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식의 진화 / 자아
철학의 맥 ........................................................... 엘리트 글쓰기 논술 교실 다음카페 eea
☏ 016-9334-4876
의식의 진화
불교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돌이나 물도-벌레의 것보다는 매우 단순하겠지만-불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현대의 인지과학자들 가운데도 있으며 의식은 생명이 진화하기 전에도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사람들에 따라서는 의식이 생명의 탄생과 더불어 생긴 것이라고 믿기도 하고 최초의 감각기관의 등장과 함께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사람에 와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퀄리아나 의식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들 여러 주장들은 검증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나름대로의 타당성이 있기 때문에 완전히 부인할 수도 없고 의식의 모든 면을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완전히 수용할 수도 없다. 우리는 다만 여러 이론들을 이해하면서 의식의 여러 가지 면과 진화의 가능성에 대해 이해를 깊이 할 뿐이다.
영국의 인지과학자 니콜라스 험프리는 의식이 사회생활에서 진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럿이 모여서 살면서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경쟁하면서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을 이해할 필요성이 생겼고 그 한 방법으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는 기능이 진화한 것이다. 험프리는 의식의 한 가운데에 “내부의 눈(inner eye)”를 설정한다. 의식이란 자신을 바라보는 루프(self-reflexive loop)이며 스스로의 출력이 다시 입력이 되는 회로인 것이다. 험프리는 이것이 데카르트적인 이원론이 아니며 단지 하나의 추가된 기능이라고 설명하지만 흡족할 수 없다. 영국의 고고학자인 미튼은 험프리의 모형 위에 언어의 역할을 더했다. 정신의 여러 기능들은 인류의 진화로 이르는 과정에서 계속 진화해왔지만 서로 고립되어 있었는데 5만년 전쯤 인간의 언어가 등장하자 이런 기능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고도의 정신 능력이 폭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철학자 처치랜드 같은 사람은 의식이 자연선택에 의해서 진화된 산물이라는 주장에 반대한다. 의식은 어떤 기능을 가진 형질이 아니고 몸의 모든 기관들이 잘 작동할 때 “건강함”을 느끼는 것과 같이 정신의 여러 기능들이 작용할 때 느껴지는 상태 같은 것이며 일종의 환각(illusion)이라는 주장이다. 의식이라는 환상은 생명이 처음에는 간단한 형태였지만 점점 복잡한 형태들이 진화한 것과 같이 더불어 복잡한 형태가 되며 우리는 그 환상을 느끼는 것이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미에드는, 험프리같이, 의식이 사회생활에서 떠 오른 것이라고 믿지만 사람만이 의식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고 다른 동물들도 의식이 있다고 주장한다. 다만 사람만이 자기 자신을 의식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제이네스는 3천년 전쯤 의식이 떠올랐다고 주장한다. 기원전 1230년 작품인 호머의 일리아드만 보아도 마음이나 정신에 대한 얘기는 없다는 것이다. 투사들은 자신의 의지나 계획 같은 것이 아니라 신의 소리를 듣고 명령을 수행하는데-그것은 현대적인 용어로는 일종의 환각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의식 내지 주관성(subjectivity)은 아직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의식에 대한 여러 이론들은 우리가 분명히 장님이며 코끼리의 다리를 만지고 있는 것임을 확인시켜 준다. 코끼리에 대한 여러 묘사들은 여러 부분들이며 제대로 된 코끼리의 모습은 이런 것들을 제자리에 갖다 붙이고 연결시킬 때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된다.
