자들의 순교 후 성사생활과 교리교육을 위해 무엇보다 사제가 절실하다고 판단한 정하상(바오로), 유진길(아우구스티노), 현석문(가롤로) 등 교회 지도자들은 성직자 영입 운동을 추진했다. 최양업 일가는 조선 교회 재건의 중심지였던 서울 남대문과 서소문을 잇는 서부 지역에 터하며 뜨겁게 신앙생활을 했다.
“서울로 와서 최(경환)프란치스코는 열심함으로 인해 한동네 살던 교우 어린아이까지 데리고 10여 명이 같이 오며 강론하고 위로하니 포교들도 즐거워하여 우두커니 서서 강론 듣기를 간청했다”(「기해ㆍ병오 순교자 시복 재판록」 97회차 이 베드로 증언 중에서).
최양업 신부 일가는 서울에서 3년 또는 수년간 이토록 뜨겁게 신앙생활을 하며 살다 다시 박해를 피해 300여 명의 신자가 교우촌을 이루며 사는 강원도 김성(현 강원도 김화읍, 일명 금성)으로 이주했다. 이때가 1827년에서 1830년 사이이다.
“서울을 떠난 최 신부 일가는 이 산골 저 산골로 이사 다니면서 손으로 가시덤불과 자갈밭을 개간해 연명했습니다. 그들은 과거에는 부자였으나 그리스도를 위해 자진해 이러한 궁핍과 재난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모범을 더욱 철저하게 따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유일한 희망으로 삼고 만족해하며 살았습니다”(최양업 신부가 1851년 10월 15일자로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 중에서).
최경환(프란치스코, 1805~1839) 성인의 둘째 아들이며, 가경자 최양업 신부의 바로 아랫동생인 최의정(야고보)은 「기해ㆍ병오 순교자 시복 재판록」 증언(101회차)에서 서울 도성 밖 공덕리 일대에 3년여 살다가 박해를 피해 신자 300여 명이 교우촌을 이루며 사는 강원도 김성(현 김화읍)으로 이주했다고 밝혔다.
최양업 신부도 “집에 신자들이 너무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에 3년이 지나자 이웃 사람들한테 신자 집이라는 것이 탄로 나서 관가에 붙잡혀 갈 위기에 처해 산속으로 피신했다”고 한다(1851년 10월 15일 절골에서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1827년에서 1830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최양업 가족이 김성에서 얼마간 살았고, 언제 부평으로 이주했는지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최양업이 부평에서 조선 교회의 첫 신학생으로 선발돼 1836년 2월 6일 서울 후동(현 주교동)의 모방 신부 댁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적어도 1836년 초 이전에 그 가족이 이곳에 터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최양업 가족의 강원도살이는 무척 고달팠다. 부평에서 최양업 가족과 3년을 같이 살았던 이 베드로는 “앞집 포교가 잡으려 해 세간을 다 버리고 도주해 시골로 피하니 가산이 점점 다 없어졌다”고 했다(「기해ㆍ병오 순교자 시복 재판록」 97회차 증언에서).
궁핍과 재난 받아들어
최양업 신부는 이 시기를 “가족들은 손으로 가시덤불과 자갈밭을 개간해 연명했다. 과거에는 부자였으나 그리스도를 위해 자진해 이러한 궁핍과 재난을 받아들였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모범을 더욱 철저하게 따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유일한 희망으로 삼고 만족해 하며 살았다”고 회상했다(같은 편지에서).
고단한 살림살이에도 아버지 최경환은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그는 한문 교육을 별로 받은 바 없지만 자주 묵상하고 신심 서적을 읽어 교리에 해박했다. 그는 이웃에게 천주교를 알리는 데 열정적이었고, 박학한 신자들이나 유식한 사람들까지 그의 강론을 들으려 모여와 설복돼 회심했다.
최양업 가족이 부평으로 이주한 이유는 아마도 고향에서 서울로 이사했을 때처럼 더 나은 교리 공부와 신앙생활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20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교회 사학계에선 “최양업이 만 11세 되던 1832년경 과천 수리산 뒤뜸이에 거주하게 돼 이곳에서 1836년 초에 신학생으로 추천됐다”는 것이 정설이었다(한국교회사연구소 「교회사 연구」제14집, 24쪽, 1999년 참조). 이 자료를 기초할 때 최양업 가족이 김성에서 부평으로 이주한 때는 1832년에서 1836년 초 사이로 추정할 수 있다.
