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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름다운 은빛 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효종
빈센트 빌럼 반 고흐, Van Gogh ; 별이 빛나는 밤 http://youtu.be/VHJ6yMEGRx4 (1853년 ~ 1890년 ) 네덜란드 화가로 일반적으로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는 그의 작품 전부를 정신질환을 앓고 자살을 감행하기 전의 단지 10년 동안에 모두 만들어냈다. 그는 생존기간 동안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1901년 3월 17일 , 그가 죽은 지 11년 후, 파리 에서 71점의 반 고흐의 그림을 전시한 이후 그의 명성은 급속도로 커졌다. 인상파, 야수파, 초기 추상화에 미친 고흐의 영향은 막대하며 20세기 예술의 여러 다른 관점에서 볼수 있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은 그의 작품과 동시대인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고 네덜란드 오테를로에 있는 크뢸러-뮐러 박물관도 그의 그림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반 고흐가 그린 몇몇 그림들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순위에 매겨지기도 한다. 1987년 , 고흐의 그림 '아이리스'가 뉴욕의 소더비즈에서 5390만 미국 달러, 1990년에는 '가셰 박사의 초상'(첫째판)이 크리스티즈에서 8,250만 달러(한국돈으로 약 580억원)에 일본의 다이쇼와제지 명예회장 사이토 료에이(당시 74세)에게 팔림에 따라, 새로운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의 쥔더르트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집안은 종교적 활동과 미술을 추구했다.고흐는 진지하고 내성적이며, 어린이답지 않게 생각이 깊었다. 1860년에 로마 가톨릭교회 성격의 준데르트 마을 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기숙사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서 새로운 학교에 입학 하기까지 3년 동안 그의 여동생 안나와 함께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가 11세때에는 32km 나 떨어진 학교에 다녔는데, 그는 가족을 집에 놔두고 떨어져 있는 것을 싫어했고, 어른이 되어서도 그때를 회상하곤 했다. 후에 그는 칼리지에 다녔는데 고흐는 자신의 어린시절을 “우울하고 차가웠던 불모스러운”시간이라고 했다. 16살에는 삼촌 빈센트의 권유로 헤이그에 있는 구필 화랑에서 일하기 시작했는데 그의 동생이자 그가 평생의 우애로 아꼈던 그의 동생 테오도 나중에 그 회사에 들어왔다. 형제간 우애는 그들이 서로 주고받았던 엄청난 편지에 충분히 기록되어 있다. 그들의 편지는 화가의 삶에 많은 통찰을 주었고, 그가 예민하고 재능있는 작가라는 것도 보여 주었으며, 무명화가로서의 고단한 삶에 대한 슬픔이 묘사되어 있다. 테오는 형을 경제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1873년에 회사를 그만둔 그는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잉글랜드의 감리교학교에서 견습교사가 된 다음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왔으나, 이듬해 신학교를 그만두고 벨기에의 광산촌에서 평신도 설교자가 되었다. 광산에서 설교활동을 하던 그는 고용주의 착취를 받는 노동자 의 편에 서다가 해고되고 만다. 1880년, 27세때 그는 동생 테오의 제안을 따라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짧은 기간동안 그는 헤이그에서 안톤 모브로부터 그림 수업을 받았다. 고흐와 안톤은 곧 예술적인 관점의 차이로 헤어졌지만, 그가 빛을 다루는 방식과 붓 자국의 산만함이 그의 작품속에 스며있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885년 겨울에 고흐는 벨기에에 있는 안트베르펀의 미술 학교에 등록했다. 