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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나라는 그렇다 하더라도, 유럽과 서남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터키인들은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2002년 월드컵 당시 우리는 머나먼 이역만리(異域萬里) 터키인들이 우리 대한민국, 꼬레를 형제의 나라라고 여기고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됩니다. 왜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6.25 때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견했다고.
그렇지만 뭔가 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우리가 베트남에 참전했다고 해서 베트남을 형제의 나라로 여기지는 않지 않습니까?
그리고 "왜?" 그렇게 많은 병력을 파견했을까요?
실제로 많은 군대(1만4936명, 전사 721명, 부상2147명)를 파견해 우리를 도왔으며, 파병이 늦어지자, 터키의 고등학생들이 『왜 형제의 나라에 군대를 파견하지 않느냐』면서 데모를 벌였다는 말이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중공군에 밀려 연합군들이 후퇴를 할 때도 물러나지 않고 끝까지 용감하게 싸우는 바람에 많은 희생자도 났다는데, 자기나라일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요?
서양으로 간 동양인 "투르크족"의 나라
터키는 한자로 돌궐(突厥)이라고 표기하며 우리와 같은 우랄알타이어족입니다.
터키는 서쪽으로 그리스와 불가리아, 동쪽으로는 그루지아, 아르메니아, 이란, 남쪽으로는 이라크, 시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습니다. 터키의 북쪽국경은 흑해와 연결되어 있구요. 남쪽과 서쪽 국경은 지중해와 맞닿아 있습니다.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관문역할을 하는 곳이 바로 터키인 셈이지요.
역사나 신화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아마 히타이트, 미다스왕, 그리고 트로이 전쟁등에 대해 친숙할 겁니다.
이들이 자리한 곳이 바로 지금 터키가 자리한 "아나톨리아 반도"입니다.
흔히, 그리스 신화에서 "소아시아"라고 지칭되는 곳이 바로 터키이지요.
그러나, 지금의 터키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과거의 히타이트족도 아니요, 미다스왕의 후예들도 아니며, 과거 트로이의 백성들도 아닙니다.
지금 터키의 국민들은 머나먼 아시아 대륙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이른바 "투르크족"이라 불리는 사람들이지요.
과거 중국인들이 흉노족, 돌궐족이라 칭했던 바로 그 족속들이 "투르크족"입니다. 중앙아시아의 대초원을 호령했던 유목민족인 돌궐이 8~9세기경 당나라의 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쪽으로 서쪽으로 이동했고(이 시기는 당태종, 당고종등 당나라 전성기이며, 우리나라는 고구려가 멸망한 때와 동시대입니다) 이들이 정착해서 나라를 세운 것이 바로 지금의 터키의 전신이라 할 셀주크 투르크, 오스만 투르크 제국인 거죠.
구이(九夷)족의 우두머리 "동이(東夷)족"
<.... 먼 옛날부터 나라가 있는데, 이를 "동이(東夷)"라 한다. 그 나라에 단군(檀君)이라는 훌륭한 사람이 태어나니 동쪽에 아홉 부족 구이(九夷)가 그를 받들어 임금으로 모셨다. 순(舜)이 중국에 와서 요(堯)임금의 다음 임금이 되어 백성들에게 사람 노릇 하는 윤리와 도덕을 처음으로 가르쳤다. (중략)
그 나라는 비록 크지만 남의 나라를 업신여기지 않았고, 그 나라의 군대는 비록 강했지만 남의 나라를 침범하지 않았다. 풍속이 순후(淳厚)해서 길을 가는 이들이 서로 양보하고, 음식을 먹는 이들이 먹는 것을 서로 미루며, 남자와 여자가 따로 거처해 섞이지 않으니, 이 나라야말로 "동쪽에 있는 예의바른 군자의 나라<東方禮儀君子之國>"가 아니겠는가? >
중국 사서인 "동이열전(東夷列傳)"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요순 시대때부터 중국의 황화문명과 대등한 지위의 동방문명이 있었으며, 우리의 선조인 동이족이 그 동방문명에서 종주국(宗主國)의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어가 알타이어 계통이란 건 다들 아실 겁니다.
