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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는 유서 깊은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입니다. 794년 간무 일왕이 나라에서 교토로 천도한 이 후, 1869년 당시 메이지 정부가 에도 현, 도쿄를 도읍지로 지정하기까지 천수를 누린 고도이기도 하지요.
오래된 역사 때문일까요. 교토 시민들 가운데 일부는 여전히 교토를 일본의 수도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도쿄를 일본의 수도라고 선언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일왕 즉위식에 사용되는 전용 좌석인 다카미구라가 여전히 교토에 있는 것도 한 몫 하고 있습니다. 또한 에도가 동쪽의 수도라고 해서 도쿄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론 것도 그들의 믿음을 뒷받침해주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연유에서 그들은 '일왕이 도쿄에 출장차 떠나 잠시 기거하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다고 하니 과연 그럴만도 합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들의 믿음일 뿐이지만 말입니다.
한편 과거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연합국에서는 교토에 핵폭탄 투하 계획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물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고쿠라도 함께 포함되었습니다. 이들 도시의 공통점은 일본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최종적으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폭탄이 투하되었습니다. 고쿠라의 경우엔 기상 악화로 인해, 교토는 일부 세력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정치적인 판단이 주된 원인이 되어 핵폭탄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교토는 그 이유가 무엇이든지 그 명맥을 잘 이어오고 있습니다. 매년 수 천만 명 이상의 국내외 관광객들이 17개의 세계 문화 유산과 50여 개의 일본 국보, 300여 개의 중요 문화 자산을 보기 위해 교토를 방문하고 있습니다. 일본 제 1의 관광 도시를 넘어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의 명성도 여전히 이어가고 있습니다. 참고로 지난 2016년 교토를 방문한 관광객들의 수는 약 7천 6백 만 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최고의 관광 도시라는 명성만으로 교토를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일본의 대문호 가와바타 야스나라는 자신의 소설 고도에서 '천 년의 고도가 서양의 새로운 것을 가장 빨리 끌어들였다'는 문구로 교토를 지칭하고 있는데, 실제로 교토는 고도로서의 명맥을 유지하는 동시에 언제나 기상이 넘치는 신도시의 면모도 갖추고 있습니다.
우선 1869년 일본 최초의 근대적 초등학교 - 릿세이 초등학교 - 가 개교식을 거행한 곳이 바로 교토입니다. 이후 1880년에는 일본 최초의 공립 그림 학교 인 교토부 그림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또 1891년에는 일본 최초의 수력 발전 사업이, 1895년엔 일본 최초의 시가지 열차인 칭칭 전철이 도입되기도 하였습니다. 1897년엔 일본 최초의 영화 상영이 릿세이 초등학교에서 이뤄지기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1927년에는 일본 내 타도시의 모형이 된 중앙도매시장이 일본 최초로 개장하였습니다. 1956년에는 일본 내에서 최초로 지자체 직영의 오케스트라도 탄생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1966년에는 일본 최초의 국립 국제 회의장인 국립 교토 국제 회관도 개장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익히 들어온 <교토 의정서>, 즉 지구온난화를 규제하고 방지하기 위한 국제연합의 기본 협약이 체결된 곳이 바로 국립 교토 국제 회관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일본 최고의 역사 도시의 이미지를 갖춤과 동시에 일본을 대표하는 혁신의 본보기가 된 도시가 바로 교토라는 사실입니다. (일각에서는 교토에서 도쿄로 천도한 이래, 도시 명성의 위기감이 엄습하여 이를 타파하기 위한 방법으로 혁신적인 면모를 보였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에너지, 수자원 확보를 위한 기반 정비, 염직업의 활성화 등을 통해 비록 수도로서의 지위는 잃었지만 여전히 일본 최고로서의 도시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물론 다른 연유일 수 있지만 최초의 영화 상영도. 최초의 중앙도매시장도, 최초의 오케스트라도 여전히 최고 도시의 명성을 쌓기 위한 그들의 노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과연 천 년 이상을 존속한 도시답게 교토 사람들의 스케일과 자부심만큼은 알아줘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브랜드 콘셉트 디렉터 김도환님의 글에서 발췌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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