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안텝 여행3 - 가지안텝의 모자이크 박물관을 구경하며 헬레니즘 문명을 떠올리다!

5월 21일 터키 동남부에 하타이 Hatay 에서 09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는 이스켄데룬
Iskenderun 을 거쳐서 13시 30분에 가지안텝 Gaziantep 에 도착해
구시가지 올드타운 에 자리한 호텔 굴루오굴루 Hotel Gulluoglu 에 체크인을 합니다.

택시를 타고 철도역 건너편에 새로 지어 이전한 새 고고학박물관 Arkeoloji Muzesi 인
Zeugma Mozaik Muzesi 에 도착하는데 가지엔텝 근교에 있는 제그우마 에서 출토된
로마(비잔틴) 시대의 모자이크 에 조각상과 청동기 시대와 히타이트 돌비석 이 있습니다.


제그우마 Zeugma 는 가지엔텝의 동쪽 비레직 에서 북쪽으로 유프라테스 강둑에
BC 3년에 셀레우코스 왕조 가 도시를 건설했으니..... 그 규모는
당시 폼페이의 3배 이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보다도 더 컸다고 하니 놀랍습니다.


박물관 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 를 소재로 한 수많은 모자이크 들이 있으니... 그
크기 에 놀라고 다음으로는 섬세한 표정 묘사 에 다시한번 감탄을 하는데
2층으로 올라가서는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뭔가 하나 빠진듯 허전한 기분 이 듭니다.

그때 지나가던 유럽인 관광객 이 우리 동양인 부부가 어리숙해 보였던지
걱정하는 마음에..... 집시여인 Cingene Kizi 을 보았느냐고 묻습니다.

우리가 히어링이 부족 한지라 어리둥절해 쳐다보니 우릴 옆으로 데리고 가는데 거기 좁은
벽을 통해 안쪽 방으로 들어가니 처음엔 캄캄해서 마치 동굴 에 들어온듯 싶은데
조금 지나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니 저 안쪽에 희미한 조명을 받고 우릴 맞이하는 여인 이라!

루부르 박물관의 모나리자 처럼 작은 모자이크 는 얼굴 반쪽 뿐이기는 하지만 도시와
호텔의 광고판에서 익히 보았던 바로 그 집시여인 인데 후래쉬를 사용만 않는다면
사진 촬영을 할수 있지만 스마트폰 은 어두운지라 자동으로 후래쉬가 터지니 불가합니다.

경비원이 어둠속에서 유령 처럼 지키고 서 있는 여기 집시여인 Cingene Kizi 모자이크 는
디오니소수 축제에서 춤추는 여인 으로 얼굴은 400개가 넘는 자연석 돌 을 사용해
감정을 표현 했으며 색깔은 13가지에다가 원근법 을 사용했다는데 은근히 매력적 입니다.

밖으로 나와 아킬레우스 를 보는데 어머니 테티스 는 트로이전쟁 에 가면 죽는다고 아들을
여장시켜 숨기나 오디세우스에게 들켜 억지로 전쟁터에 가서는 헥토르를 죽이는
첫째가는 공을 세우는데 영화 트로이는 반대로 어머니가 영웅이 될 기회라고 권유했던가요?


암소 로 변신한 바람둥이 제우스신 이 예쁜 처녀 에우로파(유럽) 를 태우고 크레타섬
으로 건너 가는 모자이크를 구경하고는 그 옆 구석에서 검은색 마르스
동상을 보는데..... 마르스 는 전쟁의 신 으로 그리스 신화의 아레스 에 해당하지요?


이 벽화가 출토된 도시인 제그우마 는 로마군단의 주둔지 였으니...... 창과
자연의 재탄생을 의미하는 꽃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며 제그우마
도시를 만든 셀레우코스 와 또 그가 모셨던 대왕인 알렉산드로스 를 떠올립니다.


도시 제그우마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진 으로 부터 시작되는 것인데 BC 334년에 그는
마케도니아군 밀집방진(플랑크스) 보병대 3만에 기병은 2천에다가 헬라스(그리스) 의
코린트 동맹 보병 7천명에 테살리아 기병등 4만의 병력으로 다르다넬스 해협 을 건넙니다.


아시아 에 상륙하여 아버지 필리포스가 마련했던 아비도스 병사 1만 과 합류한 5만 대군은
트로이 를 거쳐 그라니코스 강변 에서 멤논등 그리스인 용병이 포함된 페르시아군 과
싸우는데 기병이 되어 적진으로 돌격해서 승리하고는 그리스인들의 도시를 해방 시켰습니다.


알렉산드로스 는 미트레스 함락후 고르디움을 지나 카파도키아 를 평정하고 아나톨리아
를 통과해서는 페르시아 해군의 본거지 키리키아 연안 타르소스 를 거쳐
사르디스 를 함락하고는 시리아 를 공략하기 위해 이수스 (현재 이스칸데룬) 로 향합니다.


다리우스 3세의 페르시아군 은 다마스쿠스를 경유하여 킬리키아 에서 남하하니 BC 333년
이수스 에서 전투가 벌어지는데, 급경사 지역이라 기병을 주력으로 하는 페르시아군은
실력을 발휘하지 못해 마케도니아군의 중앙을 차지하는 중장 보병의 밀집대에 압도당했네요?

다리우스 3세 는 3년전인 BC 336년에 아르타크세륵세스 3세의 아들이자 사촌인 아르세스
가 암살되자 페르시아 왕위를 찬탈하였는데, 그리스어가 능통해 그리스인 용병 을
많이 거느렸으니 이수스 전투 에 그리스인 용병 1만 을 동원하는 놀라운 수완을 보입니다.


