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곡사지(智谷寺址) / 경남 기념물 제225호
- 경남 산청군 산청읍 내리
지곡사는 신라 승려 응진(應眞)이 창건, 국태사(國太寺)라 이름하였다.
고려 혜월(慧月)선사를 거쳐 진관(眞觀)선사에 이르러 다시 고쳐 지었다고 전한다.
고려 대각국사 의천이 천태종을 세울 때 선종 5산문 가운데 하나인 지곡사로 고려 불교계에 있어 중요한 사찰로 짐작.
조선시대에도 지곡사에 대한 기록이 각종 지리서에 나타나고 있어 중심 사찰로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12년∼1913년 사이에 조선총독부에서 사찰을 인가할 때 지곡사의 이름이 빠진 것,
승려 성안과 홍유의 비와 부도가 조선 헌종 2년(1845)에 세워진 것을 보아 1900년대 초반에 폐사한 것으로 추정.
지곡사 터엔 건물은 남아 있지 않으나 건물의 초석을 비롯하여 축대, 우물, 탑의 재료, 석수조, 부도 10여기, 배례석 등
불교관련 유구들이 곳곳에 있으며, 땅속에도 관련 유구와 유물이 있을 것으로 추정.
조선 후기 기록인 지곡사용화당기(智谷寺龍華堂記)에 신라 법흥왕 때 승려 응진이 창건하였다.
진관선사오공탑비(眞觀禪師悟空塔碑)에는 고려 광종(光宗)대에 진관 석초(眞觀釋超)를 지곡사의 주지로 임명하였다고 한다.
(위 내용은 인터넷 검색, 발췌하여 수정하였다.)
목적은 심적사와 지곡사였다. 지곡사지는 덤이었다.
글을 쓰면서 자료를 검색하니 부도밭이 있고 7기 부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은 터 앞이 저수지이다. 터 주위엔 너른 공간이 있고 개인 소유이다. 버섯 등을 키우는 농장이다.
현재 지곡사는 옛날 지곡사와는 다르다. 다음 산청을 지날 때 부도밭을 찾아 봐야겠다.
지곡사(智谷寺) / 전통사찰
- 경남 산청군 산청읍 내리
옛날 지곡사와 다른 가람이다.
1958년 비구니 덕이(德伊)가 창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곡사 입구인줄 알았다. 개인 농장 입구이다.
범종
대웅전, 대웅전 앞 조화는 누굴 위한 것일까? 근래 입적하신 분이 계신 모양이다.
산신각 지붕이 무너진 모양이다.
바람이 치는 풍경, 소리가 은은하다. 석축에 앉아 한참 자연의 소리를 들었다. 편하다.
내리저수지에서 본 풍경.
마을이 있는 것 같지만 개인 소유의 농장이고 농장 한편에 지곡사가 있다.
곧게 벋은 나무 왼편 끝부분에 지곡사지 안내판과 유물이 있다. 뒤는 웅석봉이고우측 골짜기로 가면 심적사이다.
내리저수지에서 본 풍경, 지곡사에서 황매산이 보인다고 하지만 여기선 정상 끝만 보인다.
황매산은 와불 형상이라고 한다. 나는 모르겠다.
삼장사지(三狀寺址) 삼층석탑 /경남 유형문화재 제31호
- 경남 산청군 삼장면 평촌리
높이 3.4m. 하층기단에는 양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와 1개의 탱주(撑柱 : 받침기둥)가 새겨져 있다.
4매의 판석으로 구성된 하층기단 갑석(甲石)의 상면에는 호각형(弧角形) 2단의 상층기단받침을 조출하였다.
제작 기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기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인터넷 검색)
1989년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부재를 모아 복원하였다.
예전 절 터엔 철조여래좌상, 석등 등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탑과 괘불대 2기만 남아 있다.
