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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기자로 산다는 것>(2012, 시사IN북)에 실렸던 글
내 친구 J에 대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해야겠다.
J는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잘 안 되는 사람이다. 그는,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남들 보기에 아주 이상하리만치 이 ‘원칙’을 철저하게 지킨다. 남의 부탁 또한 거절하는 법이 거의 없다.
뉴욕 친구 김정석이 내게 준 시계. 그의 유일한 유품이다.
미국 뉴욕 맨해튼 32가 코리아타운(K타운)은 뉴욕의 한국 사람들에게 천안삼거리쯤 된다. 그곳에서 J는 오랫동안 음반 가게를 운영했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빠져 뉴욕에 주저앉을 정도의 예술 애호가인 까닭에, 그의 가게에는 많은 예술가들이 드나들었다. 사람들은 그의 가게를 사랑방으로 여기며 약속 장소로도 애용했다. 한국의 유명 정치인들도 그의 가게를 찾곤 했다. 친구는 장사에 방해가 되건 말건 신경 쓰지 않았다. 누가 와도 막지 않았다.
나는 1996년 겨울 뉴욕에 갔다가 어느 화가의 소개로 J를 처음 만났다. 그는 1993년 <시사저널>에 내가 썼던 ‘김산의 아리랑’ 커버스토리를 잘 읽었다며 나를 아는 척했다. 뉴욕의 문화 예술에 밝았던 그는, 뉴욕의 정보를 거의 매일 전해 주었다. 나는 한국 대중음악의 동향을 전하고, 발매되기 직전의 대중가요 음반을 그에게 보냈다. 기자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J는 뉴욕에서 인터뷰를 적극적으로 주선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뉴욕 K타운 사랑방을 운영하며 깔아놓은 친분과 인맥이 상당했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한국 출신의 유명 예술가 가운데 J를 통해 닿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오페라 가수 홍혜경, 화가 백남준 이상남 조숙진 강익중 조상 니키리, 소설가 이창래 등과의 인터뷰는 J의 직간접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주역이었던 홍혜경씨의 무대에 오르기 직전 모습을 막 뒤에서 직접 보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세계 최고 오페라단의 스타가 막 뒤에서 긴장하는 모습을, 그것도 링컨센터 주공연장에서 직접 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J가 주선했으니 가능했다.
죽이 잘 맞던 우리는 기자와 ‘그림자 취재원’ 관계를 넘어 ‘절친’이 되었다. 그는 내가 요청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과거 <시사저널> 동료들이 뉴욕에 연수나 출장을 갈 때마다 나는 J에게 연락을 하여 도움을 주라고 했다. 예외는 없었다. 친구는 반드시 내 동료들을 만났고 아무리 바빠도 밥 한 끼는 꼭 대접했다.
2002년 내가 <시사저널>을 떠나 캐나다 토론토에 살러 온 이후 J와의 관계는 거리만큼이나 더 가까워졌다. 일주일에 적어도 서너 번씩 전화 통화를 했다.
친구는 여전했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부탁은 들어주었다. 그 사이 “<시사저널> 네 후배라면서 왔다”고 전해오기도 했다. 뭘 바라는 것도 없이 정보·사람·술·식사에, 때로는 숙소까지 제공해 주었으니, 내 친구 주변은 늘 사람들로 붐볐다.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캐릭터이다.
어느 날 전화 통화를 하던 중에 J가 말했다.
“너, 신정아라고 알지? 걔가 예일대 박사과정 한다면서 뉴욕 왔더라.”
“신정아? 걔, 금호미술관 초년병 때 봤는데…. 그런데 그 친구는 어찌 알고 너를 찾아왔대?”
“영달이 형이 갑자기 전화해서, 신정아라는 애가 가니까 밥도 사주고 좀 도와주라더라.”
“뭘?”
“뭐, 호텔 예약도 해주고, 아마존에서 주문한 책이 우리 가게로 오면 맡아도 주고, 예일대 간다니까 기차표도 예약해주고, 뭐 그런 거지….”
J가 말하는 ‘영달이 형’(애칭)은 한국 미술계의 숨은 실력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내 친구의 고향 선배이다. ‘영달이 형’은 뉴욕에 연수 왔다가 J와 친해졌다. 나는 한국에서는 기자 만나기를 꺼리는 ‘영달이 형’을 한 번도 못 보았는데, 뉴욕 출장 중에 J와 함께 ‘영달이 형’ 숙소를 찾아 대취한 적도 있었다.
신정아씨가 동국대 교수가 되었다는 소식도 J를 통해 들었다. 2007년 7월 신정아씨가 광주비엔날레 총감독이 되었다는 놀라운 뉴스에 이어, 예일대 박사학위를 위조했다는 더 놀라운 뉴스가 인터넷을 통해 들려왔다. 깜짝 뉴스의 연속이었다. 한 대학 교수의 학력 위조에 대한 매체들의 반응은, 토론토에서 보기에 이상하리만치 뜨거웠다. 학력 문제라는 한국 사회의 뇌관을 건드렸기 때문이겠거니 했다.
2007년 7월5일 잠적했다던 신정아씨가 뉴욕 JFK 공항에 떴다. 수많은 한국 특파원들이 그녀를 에워쌌다. 이례적인 광경이었다. 신씨는 택시를 타고 기자들을 따돌렸고, 그녀를 놓친 특파원들은 패션이 어떻네 저떻네 하며 특파원 월급 아까운 소리들만 잔뜩 쏟아내고 있었다. 그들이 내게 전해준 메시지가 하나 있었다. ‘어느 지인의 보호를 받고 있다.’
