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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백의사와 금산전투에서 전몰한 의병장 ?중봉(重峰) 조헌(趙憲)은 본래 선비 출신이었지만 임진왜란 개전 초에 충남 금산전투에서 수십 배의 왜적과 맞서 싸우다 장렬히 산화한 의병장이다. 그의 49년의 일생은 죽을 자리를 찾아다닌 고행이나 마찬가지였다. ?고려시대에 거란의 대군을 물리친 서희(徐熙)와 강감찬(姜邯贊), 여진을 무찌른 윤관(尹瓘) 장군 등이 본래 과거에 급제하여 문신으로 입신했으면서도 외적이 침범하자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적을 무찔렀듯이, 조헌도 그렇고, 고경명(高敬命)?곽재우(郭再祐)?김덕령(金德齡) 등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대부분이 전에 벼슬살이를 하던 문관이나 초야에 묻혀 있던 선비들이었다. 이들은 비록 말 달리고 창검 휘두르며 무술을 연마하지는 않았지만, 당대의 명장이라던 어떤 장수들에 못지않게 목숨을 내걸고 왜적과 맞서 용감히 싸웠다. 이러한 의병장과 의병들이 있었으므로 내 나라는 내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믿음이 백성들 사이에서 일어났고, 전쟁을 마침내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중봉은 내세울 만한 문벌도 없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주경야독으로 독학하다시피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한 수재였으나, 대쪽같이 곧고 서릿발처럼 매서운 성품 때문에 파란의 벼슬길에서 부침(浮沈)할 수밖에 없었다. 전후 12차의 상소로 비롯된 두 차례의 유배, 두 차례의 파직과 사직으로 얼룩진 벼슬살이에 막을 내리고 충북 옥천으로 낙향했으나 그의 나라사랑과 겨레사랑의 붉은 피가 식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중봉의 유적으로는 충남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 경양산 기슭의 칠백의총과 그 앞의 마지막 싸움터 연곤평, 그가 태어난 경기도 김포시 감정리에 우저서원(牛渚書院)이 있고, 충북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에 묘가 있다. 또 그가 현감으로 선정을 베풀던 보은에 이지당과, 의병을 일으켜 첫 승리를 거둔 차령싸움터에 사당 후율사 등이 있다. ?김포의 우저서원은 경기도지방유형문화재 제10호로 인조 14년(1636년)에 사묘(祠廟)를 창건하고 뜰에 유허비를 세웠으며, 현종 11년(1670년)에 ‘우저(牛渚)’라는 현판이 내렸는데, 이곳이 곧 중봉의 옛 집터다. 우저서원 왼쪽 담장 곁에는 경기도유형문화재 제90호로 지정된 조헌선생유허추모비가 비각 안에 모셔져 있다. ?중봉 조헌은 이곳에서 중종 39년(1544년) 음력 6월 28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응지(應祉), 어머니는 용성 차씨(龍城車氏)였다. 조헌의 자는 여식(汝式), 호는 도원(陶原) 또는 후율(後栗)이라고 한 바 후율은 조헌이 생전에 가장 존경하던 율곡(栗谷) 선생의 후학이란 뜻이다. 하지만 그의 친구를 비롯한 후인들은 중봉이란 만년의 아호를 즐겨 불렀다. 중봉의 본관은 황해도 배천(白川)인데, 사실 그의 집안은 이렇다 하고 내세울 만한 문벌도, 권세도, 재산도 없었다. 증조부 황(璜) 이래 조부 세우(世佑)와 부친 응지에 이르기까지 3대는 벼슬길에 나아가지도 않았고, 김포현 서쪽 변두리 구두물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은 조부 세우가 통진 석현에서 이곳으로 이사온 다음부터였다. ?