이 일은 실망만 안겨주 었는데, 그가 몇 달 후에 퇴학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흐는 그 기간 동안 일본화를 접하면서 밝은 색채와 캔버스 공간의 사용, 선의 처리법은 그에게 영향을 주어 그의 화풍에서 나타나고있다. 고흐는 정신장애로 인한 고통을 소용돌이와 원색의 노란색으로 표현하여〈프로방스 시골길의 하늘 풍경>〈별이 빛나는 밤>〈해바라기〉등의 걸작을 그렸다. 즉, 고흐의 그림속에는 정신적인 고통과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있는 것이다. 1888년 12월 23일에 그는 사창가 매춘부에게 자신의 왼쪽 귀 조각을 건넸다. 고흐는 매춘부의 신고 를 받고 도착한 경찰에 의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동네주민들은 그를 ‘미친 네델 란드 사내’라고 하며 그에게 마을을 떠나라고 강요했다. 그리고 그는 1889년 5월 8일, 생레미의 한 정신병원에 들어갔다. 1890년 7월 27일, 반 고흐는 들판으로 걸어나간 뒤 가슴에 총을 쏘았다. 총상은 치명적이었다.그는 집으로 돌아간 후, 이틀 뒤 동생 테오가 바라보는 앞에서 37세의 나이로 숨을거뒀다.그리고 몇개월 지나지않아 동생 테오도 매독을 앓다가 죽었다. 두 형제의 시신은 나란히 묻혔다. Vincent van Gogh's Starry Night Painting 별이 빛나는 밤 ( starry night ) 1889년 뉴욕현대미술관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계인이 가장 사랑하는 미술 작품은 빈센트 반 고흐(1853∼90)의 ‘별이 빛나는 밤’(1889)인 것으로 나타났다. 구글이 2011년 2월부터 유수의 미술관과 함께 진행한 ‘구글 아트 프로젝트’의 2년 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다. 글 아트 프로젝트는 뉴욕 현대미술관, 파리 오르세 미술관 등 세계 각 미술관의 대표 소장품들을 고해상도 카메라로 촬영해 인터넷 사이트(www.googleartproject.com)에서 볼 수 있도록 한 서비스다. 미술관별 위계나 상위 검색어 같은 서열은 따로 없다. 현재 46개국 262개 미술관의 작품 이미지 4만여 점이 올라와 있다. 국내에서는 한국사립미술관협회와 국립중앙박물관이 각 각 한국 현대미술과 고미술 이미지를 제공하고 있다. 《별이 빛나는 밤》은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별이 빛나는 밤을 정신병을 앓고 있을 당시의 고흐가 그린 작품이다. 1889년 상 레미의 정신병원에서 그린 그림으로써, 당시 고흐는 정신장애로 인한 고통을 그림속의 소용돌이 로 묘사했다. 빈센트 반 고흐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별이 빛나는 밤'은 그가 고갱과 다툰 뒤 자신의 귀를 자른 사건 이후 생레미의 요양원에 있을 때 그린 것이다. 고흐에게 밤하늘은 무한함을 표현하는 대상이었고, 이보다 먼저 제작된 아를의 '밤의 카페 테라스'나 '론 강 위로 별이 빛나는 밤' 에서도 별이 반짝이는 밤의 정경을 다루었다. 비연속적이고 동적인 터치로 그려진 하늘은 굽이치는 두꺼운 붓놀림으로 사이프러스와 연결되고, 그 아래의 마을은 대조적으로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를 보여준다. 교회 첨탑은 그의 고향 네덜란드를 연상시킨다. 그는 병실 밖으로 내다보이는 밤 풍경을 상상과 결합시켜 그렸는데, 이는 자연에 대한 반 고흐의 내적이고 주관적 인 표현을 구현하고 있다. 수직으로 높이 뻗어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사이프러스는 전통적으로 무덤이나 애도와 연관된 나무이지만, 반 고흐는 죽음을 불길하게 보지 않았다. 세계 고가 4위,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가셰박사의 초상 Portrait of Dr Gachet>1,660억원 (4. Portrait of Dr. Gachet by Vincent van Gogh - $138.4 million) 《가셰 박사의 초상 (첫째 판)》 빈센트 반 고흐, 1890년 캔버스에 유화, 67 × 56 cm 개인 소장 《가셰 박사의 초상 (둘째 판)》 빈센트 반 고흐, 1890년 캔버스에 유화, 67 × 56 cm 파리 시, 오르세 미술관 《가셰 박사의 초상》(Portret van Dr. Gachet)은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유화 그림이다.