나는 그 지인이 내 친구 J라고 100% 확신했다. 오는 사람 절대 막지 않고, 부탁 잘 들어주는 J라면 모든 걸 덮어놓고 신정아씨를 도와줄 것 같았다. 내 느낌에, ‘묻지마’ 보호가 가능한 사람은, 오는 사람 안 막는 J밖에 없었다.
나는 무릎을 쳤다. “저 인터뷰 내 거다!”
신정아씨가 J의 도움을 받고 있는지 확인도 하기 전에 나는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한국의 모든 언론이 죽자하고 따라다니는 신씨를 인터뷰 해서 어디에다 줄까? 당시 <시사저널> 동료들은 파업을 하며 회사측과 싸우던 상황이니 <시사저널>은 곤란했다. 그렇다고 이른바 조중동에도 주기 싫었다. <시사저널> 파업을 지지하던 <경향>에 줄까 <한겨레>에 줄까 고민하면서 가슴이 뛰어 잠을 설쳤다.
친구에게 바로 연락했다.
“신정아, 너한테 있지?”
“어떻게 알았냐?”
“너밖에 더 있냐? 어쨌건 노출 안 되게 잘 보호해라.”
서울에서 미리 연락을 해온 신씨에게, J는 택시를 타고 공항을 빠져나오라고 했다. 그가 직접 나타나면, 누구 도움을 받는지 금방 파악되기 때문이다. J는 한국 사람의 왕래가 드문 지역의 호텔을 소개했다. 한국 특파원들의 탐문이 시작되자 보름 만에, 유럽 여행객들이 주로 이용하는 작지만 고급스러운 산 카를로스 호텔로 옮기게 했다. 맨해튼 50가에 위치해 있어서 역시 한국 사람이 드문 곳이었다.
8월초 파업을 하던 <시사저널> 동료들이 9월 중순에 새로운 매체를 창간하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또 한 번 “이야!” 하고 무릎을 쳤다. 매체를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신정아 인터뷰는 <시사IN> 창간호에 더없이 좋은 선물이 될 것이라 여겼다.
나는 친구에게 여느 때처럼 부탁을 했다. 신씨가 뉴욕에 온 지 한 달쯤 지난 후였다.
“신정아 좀 만나자.”
“왜?”
“왜긴? 인터뷰 하려고.”
친구는 처음으로 내 부탁을 거절했다. 의외로 완강했다.
“안돼.”
“왜?”
“야, 기자들 피해서 온 사람인데, 지금 인터뷰한다는 게 말이 되냐? 좀 그렇잖아. 그리고 지금 인터뷰가 되겠냐고.”
“야, 한국 언론에서 일방적으로 얻어터지고 있는데, 자기 주장은 해야 할 거 아냐. 인터뷰가 좀 그러면 일단 얼굴이라도 보게 해줘.”
친구는 “몰라” 하며 전화를 끊었다. 1시간쯤 뒤에 전화가 걸려왔다. “신정아도 너를 알고, 또 네가 지금은 기자도 아니니 그럼, 한번 만나나 봐라. 인터뷰를 하든 말든 그건 네들 둘이 알아서 하고…. ”
전화를 끊자마자 나는 바로 뉴욕행 밤 비행기를 탔다. 8월10일이었다. 이튿날 아침 맨해튼 50가 호텔 근처로 갔다. J와 함께 나타난 나를 보고 신씨는 그리 놀라는 눈치가 아니었다. 친구가 언질을 준 모양이었다. 신씨가 1990년대 중반 금호미술관에 큐레이터로 채용된 이후, 나는 그녀를 두어 번 본 적이 있었다. 갈색의 사각 선글라스를 쓰고 나타난 신씨는 자리에 앉자마자 의외로 농담부터 했다.
“성우제 기자님, 축하합니다. 지금 한국의 모든 기자들이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계십니다.”
호텔 근처 멕시칸 식당에 앉아 브런치를 함께 하고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는 30분쯤 앉아 있다가 바쁘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사IN> 창간을 설명하면서, 다른 언론과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며 창간호에 인터뷰를 싣자고 제안했다. 지금 한국에서 일고 있는 온갖 의혹에 대한 당신의 입장과 주장을 왜곡하지 않고 말하는 그대로 싣겠다며 설득했다.
“인터뷰는 절대 안 한다. 기자는 누구도 믿을 수 없다”며 신씨는 단번에 거절했다. 나는 “난 지금 기자 신분 아니다. 또 캐나다에 살고 있으니 한국 상황을 제3자 입장에서 흥분 안하고 냉정하게 볼 수 있다. 당장 인터뷰하기가 어려우면 이왕 만난 김에 그동안 어떻게 활동 했나 들어나 보자”고 했다. 과거 문화부 기자를 하면서 한국 미술계에 대해 잘 아는 것도 대화를 풀어나가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녀가 거론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알았으니까.
신정아씨는 놀라울 정도로 달변이었다. 한국 미술계와 미술계 인사, 미술 담당 기자들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으며 자기가 지금 얼마나 황당하고 억울한 처지에 놓여 있는가를 강조했다. 5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우리는 식당의 파티오에 앉았는데, 신씨는 지나가는 한국 사람이 자기를 알아볼까 봐 계속 경계하는 눈치였다.
신씨와 헤어져 친구 가게로 갔더니 친구가 물었다.
“인터뷰는?”
“정식으로 못했다. 그냥 이야기만 들었다.”
“야, 이 븅신아! 다 만들어줘도 어째 그걸 못 하냐.”
J의 비난에 열이 확 받쳤다. J가 내 앞에 신정아씨를 데려오느라 애를 많이 썼다는 게 느껴졌다. 뉴욕에 있는 한국 기자들이 그렇게들 법석을 떨어도 신정아 그림자도 밟지 못했는데, 신정아와 만나 5시간씩이나 이야기하고도 인터뷰를 못했다는 말이 내 입에서 나오니 ‘븅신’ 소리 들어도 싸다 싶었다. 오기가 나서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이튿날 아침 나는 J가 가지고 있던 <기자로 산다는 것> 책을 전해준다는 명목으로 다시 신씨를 만났다. 책을 통해 ‘이런 기자들이 만드는 잡지에서 인터뷰 하려 하는데, 다른 곳과는 다르지?’ 하는 메시지를 전하려 했다.
