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사회와 제도
유득공의 『발해고』
역사학과
2학년 20122704
모창현
목차
1.유득공에 대하여
2.발해를 바라본 유득공
1)발해의 역대임금
2)발해의 지리
3)발해의 관직
4)발해의 외교문서
5)발해의 후예
3.결론
1.유득공에 대하여
유득공의 자는 혜풍, 혜보이고 호는 영재, 영암, 가상루, 고운당, 고운거사, 은휘당 등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는 북학파의 한사람으로 4검서의 한사람으로 지목되는 사람이다. 또한 한문학사에서는 4가의 한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유득공은 증조부와 외조부가 서자였기 때문에 서얼의 신분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는 20대에는 서얼의 신분적 답답함이 시에 적혀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허나 30대에 쓴 시를 본다면 주제들이 답답함 보다는 자유로운 주제를 가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것은 그가 30대에 이르러서 관직 생활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관직생활을 하면서 북학파인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이서구 등과 만남을 자주 교류를 하였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사상도 구축하였다고 한다.
그는 역사가보다는 시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역사적 인식은 문학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좋은 시를 짓기위하여 많은 책을 읽었는 데, 그 중 역사에 관련된 서적도 많이 읽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역사적 인식을 가지게 되었는 데, 『이십일도회고시』를 쓸 때만 하여도 주제가 한반도로 국한되어있었는 데, 『발해고』와『사군지』에서는 한강 이북의 역사를 집중하고, 북방의 역사를 중점으로 보고 있었다. 그가 이러한 변화를 가진 것에 대해서는 여러 이유가 존재하겠지만, 나약해진 조선의 현실과도 관련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발해고』의 서문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그전까지의 역사의 무대였던 만주를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한 『사군지』에 보면, 조선의 숭문억무 정책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2.발해를 바라본 유득공
1)발해의 임금에 관하여
유득공은 발해고에 발해의 왕을 적는 곳에 진국공부터 서술한 것을 알 수 있다. 진국공은 발해의 왕은 아니지만, 발해의 건설한 대조영의 아버지이다. 유득공은 진국공, 즉 걸걸중상을 속말말갈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속말말갈인은 말갈의 7부락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이것은 대조영을 고구려의 사람이라고 말한 것과 모순되는 것이라고 한다. 진국공 이후로 유득공은 발해의 15명의 왕을 언급한다. 고왕 대조영부터 시작되어 인선까지 총 15명을 언급한 것이다. 고왕이 발해를 건국한 과정에 대해서는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대조영이 고구려와 말갈의 병사를 모아서 그들을 쫓던 이해고의 군사들을 격파한 뒤, 동모산을 기점으로 삼으니 말갈과 고구려의 유민들이 모두 모였다고 한다. 고왕은 마침내 돌궐에 사신을 보내어 외교를 맺고, 부여, 옥저 등의 북쪽의 10여국을 정벌하고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리고 성력 연간에 나라 이름을 진이라고 하고, 스스로를 진국왕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다면 진나라라고 세운 것은 어찌 발해라고 우리는 부르는 것일까? 그것은 현종이 내린 임명에 의한 것이다. 현종 선천 2년 낭장 최흔을 통해서 고왕을 좌효위대장군․발해군왕으로 책봉하였다고 한다. 이 이후로 발해라고만 불렀다고 한다. 고왕 다음에 오른 왕으로는 무왕을 언급하고 있다. 무왕의 연호는 인안이라고 한다. 유득공을 그는 영토를 개척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또한 그에 대하여 적어놓은 것을 보면, 당나라와 관계가 좋지 않은 모습을 볼 수 있다. 무왕의 아우 문예가 당으로 넘어가면서 사이가 안 좋아지기 시작하였고, 그 뒤 장문휴의 공격으로 더욱이 사이가 안 좋아 졌다고 한다. 무왕의 다음의 왕으로는 무왕의 아들인 흠무, 즉 문왕을 언급하고 있다. 문왕의 연호는 대흥이라고 한다. 문왕의 무왕과 달리 당나라와 잘 지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유득공이 무왕은 당나라와의 전쟁을 주로 적어놓은 것을 볼 수 있지만, 문왕은 당나라와의 좋은 모습을 적고 있다. 조공, 발해국왕으로의 책봉 등 당나라와의 화친한 모습을 적고 있다. 그 뒤로 많은 왕이 즉위를 하였다. 발해의 마지막 왕은 인선이라고 하였으나, 유득공의 발해고에는 인선 다음으로 적은 왕이 두분이 더 존재한다. 우선 흥료주라고 언급되고 있는 사람이다. 흥료주의 이름은 연림으로 고왕의 7대손이라고 한다. 그는 요나라에서 벼슬하여, 동경 사리군 상온이 되었다고 되어 있다. 두 번째 분은 오사성 부유부 염부왕이라 적혀있는 분이다. 역사기록에 이름이 남아있지 않다고 적혀있다. 그에 대해서 유득공이 언급을 한 이유는 발해는 일찍 멸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이다. 부유부 염부왕의 이름에 대하여 정확히 언급이 되어 있지는 않지만, 태종의 조서 등을 통해서 그가 대씨의 후예임을 알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발해의 정확한 멸망을 한 것을 알 수 없다고 한다. 발해의 멸망 연도를 926년이라고 보기는 하지만, 그 뒤 부흥 운동이 금나라 초기까지 일어났던 사실을 혼돈하여서 유득공이 이리 서술하였다고 한다.
