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허준 제14화
<小說 허준(許浚) 第14話>
- 이은성 지음 / 소설 동의보감
名醫 柳義台 第三
고성서 진주까지 60여리. 그 진주에서 산음까지는
다시 60여리를 가야하리라는 말을 지리산을 드나들며 약종상을 한다는 늙은이로부터 전해 들은 허준 일가는
그 갯가 주막을 떠나 당일로 진주를 향해 길을 나섰다.
해로에 수십 일씩 시달려온 몸들이라 지칠대로 지쳐 있었으나 서강에서 어머니가 쥐어준 노리개값은 뱃삯과 밥값을 떨고 다시 미투리와 짚신을 갈아신고 나니 겨우 한 냥이 남았을 뿐이라 단 하루도 천연덕스레 주막방에서 몸을 쉴 형편이 못 되었던 것이다.
첫날 60여 리를 걸어 진주 어간 어디서 주막을 정하고 내일은 새벽에 발정하여 해 안으로 목적지인 산음 관아에 닿아 이젠 일가의 목줄이 된 아버지의 서찰을 현감에게 전하면 솟아날 길이 있으리라 믿지만 그 목적지까지 과연 몇 개의 나루를 건너야 할지 그 나루에서마다 또박또박 치러야 하는 뱃삯도 한 냥의 노자로는 불안했다.
"네 고생이 정말 말이 아니로구나. 하나 하룻길만 더 고생하면 큰 고생은 끝나지 않으리."
다음날 아침 진주성 밖 두치나루의 주막에서 주모가 말아주는 국밥으로 요기를 때우고 떠날 준비를 할 제 며느리가 아궁이에서 말려온 미투리를 받아 신으며 손씨가 치사의 말을 했다.
한양에서 김상기를 만났다는 일, 멀지 않아 가문이 회복될 것이라는 말을 배 안에서 전해 들은 손씨는 자신들의 신분으로 과분한 집안의 며느리를 맞아 바라볼수록 대견한지 자주 그런 인사를 했다.
진주에서 산음으로 가는 길은 추웠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동서로 갈라 내리지른 지리산의 완강한 산세는 고성 바닷가에서 본 봄기운과는 거리가 먼 아직 눈과 얼음을 뒤집어쓴 찬겨울이었고 그 줄기에서 뻗은 둔철산, 월명산, 보암산, 척지산 등이 잇따라 일행의 지친 걸음을 가로막았고 인가도 없는 그 험준한 골짜기의 나루에선 사공들이 얼음을 깨며 뱃길을 트고 있었다.
벙어리처럼 아니꼬운 눈만 희번덕거리던 늙은 사공이 손씨가 뱃삯 대신 버선 두 켤레를 내놓자 갑자기 감지덕지하며 말을 걸어왔고 목적지가 산음이라 이르자 또 하나 저 멀리 가로막은 산이름 이 유산이라는 것과 그 유산서 산음은 10리라고 일러주었다.
골이 깊으니 해가 짧았다.
사공이 허준의 짐 속에 서너 가지 옷가지들이 든 걸 눈치챈 듯 자꾸 헌옷가지라도 좋으니 팔아주기를 애걸했고 그 움막 같은 집에 어렵게 사는 모습이 불쌍하여 허준이 솜 누빈 옷 한 벌을 내주자 그 사공 부부는 애써 일행을 방으로 인도한 후 새삼 군불을 지피며 시래깃국을 끓이기에 법석을 떨다가 밥 두 상을 차려내었고 그 대접을 받고 허준들이 떠날 때는 해가 떨어지고 강바람소리가 한결 스산했다.
유산을 넘자 사공이 배웅차 따라나오며 누누이 일러주던 장선나루가 나타났고 나루 건너에도 산음 현내의 불빛들이 가득히 널려 있었다.
한양까지 8백40리, 한양서 용천이 1천1백여 리. 허우적허우적 2천 리를 찾아온 그 목적의 땅이 눈앞에 펼쳐 있었다.