이번에도 ‘내가 지금 얼마나 억울한가’에 대한 그녀의 길고 긴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했다. 녹음도 불가능했고, 취재수첩에 적을 수도 없었다. 볼펜만 들면 신씨는 바로 일어날 기세였다. 카메라는 아예 꺼내지도 못하게 했다. 나는 그녀가 하는 이야기들을 머리 속에 저장하려고 안간힘을 쓸 수밖에 없었다. 또 5시간이 훌쩍 흘렀다.
신정아씨를 만났으니, 기사는 얼마든지 쓸 수 있었다. 신씨의 숨어 있는 머리카락도 보지 못한 다른 매체에 비한다면 만난 것 자체만으로도 특종이었다. <시사IN> 창간호에 신씨와 만나 대화한 내용만 넣어도 괜찮은 선물이 될 것 같았다. 창간까지 한 달 넘게 남았으나 그 사이에 다른 곳에서 채갈 것이라는 걱정은 별로 하지 않았다. 신씨가 자기를 이렇게 만든 언론과는 절대 인터뷰 하지 않겠다고 여러 차례 다짐했기 때문이다.
8월말, 신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정식으로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했다. 국내에서 변양균씨와의 관계에 대해 기사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자기 주장을 할 통로를 찾으려 하는 것 같았다.
9월2일 오전 11시 신정아씨가 묵던 호텔 2층 회의실에서 그녀를 만났다. 호텔 방에서 만나기를 내심 기대했으나(방안 풍경을 보고 묘사하고 싶었다. 가방은 몇 개나 있는지, 노트북은 어떤 기종을 쓰는지 등등) 그녀는 호텔 2층의 회의실을 예약하고 기다렸다. 40명 정도 수용하는 회의실에 둘이 덩그렇게 앉아 시작한 정식 인터뷰는, 빵과 커피를 먹어가며 밤 11시까지 계속 되었다.
나는 <시사저널> 시절 동료들과 함께 구입해 사용했던 소니 아날로그 녹음기를 들고 갔는데, 신씨는 뉴욕에서 구입했다며 올림퍼스 디지털 녹음기를 꺼냈다. ‘나도 녹음하거든? 나중에 딴 소리 하기 없기다’ 하는 신씨의 은근한 압력이 느껴졌다. 나는 ‘잘 됐네. 너야말로 딴 소리 못 하겠네’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자정 가까이 되어, 근처 일식당에서 우동을 먹으며 이야기를 마무리하던 중에 테이프가 늘어지는 아날로그 녹음기의 상태를 걱정하며, 디지털 녹음기를 빌려줄 수 없겠느냐고 했다. 신씨는 어떤 믿음이 생겼던지 “가지라”며 녹음기를 선뜻 주었다. 웬 떡이냐 싶게 신이 났으나, 한편으로는 대단히 우울했다. 찍지 않겠다고 한사코 버티는 바람에 내 카메라로 인물 사진을 직접 찍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씨 스스로 찍어서 보내는 것으로 타협을 하고 친구 가게로 돌아갔더니, J는 또 욕설 섞인 비난을 푸짐하게 안겼다. 사진 못 찍었다고…. 이번의 욕은 신씨에게로도 향했다. “이왕 했으면 다 하지, 걔는 왜 또 하다 마냐?”
인터뷰는 이런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다음은 인터뷰를 하는 와중에, 또 신씨가 한국에 들어갈 때까지 뉴욕과 토론토에서 있었던 관련 에피소드들이다.
◇…나는 신씨의 인터뷰를 녹음하면 공개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나는 녹음기 버튼을 누르면서 얼떨결에 말했다. “오늘은 9월2일 일요일입니다. 저는 <시사IN>을 대신하여 뉴욕의 모처에서 신정아씨를 만나서 인터뷰를 시작합니다.” 유일하게 하는 정식 인터뷰라는 점을 새삼 강조하고 싶었다. 이 음성은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 전파를 탔다. 신기했다.
◇…첫 질문은 ‘사실을 확인하자’며 물어본 것이었다. “중경고를 졸업했고, 서울대 미대에 합격했으나 등록하지 않았다 했고…”라는 대목에서 신씨는 말을 끊었다. “서울대 시험도 본 적이 없다.” 8월11일 뉴욕에서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것과 말이 달랐다. 나는 인터뷰어로서 인터뷰 내내 이 점을 염두에 두었다.
◇…신씨는 처음 만났을 때 뉴욕에서 일기 형식의 자서전을 쓴다고 이야기했다. 그녀의 육필 원고를 반드시 확보해야 했다. 그것만 쥐고 있으면 인터뷰는 안 해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9월2일 두 번째 만남을 앞두고 신씨에게 인터뷰에서의 중언부언을 피하기 위해 내가 미리 봐야겠다고, 그러면 당신도 인터뷰 하기에 훨씬 더 편할 것이라고 설득했다.
신씨는 전제 조건을 달았다. △원고는 책으로 출판하기 위해 자서전 형식으로 쓰는 것이다 △출판할 때 감수자로 성우제 이름을 넣겠다고 약속하라 △인터뷰 기사는 이 책의 내용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써달라. 나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런 조건을 달면 나는 원고를 보지 않겠다. 그냥 인터뷰만 하자”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냈더니 ‘감수’ ‘책의 내용을 뒷받침하는 인터뷰 기사’라는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장문의 글 두 편을 이메일로 보내왔다. 이렇게 글을 길게 쓰는 것은 처음이라면서….