2)발해의 지리
유득공이 발해의 지리에 대하여 언급한 부분은 세 가지의 서책을 참고하여 적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신당서』,『요사』,『청일통지』를 참고하여 적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신당서』에 적힌 것을 보면, 발해의 지리를 크게 5경, 15부, 62주로 나눈 것을 볼 수 있다. 62주라고 언급을 하지만, 실상은 60주만을 서술한 것을 알 수 있다. 『요사』에 기록된 발해의 지를 보면은 〈부,주〉,〈군,현〉으로 나누어서 쓰고 있다. 『요사』를 보면은 요나라의 태조가 발해를 병합하여 얻은 성읍이 103곳이라고 되어 있는 데, 여기에 적혀있는 것이 113곳이여서 맞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청일통지』에 기록된 발해의 지리를 보면 5경 15부 62주라고 언급하는 것을 알 수 있다. 5경에는 용천부, 현덕부, 용원부, 남해부, 부여부 등을 언급하고 있다.
3)발해의 관직
발해의 관직에 대하여 유득공은 문관과 무관으로 나누어서 서술하고 있다. 문관의 경우는 선조성, 중대성, 정당성의 3성을 가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당의 3성 6부제를 수용하여 한 것을 알 수 있다. 3성과 함께 6부, 즉 충부, 인부, 의부, 작부, 창부 등을 두었다. 실제로 6부의 수는 6개를 넘지만, 그것이 정사와 지사를 두어서 나누어진 모습을 보이는 데 이것 또한 당나라의 것을 모방한 것이라고 한다.
4)발해의 외교문서
유득공의 발해의 외교문서라 하여 6개를 실어놓은 모습을 볼 수 있다. 무왕이 일본국 성무천황에게 보내는 국서, 문왕이 일본국 성무천황에게 보내는 국서, 강왕이 일본국 환무천황에게 보내는 국서로 이루어져 있다. 이중 강왕이 일본국 환무천황에게 보내는 국서가 4편이 실어져서 총 6편을 구성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선 무왕이 일본국 성무천황에게 보내는 국서를 보면은
‘엎드려 생각건대, 대왕의 나라는 하늘로부터 명을 받아 일본이 건국된 이래, 대대로 훌륭한 임금이 이어지고 자손이 크게 번성하였습니다. 무예는 욕되게 여러 나라를 주관하고 외람되게 여러 번국을 아우르게 되고, 고구려의 옛 터전을 수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라고 적힌 것을 볼 수 있다. 이 부분에서 고구려의 에 터전을 수복하였다는 것을 중요히 생각하여 유득공이 적었을 것이다. 유득공은 우리 민족의 영토였던 만주의 땅을 잃은 것에 대한 아쉬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신라가 만주의 땅을 포기 한것에 불만을 가졌을 것이다. 그때 만주를 점령하였던 발해가 고구려의 땅을 다 수복하였다고 하니, 이것에 대하여 만족스럽게 생각하여 그것을 적었을 것 같다. 이 문서는 무왕이 727년에 보낸 국서로 『속일본기』10권에 실려 있다고 한다.