뚜렷한 스승도 없이 서당에서 천자문을 떼고 농사짓는 틈틈이 독학으로 사서오경을 깨우친 조헌은 12세 되던 해(명종 10년?1555년)에 어촌(漁村) 김황(金滉)의 문하에서 비로소 본격적으로 유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조헌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추우나 더우나 고개를 넘어다니며 열심히 글공부를 했고, 집에 돌아와서는 그날 배운 것을 잊지 않고 밤을 새우면서도 그 뜻을 다 깨우쳐야만 직성이 풀릴 정도로 부지런히 학문을 닦았다. 낮에는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들에 나가 밭도 갈고 소도 먹여야 했다. 한 번은 소를 먹이며 책을 읽다가 소가 도망친 것도 몰랐다. 비가 오면 삿갓 밑에 책을 감추고 글을 읽고, 산에 나무하러 가서도 부지런히 한 짐 다 만들어 놓고는 글을 읽었으며, 쇠죽을 끓이고 부모님 방에 불을 지피면서도 그 불빛에 글을 읽었다. ?그는 18세 되던 해에 영월 신씨(寧越辛氏) 세성(世誠)의 딸을 부인으로 맞았고, 2년 뒤에서울로 올라가 성균관에 들어갔다. 그리고 23세 때인 명종 20년(1566년)에 함경도 온성도호부훈도라는 종9품 말직에 발령받아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섰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문과 병과(兵科)에 급제함으로써 종9품 교서관부정자에 임명되었다. 선조 원년(1568년) 25세 때에는 종6품 정주목교수를, 2년 뒤에는 파주목교수로 옮겨 앉았다. 중봉이 우계(牛溪) 성혼(成渾)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한 것이 그때였다. 그러나 중봉보다 9년 연상인 우계는 조헌의 인품을 존중해 벗으로 대하기를 바랐다고 한다. 그 이듬해 홍주목교수로 있을 때 스승으로 모시고자 찾아간 토정(土亭) 이지함(李之?)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선조 5년(1572년)에 중봉은 29세였다. 교서관정자로 중앙에 돌아온 중봉은 첫 번째 상소로 첫 번째 파직을 당하면서 조야(朝野)에 그 강직한 기개를 널리 떨치게 된다. 관례에 따라 향실(香室)에 쓰는 향을 그에게 봉(封)하게 하자 이는 유학을 숭상하는 나라의 시책에 어긋난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다른 신하 모두 못마땅하게 여기던 일이었으나 감히 입바른 소리를 못하던 것을 하찮은 벼슬아치에 불과한 중봉이 앞장서 들고일어나 괘씸죄에 걸렸던 것이다. ?“고얀지고! 이 자의 벼슬을 빼앗고 궐문 밖으로 내쳐라!” ?임금 선조의 한 마디에 중봉은 옷을 벗었다. 초야에 묻힌 그는 토정 선생, 서기(徐起) 등과 어울려 산천경개를 찾아다니며 시 읊고 글 읽고 달을 벗삼아 술 마시며 노닐었다. 아마도 그때가 중봉의 눈물겨운 생애 가운데서 가장 행복한 한때였을 것이다. 토정은 제자 아닌 제자 중봉을 자신의 다른 제자들에게 ‘금세(今世)의 일등인물’이라고 추켜세우기도 했다. 파직당한 뒤 몇 달 동안을 그렇게 여러 경승지로 돌아다니며 강호의 풍류를 즐기던 중봉은 30세 되던 이듬해 정8품 교서관저작에 임명되었다. 승진은 했으나 맡은 업무가 여전히 향료를 다루는 일이었으므로 중봉은 또다시 못하겠노라는 상소를 올렸고, 임금 선조 또한 펄펄 뛰며 화를 냈다. 생각 같아서는 목을 치고 싶었지만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힘써 말리는 바람에 중봉의 강직한 명성만 높여주고 말았다. ?선조 8년(1575년)에는 교서관박사?호조좌랑?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 등 중앙부서의 관직을 거쳐 그 해 12월에는 종6품 통진현감으로 나갔다. 만 2년 동안 선정을 베풀던 중봉은 여기서 악질 관노 하나를 엄하게 다스리다가 그가 매에 못 이겨 죽어버리는 바람에 부평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이 첫 번째 귀양살이 중 부친상을 당했는데, 유배지 부평과 본가인 김포는 불과 수십 리 거리였지만 죄인의 몸이라 중봉은 임종은커녕 장례도 치를 수 없어서 아침저녁으로 가슴을 치고 땅을 치며 구슬피 통곡하니 듣는 이마다 따라 울었다고 한다.