이 탑은 지금은 3층이지만 신라시대 보기 드문 오층석탑이었을 것으로추정한다.(안내문)
대원사 가는 길목에 있다. 2018년 내원사와 대원사를 탐방하였다.
전통사찰 탐방의 초기로 절에만 관심을 자질 때였다. 절을 찾다가 보니 주변 절 터와 문화재에도 관심이 갔다.
산청읍에서 함양으로 가는 반대 반향이지만 그리 먼 곳이 아니라 들렸다.
옛날 있었을 삼장사엔 대한 글은 인터넷에 없다.
삼장사지 삼층석탑에서 본 웅석산, 읍에서 밤머리재를 넘었다. 터널 공사가 한창이다.
대포리(大浦里) 삼층석탑 / 보물 제1114호
- 경남 산청군 산청읍 대포리
높이 3.9 m. 오랜 세월 무너져 있던 것을 1989년 복원.
2단 기단과 삼층 몸돌(탑신)으로 건립, 꼭대기를 상륜으로 장식한 일반형 석탑. 현재 상륜 부재는 찾을 수 없다.
지대석과 하층 기단 면석은 같은 돌로 조성,
하층 기단 면석의 각 면에는 우주(隅柱:모서리기둥)와 탱주(撑柱:받침기둥) 2개가 정연(整然)하게 모각(模刻).
하층 기단 갑석은 상면에 원호와 각형의 2단 굄으로 상층 기단 면석을 받고 있다.
상층 기단 면석에는 양 우주와 1탱주가 모각, 상층기단 갑석은 하면에 부연(副椽:탑 기단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이 있다.
상면에는 원호와 각형의 2단 굄으로 탑신부를 받고 있다.
몸돌부(탑신부)는 탑신석과 옥개석(지붕돌)을 각기 1석으로 건립, 각 층의 탑신석에는 양 우주가 정연하다.
옥개석은 받침이 4단이며 낙수면은 평박하고 추녀는 직선이다.
네 귀퉁이의 전각(轉角)에 반전이 있다.
평박한 낙수면과 잘 어우러져 경쾌한 옥개석으로 석탑 전체 모양이 안정감 있게 느껴진다.
석탑 바로 앞에는 석등 하대석(아래돌)이 놓여 있어 초창 당시의 규모를 생각할 수 있다.
9세시 통일신라시대 석탑으로 추정한다. (인터넷 검색, 안내문 등 여러 자료 조합)
석탑 아래 너른 공터에 집이 있다. 이 너와집은 손님이 머무는 곳 같다. 마루엔 나물이나 약초를 말리는 것 같다.
너와집 건너편에 기왓집. 사람이 사는 공간.
석탑 아래 집까지 차로 갈 수 있다. 주인의 허락을 받는다면.
주인 연락처가 분명하지 않아 이 다리 앞에 주차하고 걸었다. 약초나 나물엔 관심이 없다.
주인 연락처가 분명했으면 주인에게 허락을 받고 들어갔을 것이다. 만약 주인이 항의하면 사과할 마음으로.
걷는 게 좋다. 피나물에 꽃이 핀 것을 계곡에서 봤다.
전 구형왕릉(傳仇衡王陵) / 사적 제214호
-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가락국 구형왕은 구해(仇亥), 양왕(讓王)이라 불렀다. 김유신(金庾信) 장군의 증조부이다.
521년 즉위,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항복하였던 가야국 마지막 왕이다.
석탑이란 설과 왕릉이란 설이 있다.
이 왕릉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에 나타난다.
구형왕의 무덤인지는 확실하지 않기에 전(傳)가 붙었다.
'왕산사지'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하고 임도로 들었으나 찾지를 못하였다.
내려와 구형왕릉 앞 안내문을 보고 알았지만 유물도 없는 왕산사지를 다시 올라가고픈 마음은 없었다.
마을엔 김수로왕과 김유신 장군 관련한 전각이 있다.
예전 가족여행 때 들렸고, 산악회 따라 왕산 산행하면서 들렸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