이 그림은 두 가지 판이 있는데, 두 작품 모두 반 고흐 생애의 마지막 달인 1890년 6월에 완성되었다. 두 그림 모두 폴 가셰 박사가 오른쪽 팔에 머리를 괘고 몸을 기울여 탁자에 앉아 있다. 첫째 판 그림은, 1990년에 일본 다이쇼와제지 명예회장 사이토 료에이에게 8,250만 달러에 팔려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이 초상화는 파리 근교의 오베르에서 그려졌다. 그림 속의 가셰 박사는 현삼과 식물인 디기탈리스(digitalis)를 들고 있다. 박사는 죽기 전의 고흐를 돌봤으며, 그림 그리기가 취미여서 고흐에게 좋은 친구가 되었다. 디기탈리스는 심장의 통증을 치료하는 강심제 의 재료가 되므로 가셰 박사를 상징한다. 이 무렵 고흐는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그림에 대해 이렇게 썼다. “ 가셰 박사 초상을 우울한 모습으로 보이게 마쳤어. 누가 보면 인상 쓰고 있다고 느껴질 정도야… 슬프지만 점잖고, 아직 명석하고 지적이게. 얼마나 많은 초상화 가 이렇게 되어야 했었나… 거기엔 현대의 정점이 있어... 오랫동안 지켜봐 왔던, 아마도 백년 후에도 고대하며 돌아보게 될... 1890년에 제작된 『가셰 박사의 초상』 첫 번째 작품은, 1990년 5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8천 250만달러에 일본 다이쇼와제지의 명예회장 사이토 료에이에게 낙찰되었다. 이 기록은 당시 세계 최고가 판매기록을 세웠다. 사이토 료에이는 자신이 죽으면 소장품인 이 그림과 함께 고흐와 르누아르 의 그림 등을 함께 화장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이후 전 세계 미술계의 반대로 1991년 5월 14일 발언을 취소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사이토 회장은 이날 성명에서 "중국에는 진시황의 점토 병마와 명 13능이 있다. 나는 이런 것들을 염두에 두고 반 고흐와 르누아르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다시말해 단지 그 작품들을 영원히 간고픈 소원을 표현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하였다. 사이토 료에이는 도쿄의 밀폐 보관실에 그림을 보관하였다. 이후, 이 그림은 미국인 수집가에게 4천 400만 달러에 팔렸으며 소유자는 공개나 전시를 원하지 않고 있다. 『가셰 박사의 초상』은 백년 동안 12명의 주인이 바뀌 었으며, 제임스 패터슨과 앤드류 그로스가 쓴 범죄 소설 《Lifeguard (2005)》에서 중요한 구실을 한다. File:Vincent Willem van Gogh 127.jpg 작품명 : 해바라기 제작년도 : 1888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93x73cm 소장위치 : 런던 국립 미술관 작품설명 : 발작을 일으킨 뒤 쓴 한 편지에서 고흐는 1888년 여름에 몰두했던 '진노랑의 색조'에 대해 말하고 있다. 거의 노란색으로만 그린 해바라기 연작 다섯 점이 바로 그 색조를 강력히 보여준다. 위 그림에서 보듯이 그 효과는 충격 적이다. <네 송이의 해바리기>와는 달리 고흐는 해바라기를 이루는 기본적인 색들만을 사용했다. 이 그림을 전반적으로 지배하는색은 노란색이다. 고흐는 노란색의 여러가지 *채도를 이용하여 그림을 그렸다. *용어해설: 색의 선명한 정도. 색의 삼 요소의 하나로, 유채색에만 있으며, 회색을 섞을수록 낮아진다. 작품명 : 감자 먹는 사람들 제작년도 : 1885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81.5x114.5 소장위치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작품설명 :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등잔불 밑에서 감자를 먹는 이 사람들이 접시에 가져가는 바로 그 손으로 감자를 수확했다는 사실이다. 이 그림은 육체 노동에 대해,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정직하게 음식을 벌었는가에 대해 말한다." 