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임종 직전 아버지가 쇠고기가 먹고 싶다 했으나 사드리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중봉은 죽을 때까지 다시는 쇠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효심이 그러했다. ?중봉은 3년 뒤 선조 13년(1580년)에 귀양살이에서 풀려났다. 유배가 풀리자 그는 충남 보령으로 내려가 이태 전에 세상을 뜬 토정 선생의 묘소를 찾아 조문하고 스승을 잃은 지극한 애도의 뜻을 표했다. 보령에서 올라온 그는 해주(海州) 석담(石潭)으로 율곡을 찾아가 몇 달 동안 머물렀다. ?중봉은 옥천에 은둔하여 어지러운 나라를 근심하는 한편, 후학들을 가르치며 세월을 보냈다. 그곳이 충북 옥천의 후율정사로 충청북도지방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어 있다. 후율정사 인근에는 중봉의 옛집터와 우물이 남아 있고, 용촌초등학교 옆에는 중봉선생유상지석(重峰先生遊賞之石)이란 비석이 중봉이 천문을 관찰했다는 관천석(觀天石) 앞에 서있다. 옥천군 군북면 이백리의 이지당(二止堂)도 중봉이 한때 머물며 선비들과 학문을 논하던 유적이다. ?중봉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제자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키던 후율정사는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철종 5년(1854년)에 안내면 백양동에 재건했고, 10년 뒤에 지금 자리로 옮겼다. 1977년에 정화 보수한 후율당의 솟을삼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중봉의 충신문(忠臣門)과, 함께 전사한 그의 맏아들 완기(完基)의 효자정문(孝子旌門)이 모셔져 있다. ?그런데 선조 19년(1586년) 43세가 되던 해에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공주목교수 겸 제독관에 임명되었다. 그 해 10월에 중봉은 정사를 바로잡고 국방을 튼튼히 할 것을 주장하는 유명한 ‘만언소(萬言疏)’를 엮어 임금에게 올렸다. 만언소란 글자 그대로 1만 자에 달하는 상소문이니 전후 열두 차례에 걸쳐 올린 중봉의 상소문이 수십만 자에 이른다는 말이 결코 빈 말이 아닌 것이다. 그 이듬해 6월에서 9월 사이에도 다시 만언소를 포함해 다섯 차례의 상소를 올렸으나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자 중봉은 벼슬자리를 영영 버리고 옥천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런데 그 해 11월에 왜의 사신이 왔다는 소식을 듣자 이미 천기를 보아 왜란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있던 중봉은 왜의 사신을 목베고 방비를 굳히도록 촉구하는 상소를 또다시 올렸는데, 충정관찰사가 깔아뭉개고 임금에게는 보내지도 않았다. ?다혈질에 직선적인 격정의 우국지사 중봉은 새로운 소를 지어 먼저 것과 함께 가지고 500리 머나먼 길을 걸어 서울로 올라가 궐문 앞에서 올렸으나 임금 선조는 화만 내며 고래고래 악을 썼다. 그렇다고 해서 중봉이 그만둘 사람인가. 일단 옥천으로 내려갔던 그는 그 이듬해 1589년 46세 때 또다시 도끼를 들고 대궐로 올라가 시국을 바로잡으라는 상소를 올렸다. 도끼를 들고 간 것은 이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차라리 이 도끼로 내 목을 치라는 비장한 결의에서였다. 그러나 선조는 시끄럽고 귀찮다면서 귀양보내는 것으로 회답에 대신했다. ?충청도 옥천에서 유배지인 함경도 길주 영동역은 2천리가 넘는 먼 길. 하지만 어려서부터 농사로 단련된 못이라 중봉은 괴롭고 고달픈 그 길을 묵묵히 걸어서 갔다. 