◇…신씨가 뉴욕에서 두 달 남짓 생활하면서 쓴 원고는 2011년 3월에 출간한 <4001>의 초고이다. 신씨가 한국에 들어갈 때, 그녀의 변호사는 뉴욕에서 쓴 글의 존재를 기자들에게 이야기하면서 필요하다면 월간지를 통해 공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내가 가지고 있던 신정아 자서전 초고 파일을 <시사IN>에 보냈다. 월간지에서 쓸 기미가 보이면 먼저 풀어버리라고…. 당시 출판가에서는 자서전 원고를 두고 어느 출판사가 몇 억원을 제안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어느 월간지도 그 원고를 게재할 기미가 없었다. <시사IN>은 보유만 했을 뿐 약속대로 그 원고의 존재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황색 언론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약속은 어찌 되었든 간에 ‘육필 원고를 우리가 가지고 있다’며 백번, 천번은 우려먹었을 것이다. 초고에도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C일보 C기자 이야기 같은 예민한 문제들이 <4001>과 거의 똑같이 나온다. 초고는 윤문을 거치지 않았고, 신씨가 궁지에 몰려 쓴 글이어서 그런지 매우 거칠다. 미술계 특정 인사들에 대한 비난, 특히 기자들에 대한 비난이 많다. 그러나 <4001>에서 이슈가 되었던 외할머니 이야기는 없다. 변양균씨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이 없다(신씨는 처음 만났을 때는 변양균씨를 잘 모른다고 했었다. 그저 정부의 고위급 인사가 성곡미술관에 그림 보러 왔다길래, 예의상 나가서 안내해준 게 전부였다고 했다. 두 번째 인터뷰 할 때는 “예술적 동지”라는 표현을 썼다. “지난번 말과 왜 다르냐”고 했더니 “안다고 하면 애꿎은 사람에게 피해가 갈까 봐 그랬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연서도 나왔다고 하던데, 애인 사이 아니냐”고 물었다. 신씨는 “하늘이 두 쪽이 나도”라는 표현을 썼다. 그리고는 “아니다”라고 했다. 그후 재판정에서는 “사랑하는 사이 맞다”고 했고, <4001>에서 두 사람의 로맨스를 정밀하게 묘사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하늘은 두 쪽 나지 않았다).
◇…신정아씨가 입국하자마자 바로 검찰청으로 향하는 바람에 한국의 언론들은 그녀로부터 말 한마디 들을 수 없었다. 입국하기 직전 ‘성로비’의 증거라며 누드 사진이 나온 데 이어, 공항 패션과 병원에서 먹은 새우깡 과자까지 기사화되었다.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지푸라기 하나도 기사가 되었다. 그때는 한국의 모든 언론이 황색이었다. 신정아씨의 육성 녹음 파일에다가 육필 원고까지 보유한 <시사IN>만이 유일하게, 그리고 느긋하게 ‘사실’에 근거한 보도를 했다.
◇…인터뷰 질문지를 만드는 데 신경을 많이 썼다. 캐나다에 살게 된 지 6년째여서 한국 상황을 정밀하게 파악하는 데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다. <시사IN> 이숙이·노순동 두 후배에게 질문거리를 작성해 달라고 부탁했다. 자기 일 하느라 정신없는 와중에서도 후배들은 꼭 물어봐야 할 것들을 꼼꼼하게 챙겨주었다. 토론토에는 후배 김상현·김영신 부부가 있었다. 상현씨는 <시사저널> 후배이다. 가까이 살던 우리는 평소보다 더 자주 만나, 역시 기자 출신인 영신씨와 함께 마치 편집회의를 하듯 이야기를 나누었다. 토론토 대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온타리오 주 고위 공무원으로 일하던 상현씨는 북미 대학 사정에 누구보다 밝았다. 그는 대학원 박사과정 졸업과 관련하여 기본적이지만 송곳 같은 질문을 내게 장착해 주었다. 캐나다 명문 워털루 대학 박사인 중국인 친구 제이도 박사학위와 관련한 질문을 챙겨주었다. 이들이 만들어준 질문을 하자 신정아씨는 “나중에 얘기하면 좋겠다.” “이 부분도 나중에 밝히겠다”고 답했다. 상현·영신 씨는 인터뷰의 ‘들어가는 말’도 나와 함께 썼다. 신정아씨를 둘러싼 한국의 상황이 지나치게 들떠 있어서, 냉정하고 건조하게 쓸 필요가 있었다.
◇…신정아씨는 뉴욕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는 대신, 자료 사진을 보내왔다. 한국 신문에 나갈 만큼 나가서 인터뷰의 효과를 반감시키는 자료 사진이었다. <시사IN> 뉴스팀장을 맡은 이숙이 기자가 독촉을 해왔다. “선배, 어떻게 사진을 안 할 수 있어요? 어떻게 좀 해봐요. 인터뷰 했는데 사진 없으면 말이 안 되잖아요.” 후배지만 명령은 무겁고 단호했다. 만약 과거 <시사저널> 안병찬 편집국장이었다면 “일을 뭐 그따위로 하는 거야? 너, 어디 유람 갔다 왔니?” 하며 눈물 쑥 빠지게 호통을 쳤을 것이다. 이숙이 팀장도 똑같았다. 말투만 달랐을 뿐이다. 창피했다.
그때부터 전화로, 이메일로 설득에 설득을 거듭했다. 어렵게 인터뷰 해놓고 효과 반감되기를 원하느냐고…. 이왕 한 거니까 확실하게 가자고…. 이숙이 팀장의 명령을 그대로 전했다. “뉴욕 느낌 팍팍 나는 바깥을 배경으로 하여 현장감 있게 찍어 보내라”고…. 원한다면 내가 한 번 더 가겠다고…. 후배의 독촉까지 받은 터여서 사진에서 내가 물러설 여지는 없었다. 9월9일에 이르러서야 신씨는 맨해튼 길거리에서 찍은 사진 2장을 보내왔다. 다음과 같은 내용을 붙여서….