이것은 고흐의 그림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이 그림은 머리와 손, 구도 에 대한 많은 습작을 통해 얻어진 것이다. 그는 이 작업에 완전히 몰두했다. "내가 이 사물에 대해 가지고 있는 느낌은 꿈에서 그대로 되살릴 수 있을 정도야" 작품명 : 밤의 카페 테라스 제작년도 : 1888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81x65.5cm 소장위치 : 크뢸러 뮐러 미술관 (네덜란드 오텔로) 작품설명 : 두번째의 작품은 푸른 밤공기 속에 가스등 불빛에 비쳐진 카페의 바깥을 그린 것으로 파아란 별하늘이 내다보이고 있습니다.밤의 광장의 정경과 그 효과를 그리는 일, 혹은 밤 그 자체를 그리는 일에, 흠뻑 나는 열중하고 있습니다. 태양을 쫓아서 북쪽에서 남으로 내려왔고 또, 우연히도 자기를 닮은 해바 라기에 열중했던 고호가 가을에 접어들면서 갑자기 밤의 광경에 열중하게 되는것은, 인상파적인 흥미에서 로트렉 이나 드가가 밤의 광선에 열을 올리 던 것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타는 듯이 마음의 낮을 향했던 그의 눈은 마침내 마음 속의 보다 어두운 부분, 정신의 그늘진 부분을 향하게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푸른 별하늘과 가스 등의 이상한 노란색의 대조는 그의 마음속에 일고 있던 갈등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리라. 작품명 : 로노강의 별이 빛나는 밤 제작년도 : 1888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72.5x92cm 소장위치 : 프랑스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작품설명 : 두사람의 연인을 전경에 두고 국화꽃이 활짝 피듯, 강물에 비친 불빛의 그림자가 길게 리듬을 그리는 이 한폭의 아름다운 야상곡은, 섬세한 가락으로 놀랄 만큼 정서에 넘쳐 있다. 고흐의 리리시즘, 거의 항상 그 강도 와 밝기 때문에 리리시즘으로서의 외관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자연과의 공감을 바탕으로 그리려고 하는 그는 바로 본질적인 시인 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아를에 도착하자마자 밤의 아름다움을 몇 번이나 그리려고 마음먹었던 사실을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쓰여져 있다.그러나 그가 겨우 밤의 케마 에 착수한 것은 9월이 되고서였다. 전설에 의하면 이 지방의 별이 가장 아름 다운 달이 9월이었고, 고흐는 촛불을 그의 모자 위에 세우고 밤 경치를 그렸다고 한다. 작품명 : 파이프를 문 귀를 자른 자화상 제작년도 : 1889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51x45cm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강열한 적색과 황색에서 무서운 광기가 느껴진다. 반고흐 자신의 귀를 자른 뒤 곧 생 레미의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2년 뒤인 1890년 권총자살로 37살의 짧은 삶을 마감했다. 작품명 : 고흐의 집(노란집) 제작년도 : 1888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72x91.5cm 소장위치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작품설명 : 강렬한 푸름과 노랑으로 화면을 2등분하여 밝은 태양을 만끽하는 평화스러운 시골마을의 인상을 설득력있게 나타내고 있는 이작품은 그의 조형 적인 의도가 뚜렷이 느껴진다. 고흐는 1888년 5월에 아를의 역 가까운 라마르틴 광장에 있는 노란 집을 빌려 조금씩 손을 대고 가구를 넣어서 9월부터 옮겨 살았다. 고갱을 맞이하여 그의 그 불행한 비극을 일으킨 것도 이 집이었다. '코발트 색의 하늘, 태양의 숨결 속에 자리잡은 집이나 그 가까운 곳... 이 모티브 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기필코 나는 그것을 쓸만한 것을 해보이겠습니다.' 바깥은 노랑, 속은 흰색으로 되어 큰 방과 작은 방의 두 개를 갖춘 이 조금만 집을 빌린 5월에 바로 이사들지 못한 것은 동생 테오가 가구에 너무 비용이 들까 걱정 했기 때문이었다. 