자아의 두 이론
우리는 매일 아무 문제없이 “나”라는 말을 사용한다. 나는 모든 경험의 주체이고 결정하는 존재이며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욕망의 원인이다. 플라톤은 자아가 존재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불멸의 존재라고 믿었다. 더 나아가서 자아도 육체와 같이 소화적(appetitive) 자아, 감성적(emotional) 자아, 그리고 이성적(rational) 자아로 구성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라고 느끼는 것은 착각에 불과한 것이다. 영국의 철학자 데렉 파르피트는 자아에 대한 이론들을 크게 둘로 구분하며, 플라톤 같은 주장을 자아 이론(ego theory), 불교에서와 같은 주장을 묶음 이론(bundle theory)이라고 분류했다. “묶음”이란 말은 영국 철학자 데이비드 흄이, 자신의 속을 아무리 쳐다 보아도 온갖 감각의 묶음들을 찾을 수 있을 뿐 자아의 실체는 찾을 수 없더라는 진술에서 나온 것이다. 자아 이론은 통상적인 느낌과는 일치하지만 자아의 존재를 설명할 수가 없다는 문제점이 있고 묶음 이론은 이 세상을 경험하고 살아가는 나에 대한 느낌과 상충한다. 이 양자의 입장은 소위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를 수행하면 좀 더 잘 이해된다.
가령, 스타트랙에 나오는 것 같은 원격이동장치(teletransporter)를 생각해 보자. 장치에 들어가 스위치를 누르면 컴퓨터는 내 몸의 모든 세포를 스캔하여 원자 수준의 정보를 모두 읽어낸 뒤 이 정보를 빛의 속도로 지정된 위치에 보내며 그 자리에 다시 몸이 구성된다. 우주선에 있던 내 몸이 지구 어딘가에 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옮겨진 내 머리 속의 신경세포는 물론 각각의 신경세포를 구성하는 원자들까지 정확하게 그대로 재현되었기 때문에 나의 모든 기억도 그대로 재현되며 성격도 그대로이고 내 행동은 셔틀을 타고 도착한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이 실험의 요점은 육체와 정신의 연속성이 단절되었다는 것이다. 스타특랙에서는 의심의 여지없이 받아 들여졌지만, 지구에 재현된 나와 우주선의 나는 정말 같은 존재인가 의심할 수 있다. 만일 같다고 생각된다면 손오공의 분신들을 생각해 보자. 손오공은 숨 한번 불어줌으로써 자신의 완전한 복제품들을 만들어 낸다. 이 각각의 복제 손오공들은 완전히 동일한 원숭이들이지만 과연 하나의 자아일 것인가? 그렇다면 갓 태어난 일란성 쌍둥이들은 하나의 자아인가? 원격이동이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이동 중에 신경세포가 1개 다르게 재구성되었다고 치자. 그렇다면 이 옮겨진 나는 우주선에 있던 나와는 다른 나인가? 에러율이 좀 높아 100개 정도의 신경세포가 정확히 재현되지 못했다면 어떨 것인가? 뇌의 1/10쯤이 달라졌다면?
자아 이론자들은 원격이동된 것은 자신이고 “나”도 문제없이 이동되었다고 생각한다. 자아는 육체와 연결되어 같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육체가 그대로 복제되어 옮겨졌다면 자아도 거기에 있는 것이다. 신경세포가 완전하게 재현되지 않았다면 정신상태가 좀 달라진 것과 비슷한 상태가 된다고 주장할 것이다. 자아 이론의 관점에서 정신은 육체의 고유성을 따라 가고 있어야 한다. 묶음 이론자들에게 재구성된 몸과 마음은 이미 다른 것이다. 그것은 마치 공장에서 생산된 똑 같은 모델의 자동차들이 서로 다른 개체인 것과 같다. 외양이 아무리 같아도 그것은 다른 존재인 것이다. 의식을 흐르는 감각을 느끼는 그 자체가 자아이며 그 물리적인 틀이 해체되면 그 자아는 사라진다.
