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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담사 1번지 강진 食 풍성한 해산물 "먹거리 으뜸" 生 고즈넉한 바다서 삶의 여유 美 청자 탄생지… 옹기도 유명 언제부터인지 전남 강진을 남도 답사 1번지라고 일컫는다. 언뜻 듣기에는 동감하기 힘들다. 화려한 볼거리가 있는 곳도 아니고, 특별히 이름난 관광지도 없다. 전남의 명산으로 알려진 월출산이 있지만 강진이라기 보다는 영암에 속한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도 남도 답사 1번리라니….
한국예술을 세계적인 경지에 올려놓은 고려청자가 이 곳에서 탄생했다. 청자 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서민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옹기도 이 곳의 자랑거리.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한 자궁의 이미지와, 모든 것을 담는 그릇을 연계시키는 것이 괜한 억측은 아니지 싶다. 자궁은 또한 출산의 상징이다. 그래서인지 강진에는 유독 먹거리가 풍부하다. 강진만과 강진평야에서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생명이 잉태되듯, 끊임없이 싱싱한 해산물과 곡식이 솟아난다. 바다이면서도 강나루처럼 잔잔한 물 역시 여성의 부드러움을 닮았다. 강진여행은 요란하고 시끌벅적하지 않다. 대신 호수에 이는 파문처럼 고요하면서도 깊이있는 인생의 의미를 반추할 수 있는 여행이다. 강진은 고려청자의 보고(寶庫)이다. 국보급 청자의 80%가 강진에서 생산됐다. 국보로 지정된 것이 14점, 보물도 6점이나 된다. 9세기~14세기까지 강진만 자락인 대구면을 중심으로 도공들의 왕성한 창작활동이 있었다.
명백이 끊긴 도요지는 1963년 사적 68호로 지정됐고, 97년에는 ‘강진 청자자료박물관’이 세워졌다. 천년전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도공의 후예들이 다시 모여 가마터에 다시 불을 지폈다. 오묘한 청자의 색채가 이 곳에서 살아나고 있다. 내용뿐 아니라 형식도 그대로 재연한다. 고려시대 관요에서 도자기를 굽던 도공이 모두 관에 속하는 공무원 신분이었던 것을 이어받아 강진군이 직접 나서 10여명의 도공을 선발했다. 전국에 수많은 도공들이 활동중이지만 공무원 신분인 도공은 이 곳이 유일하다.
청자가 부잣집 양반들의 점유물이었다면 옹기는 계층을 아우르는 전국민의 생필품이다. 강진의 흙은 점토질이 뛰어나, 숨을 잘 쉬고 단단해야 하는 옹기의 특성을 제대로 표출할 수 있었다. 강진만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마량면 옹기마을에는 50년 가까이 전통 옹기를 제작해온 인간문화재 정윤석(631800)옹을 비롯한 많은 장인들의 옹기를 접할 수 있다. 언뜻 보면 강진만은 벌어진 게집게와도 닮았다. 물이 빠지고 갯벌이 드러나면 걸어서 건너편으로 도달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일반인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는다. 어부들의 삶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겉보기에는 일반 갯벌과 다름없지만 자세히 보면 꿈틀댄다. 물빠진 갯벌사이로 참게들이 구멍을 헤집고 모습을 드러냈다가 이내 인기척에 놀라 사라진다. 오히려 너무나 많은 게 때문에 사람이 놀랄 지경이다. 풍부한 해산물은 강진을 전국 으뜸먹거리명소로 만드는 일등공신이다. 빼어난 자연조건을 갖췄지만 서울권에서 멀어서였을까. 강진은 유배지로도 이름난 곳이었다. 하지만 유배지에 도착한 죄인들은 이내 자연에 순응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18년간의 강진 유배시절에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500여권의 저술활동을 펼쳤다. 그가 머물던 다산초당은 이제 유배지가 아니라 그가 심었던 차나무에서 재배한 차향으로 가득한 필수 답사코스로 자리잡았다. 제주도에 표류, 강진 전남병영성 인근으로 유배온 네덜란드인 하멜 일행도 이 곳에서 빗살무늬 담장이라는 그들 특유의 문화를 만들어냈다. 자칫 분노와 고통속에서 살아야했을 그들이지만 슬기롭게 삶을 헤쳐나갈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니의 자궁 같은 강진이어서가 아닐까. 알면 알수록 더욱 빠져드는 강진의 매력, 남도답사 1번지의 비밀이 여기에 있었나 보다. |
웹 서핑 중 펌...................
첫댓글 옹기장이와 강진차밭 좋네요 언제나 보아도 싱그러운곳....좋은글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