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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하나님이 찾는 사람
복음 전파는 전쟁이다. 그냥 설교한다고 생각할 일이 아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기쁜 소식이고 세상에는 심판이다. 두루 좋게 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나라를, 지금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좋게 하거나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새로운 나라를 뿌리는 것이다. 잡초가 있는 밭을 갈아엎고 다른 씨를 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쟁이다.
십자가에서 뛰어내리지 못하는 예수에 대해서 말씀할 때 나는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라고 하면 다 알아듣는다. 그래서 무엇이 이루어졌는가? 가장 중요한 구속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는 40여 년 전에 ‘하나님은 사람을 찾으신다.’는 말씀을 받았다. 그때 나는 은사나 기적 같은 것에 대해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원래 나는 그런 것과 관계가 없었는데 목회하러 나가니까 그것이 판을 치고 있었다. 은사나 기적이 있는 곳은 뜨거웠고 사람들이 몰려드는데 은사가 없는 곳은 냉랭했다. 내가 있던 교회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서대문 순복음교회가 있었다. 우리 교회와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래서 꿩 잡는 게 매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방향을 찾아보려고 삼각산으로, 부흥회로 쫓아다녔다. 그런데 나는 도무지 은사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자격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접었다.
그리고 CCC에 들어갔는데 거기서는 성령 충만이라는 것을 요구했다. ‘믿음으로 성령 충만’이라고 하니 막연하고 더 어려웠다. 여의도 광장에서 엑스폴로 74를 할 때 대회장을 맡았던 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가 CCC에서는 믿음으로 성령 충만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했다는 뒷소문이 있었다. 그분은 실제적으로 은사로 충만한데 CCC에서 믿음으로 성령 충만이라고 하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고 비웃었다는 것이다. 그럴 법도 했다. 그분은 체험적인 것을 가지고 말하는데 CCC에서는 믿음을 말했던 것이다. 나는 이것이 항상 마음에 걸려 있었다. 나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니까 ‘나는 왜 안 될까?’하는 마음이 항상 있었다.
그런데 ‘주의 형상을 닮아’를 두 번째 읽으면서 알아진 것은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은사나 기적이나 뜨겁거나 찬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내가 사십 년이 넘도록 한 말의 주제는 항상 사람이다. 나는 그것을 벗어난 적이 없다. 나는 거기서 확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것들은 다 은사다.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중심은 사람이다. 어떤 사람인가?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열조다. 다윗이 죽어 열조에게로 돌아갔다고 할 때 열조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세 사람을 의미한다. 이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책이 ‘주의 형상를 닮아’다.
나는 대구에 온 이후로 줄곧 사람 이야기밖에 안 했다. 보통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찾는 사람,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사람,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을 말했다. 이 길로 계속 오다 보니 누구를 만났는가? 예수라는 사람이다. 예수 즉 마지막 아담을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순풍에 돛을 달고 잘 오던 배가 어느 항구에 정박해야 될지 모르게 되었다. 왜냐하면 다 모호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내 죄가 사해졌다는 것이 도저히 수용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말인가. 나는 무슨 죄를 지었기에 내 죄 때문에 그분이 죽게 되었다는 말인가? 이런 문제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래도 나는 끝까지 사람 이야기를 했다.
왜 이렇게 사람이 감추어져 있는가.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과 같이 되어 버렸으니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고 잘된 사람은 하나님과 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에서 예수를 주님으로 전파할 때 무엇에 부딪쳤겠는가. 한편으로는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과 부딪쳤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이방인들과 부딪쳤을 것이다. 유일신을 믿던 유대인들이 이방 세계에 가니 많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유대인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것이 없다. 창세기 6장이나 욥기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다. 참 사람은 없어지고 천사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것이다.
이 우주 안에 있는 전쟁은 누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전쟁이다. 천사가 하나님 아들인가. 인간이 하나님 아들인가? 이 전쟁이다. 여기서 사람은 인권을, 인격을 빼앗긴 것이다. 그런데도 인권을 빼앗긴 줄 모르고 천사들에게 동조하고 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결전이 붙은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러면 뛰어내려 보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유대인들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러면 우리 백성을 구원해 봐라.”라고 했고 그들에게 동조하여 예수를 비난하던 자들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러면 나도 하나님 아들이 되겠다.” 이런 식으로 조롱했다.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께 똑 같은 말을 했다.