“사진 보내드려요. 어제 (사진 찍으면서) 고생을 해서 화가 많이 났어요. (뉴욕의 호텔) 밖에서 사진 찍는 게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아시잖아요. 단 10분도 제대로 못 앉아 있는 처지인데…. 안경 벗고 맨 얼굴로 밖에 앉아 사진 찍는 게 아무 것도 아니라면 얼마든지 찍어 드리지요. 너무 고생을 많이 했어요. 어제 전화하셨을 때 어느 분께 부탁하여 사진 찍을 때였거든요. 혹시라도 지나가다 누가 보면 여기 도망 와서 밖에서 사진 찍는다고 욕할 거고…. 낮에도 밖에 앉아 점심 먹으려고 하는데, 한국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누가 카메라를 대길래 곧장 일어나서 걸어 나왔지요. 그렇게 밖에서 간이 콩알만 해져서 사진을 찍고 나니 너무 화가 치밀어 오르더라구요.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화가 많이 나네요.”
◇…신정아씨가 뉴욕 JFK 공항에서 한국 특파원들을 따돌리고 난 뒤에도, 기자들의 추적은 집요했다. 특히 이른바 조중동의 취재력은, 기자 출신인 내가 봐도 집요하고 또한 탁월했다. 다만 그럴 필요도 없는 일에까지 인력과 돈과 시간을 쏟아 붓는 것이 아까울 따름이었다. 신정아씨를 ‘보호’하는 지인이 내 친구 J라는 것을 그들은 밝혀냈다. 그들은 내 친구의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학생을 수소문해 J의 대인 관계까지 파악해 냈다. <시사저널> 기자 출신인 친구 성우제가 요즘 가게에 드나든다는 것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은 또 K타운 한인식당들을 훑고 다니며 ‘테이크 아웃’ 하는 음식까지 체크했다.
하루는 신정아씨가 한국 음식이 먹고 싶다 하여 J가 설렁탕을 테이크 아웃했다. 한국의 특파원 차량이 따라붙었다. J는 맨해튼 어느 아파트의 지하로 들어가 손님 주차장에 자기 차를 세운 다음, 음식 봉투를 들고 계단으로 빠져나가 언론사 차량을 따돌렸다. J는 “첩보 활동 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뭔 짓인지 모르겠다. 죽을 죄 지은 죄인도 아닌데 밥 한 끼 제대로 못 먹게 하네”라며 허탈하게 웃었다.
◇…내가 신정아씨를 만나 인터뷰했다는 사실은 <시사IN> 창간 때까지 극비에 붙이기로 했다. 심지어 창간호 커버스토리 취재를 위해 뉴욕에 출장 온 <시사IN> 신호철 기자에게까지 비밀로 했다. 한국에서도 백승기 발행인, 문정우 편집국장, 이숙이 취재팀장, 취재 담당자인 주진우·노순동 기자 정도만이 내가 신씨를 만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뉴욕에 막 도착한 신호철 기자를 한식당에서 만나 J와 셋이서 식사를 했다. 호철이가 신정아 이야기를 꺼냈는데도 우리는 모른 척 했다. 이 사실을 모르는 호철이는 J의 집에서 서울과 통화하면서 신정아 이야기를 했다. 모르는 척 하면서 듣고 있기가 민망했다. J는 이번에도 신호철 기자를 자기 집에 재우고, 하버드대 박사과정에서 공부중인 대학원생을 통역 겸 안내자로 붙여주었으며, 멀리 취재 갈 때는 자기 차까지 내주었다. <시사IN>과 직접 관련도 없는 내 친구가 이 정도로 하는데, 선배인 나는 호철이를 도와줄 게 거의 없었다. 내가 겨우 했던 것은 밥이나 한번 사먹으라며 호철이에게 쥐어준 100달러가 전부였다.
◇…<시사IN> 기자가 뉴욕에 나타났다는 사실이 K타운 친구 가게 앞에서 진을 치던 한국 특파원들에게 알려졌다. 처음에 그들은 나와 신호철 기자를 혼동했던 모양이다. 어찌되었건 그 이후 ‘<시사IN>이 신정아를 잡았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친구 J의 가게 앞에서 진을 치던 취재진 중의 일부는 뉴저지에 있는 친구 아파트 앞에까지 나타났다. 한 방송사는 신정아씨가 그곳에 머무른다고 여겼던지 카메라를 아파트에 들이대고 있었다. J가 사는 아파트 건물을 찍어 보도하기도 했다. 마침 이숙이 기자의 남편 홍 박사가 뉴욕에 출장을 왔다. J와 이 부부는, 이숙이 기자가 콜롬비아 대학에서 연수할 때 나의 소개로 알게 되어 가까이 지내던 사이였다. J는 호텔로 향하던 홍 박사를 자기 아파트로 불러들였다. ‘현재 나의 동거인은 남자다’라는 점을 과시하려고….
◇…언론 중에서도 조중동 특파원들이 끈질겼다. 그 중의 한 기자가 신정아씨의 거처를 하도 집요하게 캐묻는 바람에 J는 ‘귀찮아서’ 아는 호텔 이름들을 대충 적어주었다. 물론 사실이 아니었다. J가 불러준 이 호텔들은 ‘신정아가 거쳐간 호텔’이라며 상세한 지도와 함께 한국 신문에 보도되었다. 코미디였다. 어떤 기자는 J의 아파트에 와서 우체통을 뒤지기도 했다.