제 1 자아
미국의 심리학자 고든 갤럽은 야생 침팬지의 우리에 3 m 짜리 커다란 거울을 갖다 놓았다. 침팬지들은 처음에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다른 침팬지로 여겼지만 좀 지난 후에는 그것이 자신임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거울을 보고 표정을 바꾸어 보기도 하고 이를 쑤시기도 하였으며 보통 때는 볼 수 없는 몸의 보이지 않는 부분에 신경을 쓰기도 하였다. 침팬지들을 마취시킨 후 이마에 진한 붉은 색 물감을 묻혀 놓았더니 침팬지들은 거울 앞에서 그 부분을 들여다 보고 검사하며 되풀이 만지작 거렸다. 전에 거울을 경험하지 못한 침팬지에게 비슷한 실험을 하면 거울 속에 강렬한 붉은 점을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것은 침팬지가 자신을 의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거울을 익힌 침팬지는 비록 말로서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거울에 비친 모습이 다른 침팬지가 아닌 자신임을 알며 더 나아가서 “어, 내 머리에 웬 빨간 물감?”하고 의식하는 것이다. 침팬지는 자신의 몸과 다른 침팬지의 몸을 식별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캘리포니아 대학의 철학교수인 파트리샤 처치랜드는 자아를 일종의 뉴런 회로이며 몸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여러 신호들을 조절하기 위해서 진화되었다고 주장한다. 내 발가락의 아픔이라든지 내 배의 고픔 같은 내부적인 상황을 의식하고 조절하다 보니 내부와 외부를 구별하게 된다는 것이다. 처치랜드의 지적은 별로 틀리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자아의 정체를 밝히는데 한 걸음 더 나아갔다고 할 수 없다. 우리가 궁금해 하는 것은 내부와 외부를 구별하고 세상 속의 한 단위로서 스스로를 인식하는 바로 그 주체가 무엇이냐는 것이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흄은 마음속을 아무리 뒤져 보아도 “자신”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하였다. 흄도 머리속에 세상과 동떨어져 존재하는 자기 자신은 분명히 느끼고 있었지만, 그 자신의 머리속을 들여 보았을 때는 각종 상념과 정서들만을 발견했던 것이다. 도대체 머리속에서 중얼거리며 생각하는 나는 무엇인가?
의식 속을 흐르는 각종 지각된 자극들과 감성의 강물을 바라보고만 있을 때 자아는 의식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밖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침팬지에 해당된다. 그에게 세상이 보이지만 자신은 보이지 않는다. 바나나가 있으면 먹고 사자가 나타나면 잽싸게 나무를 타고 올라가 도망가지만 자신은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거울이 있으면 침팬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다른 많은 침팬지 동료들과 섞여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침팬지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알아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다른 침팬지다. 다른 침팬지가 거울 밖에도 있고 거울 안에도 있는 것을 보고 자신도 거울 속에 있는 것을 추리하는 것이다. 침팬지는 분명 인과관계를 이해하고 유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만일 다른 침팬지가 없이 자신만이 있는 우리 속에 거울이 놓여 있으면 침팬지는 자신을 발견하는데 훨씬 오랜 세월이 걸릴 것이며 혹은 영영 발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사람의 아기도 마찬가지다. 아기는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며 상당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그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침팬지나 아기나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신을 관찰할 기회를 갖게 되지만 그러나 더 이상의 진전은 없다. 때때로 자신의 모습이나 행동을 스스로 보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뿐, 자신과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나 자신의 존재의 의미나 유래에 대해서 생각할 줄은 모른다.
성숙한 사람의 자아의식과 침팬지의 자아의식의 차이는 무엇일까?
자아는 결국 나를 의식하는 것이다. 고든 갤럽의 실험은 침팬지가 자기의 몸이라는 자아를 발견하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처치랜드의 내부와 외부를 구별하는 존재라는 언급은 자아가 침팬지가 자기 몸을 인식하는 바로 그 존재임을 알려 준다. 그것은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는 사실이지만 인간이 자아라고 부르는 것은 머리 속 가운데 자리 잡고 앉아 흄과 같이 인식의 강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존재이며 세상 모든 존재 속의 하나인 자신을 의식하는 존재이다. 우리가 답을 원하는 것은 이 궁극적인 의식의 실체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문학과 철학에게 페르마의 정리같이 던져진 이 존재를 편의상 제1자아라고 부르자.