그의 귀양길에는 18세밖에 안 된 막내아우 전(典)과 맏아들 완기(完基)가 따라갔는데, 전은 길주에서 전염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상소 때문에 괘씸죄에 걸려 귀양살이를 하게 된 중봉이었으나 가열(苛烈)한 성품은 귀양가서도 상소를 멈추지 않았다. <중봉집>이 전하는 중봉의 모습이다. ?-선생은 사람된 바탕과 타고난 성품이 남보다 뛰어났다. 의표가 훌륭하였고 큰 귀에 키 또한 컸으며 그 눈빛은 별같이 빛났다. 젊었을 때부터 장엄, 정중하여 엄숙하고 굳세어서 사람들이 감히 농을 하지 못하였다. - ?1592년(선조 25년) 임진년, 중봉의 나이 49세였다. 그 해 4월 14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 20만은 무방비상태의 국토를 짓밟으며 무인지경을 가듯 북상했고 멍청한 동서 당쟁으로 허송세월 하던 조정은 백성을 버리고 피란길에 올랐다. 지방의 수령?방백?변장 들도 마찬가지로 대부분 살길을 찾아 성을 버리고 달아나기에 바빴으니 힘없는 이 땅의 백성은 참상이 말이 아니었다. ?홀로 된 계모 김씨를 괴산으로 피신시킨 중봉은 책과 붓 대신 칼을 잡고 떨쳐 일어섰다. ?왜군이 서울에 입성한 다음날인 5월 3일, 그는 청주에서 격문을 띄우고 이우(李瑀)?이봉(李蓬)?김경백(金敬伯)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자 했으나 호응하는 사람들이 없어서 군사를 모을 수 없었다. 제2의 고향인 옥천으로 돌아온 중봉은 문하의 제자들인 김절(金節)?박충검(朴充儉)?전승업(全承業)을 위시하여 향병(鄕兵) 수백을 모아 드디어 의병의 대오를 갖추었다. 그러나 중봉부대의 무장이라고는 죽창과 몽둥이, 낫이나 괭이나 도끼 따위가 고작이었으므로 빈손이나 다름없었다. 그 달 중순 중봉은 보은 차령에서 첫 싸움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한 살 아래인 이순신(李舜臣)이 바다에서, 여덟 살 밑인 곽재우(郭再祐)가 뭍에서 첫 승리를 거둔 지 얼마 안 되어서였다. ?차령-수레고개는 보은군 수한면과 회북면을 잇는 해발 400m의 가파른 고갯길로 당시는 청주로 통하는 국도였다. 중봉은 이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회인을 거쳐 청주로 진격하려는 왜군부대를 무찌른 것이었다. 조총이란 신무기를 마구 쏘아대는 우세한 왜군에 맞서 석전(石戰)을 벌이고, 낫?도끼?몽둥이?도리깨?죽창 같은 보잘 것 없는 무기로 육박전을 벌인 결사적 투혼의 승리였다. 첫 승전지 차령고개 밑 차정리마을에는 후율사가 세워져 중봉의 충혼과 유덕을 지금까지 전해주고 있다. ?중봉은 차령싸움이 끝난 뒤 6월 12일에 청주로 올라가 호서?영남 등지에 격문을 띄우고 본격적인 의병 모집에 나섰다. 6월 중순에는 이광륜(李光輪)?장덕개(張德蓋)?신난수(申蘭秀)와 더불어 충청우도로 건너가 다시 1천 6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대오를 정비했다. 7월 4일 곰나루에서 장병과 하늘에 토적멸왜를 맹약하는 제사를 올린 중봉은 부대를 이끌고 홍주, 오늘의 홍성을 거쳐 7월 29일에는 회덕으로 진군했다. 호남 의병장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과 합류하여 청주의 왜군을 치기로 약속했는데 원통하게도 고경명은 이미 금산에서 전몰한 다음이었다. 그때 청주는 방어사 이옥(李沃)을 비롯한 관군은 죄다 무너지고 오직 승병장 영규대사(靈圭大師) 홀로 적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회덕을 떠나 청주로 진군한 중봉은 영규대사의 승병과 합세하여 8월 1일 청주성공략전을 개시했다. 중봉과 영규의 진두지휘 아래 만 이틀에 걸친 필사의 격전을 펼친 의명은 마침내 1만여 왜군을 몰아내고 청주성을 탈환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청주성싸움의 승전을 기념하는 비석이 지금 청주시 남문로 2가 중앙공원 안에 남아 있으니 조헌과 영규의 전장기적비(戰場紀蹟碑)가 바로 그것이다. ?