심지어는 제자들도 ‘뛰어내리면, 이때 뛰어내리면....’하고 얼마나 갈망했겠는가. 인류 중에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께 십자가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했던 것이다. 여기서 모든 사람이 일치했다. 제자들까지 합세한 셈이다. 성질은 다르지만 다 똑같이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선악과를 먹게 된 동기다. 그러니 그 말은 누구의 말이겠는가. 사탄의 말이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러면 십자가에서 뛰어내려 보라.”라고 한 것은 십자가에서 뛰어내릴 수 있어야 하나님 아들이지 거기서 뛰어내리지 못하는 인간이 무슨 하나님 아들이라는 말이다.
여러분은 예수를 어떻게 하나님 아들이라고 믿는가? 하나님 아들이라고 써 붙이고 나왔는가. 하늘에서 외쳤는가. 침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하는 소리가 있었다고 하였다. 이 말은 누가 들었는가? 예수님 혼자 들은 말이다. 변화산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그 말을 승인하시지 않았다. 그래도 “너는 잘 모르고 한 말이다.”라고 그를 칭찬하셨다. 아무도 그분이 하나님 아들이라고 증명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지금은 당연히 하나님 아들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시대에 누가 예수를 하나님 아들이라고 인정했겠는가.
희랍세계에서는 유망한 사람들은 다 하나님 아들이다. 황제도 하나님 아들이고 시인도, 철인도 하나님 아들이다. 보통 사람을 초월한 사람들을 다 하나님 아들이라고 했다. 그런 세계에 와서 예수는 누구냐는 문제가 생기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예수의 신격화가 생기게 된 것이다. ‘예수가 참 하나님 아들이다.’ 이것을 전해야 했던 것이다. ‘너희가 아는 것은 하나님 아들이 아니다. 우리 주님이 참 하나님 아들이다.’ 이것을 전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 않겠는가. 세상에 나가서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들은 말이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예수를 참 하나님 아들로 아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쟁이다.
성경에는 그 피로 곧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1:7).” 어떻게 그의 피로 구속을 받는가? 이것을 설명하려면 결국 구약을 빙자하지 않을 수 없다. 제단에서 흘린 피, 이것이 지성소에 들어간다고 해야 한다. 제단에서 죽은 제물이 지성소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유대인들에게는 당연할지 몰라도 우리에게는 먼 이야기다. 제물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그 피, 보배로운 피’를 계속 말한다. 베드로전서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쓴 책이다. 유대인들은 알아들을지 모르지만 이방인인 우리가 남의 피가 내 죄를 사해 준다는 말을 어떻게 믿겠는가. 그 피가 어떻게 내 죄를 씻는가? 돈은 대신 내 주면 된다. 다른 사람이 빚진 돈을 내가 대신 갚아 주면 된다. 이것이 대속의 개념이다. 대신 물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존재를 어떻게 대신 물어주겠는가.
이스라엘에는 묘한 법이 있다. 형이 자식이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에게 자식을 낳아 주어야 했다. 자식이 없으면 과부가 된다. 과부가 되면 기업이 없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둘째 아들을 줘야 한다. 다말 사건이 그것이다. 둘째 아들을 주었는데 둘째 아들도 죽었다. 그러면 세 번째 아들을 줘야 되는데 유다는 ‘이 여자가 팔자가 세구나. 셋째를 주면 또 죽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핑계 저 핑계를 하고 주지 않았다. 그래서 다말이 시아버지를 속여 상관하고 자식을 낳은 것이다. 기업을 얻으려고, 살기 위해서 했던 것이다.
그것은 우리 상식과는 전혀 다른 상식이지만 그들은 기업이 없으면 땅이 없었다. 고아와 과부는 기업이 없으므로 얻어먹고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 죽기 살기로 대들었던 것이다. 다말은 그 일이 폭로되면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해야 했다. 보통 간음 사건이 아닌 것이다. 사활이 걸린 진지한 문제였다. 이것이 대속의 개념이다. 그래서 룻에게 보아스가 대속을 해 준 것이고 룻은 다윗 왕의 할머니가 된 것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이런 말이 이해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이 어떻게 이해가 되겠는가. 남이 내 죄를 위해서 대신 죽어 주었다는 것이 이해가 되는가? 나는 여기 와서 막혔다. 차라리 내가 범죄라도 저질러 죽을 죄를 지었다고 통회 자복할 정도라면 몰라도 그렇지도 못하니 답답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우리 죄를 대속했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그랬는가? 예수님을 행위로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행위는 보는 사람마다 해석이 달라진다. 다 같은 의미로 보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교리나 제도로 묶어 놓아서 그렇지 자연스럽게 성경을 보면 해석이 다 달라진다. 브레드런은 모든 제도와 교리를 폐지하고 성경을 자유롭게 보게 되었다. 사람마다 견해가 달라 천 갈래 이상으로 갈라졌다.