사람은 침팬지나 어린 아기와 달리 자신의 몸만을 인지할 뿐 아니라 그 인지하는 제1자아를 스스로 느낀다. 어른과 어린 아이 사이에 그리고 침팬지와 인간 사이에 무슨 신비한 일이 일어나길래 이런 신비한 존재가 존재하는 것일까? 왕왕 신비스러운 존재는 베일이 벗겨지고 나면 때로 너무나 평범한 존재로 드러나기도 한다. 천상의 선녀 같은 여인도 하룻밤을 같이 지내고 나면 그저 보통 여자임을 깨닫기 마련이고 차마 고개를 들어 볼 수도 없던 금상의 황제도 권좌에서 끌어 내려져 땅바닥에 내던져지면 저자의 부랑배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음을 알게 된다. 우리가 느끼는 머리 속의 신비한 존재도 진화의 산물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으며 수천만 년 전 들쥐 같은 조상에서 시작하여 아프리카의 원시적인 영장류의 모습을 거쳐 침팬지의 단계를 지나 오늘에 이른 연속적인 정신 현상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인간과 침팬지의 차이 혹은 더 좁혀서 10만 년 전의 원시인과 현생인류의 차이는 진화가 만들어 낸 작은 변화가 가져온 커다란 결과이어야 한다.
나는 자아가 비교되는 다른 상대가 존재하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침팬지가 거울에 비친 다른 침팬지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깨닫듯이 의식은 생각 속의 다른 의식을 보고 스스로의 존재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의식 속의 다른 자아란 곧 대화하는 상대방이다. 의식 속의 다른 자아는 다른 동물이나 사람의 모습이 아니다. 설사 외부의 다른 존재가 소리를 지르고 말을 할지라도 그것은 눈과 귀를 통해 들어오는 자극의 하나일 뿐이다. 자아란 의식이 스스로와 마찬가지로 행동하는 다른 의식을 감지하는데서 시작될 것이다. 의식의 행동이 무엇이며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의식의 행동이란 흄이 바라보던 지각과 정서의 흐름을 쳐다보는 것이다. 의식이 스스로 쳐다보고 있는 행동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의식에게 의식의 존재를 알려 주지 못할 것이다. 침팬지가 자신의 몸을 의식할 수 있는 것은 거울이 있기 때문이다. 의식이 자신을 의식할 수 있는 것은 의식 속에 거울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의식 속의 거울은 곧 말이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사람은 의식이 중얼거린 것을 듣게 된다. 의식은 스스로가 지꺼린 것을 들으며 다른 의식의 존재가 있는 것같이 느끼는 것이다. 마치 머리 속에 두 사람이 들어 있는 것처럼 의식은 자기 목소리의 메아리를 들으며 자신의 존재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은 1루와 2루 그리고 3루까지 바쁘게 뛰어 다니면서 모든 수비를 혼자 다 하는 재빠른 도날드덕같이 혼자서 2역 또는 3역을 해 내는 것이다. (프로이트심리학이 말하는 여러 자아들은 서로 다른 자아가 아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욕망 프로그램의 발현이다.)