◇…9월2일 내가 정식으로 인터뷰를 하고 난 다음에도 서울에서는 연일 새로운 뉴스인 양 신씨에 대한 보도가 봇물을 이루었다. 심지어 태풍으로 인해 제주도에서 십수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도 신문들의 톱뉴스는 실체도 없는 신정아 관련 기사였다. 외국에서 바라보니 ‘뭔 이런 놈의 언론이 다 있나’ 싶을 정도로 매체란 매체는 모두 광기에 사로잡힌 것 같았다. 매일 같이 새로운 의혹이 불거지니, 나도 매일 신정아씨에게 연락해 물어보아야 했다. 서울에서 주진우 기자가 이메일이나 전화로 질문해 오면, 토론토에서 나는 그 질문을 뉴욕의 신정아씨에게 했다. 대답을 받아 나는 주 기자에게 다시 넘겨주었다. 서울-토론토-뉴욕으로, 다시 그 반대로 이어지는 아주 이상하지만 재미있는 인터뷰 라인이었다. 신씨와의 통화는 그녀가 뉴욕을 떠난 9월13일 새벽 6시까지 이어졌다. 주 기자를 직접 연결시켜주려 했으나 신씨가 극구 거부했다.
◇…9월12일자 <중앙일보>에 신정아 인터뷰 기사가 났다. 뉴욕에 있는 신씨가 서울에서 가까이 지내던 모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인터뷰를 했다는 내용이었다. 인터넷으로 그 소식을 접한 후 맥이 탁 풀렸다. 위기였다. 다행히도 <중앙일보>에는 구체적인 내용이 없었다. 그러나 속된 말로 ‘김이 새는’ 것은 사실이었다. 신씨는 미안했던지 토론토로 먼저 전화를 걸어와 해명했다. “친구처럼 지내던 <중앙일보> 기자가 우리 집에 울면서 전화를 했었노라고 이메일로 전해와서, 내가 전화했다. 서로 울면서 통화했을 뿐인데, 인터뷰 기사로 둔갑해 그렇게 거칠게 나왔다.” 인터뷰는 절대 아니었다고…. 9월2일 정식 인터뷰를 한 뒤 <시사IN>의 창간일인 9월15일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 참 힘겨웠다.
◇…내가 신정아씨를 인터뷰하고 <시사IN> 창간호에 싣게 되리라는 사실이 뉴욕의 특파원들과 그들의 한국 본사에 포착되었다. 친구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학생에게서 J의 가장 친한 친구가 <시사저널> 기자였고, 지금은 토론토 사는 그가 뉴욕에 자주 나타난다는 말을 들은 것으로 짐작되었다. 신씨가 귀국할 즈음 나와 내 친구에게 ‘딜’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느 방송사는 친구에게, 내가 한 인터뷰를 자기 방송에 쓰게 해주면 10만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1억원이 넘는 돈이다. 친구는 거절했다. 나중에 우리는 그렇게 단칼에 거절한 것을 두고 많이 후회했다. ^.^ 평소 J의 가게를 드나들던 한 유력 일간지의 한 특파원은, J한테서 내 이메일 주소를 알아내어 편지를 보내왔다. 9월12일이었다. 내용은 이랬다. “<시사IN> 용으로 신정아씨를 인터뷰했다고 해서 이렇게 연락드립니다. 물론 인터뷰 내용은 잡지에 써야겠지만, 잡지 내용을 크게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인터뷰 내용을 좀 알 수 없을까 해서 이렇게 연락드립니다. 물론 만약 기사를 쓴다면 <시사IN> 크레딧을 인용할 겁니다. 제게 연락처를 주시거나, 아니면 제 아래 전화로 연락 좀 부탁드립니다. 꼭 좀 연락 부탁드립니다.” 내가 연락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즈음 서울의 가족에게서 전화가 왔다. 큰 신문사 기자로 있는 고교 동창에게서 수십년 만에 연락이 왔다고 했다. ‘성우제가 뉴욕에서 신정아를 인터뷰하여 <시사IN>에 쓴다고 한다. 성우제에게 부탁해서 <시사IN> 창간호가 나오는 날, 우리 신문과 공동으로 내보내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가족은 나에게 그렇게 하라며 전화한 것이 아니라, 이런 전화를 받았노라고 전했다. 그 신문사는 선심을 쓴다는 투였다. 그냥 웃고 말았다.
◇…그 이전에도 가족의 전화가 있었다. 신정아 인터뷰를 하기 위해 뉴욕에 간다는 사실을 알고 전화를 해왔다. “나는 네가 그걸 안하면 좋겠다.” 이 한 마디로 한국의 상황이 대충 파악되었다. 한국에서는 신정아씨와 어떤 식으로든 얽히는 것을 꺼려하고, 심지어 과거의 관계조차도 부인하던 아주 이상한 분위기였다. 신씨를 도와줬다고 하면 외압에 연루되었다고 검찰에 바로 소환되는 마당이니,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신씨를 국제미술행사 디렉터인 B에게 소개한 미술계 인사 A는, 신씨와 B 두 사람 모두 A를 통해 소개받았다고 하는데도 “그런 적 없다”고 공개적으로 부인할 정도였다. 나는 걱정하는 서울의 가족에게 말했다. “뉴욕의 한국 특파원들은 신정아와 인터뷰 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나도 그들 중 한 사람이라 생각하면 된다.”
