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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소야곡(小夜曲: 세레나데)
오동추야 달이 밝아 오동동이야 - ‘오동동 타령’
송영찬 / 계간진해 편집위원
노래란, 수천수만의 마음이 지나간 ‘정서의 궤적(軌跡)’이라고 하지 않았나. 이번 가을호에는 그 궤적을 따라 ‘계간진해’ 독자들에게 한국인의 소야곡(?)이라고 불리고 있는 ‘오동동 타령’에 대한 공감대를 함께 형성해보자고, 이렇게 면담을 필자 혼자나마 감히 신청을 해본다.
* 소야곡(serenade): 사랑하는 연인의 창 밖에서 노래하거나 연주하는 곡.
■ 들어가면서
사연인즉 이러하다. 얼마 전, 우연한 기회에 필자가 알고 있는 ‘오동추야’란, ‘오동추’라는 이름에 ‘야’라는 모음으로 끝나는 체언에 붙이는 호격(呼格) 조사의 하나인 주로 손아랫사람이나 사람 아닌 대상을 부름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것으로 ‘영희~ 학교에 가자, 엄마~ 누나~ 강변 살자<김소월> 또는 새~ 새~ 파랑새~’처럼 이름을 뜻하며, ‘오동동(梧桐動)’이란 ‘여수 오동도(梧桐島)가 아닌, 마산 오동동(午東洞)’을 뜻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어! 이게 그것이 아니고 한자 그대로의 뜻인 ‘오동추야(梧桐秋夜)와 오동동(梧桐動)’일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었다. 사실 필자는 노래 가사를 다 알지는 못하였지만, 해학적이며 익살스러운 만화에 등장하는 서민의 주인공으로 온갖 스트레스를 풀어 줄, 대리 역을 맡아 카타르시스를 풀어줄, 다소 모자란 듯 헤픈 익살스러운 주인공인 오천만 민족의 오동추 모습을 상상하곤 하였는데 이게 웬 날벼락인지 고소를 금치 못하였다. 이왕 이렇게 시작한 것, 이참에 ‘생각한 만큼 보인다.’라고 했나 재음미하며 이해의 폭을 넓혀 나가 보자. ‘오동동 타령’ 가사를 어디 한번 전격 해부해 보자
■ 자~ 아~ 자. 노래 가사를 어디 한번 적어 볼까
- 오동추야 달이 밝아 오동동이냐/ 동동주 술타령이 오동동이냐/ 아니오 아니오 궂은비 오는 밤 낙숫물 소리/ 오동동 오동동 끊임이 없어/ 독수공방 타는 간장 오동동이요//
- 동동 뜨는 뱃머리가 오동동이냐/ 사공의 뱃노래가 오동동이냐/ 아니오 아니오 멋쟁이 기생들 장구소리가/ 오동동 오동동 밤을 새우는/ 한량님들 밤 놀음이 오동동이요//
- 백팔염주 염불소리 오동동이냐/ 똑딱 똑 목탁 소리 오동동이냐/ 아니오 아니오 속이고 떠나가신 야속한 님을/ 오동동 오동동 북을 울리며/ 정화수(井華水)에 공들이는 오동동이요//
여기에서 시작되는 첫 단어가 “오동추야와 오동동”이다. ‘오동추야’란 한자로 표기하면 ‘梧桐秋夜’로 ‘오동잎이 떨어지는 가을밤’이라는 뜻이며, 오동동(梧桐動)은 의태어(擬態語)인 오동나무 잎이 흔들리거나 떨어지는 것을 나타내며 또한, 의성어(擬聲語)인 빗물이 오동잎에 ‘동동’ 떨어지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이와 같이 우리말에는 오동동처럼 ‘동동’이 들어가는 노래 가사가 뜻밖에 참으로 많단다. ‘아으 동동(動動) 다리(연대 미상 고려가요), 동동 구루모(구리모, 화장품), 아리아리 동동 스리스리 동동, 아리랑 동동 스리랑 동동(가수 하춘화), 아주까리 동동(피마자기름), 동동주’처럼 우리는 쉽게 ‘동동거리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오동동 타령의 오동동을 오동나무 잎의 움직임과 소리는 물론, 가사에서처럼 ‘동동주 술타령, 낙숫물소리, 독수공방 타는 간장, 동동 뜨는 뱃머리, 사공의 뱃노래, 기생의 장구소리, 한량님들의 밤 놀음, 염불소리, 목탁소리 등 정화수에 공들이는 것까지 모두를 오동동’이라고 했다. 이것은 안타까운 마음에 애간장을 태우며 발을 동동거리는 눈에 보이는 모습과 보이지 않는 숨은 마음까지를 표현한 것이렷다.