제 2 자아
제1자아는 머리속에서 의식의 흐름을 바라보는 의식 그 자체이다. 이런 말들은 매우 혼란스러울 수 있다. 의식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의식 현상을 설명하는 말들도 여러 가지 면을 묘사하기 위해 두루 사용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극장 모형을 빌리면, 위에서 말한 “의식”은 관객이며 “의식의 흐름”은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공연이다. 제1자아란 바로 의식 그 자체이며 관객이다. 제1자아가 스스로를 인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다른 관객의 존재를 보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의식이 말을 해 놓고, 야구장의 도날드덕이 수비수의 자리로 번개같이 옮겨 가 자신이 친 공을 받듯이, 자신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기 때문에 머리 속의 데카르트 극장에는 관객이 하나 더 늘은 것이다. 의식은 자신의 메아리를 보고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제1자아는 궁극적인 한 정신이며 실체이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느끼는 자아와는 차이가 있다. 한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과 다른 외모를 가지고 있고 다른 말투를 하고 주어진 환경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이 다르며 다른 개인적인 역사와 기억을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에 의해서 인지되는 한 사람의 자아는 제1자아와는 다른 것이며 이것을 제2자아라고 하자.
제2자아는 우선 육체이다. 다른 모든 몸과 구별되는 공간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육체이며 그 육체가 다른 모든 육체들과 세부적인 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고 구별할 수 있기 때문에 제2자아는 명백하다. 이것은 사람들이 “홍길동”같은 이름으로 인지하고 기억하는 자아이다. 제2자아는 육체뿐만 아니라 육체가 이루어내는 운동도 포함한다. 그것은 목소리나 걷는 모습 같은 것도 될 것이지만 더 나아가서 그 사람만의 독특한 행위, 사고방식, 재능 같은 것을 말한다. 이것은 특히 서로를 인지하고 상호 주고 받는 사회생활에서 현저하게 나타난다. 이를테면 도덕적이거나 비도덕적인 경향 같은 여러 가지 모습의 인간 본성(즉 개성)이 제2자아의 구성 요소로 뚜렷이 부각된다는 말이다. 행동이나 성향 같은 것은 물질적 특징이 아니기 때문에 쉽게 파악하기 어렵지만 그러나 여전히 육체에 기인한 것이다. 나는 앞서 욕망이 인간의 본성이며 사람마다 특정 욕망에 대한 강도가 다르며 이런 조합이 개성을 만든다고 주장하였다. 또 욕망도 다른 이성이나 언어나 기억과 마찬가지로 신경세포에 의한 회로임도 설명하였다. 비록 어떤 한 사람이 주어진 환경에서 반응하는 특징적인 행동이나 혹은 경향이 성장환경이나 쌓인 지식에 의해서 영향을 받게 될 것은 틀림없지만 그 기저를 이루는 것은 타고난 신경회로가 아닐 수 없다. 제2자아는 결국 몸과 마음의 회로 즉 하드웨어가 된다. 이 하드웨어 자체와 하드웨어의 활동으로 나타난 모든 결과를 우리는 어떤 한 사람으로 인지하는 것이다.
“나”라는 인간에 만족을 하거나 혹은 “왜 나는 이 모양일까?”하고 개탄하는 것은 제1자아이지만 그 대상이 되는 것은 제2자아이다. 제2자아는 다른 사람에 의해서 인지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 즉 제1자아에 의해서도 인지되기 때문이다. 제1자아를 발생시키는 신경의 회로는 제2자아의 일부이지만 제1자아는 정신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제2자아와는 구분된다. 제1자아는 심리학과 인지과학, 신경과학, 심리철학 등이 궁극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정신의 마지막 성궤이다. 제2자아는 물질세계에 놓인 자아이고 제1자아는 정신현상이다. 이것은 퀄리아(qualia)의 한 모습일 것이며 마지막 신비이며 아직 어떤 것도 말할 수가 없다.
Who are you?
벽안의 유학승인 현각 스님은 “Who are you?”하는 숭산 스님의 대갈에 소스라치게 놀라게 결국 불교에 입문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Who are you?”를 계속 생각하다 보면 누구나 의식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이 자신임도 깨달을 수 있으며 더불어 그 존재는 돈이나 육체나 사회적 명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머리속에 고립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내 제1자아를 치장할 수 없고 아무리 멋진 이성이 나를 사랑하여도 내 자아는 그것을 바라보고 인식할 뿐 사랑이 자아에게 무엇인가 해 주는 것은 없다. 내가 제왕이고 최고 연봉의 스타일지라도 대중들이 숭배하는 것은 나의 제2자아이며 그것은 제1자아가 걸치고 있는 의상에 불과하다. 제1자아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돈이나 문명이 해결해 주지 못하는 자신의 원초적인 하드웨어를 의식하고, 낡아가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공포에 젖는다.