두 번째 문서인 문왕이 일본국 성무천황에게 보내는 국서에서 유득공이 말하고자 했던 말은 무엇일까? 일본과의 친교를 보이기 위해서 적었던 것이라고 본다. 문왕은 당과도 친선관계를 가지고, 신라와도 친선관계를 가졌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과와의 친선관계를 나타내기 위해서 이 국서를 실은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지금 그쪽 나라의 사신 평군조신광업등이 풍파에 휩쓸려 길을 잃고 이 곳에 표류해 왔는 데, 매번 후한 상을 주면서 명년 봄에 돌려보내고자 했습니다.’
이 부분은 일본의 사신이 풍파에 의하여 발해에 도착하였는 데, 발해에서 그를 극진히 대접하여 일본으로 되돌려 보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본과 발해의 강한 친밀성을 볼 수 있는 부분이라고 판단하여 유득공이 서술한 것이다. 이 국서 또한 『속일본기』에 존재하며 13권에 실려져 있다고 한다.
강왕이 일본국 환무천황에게 보내는 국서는 4편이 실려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같은 시대에 같은 왕들이 주고 받은 국서를 4편이나 유득공이 실은 이유는 변화가 있기때문이라고 판단한다.
3.결론
유득공은 발해를 우리나라의 역사로 인정하여 남북극시대라는 말은 만들었다고 한다. 『발해고』의 유득공 서문을 보면 이러한 말이 쓰여져 있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그 남쪽을 영유하였고 대씨가 그 북쪽을 영유하여 발해라 하였다. 이 것이 남북국이라 부르는 것으로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무릇 대씨는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의 사람이다. 그가 소유한 땅은 누구의 땅인가? 바로 고구려 땅으로, 동쪽과 서쪽과 북쪽을 개척하여 이 보다 더 넓혔던 것이다. (중략)누가 “발해는 요나라에 멸망되었으니 고려가 무슨 수로 그 역사를 쓰겠는가?”고 말할지 모르나, 그렇지는 않다. 발해는 중국제도를 본받았으나 반드시 사관을 두었을 것이다. 또 발해의 수도 홀한성이 격파되어 고려로 도망해 온 사람들이 세자 이하 10여만이나 되니, 사관이 없으면 반드시 역사서라도 있었을 것이고, 사관이 없고 역사서가 없다고 하더라도 세자에게 물어보았다면 역대 발해왕의 사적을 알 수 있었을 것이고, 은계종에게 물어 보았다면 발해의 예법을 알 수 있었을 것이고, 10여만 명에게 물어보았다면 모르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이것을 보면 유득공이 발해를 신라와 함께 삼국시대 이후에 통일 신라가 존재하고 그 뒤에 남북국 시대를 이루었던 국가로 생각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발해의 역사서를 편찬하지 않은 고려를 비판하는 것도 볼 수 있다. 또한 발해를 중국의 역사라고 말하는 것을 그는 말이 안되는 것이라 판단하였다. 자료를 근거 삼아서 보면 발해는 통일 신라와 함께 남북국을 이루었던 국가라는 것을 당연히 알 수 있다는 것이 유득공의 생각인 것이다.
유득공은 처음으로 『발해고』라는 책에서 남북국시대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발해의 우리의 역사로 끌어왔다고 생각한다. 그전까지는 발해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부족하였으나 이때부터 발해에 대한 조사가 더욱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서적
유득공, 송기호 옮김, 『발해고』, 홍익출판사, 2011.
유득공, 정진헌 옮김, 『잊혀진 제국, 발해를 찾아서 발해고』, 서해문집, 2006
유득공, 『渤海考. 北與要選. 北塞記略』, 경문사, 1976.
유득공,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 번역,『역주 이십일도 회고시』, 푸른 역사, 2009
유득공, 김윤조 번역, 『누가 알아주랴』, 태학사, 2005
논문
허태용, 「朝鮮後期 中華繼承意識의 展開와 北方古代史認識의 强化」,고려대학교
대학원 위위논문, 2007.
역사학과 20122704 모창현-유득공의 발해고에 대하여.hwp
첫댓글 이 역시 어 떤 책을 텍스트로 삼았는지가 없음.
저는 송기호가 옮긴 발해고를 기본 텍스트로 삼아서 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득공의 渤海考. 北與要選. 北塞記略 책은 발해고의 한자 그대로를 담고 있어서 그것을 참고하였습니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