몽골어, 위구르어, 그리고 터키인들이 사용하는 투르크어가 바로 우리와 같은 알타이 언어이지요. 고조선때부터 만주와 몽골초원과 중앙아시아대평원에 넓게 위치한 유목민족들의 총칭인 구이(九夷)족의 일원으로써, 우리 한민족과 투르크족은 상호공존(相互公存)해 왔던 것이죠.
한(漢), 고조선과 흉노
중화민족(中華民族) 중심 사관(史觀)으로 보는 중국의 역사는 크게 보면 농경민족인 중화족과 북방 유목민족간의 투쟁의 역사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화민족이 통일국가를 경영하는 한(漢),당(唐),송(宋),명(明)의 시대는 치세(治世)요. 그렇지 않은 때는 역사가 정체되는 난세(亂世)로 보는 그러한 시각인데요.
그런 관점의 연장선에서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어야 하고, 그래서 모든 나라는 중국을 다스리는 천자(天子)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세계관을 가집니다.
이러한 세계관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따르는 자들은 제후국으로 삼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무력으로 정벌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우리 역사상 이런 중국의 세계관에 불응한 나라가 둘 있었는데요.
그것이 바로 고조선과 고구려 입니다.
그리고, 고조선과 고구려는 자신을 중화문명에 대항하는 동방문명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그러한 세계관을 갖고 있었구요.
이런 중화민족 위주의 세계질서에 반대하는 제 세력들은 상호 연대할 필요를 가지게 되지요.
원래 한 뿌리였고(환인,환웅시대), 공통의 이익을 가지는 고조선과 흉노족이 서로 친하게 지냈을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구요.
한나라 입장에서는 중화 위주의 세계질서 편입에 반대하는 두개의 세력, 즉 동방의 고조선과 북방의 흉노와의 싸움을 벌이게 됩니다.
한 무제때에 이르러 비록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장수중 아무도 상을 받지 못할 정도로 어렵게 고조선을 멸망시킵니다.
그리고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다고 하구요.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은 것이 흉노를 막기 위함이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만리장성에도 불구하고 진을 이은 한(漢)은 흉노를 막지 못합니다.
중국을 재차 통일한 한고조(유방)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당시 흉노의 지도자였던 묵특선우(冒頓單于)와 백등산(白登山)에서 맞서 싸우게 됩니다.
결국 이 싸움에서 패한 한고조는 흉노와 신속관계(臣屬關係)를 맺게 되구요.
이후 흉노의 선우(지도자명칭)에게 공주를 시집보내고 해마다 많은 양의 견직물·술·쌀 등의 공물을 흉노에게 바쳐야 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죠.
그리고, 중화(中華)를 형성한 것으로 얘기되고 있는 한 무제가 왕위에 오릅니다.
한고조 유방의 치욕적 패배 이후 아마도 절치부심 했었던 걸로 보이는데요.
우선 앞서 얘기한 바와 같이 동방의 적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무제는 북방의 흉노와 전쟁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월트디즈니사의 영화 ‘뮬란’의 배경이 이때로 추측됨).
이후 한무제 치세 내내 무려 50년간 한-흉노의 싸움은 이어지게 되구요.
끝내 한무제는 흉노를 굴복시키지 못한 채로 숨을 거두게 됩니다.
이후 한무제의 아들 한소제는 흉노와의 화친(和親)을 도모하게 되고, 결국 양자는 대등한 관계로 서로의 왕실이 통혼(通婚)하는 관계로 발전하게 됩니다.
한(漢)도 흉노도 서로를 굴복시키지 못한 채로 평화의 시대를 열게 되는 거죠.
이후 1세기경 흉노는 남흉노와 북흉노로 갈라지게 되구요.
오랜 투쟁 끝에 남흉노에 의해 밀려난 북흉노는 서쪽으로 그 근거지를 옮기게 됩니다.