■ 오동동 타령의 유래와 마산 오동동(午東洞)과의 관계는
이처럼 오동동 타령은 1954년에 발표한 우리나라 대표적인 민요가수 황정자의 히트곡으로 그녀는 44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으며, 유명한 함안의 ‘처녀 뱃사공’을 부른 가수이기도 하다. 50년대에 유행한 노래가70년대 리메이크가 되어 많은 이의 사랑을 받기도 하였으며, 그 뒤 80년대에도 ‘들고양이’가 다시 불러 인기를 얻었으며, 아직도 많은 이들이 즐겨 부르고 있는 노래다. 일설에 의하면 “작사가 야인초 선생과 작곡가 한복남 선생의 일대기와 가수 황정자의 흔적에서 찾아보면, 통합 창원시가 된 마산구 오동동과의 관련성을 찾아볼 수가 있다.”라고 한다. 그러나 ‘마산 오동동(午東洞)과 노래 오동동(梧桐動)’은 한자부터 달라, 마산 오동동은 오동나무나 벽오동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한다. 마산 오동동은 1914년 행정구역 통합으로 오산동과 동성동 그리고 상남동 일부가 합쳐져 오산과 동성의 이름 첫 글자를 따서 오동동이라 하여 마산시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경남도민일보(2006년 1월 9일 이일균 기자)의 기사를 보면, 오동동 권번에서 배출된 기생들의 애환을 담은 노래가 ‘오동동 타령’이라고 한다. 그것은 이 노래를 불렀던 황정자·황금심이 직접 그렇다고 말을 했기 때문이란다. 그런고로 ‘오동동 타령’은 마산 오동동 기생들의 삶에서 나왔다는 것이다.그러나 첫째 줄 가사를 “오동추야 달이 밝아 오동동이냐/ 오동도 꽃이 피어서 오동동이냐/”로 고쳐 부르면,어김없이 여수 오동도(梧桐島)의 동백꽃이 중심적 이미지로 두드러져, 대부분 사람에게는 오동동 타령이 여수 오동도 동백으로 뇌리에 꽂혀 있었으리라(?). 거두절미하고 사실 ‘마산 오동동(午東洞)이냐, 여수 오동도(梧桐島)냐 하는 것’ 자체가 별 논란거리가 안 된다는 것이다. 마산 만(灣)에 접한 마산 오동동의 지형이나, 일본 강점기부터 요정이 흥했던 오동동 주점(酒店)의 역사를 본다면, 마산 오동동이 ‘오동동 타령’ 노래의 무대라고 하여도 아무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란다.
* 오동도: 한국의 미항(美港)인 전남 여수시 수정동에 있는 오동잎을 닮은 섬으로 과거엔 오동나무도 많이 있었다고 함.
* 한복남: ‘빈대떡 신사’로 가수로 데뷔하였으며 ‘오동동 타령’은 물론, ‘홍콩 아가씨’ ‘물레방아 도는 내력’, ‘한 많은 대동강’, ‘불국사의 밤’ 등 600여 곡에 달하는 히트 곡을 작곡하였음. 특히, ‘엽전 열닷 냥 ’, ‘나그네 밤거리’ 등은 직접 노래까지 불러 큰 인기를 얻었다고 함.
■ 한(恨)과 그리움의 노래, 기다림의 미학(美學)
필자가 가사도 뜻도 제대로 모르고 친구들과 곧잘 함께 불렀던 오동동 타령이 새롭게 아로새겨지는 것은 어릴 적 마을 잔칫날 시골 어르신들의 밀양아리랑 타령과 함께 신명 난 가락 장단에 아마 친근감이 남아 있어 이렇게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 이번 기회에 혼자서도 좋을 다 함께라면 더 좋을, 흥얼거리듯 천천히 불러도 좋고, 신명 나게 빠른 템포로 젓가락 장단에 맞춰 흥겹게 불러도 좋을, 한과 그리움의 노래 기다림의 미학인 우리 노래를 어디 한번 다시 불러나 보자.