작품명 : 아를의 도개교 제작년도 : 1888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54×65cm 소장위치 :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작품설명 : 고흐가 아를에서 발견한 것 중에서 가장 그의 집념을 불러일으킨 모티브 중의 하나가 이 도개교이다. 아를에서 부크에 이르는 운하에 놓여 있는 이 다리는 네덜란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런 다리에 대한 향수를 그의 마음 속에 불러 일으킨 것이다. 네덜란드에 비하면 밝은 광선에 맑고 푸른 하늘과 물에 둘러싸인 굵고 가는 선의 결구로 이루어진 단순한 모양의 다리의 조형은 그의 표현의도에 알맞게 들어맞았던 것이다. 작품명 : 고흐의 방 제작년도 : 1889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56.5x74cm 소장위치 : 프랑스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작품설명 : 가장 유명하고 가장 사랑받는 이 그림은 1888년 아를에서 그린 원본을 토대로 생레미 요양소에서 제작한 두점의 복사본 중 하나다. 이 그림 은 원래 '노란 집'에 정착하게 된 것을 기념하는 뜻에서 그려졌다. 이 그림을 높이 평가했던 테오는 복사본을 더 제작하라고 부탁했다. 흥미로운 것은 여류 작가 조지 엘리엇의 소설 <<펠릭스 홀트>>가 이 그림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다. 한 부유한 남자가 비천하게 살아가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내용의 소설이었다. 이 그림은 아를에서 고흐가 품고 있던 희망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그 자신은 매우 만족하여 자신의최고작으로 꼽았다. "남성적이고 간결한 이 그림은 단조로운 색만으로 조화를 이루었다." '노란 집'은 그에게 영원한 안식처였다. 세계 고가 16. A Wheatfield with Cypresses by Vincent van Gogh - $85.7 million, 1,020억원 작품명 : 삼나무가 있는 보리밭 제작년도 : 1889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72.5x91.5cm 소장위치 : 런던 국립 갤러리 소장 작품설명 : 타오르듯 요동하며 무성하게 깔린 들의 풀들, 역시 불꽃 모양을 하고 하늘을 치솟는 올리브색의 측백나무,휘몰아치는 대기의 하늘,그러나 화사 하게 서로 어울리는 해조의 색채가 억제된 색조에 의하여 지극히 조용한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아를르에서 생레미로 옮겨간 고호는그곳에서 아를르 시대와는 다른 조화와 성숙을 달성하고 있다. 해를 쫓아다니는 해바라기에 공감 의식을 가졌던 그가 생레미에서는 힘찬 생장력을 가지고 하늘속을 뚫고 오르는 측백나무를 주제로 열중하고 있다. 얼피보면 그는 격렬한 사나이로만 보이나, 그것은 그의 일면일 뿐, 이 작품이 갖는 안정감,섬세함,조화,억제는 또 다른 일면으로 부각된다. 고호 자신도 이 작품을 "내가 그린 가장 명성한 작품" 이라고 부르고 있다. 작품명 : 아이리스(붓꽃) 제작년도 : 1889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71x93cm 소장위치 : 게티 미술관 (캘리포니아) 작품설명 : 이 유명한 그림은 아를 주민들의 비난을 피해 요양원에 와서 안정을 얻게 된 고흐의 푸근한 마음을 표현한다. 이 그림은 이곳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정원에서 제작했다. 금잔화가 붓꽃의 행진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이 그림은 마치 기념식에 참가한 군중들 같은 생동감을 준다. 색채는 본능적으로, 통제되어 있다. 