사십 년 동안 대구에 와서 말씀을 하면서 나는 한 번도 사람이라는 초점을 놓쳐 본 적이 없다. 그것이 나니까 사람이 중요했다. 은사 같은 것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았다. 할 사람은 하라는 식이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오로지 사람이니까 그런 것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할 때도 이 이야기를 잠깐 비쳤다. 마귀는 예수를 시험하면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라고 했다.(마4:3).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면 돌로 떡을 만들어서 먹으라.”고 한 것이다. 이 말과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에게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마27:42).”라는 말은 같은 말이다.
마태복음 4장에서는 마귀와 예수님 둘뿐이었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그런데 십자가에서는 온 군중이 다 보았다. 온 인류가 참여했던 것이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비켜 가셨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점잖게 비켜 가셨다. 그래서 우리도 동의할 수 있었다. ‘그렇지. 사람이 떡을 먹고 사는가, 하나님 말씀을 먹고 사는 것이 사람이다.’했다. 그런데 나는 넘어가지 못했다. “사람이 어떻게 돌로 떡을 만들어 먹겠는가. 사람은 돌로 떡을 만들어 먹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못 뛰어내린 예수라는 말과 똑같은 말이다.
십자가에 오니 딱 그 문제에 봉착하지 않았던가. 사람들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러면 뛰어내려 보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라고 했다. 관심 없는 사람은 구경이라도 하고 싶었을 것이고, 사랑하던 제자들은 “주님,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인 그 능력으로 죽은 나사로를 살린 그 능력으로, 물위를 걷던 그 능력으로 뛰어내려 보십시오. 그래야 우리가 승리할 것 아닙니까.”하며 간절하게 기다렸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결국 십자가에서 죽고 말았다. 그래서 제자들이 가 버린 것이다. ‘십자가에서 뛰어내리지 못하는 예수는 믿지 않겠다. 믿을 수 없다.‘라며 가 버렸던 것이다. 그 말 속에는 뛰어 내리지 못하는 예수는 감추어져 있고 뛰어내릴 수도 있다는 예수만 나타나 있다. 이상한 속임수다. 이것은 보통 속임수가 아니다.
나도 그분의 행위가 나를 구속했다는 것이, 그의 피가 아니라 그분의 행하심에 의해서 내가 구속되었다는 것이 도저히 수용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막바지에 와서 난처하게 되었다. 그런데 뛰어내리지 못하는 예수를 보는 순간, 만나는 순간 내 모든 짐이 풀어졌다. ‘아, 참 사람이 저기 있구나. 존재가 저기 있구나.’라고 알게 되었다.
행위가 아니라 존재다. 뛰어내리지 못한 것은 존재다. 사랑을 하고 봉사를 하고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아가페 사랑을 하신 것, 하나님의 종으로서 죽기까지 복종을 하신 것, 이런 것은 다 행위다. 존재가 나타난 것이 아니다. 존재는 어디서 나타났는가? 뛰어 내리지 못한 데서 존재가 확실하게 드러났다. 이제 그분이 사람이 아니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다.
행위냐 존재냐, 소유냐 존재냐, 이 문제다. 소유도 사실은 행위다. 소유는 행위를 나타낸 것이다. 가인과 아벨은 자기의 존재를 나타내지 못하니까 자기의 소유를 가지고 왔다. 이것이 최초의 종교다. 그 자리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형이 아우를 죽였다. 지금도 역시 똑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다. 그렇다고 아벨은 선한 사람인가? 그렇지 않다. 계시록에는 제단 아래서 지금까지도 억울하다고 신원하고 있다고 하였다. “나는 왜 죽어야 합니까, 내 원수를 갚아 주십시오. 내 원한을 풀어 주십시오.”라고 지금까지도 신원하고 있다. 새로운 세계가 올 때까지 아벨은 계속 신원하고 있는 것이다. 선 속에도 악이 들어 있고 악 속에도 선이 들어있다.