이것이 서양사에 나타나는 훈족(헝가리)의 출현이구요.
또한 이 훈족에게 밀려난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로마제국의 멸망을 이끌어 낸 것은 익히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그리고 한(漢)나라가 위치한 중국 또한 220년 조조가 위를 세우는 시점부터 시작해서 근 400년간 열국이 중국대륙을 분할 통치하는 대난세인 위,진,남북조 시대로 접어들게 되구요.
중국이 혼란에 접어든 거의 동시대에 북방 유목민족들도 여러갈래로 나뉘어져 역시 혼돈스런 시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당(唐), 고구려와 돌궐
사실 고조선을 무너뜨리고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다곤 하나, 실질적으로 한사군의 고조선 영역 지배는 채 반세기를 넘지 못했을 걸로 보는 게 맞을 겁니다.
왜냐하면, 위에 언급한 한-흉노의 50년간의 대전쟁을 이어가기에도 여러모로 벅찼을테고, 실제 고구려를 무너뜨린 당나라도 고구려의 옛 영역을 지배한 건 채 반세기가 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중화민족은 오랜기간 만리장성 이남을 중화족의 영토로, 만리장성 너머는 새외(塞外)로 인식해 왔습니다.
농경민족인 중화민족이 유목민들의 땅을 탐낼 이유도 사실 없구요.
어디까지나 요하의 서쪽인 요서까지를 중화민족의 세계로 인식해 왔다고 보는 게 맞지 싶습니다.
어쨌든, 한(漢)의 멸망이후 중국이 혼란에 빠져 있던 때에, 고구려는 고조선의 후계자임을 자처하며 고구려를 축으로 하는 새로운 동방문명권을 건설하게 됩니다.
과거 동이족이 구이족의 우두머리 였던 것처럼 말이지요.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는 직접 통치하고, 신라와 거란(키타이), 동예, 말갈, 왜국등은 직간접적인 영향권에 두는 식으로 실질적인 동북아시아의 패자(覇者)로 군림했습니다.
오랜기간 혼란에 휩싸여있던 중국은 결국 589년 수의 양견에 의해 다시 통일되게 되구요. 그리고 이제 천하(天下)의 패권을 두고 수, 당과 고구려 간의 대문명전쟁은 자그마치 70년간이나 이어지게 됩니다.
당시 고구려는 두가지 성격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평양성을 본거지로 하는 농경문명적 성격이구요.
또 하나는 동북방 유목국가의 종주국으로써의 성격이었습니다.
즉, 유목과 농경의 두가지 국가상이 하나로 어울어져 있는 국가가 바로 고구려라 할 수 있는 거죠.
이런 연유로 수,당과 고구려간의 70년 문명전쟁에서 키타이(거란), 말갈, 그리고 돌궐등의 유목국가들은 고구려와 연합해서 수,당과 맞서 싸우게 됩니다.
이 때도 여전히 터키인들의 조상인 우리들의 조상과 더불어 싸운 형제국가였던 거죠.
투르크의 직속 선조라 믿어지는 돌궐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6세기 중엽(수가 중국을 통일하기 수십년 전)의 일입니다.
서기 552년 유연(몽골의 선조로 보임)을 무너뜨리고 몽골고원으로부터 준가르분지에 이르는 일대를 장악하게 됨으로써, 돌궐은 북방의 새로운 강자로 역사의 전면에 그 모습을 나타내게 됩니다.
이후 돌궐은 채 20년의 시간동안 동쪽으로는 만주(고구려와 국경을 닿게 되죠), 서쪽은 비잔틴제국의 북쪽, 남쪽으로는 힌두쿠시에 이르는 대판도를 실현하게 됩니다. 만리장성 이북의 초원지대를 석권하게 된 셈이죠.
그러나, 이런 대 제국 실현도 잠시 583년(수의 중국통일 6년전) 돌궐은 동서로 분열되게 됩니다.
그리고, 당나라가 수를 멸망시킬 때 동돌궐 기마군단의 도움을 받게 되기도 합니다. (618년).