고흐의 격렬한 감정은 정교 하게 관찰한 실제 꽃의 느낌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세계 고가 11위,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수염이 없는 자화상 Portrait de l'artiste sans barbe> 1,130억원 (11. Portrait de l'artiste sans barbe by Vincent van Gogh - $94.5 million) duga10.jpg 채 기온과 습도가 완벽하게 조절되는 특수 전시실에 보관했다고 세계 고가 7위,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우체부 조셉 룰랭 Portrait of Joseph Roulin>1,210억원++추가 예상 (7. Portrait of Joseph Roulin by Vincent van Gogh - $100.9++ million) duga6.jpg 세계 고가 9위,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붓꽃 Irises>1,210억원 (9. Irises by Vincent van Gogh - $101.2 million) duga8.jpg 이 그림은 아를 주민들의 비난을 피해 요양원에 와서 안정을 얻게 된 고흐의 푸근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를 체류 시절 유일한 친구로 귀를 자른 반 고흐를 돌봐주었던 우체부 조셉 룰랭의 초상화. 구름 낀 하늘 아래의 보리밭 1890 년.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건강을 위하여 뜰에서 제작을 하고, 꽃이 피는 것을 보기도 하는 것은 정말 좋은 일입니다. 바다와 같은 넓은 언덕을 향하여 펼쳐져 가는 보리밭의 그림에 지금 열중하고 있습니다. ' 최후의 3점의 대작의 하나로, 이것도 어두운 폭풍 속에 있는 보리밭이다. '저는 완전히 이 보리밭의 대작에 소모당하고 있습니다'라고 그는 어머니에게 써 보내고 있었다. 그가 자살을 시도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이 작품은 색채 면에서 '까마귀가 있는 보리밭'만큼 불길해 보이지 않지만, 무서운 공백감은 불길 이상의 종언의 예고와도 같은 작품이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 1890년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또 돌아와서 작업에 들어간다. 그러나 손에서 붓이 떨어지려고 한다. 나는 내가 바라고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러나 다시 3점의 대작을 완성한다. 그것은 폭풍의 하늘에 휘감긴 보리밭의 전경을 그린 것으로 나는 충분한 슬픔과 극도의 고독을 표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테오에게의 편지에 이렇게 적고 있다. 오베르의 종말기에 그는 옆으로 길게 된, 그에게 있어 새로운 규격의 그림을 시도했다. 지평선에의 넓은 전망에 대한 그의 잠재의식이 예견한 종말의 의식과 함께, 대지가 폭풍 속에서 바다처럼 사납게 일렁이는 거기에 까마귀가 활개치며 나르는 불안한 화면을 통하여 그는 영혼의 고독과 슬픔을 절규하고 있다. '앞날의 예감도 어둡다. 나는 미래를 행복한 빛 속에서 보는 것은 전혀 되지 않는다.' 절망감은 그를 못견디게 하고 있다. * * * * [역사속라이벌]고갱을 끊임없이 질투한 고흐 라이벌은 비슷한 실력을 갖추어야 라이벌 관계가 형성된다. 실력에 차이가 나면 아무리 노력해도 라이벌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이벌은 자신의 실력 을 향상시킬 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노력해도 안 된다는 절망감을 선사하는 사람이기도 한다. 라이벌 관계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라이벌을 끊임없이 질투하고 끊임없이 비교함으로서 자신의 예술적 경지를 끌어 올린 화가가 고흐다. 고흐는 고갱과의 만남이 있었기에 자신의 예술 세계를 변화 시킬 수 있었다. 고흐와 고갱이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고흐의 동생 테오 때문이다. 사실 고갱은 내성적이고 괴팍한 고흐와 친구할 생각이 없었다. 고갱은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 지만 화상이었던 고흐의 동생 테오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당시 고갱은 그림 을 그릴 공간은 물론 먹고 살기도 힘들 정도로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마침내 고갱은 남프랑스 아를에 있는 고흐의 작업실에로 이사를 한다. 