‘십자가에서 뛰어내리지 못하는 예수’, 우리 교회에 이것을 내놓고 보니 말이 많다. 시시비비를 내 놓는다. 자기 간증을 내놓지 왜 시시비비를 하는가? 구속이 확실하면 구속을 내놓으면 된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라는 그 말로 구속이 되었으면 그 말로 증거 하면 되는데 그것이 없는 사람들이 시시비비한다. 그래서 겉으로는 우리 교회가 상당히 시끄럽다.
내가 어디 가서 나와 연합할 예수를 만나겠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존경스러운 예수를 만났다. 경배할 수 있는 분을 만났다. 그런데 나와 연합할 수 있는 예수는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뛰어내리지 못한다는 말을 할 때 너무 너무 통쾌하고 좋았다. 지금까지 내가 해 왔던 모든 말을 한 마디로 함축할 수 있는 말이 이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이 참으로 유익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 아멘하면 문제가 없는데 이러니저러니 하고 시시비비를 하니까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미안하고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하려고 한다. 내가 표현이 부족해서 이렇게밖에 말하지 못하니까 더 좋은 표현이 있으면 언제라도 말해 주시기 바란다.
누구라도 시시비비만 하지 말고 “나는 이렇습니다.”하고 간증을 하시기 바란다. 그러면 나는 지금도 바꿀 용의가 있다. 왜 듣기 싫다는 말을 계속 하겠는가? 거룩한 주님을 보고 뛰어내리지 못했다는 말만 하면 되겠는가? 더 좋은 간증이 있다면 나는 당장 바꿀 것이다. 찾아보아도 더 좋은 말이 없다. 그래서 더 좋은 말이 있으면 내놓으라고 공모를 하려고 한다. 그래서 이 복음이 끝까지 전파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세상에는 별 사람이 다 있다. 예수를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다. 잘 믿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어젯밤에는 꿈을 꾸었는데 불교를 믿는 사람들을 만나 한참 대화를 했다. 십자가에서 뛰어내리지 못하는 예수에게서 우리가 구속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신이 났다. 우리가 어디를 가도 당당한 것을 내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불교인을 만나든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을 만나든 확실한 것을 내놓아야 한다.
나는 지금 이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기독교도 지금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기독교 인구가 줄었다고 하는데 유럽은 이미 휴업 상태고 미국만 남아 있는 상태다. 머지않아 불교에게 영역을 빼앗기고 말 것이다. 인류를 확실하게 회복시키지 못하면 기독교는 없어진다. 불교 철학자가 이제는 불교의 시대가 왔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
사람들의 사고방식 자체가 민주화되고 자본주의화 되어서 복음을 말하면 꼭 그것만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한다. 대학생들은 이야기를 한참 하고 나면 “좋은 말씀 들었습니다. 그러나 꼭 그것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꼭 그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말해 봤자 소용없다. 바울 같은 사람도 공원에 모인 사람들에게 한참 이야기를 하고 나니까 “들을 만하다. 내일 또 와서 듣자.”고 했다. 그와 똑같은 일이다. 들을 만하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이 변화되지는 않는다.
나와 예수의 연합, 그 안에 있는 구속!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것이 없으면 교회가 안 된다.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되지 백성도 없는데 나라 형태만 만들어 놓는다고 나라가 되겠는가. 미국에 산다 해서 미국 사람인 것이 아니다. 미국에 살아도 한국 사람은 여전히 한국 사람이다. 구속이 없으면 다음 단계가 하나님 나라가 되지 않는다. 구속이 되어야 하나님 나라가 된다.
소가 풀을 먹지 개가 풀을 먹겠는가? 개들을 모아 놓고 풀을 준다고 먹겠는가? 소라야 풀을 먹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누가 하는가? 하나님께 구속된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말을 한다.
우리는 확실한 제한이 있다. 사람이라는 제한이다. 이 한 가지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예 하나님 나라가 출발이 안 된다. 출발 자체가 다른 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 하나님은 존재를 찾으신다.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존재를 찾고 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하셨다. 위치를 묻고 존재를 찾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시지 “네가 무엇을 했느냐?”라고 물으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다 용서하실 수 있다. 하지만 위치를 이탈한 것은 어찌 하실 수 없다. 그래서 예수가 필요한 것이다. 그 사람이 하나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뛰어내리지 못하는 하나님 아들이다. 우리는 이것을 전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하나님 아들이다. 십자가에서 뛰어내리지 못한 아들을 전하는 것이다.