그러나, 630년 동돌궐은 내부 혼란으로 말미암아 당태종 이세민에게 복속됨으로써 그 생을 마치게 되구요.
서돌궐은 천산(天山) 일대를 그 근거지로 하여 중앙아시아와 서북 유라시아를 지배했습니다.(현재의 티벳, 카자흐스탄등 중앙아시아 일대) 서돌궐은 동돌궐이 멸망한 이후에도 비잔틴 제국(동로마제국)과 동맹하고 사산조 페르시아(지금의 이란)에 공격을 가할 정도로 한 때 강성했었으나, 역시 내부혼란을 틈탄 당고종의 공격으로 657년 멸망하게 됩니다.
전경에 순망즉치한(脣亡則齒寒)이라고 하듯이, 당 북서쪽의 강력한 동맹세력을 잃어버린 고구려도 결국 11년뒤인 668년 멸망하게 되구요.
이 때 패망한 투르크인들 일부는 서쪽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압바스 왕조등에서 용병등으로 일하던 이들 투르크인들은 결국 투르크인들의 나라를 세우게 되고, 이것이 셀주크 투르크, 이후 오스만 투르크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힘을 키운 오스만 제국은 1453년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콘스탄티노플이란 고도(古都)를 이스탄불로 개칭하여 자신들의 수도로 삼은 후, 유럽의 패자가 되게 되는 거죠.
그리고, 이 유럽화한 오스만 제국이 바로 터키의 전신(前身)이 되는 거구요.
원래, 나라와 나라사이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는 법이지만 돌궐과 고구려는 계속 우호적이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를 "형제의 나라"라 불렀고 세월이 흘러 지금의 터키에 자리잡은 그들은 고구려의 후예인 한국인들을 여전히 형제의 나라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즉,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형제의 관계였던 것이죠.
그렇다면 의문점 하나. 우리는 왜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까요?
그리고 터키인들은 왜 아직도 우리를 형제의 나라라고 부를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역사 교과서의 차이죠.
우리나라의 중,고 역사 교과서는 "돌궐"이란 나라에 대해 단지 몇 줄만 할애하고 있을 뿐입니다.
터키는 다릅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경험했던 터키는 그들의 역사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에서 역사 과목의 비중이 아주 높은 편이며 돌궐 시절의 고구려라는 우방국에 대한 설명 역시 아주 상세합니다.
"형제의 나라"였다는 설명과 함께.
그래서 대부분의 터키인들은 한국을 사랑합니다.
설령 한국이 그들을 몰라줄지라도..
실제로 터키인들은 한국인들 역시도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인들도 터키를 형제의 나라라 칭하며 그들을 사랑할 것이라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88 서울 올림픽 때 터키의 한 고위층 관계자가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자신을 터키인이라 소개하면 한국인들에게서 큰 환영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은 데 대해 놀란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었습니다.
"터키라는 나라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돌아온 답은 대부분 "아니오"였죠.
충격을 받고 터키로 돌아간 그는 자국 신문에 이런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합니다.
"이제.. 짝사랑은 그만합시다.."
이런 어색한 기류가 급반전된 계기는 바로 2002 월드컵입니다.
"한국과 터키는 형제의 나라, 터키를 응원하자"라는 내용의 글이 인터넷을 타고 여기저기 퍼져나갔고 터키 유학생들이 터키인들의 따뜻한 한국사랑을 소개하면서 터키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이 증폭되게 되었뇨.
6.25 참전과 올림픽 등에서 나타난 그들의 한국사랑을 알게 된 한국인들은 월드컵을 치르는 동안 터키의 홈구장과 홈팬들이 되어 열정적으로 그들을 응원했습니다.
하이라이트는 한국과 터키의 3,4위전.
자국에서조차 본 적이 없는 대형 터키 국기가 관중석에 펼쳐지는 순간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수많은 터키인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합니다.