고흐가 아를에 있는 작업실 노란 집에 고갱을 초청한 것은 화가들의 공동체 설립을 꿈꾸 었기 때문이다. 노란 집에서 고흐는 고갱을 대다한 화가라고 생각해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학생처럼 행동했다. 두 사람은 수많은 주제를 연구했으며 서로의 작품 을 비교하고 토론한다. 하지만 고흐는 신중한 성격에 합리주의자였던 고갱과 비교할 때마다 참을 수 없었 으며 고갱은 낭만주의자였던 고흐를 혐오한다. 고흐는 우연을 기대하며 색을 칠한 다면 고갱은 무질서한 작업보다는 원시적 것을 더 좋아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고흐는 그림 표면에 윤곽선을 두르는 고갱의 방식을 따르면서 자신의 재능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다. 고흐는 자신과 고갱의 방식의 차이를 깨달은 순간부터 고갱의 예술적 라이벌이 된 것이다. 고흐와 고갱의 다른 성격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 고흐가 그린 의자다. 먼저 고흐가 자신의 의자를 그린 작품이 <파이프가 놓인 빈센트의 의자>다. 의자 위에 파이프와 담배쌈지가 놓여 있는 소박한 의자다. 빈 의자는 사람들의 무관심에 대한 두려운 그의 내면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 작품에서 빈 의자가 상징하고 있는 것은 고갱이 떠난 후 그가 느꼈던 외로움과 절망을 암시하고 있다. 노란색의 의자는 희망을 상징한다. <파이프가 놓인 고흐의 의자> 1888년 캔버스에 유채 93x73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책과양초가 놓인 고갱의 의자> 1888년 캔버스에 유채 90x72 암스테르담 국립 반 고흐 미술관 소장 고갱에 대한 고흐의 생각이 드러나고 있는 작품이 <책과 양초가 놓인 고갱의 의자>다. 고갱의 의자는 고흐의 의자보다 좀 더 세련되고 팔걸이도 있다. 의자 위에는 촛불과 책이 놓여 있는데 고갱의 열정과 지식을 나타낸다. 고흐의 의자와 반대로 빨강과 녹색 을 사용하고 있는데 밤의 카페와 잃어버린 희망을 상징한다. 고흐의 노란 집에는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의자가 없었다. 영국 더 그래픽이라는 잡지 에서 영국 화가 필데스가 드로잉한 찰스 디킨스의 의자를 보고 매료된 고흐는 잡지에 실린 화려한 의자가 고갱과 어울린다고 생각해 그린 것이다. 두 작품에서 사물 표면에 검은색 테두리를 그린 것은 고갱의 방식을 따른 것이다. 하지만 노린 집에서 고흐는 고갱과 함께 살면서 자신의 재능을 확인했지만 한편으로는 점점 고갱에게 집착한다. 고갱은 자신에게 집착하는 고흐를 떠나고 싶었지만 고흐의 희망과 신뢰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떠나지 못한다. 결국 고갱의 외출을 의심하고 있었던 고흐는 그를 미행한다. 그 일로 두 사람은 다투게 되었고 고흐는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라 매춘부에게 주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양 집으로 돌아왔다. 매춘부의 신고를 받고 경찰이 고흐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자 고갱은 은밀하게 아를을 떠난다. 그 사건으로 고흐와 고갱과의라이벌 관계가 끝이 난다. 라이벌과 지나친 비교는 오히려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려대신문 news@kukey.com> * * * * (감상) 도대체 반 고흐는 미술계에서 어찌하여 최고의 화가로 추앙받고 있으며 애호가들의 사랑 속에 그의 그림은 경매시장에서 최고가 행진을 하고 있을까? 그것은 드라마 같은 37년의 짧은 일생, 작가의 생애 - 불우, 정신병, 귀를 자름, 권총 자살, 이루지 못한 사랑, 창녀와의 동거 등등... 