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원주민(Native American) 인디언(Indian)
텍사스주 정부에는 세금을 내지 않지만, 연방정부에는 세금을 내고 체로키 국에도 세금을 낸다.
하지만 체로키 국의 주요 재원은 연방정부의 보조금과 카지노 운영 수익이다.
체로키 국의 수반(首班)은 여전히 최고 추장(Principal Chief)으로 불리며, 현재 채드위크 콘터셀 스미스(Chadwick Corntassel Smith)이다.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영화 ‘늑대와의 춤을’을 보면 인디언들이 ‘주먹 쥐고 일어서’, ‘늑대와의 춤을’, ‘발로 차는 새’, ‘머릿속의 바람’과 같이 보통명사를 이름으로 쓰는 경우가 많은데 스미스 추장의 경우 콘터셀은 ‘옥수수수염’이라는 뜻이다. 이 옥수수수염(콘터셀)은 법학 박사 학위가 있는 인디언 법 전문가다.
체로키 국도 나라이다 보니 일 년에 한 번씩 최고 추장의 국정(State of the Nation) 연설이 있는데 옥수수수염은 이 연설에서 체로키 국의 목표가 ‘100년 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눈물의 길이 100년 전으로 돌아가야 끝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게 아닐 것 같다. 시간을 거꾸로 걷는다고 상상해보라.
‘지금부터 100년 뒤, 우리가 100년 전의 상태로 돌아가 있다면 우리가 나라를 성공적으로 재건했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가 말하는 100년 전이란 오클라호마주가 생기기 전의 체로키 국으로, 문자 해독률이 90%에 이르고, 넘치지도 않지만 부족할 것도 없었던 공동체 생활을 누리던 그 상태다. 그는 그 상태를 ‘삶의 질’의 개념으로 설명했다.
‘삶의 질이란 둑방에서 낚시하는 겁니다. 호화 보트를 타고 알래스카로 원정 낚시하는 게 아닙니다.
삶의 질이란 우리의 아들딸과 손자들이 조그만 공을 갖고 마당에서 노는 것을 지켜보는 겁니다.
메이저리그 야구 경기를 구단주 특석에서 보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시작한 삶의 질에 대한 그의 연설은,
‘우리가 지구상에 있는 순간들을 사랑하고 즐기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게 삶의 질입니다.
불평하고 남을 탓하는 불안정한 함정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와 같은 생활철학으로 이어졌다.
마지막은 ‘삶의 질은 존재하는 것이며 행하는 것이지, 소유하는 게 아닙니다. (Quality of life is being and doing, not having)’ 였다.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그는 언어와 일, 그리고 공동체를 중심단어로 던졌다. 언어를 잃으면 문화를 잃는 것이다.
눈물의 길도 원래 체로키의 말로는 ‘Nunna dual Tsuny(The trail where they cried)’다.
그들이 눈물을 흘린 길이라는 뜻이다. ‘눈물의 길(The trail of tears)’과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짧게 해야 하기 때문에 줄여서 그렇게 했겠지만, 체로키 말에서는 아직도 피눈물이 나는 것 같은 동적인 느낌이 살아있는 반면, 영어로 표현된 ‘눈물의 길’에는 눈물이 왠지 응고되고 메마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영어로 옮기면서 의미를 상실한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체로키(Cherokee)도 영어식 표현이고, 원래는 다스라게(Tas-La-Ge)로 ‘마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옥수수수염은 언어를 통해 풍요로운 문화와 역사를 간직하면서 일을 통해 자립하며 공동체를 통해 함께 나누는 삶을 기약하자면서 연설을 마쳤다. 세계의 어느 나라의 국가수반으로부터도 듣기 어려운 내용의 연설이다.
이 연설은 마지막에 ‘당신의 초라한 종(Your humble servant)’이라고 자신을 낮추는 말로 끝난다.
그러나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마를 사이가 없다. 인디언들은 사회 부적응자(不適應者)로, 알코올 중독자로, 정부의 구호대상으로 현대를 살아간다. 더구나 미국에서는 인디언들의 국가적 실체(체로키 국)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흐름이 엄연히 살아있다.
