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갈 또는 무굴 제국의 창시자 《 바부르 》는 이 티무르의 손자 격이다. 원래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의 지배자였다. 후에 인도의 지배자가 되었을 때 스스로 몽골제국의 뒤를 이었다고 자칭했기 때문에 국호를 몽골이라 칭했는데 이 몽골이 와전이 되어 무굴, 또는 무갈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위의 인도에서 어지러운 왕조교체는 즉 중앙집권이 상당히 힘들었다는 것을 뜻했다. 왕조에서 총독으로 임명만 되면 수시로 독립을 하였고 지방분권화가 되었다. 이렇게 되면 춘추전국의 어지러운 시대이며 서로 합종연횡이 되풀이되기 쉬운데, 바부르가 인도에 등장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마지막 로디왕조의 펀잡 지역의 총독은 어지러운 정세 가운데 카불의 바부르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바부르는 기회를 놓치지 아니하고 인도로 들어 와서 로디왕조의 이브리힘 3세를 격파하였다. ( 1526년 )
이 후에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바부르 이후에 무굴 조는 잇달아 현명한 군주가 나타나 인도 거의 전역을 지배를 하는데 성공한다. 바부르는 여태의 지배자와 달리 파드샤( 인도식 황제 )라 칭했다. 그 이전까지는 대부분 술탄이라 불렀었다. 그리고 간과하기 힘든 것은 최소 바부르 정도이면 몽골의 피가 섞였다는 이야기가 가능할지 모르지만 그 이후에는 거의 튀르크화가 되어 몽골의 흔적을 찾기가 힘들다는 사실이다.
바부르 뒤이어, 후마윤, 그리고 대제 ( 大帝 )라 불리는 악바르, 자항기르, 타지마할묘를 만든 샤자한, 그리고 아우랑제브 까지가 무굴조의 전성기를 일구어 낸 황제들이다. 샤자한 대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부유한 나라 중에 하나로 꼽힐 정도이다.
실질적으로 무굴 제국의 토대를 세운 평생을 전쟁으로 지세웠던 《 악바르 》는 종교에 관용적이어서 본바탕이 이슬람이었지만 그리스교도나 불교, 힌두교 등에 차별을 두지를 아니하였고 그들과 토론을 거쳐 만년에는 자신만의 독특한 종교를 창시하였다. 그러나 당시 인도인에게 소귀에 경읽기 정도로 그쳤다. 그리고 그 뜻을 이어 받아 뒤의 군주는 이슬람과 힌두 등의 종교에 차별을 두지 아니했다.
그러나 아우랑제브( 1658~ 1707 )시대는 아소카시절의 인도에 맞먹는 판도를 자랑했지만 제국의 말기의 징조가 곳곳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우랑제브는 중국 청의 건륭제와 닮았다. 제국의 판도는 최대로 키웠지만 무력으로 인한 재정의 적자는 다음 세대에 큰 부담을 안겨주고 나주에 노골적으로 삼키려 드는 열강 중에 영국이 그곳에 등장한 때도 둘 다 같다. 단지 이때는 아우랑제브나 건륭제는 워낙 국력이 왕성할 때여서 영국이 감히 넘보기 힘들고 무역을 해달라고 청원을 비는 판국이었다. 나중에는 노골적인 침략을 하지만.
이 아우랑제브는 게다가 이슬람의 광신적인 형태를 보였다. 결국 아우랑제브에 대항해 1674년 시바지가 힌두교도 호족들로 이루어진 마라타 왕국(마라타 동맹, 1674 ~ 1818)을 건국하였고 이들이 나중에 무굴제국의 기초를 무너뜨리는 단체가 되었다. 이외에 시크교 세력이 힘을 모아 시크 동맹(1716 ~ 1799)을 결성하고 반란을 일으킴과 더불어 시크 왕국(1799 ~ 1849)을 세우고 라지푸트족의 소국, 자트족의 소국들, 아와드족 세력들까지 난립하면서 인도의 넓은 대륙은 델리 근처 외엔 이미 무굴제국의 힘이 미치지 못하였다. 그런 가운데 인도 내부가 아닌 페르시아 방면에서 온 아프샤르 왕조의 전투 괴물 《 나디르 샤 》이었다. 그는 1739년 델리에 입성하여 무력한 무굴제국에 살육과 약탈을 하여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 나디르 샤에 의한 침공은 무굴제국의 200년 동안 모은 부를 단 며칠 만에 털어버렸다고 한다.
이들 보다도 사실상 더 위협적인 세력은 서쪽에서 그리고 바다 건너서 왔다. 유럽 쪽에서 내부적인 패권다툼을 완수한 다음 드디어 인도로 마수를 뻗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전에는 포루투갈이 부분적으로 바다 쪽에만 도시 정도의 단위로 몇몇을 지배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인도의 통상권을 차지하기 위해 7년 전쟁 걸쳐 플라시의 싸움 ( 1757년 )에서 영국은 프랑스를 물리치고 인도의 독점적인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 곧 무굴제국 말기의 혼란기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하나씩 하나씩 인도 여러 지역을 야금야금 먹어 들어갔고, 19세기 중엽 《 세포이의 난 》이 일어나자 그 구실로 난을 진압한 후에 완벽하게 인도 전체를 통치하게 된다.
이때부터 인도 전역은 식민지 시대로 들어갔던 것이다.
( 인도의 간단한 역사 )
witpo

나디르 샤는 이란 아프샤르 왕조의 창시자(재위 1736~47)로서 역사상 나타났던 전쟁광이며 전쟁 기계 중에 한명이며 동양에서는 최후의 정복군주이다. 본명은 나디르콜리베그이며 사파비 왕에게 충성을 바친 투르크의 아프샤르족(族) 출신으로 전쟁의 공훈을 바탕으로 실권을 쥐고 나중에는 1736년 아바스 3세를 폐하고 나디르샤라고 자칭,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기록에 의하면 나디르 샤도 패배란 단어가 없었다. 해군을 만들어 아랍인들에게서 바레인을 빼앗고, 오만을 침략하여 정복했다. 1717년부터 공격의 방향을 동쪽으로 돌려, 아프가니스탄의 칸다하르 ·카불 등을 점령했다. 1739년 무굴제국의 수도 델리를 살육과 약탈하여 유명한 공작 왕좌(Peacock Throne) ·코이누르(Kohi-noor) 다이아몬드 등을 손에 넣은 것은 아주 유명한 사실이다.
최후의 가장 큰 승리는 당대의 최강국인 오스만 튀르크를 1746년에 크게 격파한 것이다.
나디르 샤는 전쟁을 즐겼고 전쟁에는 귀신이었지만 내정에는 등신이었다. 주먹구구식으로 일관하여 내부에는 혼란이 그치지 아니했고 그의 공포정치는 그가 통치하는 지역에서는 틈만 나면 반란을 할 준비되어 있었다. 결국 반란을 진압하러 가다가 그의 부하들에게 암살을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