청주성에서 북진을 결심한 중봉은 아들 완도와 제자 전승업(全承業)을 보내 행재소의 임금에게 12번째이며 일생의 마지막이 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러는 사이에 1천 600여 의병은 절반도 더 흩어져 버리고 끝까지 중봉을 대장으로 모시고 따르겠다는 사람은 700명밖에 남지 않았다. 8월 16일, 영규대사와 함께 700 의사를 이끌고 중봉은 금산으로 향했다. 자신이 가는 길이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 길이라는 사실을 중봉은 잘 알고 있었다. 일은 더욱 고약하게 어긋나게 되었으니 전라순찰사 권율(權慄)과 8월 18일 합류하여 금산의 적군을 공격하자고 약속했는데, 권율은 약정기일을 연기하자는 글을 보냈고, 그 글을 받기도 전에 중봉부대는 이미 금산벌에 도달한 것이었다. ?그때 금산에는 소조천융경 휘하의 안국사와 입화종무 등이 지휘하는 1만 5천여 왜군 대부대가 진치고 있었다. 유성?대전을 거쳐 금산에 다다라 성 북쪽 5리쯤 되는 벗들(연곤평)을 내려다보는 경양산에 진치고 있을 때 왜군은 이미 척후병을 보내 아군의 허실을 낱낱이 정탐해 간 다음이었다. 8월 18일 새벽의 어스름이 채 걷히기도 전에 후속부대가 없는 것을 안 왜군은 3면에서 파상적으로 선제공격을 개시했다. ??“오늘 싸움에서는 다만 한번의 죽음이 있을 뿐이다! 생사와 진퇴에 있어서 의자(義字)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라!” ??그것이 의병대장 중봉의 군령이었다. 그날 해질 무렵까지 세 차례에 걸쳐 적을 물리쳤지만 결국은 중과부적 역부족이었다. 변변치 못한 무기로 악전고투를 거듭했으나 화살마저 떨어지고 어둑어둑 해까지 지는데 야수같고 악귀같은 왜군은 수도 없이 밀려들어오니 천하의 중봉부대 의병도 힘이 다하고 사기가 떨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지휘소까지 적병이 돌입하는 위급한 사태에 다다르자 막료들이 우선 몸을 피해 뒷날을 기약하라고 권했으나 중봉은 태연히 독전하다가 마침내 말안장을 풀어 땅바닥에 내던지며 부르짖었다. ??“장부가 국난을 당해 한번 죽음이 있을 뿐, 어찌 구차하게 살 길을 바라리요! 오늘 이 땅??? 이 바로 내가 죽을 곳이다!” ?이어서 북채를 잡고 둥둥둥둥 북을 울리니 100명도 채 남지 않은 잔병이었으나 모두가 분연히 달려나가 육탄전을 벌이는데 단 한 사람의 이탈자도 없었다. ?영규대사의 의로운 승병도 죽기를 각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의 제자인 영규는 속성이 박씨로 호는 기허당(騎虛堂), 공주 청련암과 금산 보석사에서 수도했는데 타고난 신력(神力)과 선장(禪杖) 무술에 뛰어난 승병장이었다. ?전세가 완전히 기울어지자 중봉의 맏아들 완기가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고 단기로 말을 달려 적진에 뛰어들었다. 대장처럼 보여 적의 주의를 끌어 아버지의 죽음을 대신하고자 해서였다. 과연 왜적들은 완기를 주장(主將)으로 여기고 집중 포위를 해 무수히 칼질을 하고 시체마저 돌로 마구 찍어대 으깨 놓았다. 완기는 그때 23세 꽃다운 나이로 용모가 단정하고 신장이 크며 품성과 도량이 뛰어나 장부의 풍모가 있었다. ?중봉이 기병(起兵)할 때, “너는 돌아가 할머니 봉양에 힘쓰라”고 하자 대답하기를, “아버님께서 사지(死地)를 찾아가시는데 소자가 어찌 따르지 않으리까”하고 내내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부자가 어찌 함께 죽겠느냐”고 중봉이 재차 돌아가라 이르니, “아버님은 충신이 되거늘 소자는 효자 노릇도 못하오리까”하고 눈물을 비오듯 흘리며 끝내 떠나지 않다가 마침내 부자가 나란히 한 들판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았던 것이다. ?