"저기가 산음올시다."
품안에 둔 아버지의 서간을 할인하면서 허준이 읍내의 불빛이 가장 밀집한 지점을 향해 감개를 담아 말했다.
"저쯤이 아마 관아인 듯싶습니다."
허준이 다시 말을 잇자 자신의 고생은 젖혀놓고 손씨가 새삼 며느리의 손을 잡고 눈물겹게 웃음지었고 다희가 그 시어머니의 한 팔을 부축하며 허준의 뒤를 따랐다.
산음.
민호 3백60여 호, 인구 2천2백여. 논이 7분의 3으로 배합된 간전이 2천 결(조세를 셈하는 논밭의 넓이의 단위로 1결은 100짐).
그 외롭고 한적한 내륙의 소읍은 적어도 허준에게 있어서는 그냥 낯선 고장이 아니라 자기의 제이의 인생을 살아갈 새 천지 새 세상이었다.
앞서 가던 허준이 걸음을 세우고 뒤쫓아오는 아내와 어머니를 기다렸다.
오랜만에 그 얼굴에 희망이 터질 듯이 넘치고 있었다.
"이곳을 떠난 지 오래라니 누가 말씀이오!"
허준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전임 사또의 함자를 묻지 않았소?"
"전임 사또?!"
"함자가 조상두라면 내가 모시던 분인데 모를 리 있소?
이미 두어 달 되었소이다. 벼슬 그만둔 지."
"그만둔 지 두어 달 ..."
허준의 입속이 순식간에 메말라갔다.
"그럼 지금 이곳에는 아니 계신단 말씀입니까?"
"당연하잖소. 벼슬 그만둔 사람이 궁벽진 땅에 뭣하러!"
"그만둔 까닭이 무엇이오니까."
까닭은 필요없었다. 그러나 허준이 매달리듯이 물었다.
"노모께서 병환이 위중하시어 돌아가시기 전에 자식의 도리나 다하겠노라시며 벼슬을 버린 줄 아오만 ..."
용천땅이 어디 붙었는지 알리 없으되 말로 듣던 평안도
그 멀고 먼 땅에서 찾아왔다가 허행을 한 허준을 산음현 이방은 동정을 담아 건너보았다.
"대체 그분과는 어떤 연고오니까?"
"꼭 만나야 할 사람올시다. 안 만나면 아니 되는 ..."
"그럼 다시 한양으로 가야지 ..."
"한양?"
"오는 길에 한양 댁에 들르지 아니했었소?"
이방이 그제야 좀 의아한 투로 허준을 보았다.
허준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절망이었다.
새 옷 꺼내 주막에서 다리미 빌어 다려주며 희망에
차 있던 어머니와 문밖까지 따라나서던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허준의 무릎이 떨려왔다. 오금이 떨어지지 않았다.
일어서 나간들 갈 곳이 없었다.
"보아하니 무척 간절한 사연인 듯하오만 한양 댁을 모르시오?"
" ..."
허준의 귀엔 다 들리지 않았다. 다시 한양에 갈 기력은 없었다. 한양에 살기 위하여 용천을 떠나온 것이 아니었다. 자기의 신분으론 한양에서 자유와 새 천지를 찾을 수 있을 리 만무인 걸 알고 있었다.
자기의 희망은 이 산음뿐이었다.
용천서 한양까지 한양서 다시 고성까지 고성서 다시 여기까지 그 험한 물길과 첩첩한 산을 넘어오면서 그 길이 험하고 첩첩할수록 허준은 이 세상으로부터 그만큼 멀어진다는 해방감을 느꼈다.
다른 일도 아닌 신분에의 탈출이 아닌가.