아가페 사랑을 가진 예수, 죽기까지 충성한 예수, 그런 것은 다른데도 많다. 찬불가는 찬송가보다 훨씬 화려하다. 자기 생각으로 하는 것이니까 얼마든지 예찬할 수 있는 것이다. 찬송은 시라고 할 수 있다. 한 가지 꽃을 두고도 빨갛다고 할 수도 있고 파랗다고 할 수도 있다. 근심스러운 꽃이라고 할 수도 있고 기쁨의 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 600곡 찬송은 비교가 안 된다. 불교방송에서는 불교성가대가 나와서 화려하게 부처를 찬양하고 있었다. 불교라고 그렇게 못할 것이 없다.
오직 한 가지 구속만은 할 수 없다. 이것은 예수님의 유일한 사역이다. 이 사역을 빼고 보면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것이 얼마든지 많다. 교회가 없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속은 하나님 나라의 출입문이나 마찬가지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다고 하셨다. 이 길은 좁은 길이다. 오직 한 사람, 오직 이 사람뿐이니 얼마나 좁은가!
어떤 사람들은 “왜 꼭 그렇게만 말해야 됩니까? 왜 이것을 마지막 복음이라고 합니까?”라고 묻는다. 내일 또 다른 복음이 나올 수 있다. 그것을 내가 알겠는가? 모르니까 마지막이다. 베드로가 전한 복음은 바울이 전한 복음 앞에 나왔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못하니까 다음에 바울의 복음이 또 나온 것이다.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못하면 다음에 또 복음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다음에 또 나올 것이니까 지금은 안 하겠다고 하면 되겠는가? 처칠 수상이 2차 세계대전 중반에 폐렴에 결렸다. 그때 페니실린이 개발되었는데 아직 임상실험을 거치지 않았다. 임상실험을 해서 2세대, 3세대 페니실린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당장 죽게 되었으니 그 약을 썼고 처칠은 살아났다. 그래서 페니실린이 항생제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언제든지 마지막이다.
로마서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이 그때는 마지막이었다. 그런데 다음에 주와 함께 죽고 주와 함께 살았다는 것이 또 나왔다. 그러면 이것이 나오기 전까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그것이 전부냐. 다음에 또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면 종교개혁이 되었겠는가. 그러면 종교개혁을 못한다.
우리가 무엇을 전할 것인가? 듣기 싫다고 해도 이 말을 해야 될 것인가. 아니면 더 좋은 말이 있는가?
나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예수가 우리를 구속한 하나님 아들이라는 이것이 너무 쉽고 가장 편하고 만유를 포함한 복음인데 듣기 싫다고 하는 사람이 생기고 복잡하게 될 줄 몰랐다. 그런데 이렇게 복잡하게 된 것이 유익하다. 이런 일이 오지 않았으면 이 복음이 쉽고 편하다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거리끼는 사람은 말 때문에 걸린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말은 더 좋은 말이 있다면 얼마든지 다른 말로 하면 된다. 단순히 말이 문제가 아니라 복잡하게 된 뒤에 또 다른 것이 숨어 있다.
어떻게 모든 인류가 똑같이 “하나님의 아들이면 뛰어내려 보라.”고 하겠는가. 그 뒤에 누가 있는가. 그것이 전부 사탄의 말이 아닌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러면 뛰어내려 보라. 그러면 내가 하나님 아들의 자리를 양보하겠다.”라는 말인 것이다. 신기하다. 나는 반대하는 말이 나올 때마다 깊이 숨어 있는 것이 나왔다는 생각을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사람은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을 썼다고 하는데 이것은 ‘행위냐 존재냐’의 문제다.
사람들은 행위만 본다. 우리도 누구를 만나면 “무슨 일을 합니까? 직업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 그 사람의 존재는 우리가 모른다. 예수님에게도 마찬가지로 묻는다. “저 사람이 무엇을 한 사람이냐?”라고 묻지 “저 사람의 존재가 어떤 것이냐?”라고 묻는 사람은 없다. 존재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그런데 구속은 행위가 아니라 존재와 관계되는 것이다. 존재는 존재라야 구속이 되지 행위로는 구속될 수 없다.
어떤 이는 대속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데 구약에도 대속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대신 빚을 갚아 주고 대신 남편이 되어 주는 법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약은 아니다. 우리가 다시 구약으로 돌아가겠는가?