경기는 한국 선수들과 터키 선수들의 살가운 어깨동무로 끝이 났고 터키인들은 승리보다도 한국인들의 터키사랑에 더욱 감동했으며 그렇게.. 한국과 터키의 "형제애"는 더욱 굳건해졌습니다.
터키의 언어에는 순우리말과 비슷한 단어가 참 많습니다.
말뿐 아니라 음식, 문화, 습성, 국민정서 (터키인 우월주의에, 감정적 다혈질이면서 반대로 다정다감하고, 거나하게 놀기 좋아하고, 어쩜 그렇게 성질 급한 것까지..)도 상당히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과거 돌궐(투르크 => 터키)과 고구려는 그냥 우방이 아니라, 이와 잇몸 같은 관계였다고까지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돌궐의 공주와 결혼을 하였을 정도니까요.
같은 우랄-알타이 계통의 언어를 사용했지만 통일신라시대 이후 우리는 중국의 영향으로 한문을 사용했고, 터키는 아랍의 영향을 받아 언어는 전혀 다르게 발전하게 됩니다.
유전학이나 인류학적으로도 터키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몇개 안되는 북방계 몽골리언국가(몽고, 한국, 일본, 에스키모, 인디언) 중 하나로, 헝가리 와 함께 북방계 몽골리언의 유전자가 많이 남아있는 유럽국가입니다.
터키인은 "코리아"의 어원이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의 영문표기라는 것까지도 알고 있습니다. 대단한 형제사랑이지요.
그렇다면, 북한도 같은 민족인데 어째서 한국과 형제인 터키가 6.25 때 남한편에만 병력을 파병했을까..
한국과 일본의 관계만큼이나 아르메니아인들과 터키는 견원지간(犬猿之間)입니다. 아니, 원수지간이라는 말이 더 적절하겠네요.
과거 아르메니아인(오스만 기독교인들)들이 터키인(투르크 이슬람교도)에게 대학살을 당했기 때문이지요.
과거 오스만터키에서 소수민족들이 독립을 하면서 쇠약해진 국력과 맞물린 굴절된 민족주의로 말미암아 아르메니아인 수천명이 죽임을 당하는 1차 대학살의 참사가 벌어집니다.
유럽으로 남진하려하는 러시아의 힘을 얻어 루마니아와 세르비아가 독립을 하게되고 오스만터키의 아르메니아 영토 대부분을 러시아가 차지하는 셈이 되자 이에 분노한 투르크인들이 러시아와 붙어먹은 아르메인들을 표적으로 인종청소라는 대학살을 감행한거죠.
1차 대학살 20년후 또 다시 오스만터키 정부의 도움을 받은 투르크 이슬람교도들은 아르메니아인 5만명에 대학살을 자행합니다. (2차대학살) 게다가 정부는 학살된 아르메니아인 외 175만명을 추가로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로 추방하고 그 추방하는 과정에 60만명이 사막에서 목숨을 잃게 됩니다.
(1894년~1915년까지 250만명이였던 아르메니아인은 30만명만이 살아남게 됩니다.)
그후 1912년 발칸전쟁 때 몬테니그로, 불가리아, 그리스가 오스만터키에서 독립할 때도 알게모르게 러시아가 개입하여 아르메니아인을 도와줍니다. 따라서 러시아가 북한을 지원하기 때문에 당연히 터키는 그 반대 쪽인 남한에만 병력을 파견한 거지요.
물론 혹자는 당시 터키가 미국과의 우방적 연계로 말미암은 국제적 이득을 노린 선택일 뿐이였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역사의 흐름이라는 큰 범주에서 바라본다면, 터키가 한국전쟁때 우리의 동맹국 중의 하나였던 이유가 필연적으로 러시아와 적대 관계일 수 밖에 없는 과거사 때문이였다고 보는게 타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형제의 나라
최근 대한민국 축구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으며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선수가 아닌, 더구나 한국인이 아닌.... 2002년 월드컵 당시 투르크전사라고 불리우던 터키축구대표팀의 수장이었던 현 FC서울의 세뇰귀네스감독입니다.