먼저 1절의 가사를 살펴보면 만추(晩秋)의 달 밝은 밤, 바람마저 머물지 않는 마당 한가운데 자리 잡은 오동나무에 애절한 마음을 내비친다.
- 오동추야 달이 밝아 오동동이냐/ 동동주 술타령이 오동동이냐/
괜히 시비를 걸고 있는 듯하다. 시작부터 마음이 편치 않은 모양일세. “달이 밝아 오동동이냐 오동잎이 떨어져 오동동이냐 아니면 동동주 술에 밥알이 동동 떠서 오동동이냐?”라며 미운 정, 고운 정 온갖 생각이 솟구쳐 올라 반말 비슷하게 따져 묻기도 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한다. 그러나 어찌 보면 시적(詩的)인 표현으로 볼 수도 있겠다. 왜냐면 가을밤 달이 너무 밝아 ‘오동추야’라고 하는 것일까? 아니면 오동나무 잎사귀가 구름 한 점, 바람 한 점이라고는 없는데도 커다란 잎이 만해 한용운 선생님의 시(詩) ‘알 수 없어요.’처럼, 수직(垂直)의 파문을 일으키며 고요히 떨어져 ‘오동동’이라고 하는 것일까? 기다리다 지쳐 외로움을 달래며 한잔한 동동주에 취기가 올라 무심코 쳐다보니 동동주에 밥알이 동동 떠있어 그것을 ‘오동동’이라고 하는 것일까?아니면, 달만 막연히 바라만 보고 있는 외로운 마음이 갑자기 달빛 때문에 오동잎이 흔들리느냐고 묻다가 다시, 노랫소리 때문에 오동잎이 흔들리느냐고 묻는 것과 같은 이치인지, 빛으로 나무를 흔드는 것보다야 소리로 흔드는 것이 좀 더 그럴듯해 보이기 때문인가? 하지만, 아무리 소리가 큰들 노랫소리일 뿐인데, 정말 오동나무를 흔들기야 하였겠느냐마는, 노랫소리도 듣는 이의 마음에 귀가 있는가보다.
이처럼 우리 고유의 노래인 타령의 가사에는 톡톡 튀는 감각적인 언어 매력이 있다고 한다. 왜냐면, ‘오동동의 동동과 동동주의 동동’을 잇는 솜씨 보면 알 수가 있단다. 앞의 동동(桐動)과 뒤의 동동은 전혀 다른 말이기 때문이란다. 앞에 있는 것은 오동나무 잎이 떨어지는 것을 뜻하며, 뒤에 있는 것은 동동주 표면에 밥 알갱이가 동동 뜨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잠깐! 여기서 숨 한번 돌려보세. 동동주란 어떤 술인가? 마실 땐 달콤하여 얼마나 먹기가 좋은가? 하지만, 그 맛을 믿고 많이 마셨다가는 어김없이 취하고 마는 유혹의 술이다.사랑이 그런 것 아니던가? 처음엔 달콤한 기분에 호기심 반, 장난 반으로 마시다가 이윽고 만취하여 걷잡을 수 없게 되는 술과 같은 것이 아닌가? 그런 동동주에 취하여 부르는 노래이니 어찌, 애처로운 심사인 사랑의 사연이 가슴 속에 솟아나오지 않았겠는가? 어쩜, 외로운 귀에는 그 노래 역시, 자신의 한숨처럼 오동나무를 뒤흔드는 밀려오는 그리움이 왜, 아니겠는가? 인제 보니, 오동나무가 흔들리는 게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의 일렁임이 바로 오동동인 것이다.