전도를 하면 당장에 “왜 하필이면 예수뿐입니까?”라는 질문에 부딪친다. 여기 대답을 못하면 전도를 못한다. 무엇을 전도하겠는가. 예수를 전한다고 가서 부처님을 전하겠는가, 누구를 전하겠는가?
그러므로 우리의 구속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야 하고 이렇게 중요한 구속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알아야 한다. 고린도전서 1장에 있는 말씀이 너무나 확실할 말씀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1:23-25).”
그런데 이 구절만으로는 해석에 논란의 여지가 분분하다. 그래서 30절에는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라고 하였다. 무엇을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었다는 것이다.
구속은 해 주는 것이 아니다. 그분 자신이 우리의 구속이 된 것이다. 그러러면 그분과 하나라야 한다. 그분과 내가 하나가 아니면 그분이 나의 구속이 될 수 없다. 예수 자신이 우리의 구속이다. 우리의 원형이다. 그가 나의 생명이 되신다는 말이 그 말이다. 그가 바로 나다. 떨어질 수 없는 나다.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해도 예수가 바로 자기 자신인 것을 모르고 십자가에서 뛰어내리지 못한 것이 예수인 줄 생각한다. 예수만 십자가에서 못 뛰어내리는가? 나도 못 뛰어내리는 사람이다. 그러니 얼마나 가까운가! 가깝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무촌지간이다. 부부간을 무촌지간이라고 한다.
계시의 마지막은 부부간으로 묘사된다. 요한계시록 마지막이 부부간이다. 창세기 2장 마지막은 부부간에 관한 계시다. 부자간이 아니라 부부다. 부부는 남남이지만 촌수가 없다. 아들과 아버지는 한 핏줄이므로 일촌이다. 그런데 부부간은 무촌지간이다. 헤어지면 남이지만 만났다 하면 무촌이다. 우리도 예수와 무촌지간이어야 되지 일촌지간이 되면 안 된다. 아버지와 아들이 틀어져서 원수 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호적에서 지우겠다는 사람도 있고 별 사람이 다 있다. 평생 한 번도 안 보는 사람도 있다. 같은 핏줄인데도 부자간이 그렇다. 그런데 부부간은 헤어졌다가도 다시 만날 수 있다.
무촌지간이니까 이혼했다가 도로 합해서 사는 사람도 있다. 무언가 틀어져서 이혼하고 바깥에서 혼자 살아보다가 다시 와서 살면 좋겠는데 자존심이라는 것 때문에 못한다. 후회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가 괜히 이혼했구나. 왜 이 입으로 이혼하자고 했을까?’ 하며 후회해도 자존심 때문에 바꾸지 못하지만 무촌이니까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 예수와 나는 무촌지간이라야 되지 일촌이어도 안 된다.
하나님 말씀이 얼마나 정확한지 모른다.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하셨다. 아담은 ‘잇쉬’고 하와는 ‘잇솨’다. 얼마나 정확한 말인지 성경을 보면 볼수록 어떻게 이런 말을 써 놓았을까 싶다. 창세기 1장에서도 그러하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사람을 지으셨다고 하고 그 사이에 남성과 여성을 끼워 놓았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시고....(창1:27).”라고 하였다. 남성과 여성이 둘이 합해야 인간이라는 것이다.
온 인류가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예수 안에 있다. 유일한 길, 이것을 가지고 가면 불교도 말을 못 한다. 온 인류가 만날 수 있는 자리가 어딘가? 이 자리 외에 또 다른 자리가 있겠는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라고 하면 수십 가지로 항목이 갈라지고 만다. 그렇게 되면 사탄이 끼어들 여지, 변명할 여지가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좀 듣기 싫어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뛰어내리지 못했다는 말을 하면 그 존재 외에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다. 사람 대 사람밖에 남지 않는다. 나와 예수밖에 남지 않는다. 아무것도 거기 끼어들 수 없다.
그때 우리를 꾀고 속이던 사탄이 무저갱에 천년 동안 갇힌다. 그리고 마지막에 잠깐 나왔다가 확실하게 유황 불 못으로 던져지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 속일지 모른다. 어느 구석에서 속일지 모른다. 아가페 뒤에 숨어서 속일지 모르고 죽기까지 복종하는 행위 뒤에 숨어서 속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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