◇…9월10일께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에 대한 검찰 조사가 발표되자 신정아씨는 한국으로 급히 귀국하려 했다. 자기 때문에 ‘남의 인생이 망가지는 것을 이상 견딜 수가 없다’고 했다. 단독 인터뷰의 폭발력이 떨어질까 봐 나와 J는 신정아씨의 귀국 타이밍에 조바심을 냈다. <시사IN> 창간호가 나올 때까지는 어떻게 해서든 귀국을 만류해야 했다. 신정아씨의 육성 인터뷰를 유일하게 게재한 <시사IN> 창간호는 9월15일 토요일에 인쇄를 마치고 9월17일 월요일에 배포될 예정이었다. 최소한 <시사IN> 창간호가 인쇄되기 전까지는 한국 땅에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된다고 우리는 생각했다. 급기야 9월13일 새벽 6시 신정아씨가 호텔에서 나와 지금 공항으로 이동 중이라며 토론토로 전화를 해왔다. 그 와중에 <문화일보>에 실린 누드 사진에 대해 질문을 했다. 아니라며 펄쩍 뛰었다.
◇…J는 묘안을 생각해냈다. 13일에 비행기를 타게 하되 일본 도쿄를 경유하도록 했다. 한국에서 건너온 변호사를 신정아씨가 만나게 한다는 명목으로 도쿄에 하루만 붙잡아두면 9월15일 토요일 오후 귀국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그 즈음이면 <시사IN> 창간호 인쇄기는 돌았고 배송이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J는 일본인 친구인 모 민영 방송사 PD 모리타에게 연락하여 도쿄에서 신정아씨를 ‘영접’하도록 했다. 사실상 하루 붙잡아 두는 영접이었다.
◇…부탁을 하면 120% 들어주던 J의 진면목이 또 드러났다. 그는 신정아씨에게 “이왕 줄 거라면 확실하게 주라”고 강조했다. J가 신씨에게 마지막으로 요구한 사항은 일본을 거쳐 김포공항에 들어갈 때의 패션이었다. 신씨의 말 한 마디 못 들은 언론들이 옷 차림새에 유독 관심이 많은 만큼, <시사IN> 창간호 사진 속의 옷과 똑같은 옷을 입고 가도록 주문했다. 그래야 <시사IN>의 사진이 더 사실적으로 보이고 효과 또한 더 커지리라 그는 판단했다. 신씨는 J의 말에 따랐다. 검은색 셔츠, 베이지색 재킷과 데님 청바지였다.
J의 프로 기질은 끝까지 발휘되었다. 신씨가 뉴욕을 떠난 날 오전 나는 전화를 걸었다. “지금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나 지금 홍 박사 태우고 공항 가는 길인데, 신정아 머물던 호텔에 가고 있다”고 했다. “신정아 떠났는데?” “홍 박사 편에 호텔 사진 찍어서 이숙이한테 이메일로 보내라고 하게. 나한테 디카가 없잖아. 자료 사진보다 직접 찍는 게 훨 낫고….” 호텔 사진을 찍기는 했으나 ‘사진빨’ 안 난다고 보내지 않았던, 인터넷 자료 사진을 쓰면 되겠거니 하고 안이하게 생각했던 나는 크게 한방 맞은 느낌이었다. J는 나보다 훨씬 높은 급수의 프로였다. 비록 홍 박사가 찍은 사진이 사정 때문에 게재되지는 않았지만 J는 신정아 인터뷰의 마지막까지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중간 중간 “네 부탁 들어준다고 내가 지금 무슨 개고생이냐”라고 퍼부었지만….
◇…J와 나의 기대와 예상대로, <시사IN> 창간호의 마감 다음날, 방송사 카메라를 비롯한 다른 매체의 기자들이 <시사IN>에 들이닥쳤다는 ‘낭보’가 들려왔다. 최고참 백승기 선배가 약간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해왔다. “신정아 음성 녹음한 거 있지? 그것 좀 빨리 보내”라고. 방송사에서 필요로 한다고 했다. 신정아씨가 귀국했으나 그녀의 목소리라고는 한 마디도 듣지 못했으니, 당연한 요구일 터였다. 신씨가 내게 준 디지털 녹음기가 위력을 발휘했다. 나는 음성 파일을 바로 보냈다. 신정아씨의 음성은 “다음 주 월요일에 창간하는 시사주간지 <시사IN>과 인터뷰한 신정아씨는…”이라는 9시 뉴스 앵커의 멘트에 이어 나왔다. 한국의 모든 매체가 <시사IN>이 보유한 음성 파일과 인터뷰를 인용해 보도했다. 창간 작업 하느라 탈진한 <시사IN> 기자들은, 들이닥치는 다른 매체 기자들을 상대하느라 초죽음이 되었을 것이다. 인터넷에 정리가 되지 않은 인터뷰 초고 파일들이 뜨곤 했다.
서울에서 문정우 편집국장이 “수고 많았다. 빨리 들어와라. 술 한번 제대로 먹자”고 했다. 이 전화를 받고 나는 J에게 전화했다. “정말 수고 많았다”고 했더니 J는 화를 냈다. “친구 사이에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다”라며….
◇…신정아씨가 검찰에서 조사를 받고 있으니, 매체들은 나에게 연락을 해왔다. 일일이 다 응하다가는 생업을 포기해야 할 지경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2개월 동안 생업을 도맡아 하던 아내가 많이 힘들어하던 터였다. 원칙을 정했다.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 하나, 텔레비전 교양 프로그램 하나, 그리고 텔레비전 뉴스 하나씩만 한다. <시사IN>에 썼으니, 인쇄 매체는 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손석희의 시선집중> 등 딱 하나씩만 방송했다. 나머지는 다 거절했다. 전화 인터뷰를 네 번(시선집중과는 이틀 연속) 했는데, ‘손석희가 왜 손석희인가’를 실감했다. 예전 <손석희의 시선집중>을 시작할 때 그와 정찬형 PD를 함께 만나 인터뷰한 적도 있었다. 내가 그 프로그램에 나갈 줄은 몰랐다. 이번에 그의 인터뷰이가 되고 보니 그는 인터뷰의 천재였다. 내가 말을 술술 풀어갈 수 있도록, 내 입이 저절로 딱딱 벌어지도록 질문을 해왔다. 사전에 자료를 충분히 검토한 다음, 나의 대답을 듣고 바로 질문을 이어나갔다. 덕분에 서울과 토론토를 연결한 생방송 전화 인터뷰인데도 전혀 긴장 되지 않았다. 반면 다른 두 건의 전화 인터뷰는 짜증의 연속이었다. 앞뒤 맥락 없이, 종이에 적은 질문만 계속 들이댔다. 아까 했던 녹음이 잘못되었다며, 새벽 3시에 다시 전화를 하여 새로 녹음하기도 했다.