곤궁했던 그의 삶 마지막 10년간 정신병의 고통 속에서도 열정을 다하여 혼을 담은 그림이 생전에는 묻혀있다가 사후 십여년 후에야 빛을 보게된 아쉬움과 애틋함이 있을 것이며, 동생 테오와 주고 받았던 편지속에서 두터운 형제 애와 화가의 깊은 고뇌가 솔직하게 드러나 많은사람들에게 동정심을 유발시키는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 거기에 친구 고갱과의 심한 라이벌 경쟁도 한몫을 하며 지금도 애호 가들의 흥미를 돋구는 화제거리가 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미루어 볼때, 최근이라고도 할수 있는 두어세대전에, 현대사회로 접어들면서 그의 생애가 매스컴의 신속한 전파로 애호가들에게 파급되면서 화가에 대한 동정심이 폭증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수세기에 걸쳐 천재화가들이 등장하였지만, 그의 명성이 뚜렷히 각인되는 것은 흔이 말하는 시대적인 타이밍이 잘 들어 맞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것이다. 미술사의 시작점을 찍으며 회화예술에 빛은 던진 화가로 추앙받는 13세기 조토 디 본도네 이래로 수세기에 걸쳐 특출난 화가들이 등장하며 대중들에게 감동을 주었지만 세월의 흐름 따라 점차 잊혀져가고, 새로운 대중들은 새로 등장하는 화가와 새로운 미술사조에 동화되 는 것이 역사의 순리이며, 이전부터 내려오던 미술의 흐름이 반 고흐의 등장으로 새로운 물결인 인상파, 야수파, 추상파 탄생에 영향을 미치며 20세기 현대미술사의 막을 열었다는 역사적인 의미도 한몫 하였을것이다. 지난날 중학교 시절, 미술책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고흐의 그림,그때 임규삼 미술선생님이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실감나게 들려주시던 그림이야기 ㅡ " 칼로 베어낸 귀를 손에 잡고 절규하는 고호 ! " (일본식 발음) " 정신병과 심한 우울증, 권총으로 자신을 쏴... " 벌써 60년전이지만, 지금도 뚜렷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은 애절한 화가이야기에 가슴조이며 듣던 급우들의 심각한 표정과 무겁게 내려앉은 그 때 교실분위기가 고흐의 그림을 대할때마다 떠 오르는 것은 그를 향한 애틋한 연민의 정 때문이다. 일의(Earl) * * * * (미술이해) 후기인상주의(Post impressionism) 인상주의의 단계를 거치면서도 그 양식의 한계에 만족하지 못하고 갖가지의 방향으로 인상주의를 넘어선 일군의 화가들을 가리킨다. 인상주의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독자 적으로 해결책을 추구하던 이들 작가군을 인상주의 이후의 세대라는 포괄적인 관점에서 후기인상주의 화가 라는 명칭을 얻게된다. 이들은 이상주의가 지나치게 순간적인 시각세계에만 사로잡혀 있다고 믿었기에 보다 개인 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에 근거한 미술을 추구해야 함을 표방했다. 세잔느,고갱,고흐로 대표 된다. *현대미술의 시작은 언제일까? 시작시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대체로 리얼리즘이나 인상주의를 현대미술의 대표적인 시작으로 본다. 따라서 이 두 사조가 시작된 19세기 중엽의 프랑스 미술이 대표적인 얼굴마담 역할을 맡게 된다. 마네, 모네, 세잔, 고흐, 고갱 등의 유명 작가들이 이 시기, 이 사조의 대표 작가들이다. 과거의 미술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많은 주제들을 표현의 방법으로 선택해 왔다. 그중 가장 기본이 되는 것들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뉠 수 있다. 첫째 고대 그리스-로마신화가 그것이며, 둘째 로마제국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경의 내용이 그것이다. 성경의 내용은 다시 구약, 신약 그리고 성인들의 일화로 세분화하여 나뉘 어진다. 인상주의 이전의 모든 서양미술이 이 세 가지만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 이 아닐 것이다. 특히 유럽 여러 나라의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많은 대가들의 작품들은 대부분 이 내용을 표현의 수단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서양미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먼저 이들 그림의 내용을 알고 있어야 함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