- 아니오 아니오 궂은비 오는 밤 낙숫물 소리/ 오동동 오동동 끊임이 없어/ 독수공방 타는 간장 오동동이요//
이런저런 생각에 기다리다 지쳐 괜히, 재 풀에 겸연쩍은지 시비를 걸다가 그래도 미워할 수가가 없는지 그만 돌아서서 강하게 부정부터 해본다. ‘아니오. 아니오.’라며 심란한 마음을 궂은비 오는 날 밤에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소리라고 다시 우겨본다. 처량하게 떨어지는 빗물처럼 외로움과 기다림에 지쳐 애간장 타는 자신의 마음이 오동동이라고 심기를 밝히는 것 같다. 혹자는 이 노래의 강점을 뛰어난 ‘차음(借音)’이란다.처음 오동잎이 흔들리는 모습을 의태어로 표현하더니, 이번엔 낙숫물 소리의 의성어로 엮어 올린다. 처음 그윽한 소리는 술잔의 밥 알갱이로 바뀌다가 마침내 리듬도 빨라진 물소리로 변하게 한 것은 활발하고 익살스러운 ‘언어치환(言語置換)’으로 가히, 기발한 표현이다. 또한, 이 노래의 내용이 답답하고 막막한 외로움을 토로하는 것이면서도, 전체적인 분위기가 활달하고 명랑한 이유는 ‘낙천적인 말 꿰맞추기의 해학(諧謔)’이 숨어 있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이 유쾌한 와중에서도 곰곰이 짚어 생각을 해보라. 홀로 상심하여 빈방을 지키는 외로운 여인이 얼마나 오랫동안 그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면, 그놈의 낙숫물 소리가 ‘오동동 오동동’으로 들린다는 사실까지 발견했겠는가? 님이 오는 발걸음 소리라도 들을까 하여, 쫑긋 세운 귀에 들려온 그 쓸쓸한 빗소리의 오동동은 차라리 처음의 오동잎 지는 소리나, 동동주에 취한 노랫가락보다 더욱 못 견디게 하는 오동동이 아니었으랴? 그러기에 빗소리를 듣고 있는 여인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였기에 그 마음이 오동나무를 움직였을까? 달빛이나 노랫가락이 오동나무를 흔들었다면 왜, 이 여인의 사무친 마음인들 오동나무를 흔들지 못하였겠는가? 결국, 오동잎이 바람도 없는데 저절로 흔들린다는 것은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라는 것과 같다고 하였나, 아! 이 얼마나 무서운 집념인가?
2절에서는 무대를 다시 옮겨 자신의 구차한 변명을 계속 늘어놓는다.
- 동동 뜨는 뱃머리가 오동동이냐/ 사공의 뱃노래가 오동동이냐/
긴긴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 방황하다가 무엇이 왜 이렇게 애태우는지 알 수가 없어 또 시비를 걸어본다. “밀려오는 파도에 동동 뜨는 뱃머리가 오동동이냐, 아니면 뱃사공의 노래가 오동동이냐?”라며 현실을 전혀 수긍하려고 하지 않는다.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며 돌아 서서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원인 분석에 골몰하는 모습이 역역하게 엿보인 듯하다. 참으로 답답한지고. 솔직담백한 경상도 기질인‘밀양아리랑’ 가사처럼,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와 같이, 그것도 동지섣달 귀한 꽃 본 듯 이 다그치게 자기 마음을 헤아려 달라며, 차라리 직설적인 표현을 하는 것이 더 좋을 듯하기도 하고 아무튼 어렵구먼, 어려워........
- 아니오 아니오 멋쟁이 기생들 장구소리가/ 오동동 오동동 밤을 새우는/ 한량님들 밤 놀음이 오동동이요//
그런데 이쯤에서 또다시 갑자기 생뚱한 소리를 한다. 아니라고,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고, 아직 단정 지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그런데 의문문인 반말로 하다가 갑자기 존대어로 바뀌는 까닭 또한 무엇일까?이유가 뭘까? 아마 스스로에게 자문자답하듯 말한 것이리라. 이 또한 이 얘기를 들은 그 누군가에게 호소하기 위하여 말을 건네고 있다는 것이다. ‘실은 이렇습니다.’라고 그런 고백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 엉뚱스러워 보이는 국면전환을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분위기를 풍기는 것과 같단다. 이렇게 하룻밤이 아니라 여러 날의 외롭고 괴로운 날들이 중첩이 되어, 애간장 태우는 심란한 마음 때문인지 그럴 수가 없다며, 하늘처럼 믿었던 당신이기에 역시 아니라고, 절대 아니라고 강하게 부정부터 해본다. 여기에서 주지할 것은 함께 농경사회 보릿고개의 어려운 생활에서 몸과 마음이 지쳐 있다가 가을 추수를 마치고 이젠,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있어 좀 살만하다 싶었는데, 남편이라는 작자가 집을 나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도 알아주지도 않은 채, 돌아오지를 않고 있어, 아마도 노름이며 계집질 등 주색잡기에 아직도 빠져 있을 것이라며, 더욱더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며, 어쩔 줄을 몰라 극한상태까지 분위기를 끌고 가고 있는 것이렷다.