다리우스 는 시리아에서 우회해 북쪽 마케도니아군의 보급로 를 차단하니 알렉산드로스
는 되돌아서서 남쪽에 진을 치는데, 페르시아군은 보병 7만에 그리스인 용병 1만
그리고 기병 1만등 9만 에 비해 마케도니아군은 보병 3만 5천에 기병 6천등 4만 입니다.


다리우스의 군대 는 좁은 해안가에 진을 치고 강가에 말뚝을 박아 적을 저지하려 했으며
다리우스는 페르시아군 중앙 배후에 최정예 보병 과 함께 위치하고 그 앞에
그리스 중장 보병들과 페르시아 보병을 배치하고 기병은 우익을 맡아 타격대로 배치합니다.


알렉산드로스 는 최정예 컴파니언 기병대을 직접 지휘 하여 오른쪽 날개를 맡고 테살리아
기병을 좌익 에 배치하고 중앙은 파르메니온이 이끄는 중보병인 팔랑크스 를 배치합니다.


전투는 페르시아의 기병이 강을 건너 마케도니아의 왼쪽을 치는 것으로 시작되었는데
알렉산드로스의 왼쪽 날개는 수적으로 우세한 페르시아군을 맞아 최대한 버티면서
오른쪽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정예 기병이 페르시아 를 격파할 시간을 벌어주는 임무네요!


중앙의 마케도니아 중보병 은 강을 건너 페르시아의 전열에 타격을 가하는데 성공했고
알렉산드로스는 컴페니온 기병대 를 이끌고 다리우스의 본진으로 돌파해 들어가자
다리우스는 도망쳤고 알렉산드로스는 뒤로 돌아 페르시아의 그리스 용병을 공격했습니다.

다리우스가 도망가는 것을 본 페르시아 군대는 앞다투어 도망치기 바빴으니 마케도니아군은
패주하는 페르시아군을 살육 하였는데 페르시아군의 시체로 강은 붉게 물들었고
댐을 이룰 정도였다는데 다리우스는 패주하고 왕모와 왕비 및 왕자들은 포로 가 되었습니다.

1831년 폼페이에서 출토된 유명한 모자이크 대벽화는 이 전투 광경을 그린 것이라는데
독일 화가 알트도르퍼도 이수스 전투 라는 이름의 그림을 그렸으니 미술에서 사용하는
히스토리는 그리스어 이스토리아로“역사”라기 보다는 “이야기” 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된 폼페이 모자이크 는 “파우누스의 집”
에서 출토되었는데..... 젊은 알렉산드로스 가 불리한 전황을
뒤집고 극적으로 승기를 잡는 순간을 역동적으로 묘사한 걸작이라고 하네요?

알트도르퍼가 그린 이수스 전투 는 전차를 타고있는 다리우스 3세나 알렉산드로스가 두드러
지지 않는데 소재를 부각시키는 대신에 스케일이 큰 파노라마 풍경의 소용돌이 속에서
역사의 전환을 개관하는... 이른바 “세계 그림”의 구성을 취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수스 전투 후 알렉산드로스 는 내륙으로 달아난 다리우스 3세를 추격하지 않고 지중해를
따라 페니키아로 남하해 티루스 등 험난한 전투를 거쳐 이집트 를 점령하는데
이는 페니키아의 페르시아 해군 이 후방에서 보급을 차단할 것을 염려한 때문이라고 합니다.

2년 후인 BC 331년 10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끄는 헬라스 동맹군과 다리우스 3세
가 이끄는 페르시아군이 유프라테스강 동쪽 바그다드 북쪽에 위치한
가우가멜라 에서 역사상 유명한 가우가멜라 전투 는 알렉산드로스가 대승을 거둡니다.

다리우스 3세 는 페르시아군 20만명 을 코끼리· 전차· 기병으로 2중으로 횡진을 펼치니
알렉산드로스가 이끄는 헬라스 동맹군은 4만 7000명 으로 기병은 페르시아군
좌익을 강습하여 다리우스 3세를 패주시킴으로써 이 전투 결과 페르시아왕국은 멸망 합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수사와 페르세폴리스 를 함락하고 아프가니스탄의 발흐와 중앙 아시아의
부하라 및 인더스 강 유역까지 정복하고는 바빌론 으로 돌아와 대성공을
축하하는 연회를 베푼후 곧 병들어 사망하니 BC 326년으로 그의 나이 32세 였다고 합니다.

장군들에 의해 네나라 로 분할되었으니 셀레우코스 Seleucos 는 시리아와 소아시아반도
대부분 및 인도 변방에 이르는 동부 지역을 차지하였고, 소아시아 반도의 나머지는
안티고누스 , 마케도니아는 안티파트로스 그리고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가 차지 합니다.

이것을 구약 성서 에서는 "큰 뿔이 꺾이고, 그 대신 현저한 뿔 넷 이
하늘 사방을 향하여 났더라."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죽기전에 페르시아 사카이에 옥시아르테스의 딸인 록사네와 결혼 하고 부하 장군들에게도
결혼을 권유하여 동서문명이의 융합 을 꾀했으니 헬레니즘 문명 인데 BC 330년
부터 프톨레마이오스조 이집트 가 로마 에 정복당하는 BC 30년 까지 300년간 이어집니다.


후계자중 하나인 셀레우코스 왕조 는 안티오키아와 제그우마 등 많은 도시들을 건설하고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모자이크 벽화 를 제작해 헬레니즘 문명 을 발전시킨후 BC
30년 로마에 넘겨주었으니 동로마에서는 이를 기반으로 비잔틴 문명 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