조선 시대 부평도호부는 오늘날 행정구역으로 정리하면 김포시 하성면ㆍ통진읍ㆍ대곶면, 구 김포읍, 서울시 양천구ㆍ영등포구ㆍ금천구 일대이다. 이 지역엔 1810년 전후로 이미 교우촌이 있었다. “어려서 모친을 여의고 부친 및 형제들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했다”는 민극가(스테파노, 1787~1840) 성인의 증언, “모친에게 신앙을 배웠다”는 이호영(베드로, 1803~1838) 성인과 누나 이소사(아가타, 1784~1839) 성녀의 고백이 이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19세기 중반 당시 이 지역 신자 대부분은 부평과 인천에 집중돼 있었다. 그래서 최양업 가족도 신자들이 많이 사는 부평에 터한 것이다.
이 베드로는 최양업 가족이 부평 ‘접푸리’(졉프리)에 살았다고 한다. 아드리앵 로네 신부는 「조선 순교 복자전」에서 “부평군 전퍼리로 이주했다”고 한다. 문제는 이 지명이 이 두 자료를 제외하고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2009년 인천교구 성지개발위원회 김진용(마티아) 부위원장은 「최양업 신부가 신학생으로 선발될 당시 부평지역에서의 거주지에 관한 연구」에서 부평 접푸리(전퍼리)를 지금의 인천 경서동 ‘진펄마을’이라고 유일하게 주장했다. 과거 부평군 석곶면에 속한 이곳은 땅이 질퍽한 갯벌 마을로 염전과 녹청자(綠靑磁) 도요지가 있었다고 한다.
김 부위원장은 최양업 가족이 어패류 등 먹을거리가 풍족한 이곳에서 도요지에서 옹기를 굽고 호구책을 마련했을 것이라 주장했다. 하지만 교회사 학자들은 부평 접푸리(전퍼리)가 이곳이라고 비정(比定)하기엔 학문적 근거나 너무 빈약하다고 보고 있다.
여하튼, 최양업은 부평에서 조선 교회 첫 신학생으로 선발됐다. 그를 모방 신부에게 추천한 이는 정하상(바오로, 1795~1839)과 남이관(세바스티아노, 1780~1839) 성인들이다. 모방 신부가 1836년 1월 15일 한양에 도착해 그해 2월 6일 최양업을 선발했으니 아마도 양업은 여항덕(파치피코, 유방제) 신부 때 이미 신학생으로 낙점돼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부모는 조선에서 가장 훌륭한 교우”
모방 신부는 최양업과 자신이 선발한 신학생들과 그 부모에 관해 이렇게 평했다. “그들의 부모는 조선에서 가장 훌륭한 교우들입니다. 그리고 이 소년들은 매우 온순한 성격입니다. 저는 주님의 은총으로 신부님께서 이 소년들에게 만족하시길 바랍니다. 그들은 성심을 다해 공부에 전념할 것과 주님의 섭리가 명하는 대로 교회의 어른들께 완전히 순명할 것을 서약했습니다”(모방 신부가 르그레즈아 신부에게 보낸 1836년 12월 3일자 서한에서).
1838년 10월 부평에서 정 바오로가 조상의 위패를 부순 사건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이원명 등 신자 12명이 체포됐고 50여 명의 신자가 피신했다. 최양업 가족은 아마도 이때 체포를 피해 수리산 뒤뜸이로 이주한 듯하다.
최경환 성인과 같은 신심 깊은 아버지가 있었기에
▲ 수리산 성지에 있는 최경환 성인 흉상.
최양업 신부의 삶에 있어 부평 시절은 참으로 중요한 시기였다. 철이 들 무렵인 10대 초반을 그는 부평에서 보냈다. 이 시절 최양업에게 아버지 최경환은 ‘모든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를 본받으며 성장했다. 양업은 아버지의 두터운 신심과 헌신적인 선교 정신, 가난한 이웃에 대한 사랑 등을 그대로 흡수해 훗날 길 위의 사목자, 땀의 순교자가 된다.
15세에 신학생으로 선발된 최양업은 서울 후동(현 주교동)의 모방 신부 은신처에서 1836년 2월 6일부터 그해 12월 3일까지 10개월을 살다가 유학길에 오른다. 최양업 신부와 모방 신부의 서한에 자세한 내용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양업이 모방 신부의 은신처로 왔을 당시 가족과의 이별이 아버지 최경환과 어머니 이성례(마리아)와의 마지막 작별이었을 듯싶다.
훗날 최양업 신부가 쓴 아버지 최경환의 순교록을 보면 부정(父情)에 대한 그리움이 글자 한 자 한 자에 배어 있다. 최경환 성인의 인품과 영성을 증언하는 유일한 글이다. 그 내용 일부를 그대로 옮긴다.