마지막 3절에서도 같은 양상이 나타난다.
- 백팔염주 염불 소리 오동동이냐/ 똑딱똑 목탁 소리 오동동이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뒤숭숭한 마음에 무대를 또 옮겨본다. 울다 지친 동백아가씨 가사처럼, 그리움에 지친 동백 꽃잎처럼, 빨갛게 멍든 마음을 법당에까지 찾아가 좌선을 하며, 백팔염주 염불소리가 오동동이냐 목탁소리가 오동동이냐며, 이분법적인 염불소리도 목탁소리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듯이, 기다림을 몰라주는 사뭇 치게 그립게 가슴에 요동치는 마음을 결국, 대자대비하신 부처님께 빌고 빌어본다. 역시나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포기란 결코 있을 수 없단다.
- 아니오 아니오 속이고 떠나가신 야속한 님을/ 오동동 오동동 북을 울리며/ 정화수(井華水)에 공들이는 오동동이요//
그러나 끝까지 부정과 부정만 하다가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그렇게 밉고 미운 서운한 님이지만, 막말로 뭐(?) 같지만 차마, 미워할 수가 없어 내 마음의 북소리가 사랑하는 님의 가슴에도 ‘둥 둥’울려줄 것을 바라며, 다시금 돌아와 달라고 장독간에 정화수 올려놓고, 미운 마음일랑 던져버리고 고운 정만 앞세워 신령님께 빌고 빌겠다는 이 얼마나, 한국적 여인만이 갖는 ‘은근과 끈기의 아름다움’인가? 자~ 자. 돌아가세! 어서 돌아들 가게! 난, 이젠 돌아가야 하겠네.ㅎ^ㅎ~……. 여기서 아리랑가사처럼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나네.’ 정말 그럴까? 김소월의 시(詩) 진달래처럼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와 같은 마음일까? 그럴까? 속마음은 그러하지를 못할 걸세. 아마 반대일 거야? 정화수에 공들이는 마음과 같은 마음일 걸세.
잠깐, 쉬어 가세나. 서양의 경우 대게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사랑을 갈망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나? 그 유명한 프랑스의 소설가 ‘뒤마’의 역사 소설, ‘삼총사’를 원작으로 한 청년 ‘달타냥’과 천사와 같은 여인 ‘콘스탄스’와의 사랑이야기가 그렇고, 유명한 오페라 ‘황태자의 첫사랑’의 황태자 ‘칼 하인리히’와 여관집 딸인‘캐티’와의 사랑이야기며, 네티즌이 뽑은 오페라 아리아 1위 곡인 ‘도니젯트의 사랑의 묘약’ 중 ‘남몰래 흐르는 눈물’에서 가난한 청년 ‘네모리노’와 대농장주 딸인 ‘아디나’와의 사랑이야기에서 사랑의 표현을 모두 남자가 그것도 적극적으로 하지만, 우리네 사정은 정반대이지 않나? 이 얼마나 고마운 마음인가? 그대 이름 하여 한국 남자여! 그대들이 부럽소이다. 다들 복 받았네그려~~~ㅎ^ㅎ~
물론, 예외도 있다. 유명한 조선의 명기(名妓) 황진이의 임종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인물, 바로 백호(白湖) 임제의 이야기이다. 평생 황진이를 못내 그리워하며 동경하던 그가, 마침 평안도 절도사가 되어 임지로 가는 길에 송도에 들렀으나, 황진이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님을 알고 절망한 그는, 그 길로 술과 잔을 들고 무덤을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紅顔)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盞)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라며,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그 유명한 시조를 지어 황진이를 애도하였다 한다. 그 후, 그는 조정의 벼슬아치로서 체통을 돌보지 않고 한낱 기생을 추모했다 하여 결국 파면을 당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임종을 맞게 되어,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내가 이같이 좁은 나라에 태어난 것이 한이로다.”하고 눈을 감았다고 한다.
■ 전통 민속주인 ‘동동주(動動酒)’란 어떤 술인가?