◇…여성지에서 ‘무슨 내용이라도 좋으니 써달라’는 원고 청탁이 여럿 들어왔다. 그즈음까지 신정아씨를 직접 만난 기자가 단 한 명도 없으니, 무슨 내용을 써도 새로울 터였다. 어떤 후배는 “이번 참에 고료 좀 챙겨보시죠”라고 연락해 왔다. 쓸 기력이 없었다. 또 힘이 있다 한들 여성지에 쓰고 싶지 않았다. 과거에 한번 덴 경험이 있었다. 원기를 회복하고 ‘왜 돈 안 되는 엄숙주의에 빠졌었나’ 하고 자책할 무렵이 되자, 아무도 청탁하지 않았다.
◇…조중동 중에서도 <조선일보>가 과연 대단했다. 뉴욕에서 신씨를 쫓아다니면서도 그랬거니와 신씨가 귀국한 후에도 그 집요함은 여전했다. 신씨가 한국으로 돌아간 지 한참이 지난 9월말 <조선일보> 뉴욕 특파원이라며 전화를 해왔다. “집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자 “선수끼리 뭘 그런 걸 묻고 그러냐”고 했다. 그는 <시사IN>에 쓰지 않은 내용이 없느냐고 했다. 쓰지 않은 내용, 특히 신정아씨가 쓴 글에 <조선일보>와 <조선일보> 기자들과 관련된 내용이 많았으나 주고 싶지 않았다. “<시사IN>에 실리지 않은 많은 내용이 인터뷰의 전문 형식으로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랐으니 그걸 참고하라”고 했다.
◇…편집권 독립을 두고 싸우다가 <시사저널>에서 나온 <시사IN>은 출발부터 운이 좋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좋을 정도가 아니라 ‘하늘이 도왔다’고 믿고 싶을 정도였다. 하필 바로 그 시기에 신정아 학력위조 사건이 터졌고, 조중동을 비롯한 언론들이 이른바 ‘프레임’을 만들어 한 개인의 학력위조 사건을 나라를 뒤흔드는 초대형 사건으로 부풀렸다. 또 하필 그 즈음 <시사IN>은 무리한 일인 줄 뻔히 알면서도 9월 중순 창간을 선언했다. 신씨는 졸업했다는 증거를 찾겠다며 뉴욕으로 왔고, 하필이면 내 친구 J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기껏해야 학력 위조와 미술관 공금 횡령 정도의 작은 사건(로맨스 문제야 고소가 안 되었으니 법에 저촉될 일은 아니고…)인데, 사건은 수백배 이상 커졌다. 한국 사회와 신씨 개인에게야 불행한 일이겠으나, <시사IN>의 창간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는 사건이 커지면 커질수록 좋았다. 일이 잘 되려고 할 때는, 모든 것이 이렇게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아이러니 하게도 신정아 학력위조 사건을 크게 키운 보수 언론들이 진보 언론 <시사IN> 창간 홍보를 도왔다.
2개월 이상 한국의 신문 방송을 뒤덮은 사건의 핵을 바로 내가 쥐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기자 출신으로서 하늘에서 구름을 밟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누가 인정하든 않든, 나의 기자 인생에서 이렇게 화려한 날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일상으로 돌아와 생업에 충실하던 이듬해 3월 서울 <시사IN>에서 특종상을 보내왔다. 옥으로 만든 상패와 상금 1000달러였다. 친구인 장영희 기자가 적극 주선했다고 했다. 어려운 살림살이 하는 걸 뻔히 아는 터에 상금 받기가 조금 미안했다. 장영희는 안 받은 원고료를 받는다 생각하라고 했다. 상패·상금보다 더 마음에 든 것은 상패의 문구였다. ‘모든 언론사가 원했으나 어디도 하지 못한 신정아씨 직접 인터뷰를 성사시켜 <시사IN>의 위상과 신뢰를 한껏 높였기에….’ 내 친구 J에게도 똑같은 것이 보내졌다.
내 친구 J에게 나중에 물어보았다. 고의로 그랬든 아니든 학력을 속인 사람을 왜 도와줄 마음이 생겼냐고. J는 말했다. “그 전에도 내가 학력이나 직위 보고 만났던 게 아니다. 그저 나한테 도움을 청하니 도와준 것뿐이다. 신정아의 학력이나 직위가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그걸 속였든 말든 그건 나와 상관도 없고, 관심도 없다.”
뉴저지에 있는 친구 김정석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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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언론의 힘이 대단합니다. 마지막에서 눈물이 왈칵나네요.
기자로서 거짓말하는 사람 말을 그대로 사실 확인없이 받아적어 세상에 알리는게 과연 맞는 일인가요? 친구 분도 세상을 속이든 말든 상관없다구요? 캐나다는 기본적으로 그 사람 말을 신뢰하지만 한 번 거짓말 하면 그 사람 말은 다시는 믿어주지않지 않나요? 친구 분의 명복을 빌지만 두 분 다 진실을 왜곡하는 걸 아무렇지않게 생각하신다니 실망스럽습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01.14 1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