한 때 대학 교수로도 재임했었다는 귀네스감독이 얼마 전 인터뷰 중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국인은 ‘빨리빨리’하는 것 등 터키인과 유사점이 많습니다. 역사공부를 해 봐서 알지만, 한국과 터키는 같은 민족이었다고 확신합니다......”
한국의 경제성장을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자부심을 갖는 나라, 2002년 월드컵 터키전이 있던 날 한국인에게는 식사비와 호텔비를 안 받던 나라.. 월드컵 때 우리가 흔든 터키 국기(國旗)가 터키에 폭발적인 한국 바람을 일으켜 그 후 터키 수출이 2003년 59%, 2004년 71%나 늘어났다는 KOTRA 통계가 있습니다.
고구려의 멸망 이후 1,400년 가까이 지난 2005년 4월 14일, 대한민국 원수로서는 처음으로 우리 노무현 대통령이 터키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히타이트 [Hittite]
BC 2000년이 시작될 무렵 아나톨리아에 등장해 BC 1340년경 근동의 지배세력이 된 인도유럽어족.
미다스[Midas]
고대 신화에 나오는 어리석고 욕심많은 왕
트로이 전쟁[― 戰爭, Trojan War]
초기 그리스 사람들과 서(西)아나톨리아의 트로이인 사이에 일어난 전설적인 싸움.
이후의 그리스 작가들은 그 시기를 BC 12세기 또는 BC 13세기경으로 추측했다.
동이열전(東夷列傳)
위나라 안리왕 10년에 공자(孔子)의 7대손(七代孫) 공빈(孔斌)이 고대 한국에 관한 이야기를 쓴 책
東方有古國, 名曰東夷,星分箕尾, 地接鮮白.始有神人檀君, 遂應九夷之推戴而爲君, 與堯竝立.
虞舜生於東夷而, 入中國爲天子, 至治卓冠百王, 紫府仙人,有通之學,
過人之智, 黃帝受內皇文 於其門下, 代炎帝而爲帝.
小連,大連, 善居喪, 三日不怠, 三年憂, 吾先夫子稱之.
夏禹塗山會,扶婁親臨而定國界.有爲子以天生之聖人,英名洋溢乎中國.
伊尹受業於其門而, 爲殷湯之賢相.
其國雖大,不自驕矜,其兵雖强不侵人國, 風俗淳厚,行者讓路,食者推飯,
男女異處而不同席,可謂東方禮儀之君子國也
是故殷太師箕子,有不臣於周朝之心而,避居於東夷地 吾先夫子,
欲居東夷而,不以爲陋,
吾友魯仲連, 亦有欲踏東海之志. 余亦有欲居東夷之意,
往年賦觀東夷使節之入國, 其儀容若有大國人之衿度也.
東夷,蓋自千有餘年以來,與吾中華, 相有友邦之義,
人民互相來居往住者接踵不絶
吾先夫子, 以東夷 不以爲陋者, 其意亦在乎此也.
故余亦有感而, 記其實情, 以示後人焉.
魏, 安釐王十年, 曲阜 孔斌 記 (字, 子順)
(해설)
동방에 오랜 나라가 있으니 이름하여 동이(東夷)라고 부른다. 별자리 분류로는 기성(箕星)과 미성(尾星)의 방향(동북방)이며, 땅은 선백(鮮白)에 접해 있었다. 선백(鮮白)은 선비(鮮卑)
처음에 신인(神人) 단군(檀君)있었는데 마침내 아홉 이족(九夷) 의 추대에 응하여 임금이 되었으니 요(堯)임금과 더불어 병립하였다.
순임금(虞舜)이 동이(東夷)에서 태어나서 중국에 들어와 천자가 되어 다스리기에 이르니 많은 왕들 중에서 탁월하게 뛰어난 분이셨다.
자부선인(紫府仙人 : 동이족의 선인)이 학문에 통달하고 다른 사람보다 지혜가 있으니 황제 헌원이 그에게서 공부하고 내황문을 받아와서 염제 신농씨 대신 임금이 되었다
소련과 대련(동이족으로 공자선생등이 "효경"등 에서 언급이 자주 되는 인물)이 부모의 상을 잘 치뤄 3일을 게을리 하지 않고 3년을 근심하니 나의 할아버지께서 칭찬하셨다.