다시금 숨쉬기를 고르자. 여기에 등장하는 또 다른 용어인 동동주에 눈을 돌려보자. 동동주란 어떤 술인가.쇠주도 막걸리도 아닌, 독하지도 싱겁지도 않은 술이 아닌가? 그러니 여성들이 외로움을 달래기에 좋은 술일 수밖에. 실제 제조법은 막걸리와 크게 다르지도 않단다. 막걸리에 비해 술이 완숙되면 대부분 전분(澱粉) 성분들은 전부 가라앉아 전분(녹말)이 당화(糖化)되어 알코올 화(化) 되는 과정에서 주성분을 다 잃은 쌀알이 술 표면에 뜨게 된단다. 따라서 찹쌀로 빚은 맑은 술에 밥알이 동동 떠 있어 개미가 물에 떠 있는 것과 같다고 하여 ‘부의주(浮蟻酒)’라고도 하였단다. ‘목은집’의 기록으로 보아 고려시대 때부터 있었으며 최근 1984년 민속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옛 어른들께서는 동동주를 ‘호랑이 술’이라고도 하였다. “달 콤, 달짝한 것이 먹기에는 좋으나 좀 과음을 하면 뒷맛이 사뭇 감칠맛이 있어, 호랑이를 만난 듯 꼼짝달싹할 수가 없게 된다.”라는 데서 유래한 말일 것이다.
■ 나가면서
마지막으로 이 여인의 마음속으로 다시 한 번 들어 가보자. 마음마저 산란한 가을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지루한 낙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 여인의 방에도 들어 가보자. 아마, 황진이의 시(詩) “동짓(冬至)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春風)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님 오신 날 밤이 오면 굽이굽이 펴리라”//처럼 ‘두동달이베개’의 한쪽이 비어 있어 혹시, 저 빗속에 님이 오시지 않을까 학수고대하는 마음에 비는 그칠 줄도 모르고 온밤을 적셔, 저 비가 그치면 꿈에도 그린 그리운 님이 올까나 생각한 끝에, 저 낙숫물 소리가 그리운 이를 만나게 해 줄 마지막 전주곡일지도 모른다는 ‘기발한 발상(發想)(?)’까지 하게 한다.
그러니 뛰어난 언어감각을 지닌 소리꾼들이 그리 섣부르게 끝내지는 않았을 것이란다. 즉, 오동동은 내 마음(吾心)이 흔들리고 흔들린다는 뜻의 ‘오동동(吾動動)’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이 노래의 ‘주조음(主調音)’으로 처리하고, 그 외 꾸준하게 ‘변조음(變調音)’을 올려 분위기를 극대화시켜 공감대를 만든 것이 실로 이채롭다 할 것이다. 여기서 오동잎이 흔들린다는 것은 봉황(鳳凰)이 나무에 깃들이는 것으로 봉황은 예로부터 상서로운 새로 오직 오동나무에만 자생하며 ‘수컷을 봉(鳳), 암컷을 황(凰)’이라 하여 서로 ‘의(義)가 좋은 남녀의 상징’으로 쓰이기도 하였단다. 그러기에 오동잎 소리는 바로 님이 오시는 소리며 독수공방 애타는 마음이 주조음인 오동동(梧桐動)과 변조음인 빗소리 등과 함께 자연히 귀를 열어두게 되는 것이다.
되돌아보니, 어린 시절 때로는 경박스럽고 경망스럽게 촐랑거리듯이 뜻도 모르고 불렸던 ‘오동동 타령’이,이 얼마나 외로운 밤의 고독과 수 없는 밤의 중첩된 그리움과 사무친 이별의 아픔들이, 이토록 철저하게 푸르게 배어 있는지조차 필자 자신도 몰랐다. 조금도 색깔이 바래지 않은 늘 푸른 마음인 벽오동(碧梧桐)처럼 옛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라 그윽하고 외로운 가슴으로 불러나 보세. 오늘과 같은 청풍명월(淸風明月) 만추의 계절에 우리 다 함께 오동동 타령을……
* 두동달이베개: 갓 결혼한 부부가 함께 베는 베개
* 오동나무: 울릉도가 원산지로 악기 제작과 가구재로 널리 사용되며 민간약재로도 사용되고 있다. 특히,우리 조상은 죽어서도 함께하는 ‘나무(棺)’로 아주 귀히 여겼다고 한다.
*** 참고로 독자 제현님의 흥미와 이해력을 돕기 위해 일부 글들은 인터넷에서 검색하여 올려 두었음을 밝혀둔다. 다음엔 같은 정서를 가진 연장선상에서 우리 선조들의 영원한 여인 '황진이 이야기'를 올리도록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