“밭에서 일할 때나 집에서 일할 때나, 길에서 누구와 담화를 할 때나, 항상 천주교 교리와 신심 사정에 대한 이야기만 하였습니다. 그가 얼마나 꾸밈없이 순박하게 그리고 몸짓을 해가면서 힘차게 말하는지 듣는 사람은 누구나 탄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육신을 가꾸는 일이나, 세속적인 평판이나, 세속적 관심이나, 현세적인 사정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아니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장을 보러 갈 때에는 물건 중에서 제일 나쁜 것이나 흠 있는 것을 골라서 사옵니다. 왜 그런 짓을 하느냐고 나무라는 사람들에게는 ‘제일 나쁜 물건을 사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 않겠소? 그런 사람이 없으면 이 불쌍한 장사꾼들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소?’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해 추수할 무렵, 농작물에 굉장한 폭우가 쏟아져서 곡식을 다 잃게 되었습니다. 모든 이가 그러한 재난을 당하여 눈물로 탄식하며 실망하고 있을 때, 프란치스코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평온한 얼굴을 보여 주었고, 오히려 평소보다 더 명랑하여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기는 교우들에게 프란치스코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절망에 빠져 있고 이처럼 비탄에 잠겨 있습니까? 모든 일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까? 세상일이 다 하느님의 안배대로 되는 것임을 왜 믿지 아니합니까? 우리의 탓과 게으름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면 모르거니와 하느님의 섭리로 추수를 망친 것인데 슬퍼할 까닭이 무엇입니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흉년이 되면 프란치스코는 주변에 사는 가난한 이들을 백방으로 도와주었습니다. 과일을 추수할 때가 되면 가장 좋은 것을 골라 이웃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남들이 탄복할 만큼 형제들과 화목하게 살았고, 어머니에 대해서는 가장 다정한 효도로 섬겼으며, 아랫사람들에 대해서도 자상하게 보살펴 주었습니다. 매일 규칙 생활을 하면서 아무리 바쁜 날이라도 신심 독서를 중단하지 아니하였고, 아침ㆍ저녁 기도를 가족 모두와 함께 공동으로 하였습니다.”
(1851년 10월 15일 자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청주교구 배티성지 양업교회사연구소 편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 104~105쪽 인용)
▲ 신학생으로 선발된 최양업이 서울로 떠나면서 가족들과 이별하는 장면을 묘사한 배티성지 성당 스테인드 글라스 작품.
▲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선발돼 10개월 남짓 머문 서울 후동의 모방 신부 거처는 지금의 서울 중구 주교동 일대를 말한다. 사진은 주교동 입구인 청계천 배오개다리 주변 모습.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약 10개월간 살았던 서울 후동의 모방 신부 은신처는 지금의 서울 중구 산림동과 주교동에 걸쳐 있는 마을로 ‘뒷골’이라고 불렸다. 이 집은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가 왕 요셉을 통해 북경에 온 조선 밀사 유진길(아우구스티노)ㆍ조신철(가롤로)ㆍ김프란치스코에게 주교관을 마련하고 자신의 조선 입국 경비로 사용하라고 준 자금으로 장만한 집이다.
이 집은 1834년 입국한 여항덕(유방제, 파치피코) 신부를 비롯한 모방ㆍ샤스탕 신부, 앵베르 주교의 은신처로 사용됐다. “이 집의 출입문이 주변 집들의 어떤 대문에서도 보이지 않아 신자들이 왕래하기 좋았다”고 앵베르 주교는 회고했다(앵베르 주교, 「1839년 조선의 서울 박해 보고서」에서).
특히 1837년 12월 18일 조선에 입국한 앵베르 주교는 모방 신부처럼, 1838년 이 집에서 정하상을 비롯한 4명의 신학생을 선발해 라틴말과 신학을 가르쳤다. 따라서 서울 후동의 이 집은 조선 교회 첫 교구청이자 주교관이요, 서양 선교사의 첫 사제관이며, 조선인 신학생들의 첫 교육장이라 하겠다.
이 집에서 거처하며 앵베르 주교를 보필했던 정하상(바오로)은 배교자 김여상의 밀고로 어머니 유체칠리아와 여동생 정정혜(엘리사벳)와 함께 1839년 7월 16일 (「기해일기」에는 7월 11일)에 체포돼 순교한다.
최양업 신부 연구 권위자인 양업교회사연구소장 차기진 박사는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세 신학생은 후동 모방 신부 은신처에서 라틴어와 전례 예법, 서양 관습 및 예절에 대해 배웠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세 신학생은 1836년 12월 2일 이 집에서 모방 신부에게 순명과 복종을 서약하고 다음날 정하상과 조신철의 안내로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