싸움이 끝난 다음날 중봉의 아우 범(範)이 연곤평에 들어가 보니 중봉은 의병부대기인 의자기(義字旗) 아래 쓰러져 죽어 있었고, 그를 중심으로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다 전사한 장졸들의 시체가 엎치고 겹쳐 있었다. 조범이 형의 시신을 업고 옥천으로 돌아가 빈소를 차렸는데 여름철에 죽은 지 사흘이 지났건만 얼굴빛이 생시와 다름없었다. 성난 수염은 빳빳이 곤두섰고 부릅뜬 두 눈이 금시라도 벌떡 이어나 분노의 고함을 지를 것 같아 보였다. ?대전에서 남쪽으로 80리, 금산읍에서 대전 쪽으로 2km를 거슬러 오르다 왼쪽으로 700m를 들어가면 연곤평 옛 싸움터를 내려다보는 경양산 기슭에 충효 호국사상의 역사적 성역 칠백의총이 자리잡고 있다. 사당인 종용사(從容祠) 바로 뒤 연곤평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기슭의 커다란 봉분이 700의사의 유골을 모신 의총이다. 싸움이 끝난 나흘 뒤 중봉의 제자 전승업?박정량(朴廷亮) 등이 시체를 수습하여 한 무덤을 이루고 모신 것이 의총의 시초였다. 그 뒤 1603년(선조 36년) 유림에서 순의비(殉義碑)를 세웠고, 종용사는 1647년 인조 때에 건립한 것을 1663년 현종이 사액했다. ?그런데 1940년 일제강점기 때 당시 금산경찰서장이던 석천이라는 왜놈이 항일유적을 말살하고자 의총을 헐고 비석을 깨뜨려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부끄러운 후손인 우리가 칠백의총을 재건한 것은 1952년. 의총을 보수하고 사적 제105호로 지정하기는 1963년. 그 해부터 시작된 단장 정화 보수 개축 공사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계속되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렇거나 저렇거나 살아서 나라와 겨레를 위해 바른말을 할 때에는 미친 소리 듣기 싫다며 이리 내치고 저리 쫓아보내더니, 죽은 다음에는 문열(文烈)이란 시호에다가 참판이니 판서니 영의정이니 아무리 승진을 시킨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랴. ?충북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 도성마을 61번지에 있는 중봉의 묘는 충청북도지방기념물 제14호로 지정되어 있다. 100평쯤 되는 묘역은 봉분 앞에 2기의 묘비, 상석과 문인석과 석등이 서 있다. 묘비 하나는 중봉의 후학 우암 송시열이 이곳으로 이장하면서 중봉의 공적을 기록한 것이다. ?본래 중봉의 묘는 그의 아우 범이 금산벌에서 거두어 옥천으로 돌아와 그 해 8월 23일 옥천군 안읍 도리동에 장사지냈다가 1636년(인조 14년) 10월 2일에 안남면 박달재 서쪽 미산 도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묘소 아래 100m쯤 길가에 중봉의 신도비가 서 있는데,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글 짓고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이 글씨 쓴 것이다. 중봉묘소가 있는 옥천군에서는 1976년부터 중봉의 높은 뜻과 위업을 기리며 유덕을 추모하는 중봉충렬제를 해마다 벌여오고 있다. ?의병이란 무엇인가. 불굴의 저항정신이다. 민족의 자존심과 주체성을 수호하기 위해 피흘려 온 민족사의 전통이요, 또한 그 맥을 지켜온 원동력인 것이다. 한말 항일의병으로 이어진 민족 자주?민중 주체의 빛나는 전통을 세운 장한 사나이들이 바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다. 국권 수호의 책임 있는 벼슬아치들이 제자리를 내팽개친 채 저마다 살 길을 찾아 산으로 바다로 도망치기 바쁠 때, 광인 소리를 들으며 이리저리 쫓겨다니다가 초야에 은둔하던 중봉 조헌이 어떻게 떨쳐 일어나 무엇을 했던가 다시 한번 돌이켜보자. 장부란 그렇게 죽는 것이다. 고래고래 악을 쓰며 구차하게 한 세상 살아도 불과 100년의 유한한 인생이다. |
출처: 平海居士 원문보기 글쓴이: 평해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