하(夏)나라 우(禹)임금이 (제후들을 소집하여) 도산(塗山)에서 회맹(會盟)할 때에 부루(扶婁)께서 몸소 임하시어 나라의 경계를 정하였다.
유위자가 하늘이 낳은 성인으로 훌륭한 이름이 중국에도 넘쳐 흐르니 이윤이 그 제자로 공부해서 은나라(동이족왕조) 탕임금의 어진 재상이 되었다.
그 나라는 비록 크나 스스로 교만하지 아니하며 그 병력은 비록 강하나 남의 나라를 침범하지 않으며, 풍속이 순후(淳厚)하여 길을 가는 사람이 양보하고 먹는 사람은 밥을 상대에게 권했었고 남녀가 처하는 곳을 달리하여 앉은자리를 함께 하지 않으니 동방예의의 군자국(東方禮儀之君子國)이라고 할 만 하다.
이런 연유로 은나라 태사(太史)였던 기자(箕子)가 주(周)나라 조정에서 신하 노릇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어서 동이(東夷)의 땅에 피해 가서 거처하였고 우리 선대 어른(공자)께서 동이에 거처하고자 하셨으며 누추하지 않다고 여기셨다. 내 친구 노중련(魯仲連) 역시 동쪽 해안 지방을 답사할 뜻을 가지고 있고 나도 역시 동이에 거처하려는 뜻이 있었는데 왕년(往年)에 동이의 사절이 (우리나라 즉, 魏나라에) 입국하는 것을 살펴보니 그 몸가짐이 대국인(大國人)의 금도(衿度)가 있었다.
동이는 대개 천 여 년 이래로부터 우리 중화(中華)와 서로 우방의 의리가 있어서 나라 사람들이 서로 와서 거처하고 가서 사는 경우가 끊임없이 이어져 왔던 것이다.
우리 선대 어른께서 동이가 누추하지 않다고 여기신 것은 그 뜻 역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 역시 깊이 느낀 바가 있어 이 진상을 기록함으로써 후인들에게 보이는 것이다.
위(魏)나라 안리왕(安釐王) 10년 (서기 268년) 곡부(曲阜) 공빈(孔斌)이 기록하다. (자(字), 자순(子順))
압바스 왕조(Abbasid dynasty)
750년~1258년사이의 서아시아의 이슬람 왕조를 말하며 수도는 하시미야, 바그다드, 사마라 이었다
선우(單于)
흉노족의 왕을 칭하는 명칭
묵특선우(冒頓單于)
흉노의 1대선우인 두만선우의 장자로 아버지가 이복동생을 선우에 등극시키고자 묵특을 월지(북방 유목세력중 하나)로 보내었으나 명마를 훔쳐타고 도망 나와 아버지와 이복동생을 죽이고 선우에 등극하였으며 이후 월지,동호등 북방세력들을 통일하고 유방의 한나라를 굴복시키는등 흉노의 번성기를 이루었다
견원지간(犬猿之間)
[개와 원숭이의 사이라는 뜻으로] ‘서로 사이가 나쁜 두 사람의 관계’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
KOTRA
대한 무역 진흥 공사. [Korea Trade Promotion Corporation]
(참고한 책들)
<터키 "신화와 성서의 무대, 이슬람이 숨쉬는 땅"> 이희철 지음, 도서출판 리수, 2002년
<유목민이 본 세계사> 삼산 정명(衫山 正明)지음, 학민사, 1999년
<고구려의 발견> 김용만 지음, 바다출판사
<고등학교 시민 윤리> 교육인적자원부, 2003년 (교과서)
기타 인터넷에 올린 글들
[출처] 한, 고조선, 흉노/돌궐, 당, 고구려/돌궐의 터키로 이동한 경로|작성자 김충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