석가모니는 제1자아가 사라지지 않는다고 주장한 셈이다. 훗날 데카르트가 그랬던 것같이 정신은 육체와는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이질적 존재이며 그것은 어떤 알 수 없는 경로를 통해 다른 세계를 유전(流轉)한다고 본 것이다. 석가모니는 제2자아가 컴퓨터 게임의 매력적인 아바타나 내가 플레이하는 아름다운 캐릭터에 불과한 환상이며 허상이라고 깨달았다. 그는 제1자아의 존재를 깨닫고 그 윤회를 알고 이 황당한 게임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불교의 가르침은 현대 인지과학 내지는 심리학이 도달한 것과 너무 유사하여 사람을 놀라게 한다. 숭산 스님의 일갈에 충격을 받은 현각 스님은 몇일 동안 이런 생각을 하며 구원의 길을 찾아 나선 것이라고 생각된다.
수행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이 감히 말하기는 어려운 것이지만, 그러나, 수행으로 제1자아의 본질을 과연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과학자의 시각에서는 스스로의 정신을 통제함으로써 본질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정신은 실험과 분석으로 접근할 수 있는 자연의 한 부분인 것이다. 정신의 불멸성도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두 개의 전극에 충전을 시키면 어느 순간 방전이 되며 불꽃이 튀는 것을 볼 수 있다. 전극이 더 이상 충전되지 않는다면 불꽃도 더 이상 없다. 불꽃이 너무나 뚜렷하기 때문에 불꽃이 어딘가 다른 세계에 여전히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과학적인 원리로 따지면 방전은 전기적 원리의 한 결과이며 그것이 따로 존재하는 세상이 있을 필요는 없다. 오랜 수행은 분명 수행자가 특별한 정신적 경지에 도달하게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다른 세계와의 통로일 것인가? 신경생리학은 프란체스코 교단의 수녀들이 집중된 기도를 하는 순간 정신의 환각 상태에 빠진다고 증명하고 있다. 인간의 의식이 매우 집중된 상태에 이르면 꿈을 꾸듯이 비현실적인 상태에 빠진다는 말이다. 과학자의 관점에서 보면 기도나 수행의 경지란 이런 의식 집중의 경지라고 보아진다. 그것은 아마도 집중에 의한 감각 통로의 차단일 것이며 꿈과 비슷한 상태일 것으로 추측된다.
적어도 모든 고등동물의 머리속에는 고유한 제1자아, 즉 의식이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사람과 다른 고등동물의 차이는 제1자아가 스스로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가의 차이이다. 아직 충분한 증명은 되지 못했지만 제1자아는 신경회로에서 일어나는 방전 같은 현상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신경회로가 만들어 내는 퀄리아(qualia)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Who are you?”라는 질문에 신경회로의 방전이나 자아에 대해 근원적으로 답을 할 수는 없지만 부처님의 말씀처럼 제1자아는 공(emptiness)처럼 보인다. 그것은 잠시 동안 신기루처럼 나타났다가는 사라지는 현상인 것이다. 제1자아는 인간을 비롯하여 고등동물들을 통합하고 조절하는 주체이고 제2자아는 살아 있는 동안, 특히 사회적 동물의 경우에, 주어지는 역할이다. 세포로 말하면 제1자아는 DNA에 수록된 유전정보이고 제2자아는 자신이 신경세포인가 상피세포인가 근육세포인가 하는 차이에 해당되며, 구체적으로는 내장의 어느 부분에 위치하는가 뇌의 어느 부분인가 하는 차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