이 지독한 흉년을 기화로 평생 쫓아다닐 천민의 딱지를 떼어던지고 타도로 유랑하는 유민으로 탈바꿈하여
이 땅에 뿌리를 박아 농사지으며 자식 낳아 기르는
최소한 사람다운 자격, 그 양민이 되련다는 꿈이 소리
내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처음 찾아들 제 사또를 뵈러 왔노란 말에 제법 은근히 행랑으로 안내했던 이방이 이젠 행랑 문턱을 쓰러질
듯이 넘어가는 허준을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전임 사또가 혹 생부인지도 모르지. 어디다 몰래 싸질러놨던."
처음 인사를 당겼을 때의 허준의 성씨를 깜빡 잊고
이방이 허준의 절망을 멋대로 해석하는 말을 뇌까렸다.
저만큼 주막의 돌각담이 보이는 곳에서 허준은 걸음을 세웠다.
화톳불을 뒤집어쓴 듯이 머리속이 뜨거웠다. 주막방에 앉아 하회를 기다리는 어머니와 다희에게 무슨 말로 이 사실을 알릴 것인가 아득했다.
허준은 주막담을 지나쳐 아무데로나 걷기 시작했다.
산속 소읍은 특별하게 바쁜 생업의 광경이 보이지 않고 사람들의 걸음이 한가로웠다.
집집마다 산에서 캔 약재의 건조장이 마당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특이할 뿐 고을은 외래객인 허준의 절망과는 아무 상관없이 평화로웠다.
바람은 차가워도 겨울의 얼음은 녹고 있는 듯 아낙들이 빨갛게 언 손으로 물방망이를 두들겨대는 소리가 개울을 따라 한참 따라왔다.
'도망칠 길은 없어.'
허준이 걸음을 세우며 자신에게 일렀다.
어떤 절망 어떤 고난이 되었건 어머니와 그리고 아내는 자기가 맡아야 할 사람이었다.
허준이 주막집을 향해 되돌아가기 시작했을 때 맞은편에서 한 채의 가마가 오는 것이 보였다.
지나쳐가는 그 허준에게 가마를 따라오던 큰갓 쓴
중년의 사내가 가로막았다. 가마꾼들이 신발을 발등에 잡아 싸맨 걸로 보아 가마는 제법 멀리서 달려온 듯 보였다. 가마 속 늙은 남자가 신음소리와 함께 처절하게 아들의 이름을 거푸 불렀다.
"말 좀 묻네. 여기 유의원댁이 어딘가."
"모르오."
허준이 냉랭하게 대꾸하고 가려 하자 큰갓 쓴 사내가 허준의 소매를 잡아챘다.
"모르다니, 산음 사람이 유의원 집을 몰라? 유의태 말일세, 유의태."
그 손을 뿌리치며 허준이 다시 차가운 눈을 돌렸다.
"모른다지 않습니까."
일순 머리의 패랭이하며 신분 낮은 허준의 태도가 노여운지 사내가 눈을 치떴다.
그러나 병자를 대동한 급한 마음에서 막 나타난 약초를
한 짐 진 늙은이에게 내달았다.
약초 진 늙은이가 손가락을 놀리며 방향을 가리켜주자 가마가 다시 달려갔다.
그 가마를 쫓아가는 사내를 보며 문득 허준은 '유의태'라는 이름을 어디서 들었다고 생각했다. 곧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 이름을 처음 들은 건 용천 한전동에서 다희의 입에서였다. 다희의 아버지, 그 죽은 장인이 북청서 의주까지 찾아나섰던 의원의 이름이 유의태였다.
'하나 그 의원의 존재가 자기에게 무엇이란 말인가 ...'
가마가 멀리 산비탈로 달려가는 것을 보면서 허준은 어머니와 아내가 기다리는 주막으로 향했다.
계속 ~~
[著者 放送作家 李恩成]
산읍 ?지금의 경남 산청군
70%가 산 지리산 기슭
10시 방향 함양
2시 방향 합천
5시 방향 진주
고성은 사천과 부산 중간
진주 5시 방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