오클라호마주를 대표하는 연방 상원의원에 출마했던 공화당의 톰 코번(Tom Coburn) 하원의원은,
‘미 연방정부와 인디언 국가들과의 조약은 원시적이고 웃기는 합의’라고 독설을 퍼붓기도 했는데 그 의미는 인디언 정부를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의 말은 ‘독립국 안에서는 독립국이 있을 수 없다’는 미국 내 반(反) 인디언의 오랜 전통을 대변하는 것이다. ‘눈물의 길’이 현재 진행형인 ‘눈물을 흘리고 있는 길’로 바뀌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눈물의 길’은 미국 체로키인디언의 가슴에 패인 깊은 흉터가 아니라 아직도 피가 흐르는, 아물지 않은 상처다.
4. 조셉 추장(Chief Joseph)의 마지막 연설
*조셉 추장(1840~1904, 미국 오리건주에 거주하던 인디언 네즈퍼스 부족의 마지막 추장)
나는 이제 지쳤습니다. 나의 족장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노인들도 다 죽었습니다. 옳고 그름을 말하는 건 젊은이들인데 그들도 모두 죽었습니다. 젊은이들을 이끄는 사람도 죽었습니다.
밖은 춥고 덮을 이불이 없어 어린 생명들이 죽어갑니다. 일부는 먹을 것도 없이 도망쳤습니다. 이미 얼어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 어린 것들을 찾을 시간이 필요하지만 얼마나 많이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대부분을 죽음 속에서 찾게 될 겁니다. 지배자들이여! 나는 너무 지쳤습니다.
내 심장은 아프고 슬픕니다. 지금 태양이 떠 있는 이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싸우지 않겠습니다.
조셉 추장 / 인디언 천막집 / 미국 몬태나 주(州) 베어포 산(1877년 10월 5일)
1870년경, 인디언 네즈퍼스(Nez Perce) 족은 금광을 찾는 백인 개척자들의 공격을 받는다.
우두머리였던 조셉 추장은 결국 부족민을 이끌고 캐나다 국경지대로 이동한다. 이들은 국경을 64km 정도 남긴 몬태나주의 베어포 산에서 미국 기병대에 포위되자 조셉 추장은 한 편의 시와 같은 항복 연설을 하게 된다.
그의 연설문은 골드러시(Gold Rush) 시절, 미국 인디언의 피와 눈물을 상징하는 유산으로 여겨진다. 조셉 추장의 연설은 담백하고 진솔하다. 항복을 결심한 리더지만 비굴해 보이지 않는다. 부족민의 생명을 위하여 자존심을 내려놓는 용기와 절실함이 읽히기 때문이다. 리더는 자기 개인의 자존심을 앞세워 무리한 선택을 하다가 공동체를 파멸로 이끄는 경우가 허다한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결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조셉 추장의 다른 연설이다.
내가 문명인들의 학교(學校)를 마다하는 이유가 있다. 학교를 세우면 문명인들은 교회를 세우라고 가르칠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끝없이 하느님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을 가르칠 것이기 때문이다. 이곳 네즈퍼스 인디언 주거지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어느 곳엘 가나 가톨릭과 개신교는 끝없이 싸운다. 우리는 그런 걸 원치 않는다.
우리는 이 땅에 있는 것을 가지고 가끔 다투기는 하지만 위대한 정령(Great Spirit)에 대해선 건드리지 않는 법이다. 우린 그런 걸 배우고 싶지 않다.
우리는 위대한 정령이 만물을 만들어놓은 대로 세상의 것에 만족하고 손대지 않는다. 그러나 문명인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강이나 산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마구 바꿔 버린다. 그들은 그것을 창조라고 부르지만, 우리의 눈에는 철없는 파괴로 보일 뿐이다. 대지를 적시며 흐르는 강, 이 대지, 내가 선 이 자리를 나는 세상 어느 것보다도 사랑한다. 자기 아버지가 묻힌 대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들짐승보다 못한 자이다.
조셉 추장은 백인 개척자들을 ‘문명인’이라고 했는데 당시를 되짚어보면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훨씬 더 발달된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테면 백인 개척자들은 대부분 문맹(文盲)이었지만 체로키인디언들은 90% 이상이 읽고 쓸 줄 알았고, 고등 교육기관도 있었다.
단지 백인 개척자들은 총으로 무장되어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들보다 전투능력이 앞섰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